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헐 노트
고노에 내각은 평화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1941년 10월 16일에 붕괴하고 이틀 후인 18일에 도조 내각이 성립되었다.
도조는 수상이 된 뒤에도 육상 자리를 내놓지 않았고 새로이 내상까지 겸했다.
해상으로는 시마다 시게타로가 입각했으며 외상은 도고 시게노리가 맡았다.
도조 내각의 성립은 뜻밖의 일로 도조 자신도 히로히토 천황으로부터 조각 명령을 받고 당황했다.
군국주의자인 도조를 수상으로 천거한 것은 내대신 기도 고이치였다.
기도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이 천황에게 도조가 충성심이 강하면서 군부에 영향력이 크니 그에게 전쟁을 막으라는 임무를 주어 수상으로 삼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고 천황이 받아들였다.
도조는 11월 1일에 제국국책수행요강의 날짜 부분을 수정하여 대본영과 협의를 마쳤으며 11월 5일에 히로히토 천항이 참석한 가운데 다시 어전회의를 열어 개전을 12월 8일로 확정했다.
그렇지만 일본이 외교에 의한 타결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도조는 10월 중순으로 되어 있던 미국과의 외교 교섭 기한을 11월 25일, 최종적으로는 29일까지 6주 정도 연장했으며, 일본군의 작전 계획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미국과의 타결이 이루어지면 중단한다는 전제로 작성되었다.
(도조 히데키 일본 수상.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 군부는 외교와는 별도로 전쟁 준비를 진행했다.
어전회의 다음날인 11월 6일에 남방작전을 진행할 사령부 편제가 확정되었다.
남방총군 사령관에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이 임명되어 남방작전을 총지휘하게 되었으며, 필리핀을 담당한 제14군 사령관에 혼마 마사하루 중장, 버마를 담당한 제15군 사령관에 이다 쇼지로 중장이 임명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담당한 제16군 사령관에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 영령 말레이 반도를 담당한 제25군 사령관에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이 임명되었다.
4일 후인 1941년 11월 10일에는 남방총군 사령관 데라우치 대장과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남방작전의 큰 틀에 대하여 합의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루손, 괌, 말레이 반도, 홍콩, 북보르네오의 미리에 동시 상륙한다. 미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전에 공습을 가한 후 상륙한다.
2.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진주만의 미태평양함대를 공습한다.
3. 초반 공격이 성공하면 마닐라, 민다나오, 웨이크 섬, 비스마르크 제도, 방콕 및 싱가포르를 빨리 점령한다.
4.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점령하며 그동안 중국에서의 전투는 계속한다.
그루 주일대사는 일본군의 자세한 내부 사정을 몰랐지만 분위기는 파악하고 있었다.
11월 3일에 국무성에 보낸 전보에서 그루 대사는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전격적으로 기습하려는 것 같다고 적었다.
11월 5일에 도고 외상은 노무라 주미대사에게 암호 전문을 보내어 도조가 새로 설정한 기한인 11월 25일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과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같은 날, 도조는 노무라 대사를 돕기 위하여 미국인 아내를 둔 거물급 외교관 구루스 사부로를 특사 자격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도조는 중국에서 철병하지 않고 석유 수입을 재개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이를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11월 6일에 일본은 미국에게 도조 내각 성립 이후 최초의 제안을 했다.
암호 해독을 통하여 A 플랜이라 부르는 이 제안을 거부하면 다른 제안이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미국은 거부했다.
이제 미국도 다가오는 전쟁을 느끼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1월 7일에 각료들에게 일본이 영령 말레이를 공격할 경우 국민들이 일본과의 전쟁을 지지할 것인지 물었다.
각료들은 지지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구루스 특사는 미국에 도착하여 11월 15일에 노무라 대사와 함께 헐 국무장관을 만났다.
17일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헐 국무장관과 함께 구루스 특사와 노무라 대사를 만났으나 양국 간의 입장 차이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11월 20일 일본은 노무라 대사를 통하여 최종 제안을 전달했다.
B 플랜이라 부르는 최종 제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의 북부 인도차이나 증원을 제외하고 미국과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병력을 증원하지 않는다.
2. 일본은 미국과 합의하는 즉시 남부 인도차이나의 병력을 북부 인도차이나로 철수시킨다.
북부 인도차이나의 일본군은 중국과의 평화가 확립되거나 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오면 철수한다.
3. 미국과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데 있어 서로 협력한다.
4. 미국과 일본은 서로에 대한 자산동결을 해지하며 미국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양만큼의 석유를 공급한다.
5. 미국은 중국을 돕는 행위를 중단한다.
헐 국무장관은 이 제안을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손을 떼고 일본에게 석유를 공급함으로써 중국의 파멸을 지켜 보기만 하라는 소리로 미국에게 '협박에 굴복한 비참한 항복' 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평가했다.
미국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1월 22일, 일본은 주미대사관에 암호 전문을 보내어 교섭 기한을 25일에서 29일로 연장했다.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11월 24일에 마닐라의 하트 대장과 진주만의 킴멜 대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과 타협에 이를 가능성은 희박하다..일본군이 언제든 필리핀이나 괌을 포함하여 어디든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현재의 긴장 상태를 심화시키거나 일본의 공격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유의하라."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시간을 끌어줄 것을 요청했다.
