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일 통상조약 실효
1937년 12월의 파나이 호 격침 사건 직후 일본군은 남경에서 30만명의 중국인을 강간 및 학살하는 난징사건을 일으켰다.
난징학살은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일본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한 실질적 행동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하는 잔학 행위는 미국의 여론을 점차 악화시켰다.
일본이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충칭에 소이탄 공격을 가하여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는 처음으로 경제제재 카드를 빼들었다.
1938년 6월 11일에 코델 헐 국무장관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하고 있는 민간인 폭격을 비난하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3주 후인 7월 1일에 헐 국무장관은 미국정부는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는 국가에 비행기나 그 부품을 수출하는 행위를 강경하게 반대한다고 발표했다.
헐 장관은 일본을 겨냥한 이 무역제재 조치를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라고 불렀다.
비행기와 그 부품의 수출 금지는 일본에게 치명타라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만일 미국이 석유나 고철의 수출을 금지한다면 이는 일본에게는 큰 타격이 될 것이었다.
특히 석유는 일본이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석유와 고철의 수출을 계속했는데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석유와 고철 수출의 금지는 미일통상조약 위반이었다.
실질적인 고려로서 만일 일본이 석유를 수입할 수 없게 되면 석유가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침공할 것이 확실했는데 이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며 전쟁을 의미했다.
미국은 석유를 수출하여 일본의 침략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침략을 막기 위해 수출을 끊으면 전쟁을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일본 또한 침략을 할수록 석유가 더 많이 필요한데 비하여 수입선이 끊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안정적으로 석유를 얻으려면 침략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까지 확대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일본은 자체적으로 석유를 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인조 석유를 생산하고 만주국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전 영역에 걸쳐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곳이면 모두 시추공을 뚫었다.
그리하여 1년에 약 300만 배럴을 생산할 수 있었으나 이는 2,000 만 배럴이 넘는 소비량의 일부만을 충당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주로 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일본은 석유 수입이 끊기는 상황을 대비하여 국내에 대규모의 저유 시설을 건설하고 최대한 많은 석유를 수입하여 비축했다.
1940년에 일본이 수입한 원유와 각종 정제유는 3,716만 배럴에 달했다.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연말의 일본 석유 비축량은 4,890만 배럴이었다.
일본의 고노에 내각은 1938년 12월 22일에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의 점령지를 인정하며 경제적 특혜를 요구하는 강압적인 조건으로 중국에 화평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당연히 거부했다.
고노에의 뒤를 이은 히라누마 내각에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히라누마 총리는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염려하여 독일과의 군사협정 체결에 반대했다.
1939년 2월 26일에 사이토 히로시 주미대사가 현지에서 사망했다.
국무성은 화해의 제스처로 중순양함 애스토리아에 사이토 대사의 유골을 실어 일본으로 보냈다.
애스토리아는 3월 18일에 아나폴리스를 출항하여 4월 17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함장 리치먼드 켈리 터너 대령을 비롯한 애스토리아의 승무원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타가키 육상이 그루 주일대사와 터너 대령을 초청한 만찬은 매스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그들이 중국에서 저지르고 있는 짓에 대하여 미국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증거라고 선전할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CA-34 애스토리아.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결론적으로 애스토리아의 항해는 효과가 없었다.
애스토리아가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일본군은 중국 남부의 하이난 섬을 점령했는데 그곳에는 철광산이 있었으며 말레이 점령을 위한 좋은 출발지였다.
일본은 이어서 인도차이나 근해의 스프래틀리 군도를 점령했다.
아리타 외상은 하이난 섬과 스프래틀리 군도의 점령은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1939년에 중국전선은 소강상태였다.
일본 육군은 1938년 10월에 한커우를 점령한 이후 사실상 공세를 중단했으며 충칭의 국민당 정부는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군은 체면이 깎이고 영향력이 감소했으며 해군의 발언권이 커지기 시작했다.
일본해군은 중일전쟁에 부정적이었다.
그들의 희망은 바다였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는 그들의 배를 아무 걱정없이 움직이기에 충분한 양의 석유가 펑펑 나고 있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점령하려면 네덜란드는 물론 영국 및 미국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보여준 태도는 그들이 싸우기를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1939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민의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7월 6일에 충칭의 대사관 부근에 있던 미국인 교회가 폭격을 받고 다음날 정박 중이던 미국포함 투툴리아 부근에 몇 발의 폭탄이 떨어지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본격적인 경제 제재를 가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1939년 7월 2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 미일통상조약의 실효를 선언했다.
이로써 1911년부터 3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미일통상조약은 6개월 후인 1940년 1월 26일을 기하여 실효하게 되었다.
8월 25일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민의 80% 가 통상조약의 폐기를 지지했으며 조약이 실효되는 즉시 일본에 대해 금수조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비율 또한 80% 를 넘었다.
그러나 만일 통상조약의 폐기와 뒤이은 금수조치가 사실상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정도의 지지가 나왔을지는 의문이다.
불과 1달 전의 여론조사에서 중국에 걸려있는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과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미국민은 6% 에 불과했다.
일본정부는 미국의 통상조약 폐기 통고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국 정부가 동아시아의 여건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한 새로운 통상조약을 준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논평을 내면서 충격을 감추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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