18. 정상회담 제의
일본과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에게 1941년 7월 26일의 석유금수조치 이후 진주만 기습까지 4개월 남짓 진행된 최종 협상은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얻기 위하여 벌이는 말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진주만 기습에 투입할 조종사의 기량을 연마했다.
미군에게도 함정을 건조하고, 탄약과 전쟁물자를 대량 생산하며 필리핀에 병력을 보내기 위하여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협상에 임하는 양국 정부의 자세는 진지했다.
고노에 수상은 전쟁을 반대했으며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외무성과 함께 미국과 자국의 군국주의자들을 모두 만족시킬만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 또한 양면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 내의 역학 관계를 평화 쪽으로 돌릴 수 있다면 어떤 기회라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양국 정부의 진지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애당초 미국과 일본은 아시아의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미국과 일본은 공히 아시아의 평화를 원했으나 그 평화는 서로 다른 의미였다.
미국에게 있어 아시아의 평화는 일본이 중국과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중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이 생각하는 아시아의 평화는 일본의 지도 아래 단결된 대동아, 즉 팔굉일우의 평화를 뜻했다.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는 고노에 내각의 본격적인 외교노력은 1941년 1월 말에 미국무성이 좋아하는 거물급 외교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을 주미대사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노무라 대사가 3월 8일에 국무성을 방문하면서 일본과 미국은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대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협상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미국은 일본에게 히틀러와 손을 끊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며 중국과 평화협상을 시작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삼국동맹은 방어를 위한 것이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중국과의 평화가 확립되면 철수할 것이며 방해받지 않고 일본이 중국과 논의할 수 있도록 미국이 먼저 중국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했다.
노무라 대사는 진심으로 협상에 임했다.
미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노무라 대사와 친분이 있었다.
스타크 제독은 몇 번에 걸쳐 식사를 하면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노무라 대사의 진정성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노무라 대사는 일본 정부의 훈령에 따라야 하는 일개 공무원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미국 정부가 받아들일만한 제안을 할 권한이 없었다.
1941년 7월 16일에 제3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이는 단지 외상 마츠오카 요스케를 도요다 데이지로로 교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츠오카는 독소전이 발발한 이후 남방진출에 반대하고 소련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다가 내각에서 쫓겨났다.
고노에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은 불과 3개월 전에 자신이 주도하여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어 놓고는 독소전이 벌어지자 소련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는 마츠오카의 횡설수설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 측에서는 삼국동맹을 주도했던 마츠오카의 실각을 협상에 호재로 생각했으나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7월 25일에 일본이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출하고 다음날 석유금수조치가 실시되면서 양국 사이의 긴장은 한층 높아졌다.
1941년 8월 6일에 노무라 대사는 국무성을 방문하여 일본 측의 제안을 전달했다.
이는 석유금수 및 자산동결 조치에 대한 일본 측의 첫 공식반응이자 신임 도요다 외상이 협상에 임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용은 강경했다.
미국은 일본과의 자유 무역을 재개하고, 필리핀에 대한 병력증원을 유보하며, 중국과 극동에 있는 영국 및 네덜란드의 식민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인도차이나에 있어서 일본의 군사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특수 지위를 인정하며, 장개석 정권에게 협상에 나서도록 압력을 가하라는 것이었다.
그 댓가로 일본은 인도차이나 바깥으로는 침공하지 않고, 중국과의 평화가 확립되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며, 필리핀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으므로 이틀 후인 8월 8일에 국무성은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대사가 말하지 않은 내용도 알고 있었다.
제안 이틀 전인 8월 4일에 일본 외무성이 노무라 대사에게 보내는 훈령을 미국 암호해독반이 가로채어 해독한 것이었다.
훈령은 일본이 삼국동맹을 바탕으로 모든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문장으로 끝맺고 있었다.
이 말은 협상 결과와 상관없이 미국이 독일과 전쟁을 하면 일본도 독일 편으로 참전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헐 장관은 그렇다면 일본과 협상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생각했으며 이후 일본의 진정성을 믿지 않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8월 9일부터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플라센셔 만에 있는 어젠셔 해군기지에서 윈스턴 처칠 수상과 회담을 가진 후 14일에 대서양 헌장이라고 불리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대서양 헌장은 나중에 국제연합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문건이었다.
여기서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게 인도차이나를 넘어 침략을 개시하면 양국은 전쟁의 위협을 무릅쓰고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루스벨트 대통령은 8월 19일에 노무라 대사를 접견하고 8월 6일의 일본측 제안을 거부하면서 일본이 계속 팽창정책을 추구한다면 미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라 대사는 고노에 수상이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원한다고 말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정상회담의 효용을 잘 알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헐 국무장관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 만나야 의미가 있다고 대통령을 설득했다.
8월 28일에 노무라 대사가 국무성에 정상회담을 요청하는 고노에 수상의 친서를 전달하러 왔을 때 헐 장관은 실무자 선에서 기본 원칙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9월 3일에 고노에 수상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앞서 합의가 필요한 4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1. 모든 국가의 영토 및 주권에 대한 존중
2. 내정간섭 금지
3. 문호개방 원칙을 포함한 평등
4. 현상 유지를 원칙으로 하며 변경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할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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