21,000 명에 달하는 미군이 12월 8일에 필리핀으로 출발할 예정이었으며 선발대는 괌 근해를 지나고 있었다.
이들이 도착하면 필리핀을 지킬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었다.
마셜 장군과 스타크 제독은 행정부에 ADB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 즉 일본이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의 영토나 타이, 티모르, 그리고 뉴칼레도니아를 침공하지 않는 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파국을 막고자 3개월 기한의 잠정 제안을 준비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평화정책에 대하여 상호 선언한다.
2. 무력 진출이나 무력 위협을 중단한다.
3. 남부 인도차이나의 일본군은 북부 인도차이나로 철수한다.
북부 인도차이나에서는 향후 철수한다.
4. 미국은 매달 민간용 수요에 한하여 일본에 석유를 수출한다.
5. 미국은 일본이 평화, 법치, 순리, 그리고 정의의 원칙에 따라 장제스와 협상을 시작하기를 원한다.
헐 국무장관은 이 잠정 제안에 반대하면서 일본에게 내밀기 전에 동맹국과 정부 인사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주장하여 허락을 받았다.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중국은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처칠 수상도 중국에게 가혹하다며 반대했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인사들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스팀슨 전쟁성 장관은 잠정 제안이 미국의 명예를 짓밟고 미국과 중국의 사기를 떨어뜨리며 전 세계에 미국의 극동 정책이란 것이 말뿐이라는 점을 광고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시간을 벌기 위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던 마셜 장군은 찬성했으며 스타크 제독도 미온적으로 찬성했다.
그 외에는 영국의 주미대사였던 핼리팩스 경 정도만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헐 국무장관은 동맹국과 정부 인사들의 부정적 반응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게 일본이 잠정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으며 만일 받아들인다고 해도 중국의 사기를 크게 꺾을 것이고 그런 부작용에 비하여 효과는 일시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상황에서 11월 25일에 타이완 부근에서 일본 수송선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잠정 제안을 포기하고 국무성이 준비한 강경한 제안을 승인했다.
다음날인 11월 26일, 헐 국무장관은 11월 20일에 일본이 내민 최종 제안의 대답으로서 "미합중국과 일본국 간 협정의 기초 개요"("Outline of Proposed Basis for Agreement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줄여서 '헐 노트'(Hull note)라고 부르는 문건을 구루스 특사와 노무라 대사에게 전달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다변적인 불가침조약의 체결을 위한 노력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 주권의 존중과 이에 관한 협정을 체결
- 중국 및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의 육·해·공군 병력 및 경찰력 철수
- 중화민국 국민정부 이외의 군사적·정치적·경제적인 지원의 금지
- 중국에서의 일체의 치외법권의 포기
- 합중국 및 일본국 간에 통상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의 개시
- 합중국에 있는 일본 자금 및 일본국에 있는 미국 자금에 대한 동결조치의 철회
- 엔화와 달러 환율의 안정에 관한 협정과 자금 공여
- 제3국과 체결하는 협정이 본 협정에 모순되게 해석되지 않도록 노력
- 타국이 본 협정을 준수·적용하도록 노력
(http://ko.wikipedia.org/wiki/%ED%97%90_%EB%85%B8%ED%8A%B8 , 헐 노트의 전문은 여기로)
일본 입장에서 헐 노트의 내용은 충격적인 것으로 인도차이나 뿐 아니라 중국에서의 철병까지 요구한 제3항과 삼국동맹의 탈퇴를 요구한 제9항은 일본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미국은 제3항, 제4항 및 제5항에서 말하는 중국의 범위를 규정하지 않았으나 일본은 만주를 포함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중국과의 교섭도 아닌 일방적인 철군을 강요하고 삼국동맹을 탈퇴하라는 강경한 제안을 하면서 미국이 약속한 것은 자산 동결 해제 뿐이었다.
일본이 중시하는 석유 공급에 대해서는 명시적 약속 없이 제6항에 통상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를 개시한다고 제시했을 뿐이었으며 일본이 요구해왔던 필리핀 증원 중단이나 장제스 정권 지원 중단에 대한 언급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일본이 보기에 헐 노트는 1941년 초반부터 9개월 간의 힘든 협상 과정을 통하여 양국 사이에 공감대가 이루어진 문제 해결의 기본적 토대 뿐 아니라 만주국 건설과 중일 전쟁 발발을 비롯하여 지난 20년 간 벌어진 중대한 상황 변화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석유를 받고 싶으면 아무 조건없이 시계를 1922년의 9개국 조약 당시로 돌리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은 헐 노트를 더 이상 교섭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받아들였고 미국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헐 국무장관은 헐 노트를 전달하기 전날인 11월 25일에 정부 내의 고위 각료들과 회의를 하면서 일본과 합의에 이를 가능성은 없으며 이제 국가안보는 육군과 해군의 손에 달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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