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전진배치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6개월 전인 1939년 4월 초부터 일본과 이탈리아에 향후 어떤 전쟁에서든 같은 편으로 싸운다는 내용의 군사동맹을 체결하자고 제안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이타가키 육상은 이 제안에 찬성이었으나 요나이 해상은 반대했다.

결국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두려워한 시라누마 총리는 독일과의 군사동맹을 체결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히틀러는 1939년 8월 23일에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는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36년에 추축 3국 사이에 체결되었던 방공협정을 배반하는 독소 불가침 조약은 일본에게 충격과 함께 골칫거리를 안겨 주었다.

당장 노몬한 사건에서 소련의 입장이 강력해지면서 전투에서 패한 일본은 협상의 여지도 없이 사실상 소련의 의향에 따라 협정을 맺어야 했다.

 

독소 불가침 조약이라는 독일의 외교적 배신행위로 인하여 새삼 일본과 독일의 국익이 불일치하는 면이 부각되었다.

독일은 일본과 싸우는 중국군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훈련을 시켰으며 일본에게 중일전쟁을 끝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은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원칙을 지지했다.

독일이 유럽에서 승리한다면 제1차 대전 이후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태평양의 독일 영토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6개월간 일본은 뚜렷하게 친서방적인 경향을 보였다.

 

일본의 친서방 경향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체주의적인 일본 지배층은 사상적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보다는 독일의 나치즘에 이끌렸다.

육군 중심의 동맹파는 독일과의 군사동맹이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하여 동아시아에서 일본에게 간섭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를 격파해버리면 일본은 동아시아에 있는 그들의 식민지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해군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는 독일과의 군사동맹은 미국과 영국을 자극할 수 있으므로 반대하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동맹파든 반대파든 연합국이 약화되는 것이 일본의 이익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분명했다.

미국은 일본의 남방 진출을 촉진할 유럽 추축세력과 일본의 결합을 막고 싶어했다.

주일대사 그루는 일본 각료를 만날 때마다 중립을 촉구했다.

일본 측은 중립을 원하면 미국은 중국에서 손을 떼고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 1940년 말까지 중국 해안이 거의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 외부 세계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길은 버마 로드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하노이 항만이 남았다.

 

1940년 1월 16일에 성립한 요나이 내각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나 중국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중국 문제를 바라보는 일본과 미국의 시각은 너무나 달랐고 이건 요나이 내각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1940년 3월 31일에 미국의 언론들이 제21차 함대훈련이 하와이 근해에서 실시될 것이라고 보도하자 일본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5년 전인 1935년에는 함대훈련이 일본에 더 가까운 곳에서 실시되어도 침묵했던 일본은 이번에는 강경하게 나왔다.

일본 언론들은 미국의 함대훈련이 일본을 윽박지르려는 의도라고 보도했으며 해군성 대변인은 4월 4일에 기자회견을 열어 만일 미함대가 날짜 변경선을 넘으면 일본의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는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함대훈련을 계기로 짧게 지속되던 일본정부의 친서방 경향도 끝장났다.

 

(미함대 총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4월 4일에 시작된 미함대의 함대훈련은 날짜변경선을 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훈련 종료를 이틀 앞둔 5월 7일에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미함대 총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대장에게 정찰부대의 출발을 2주간 미루고 전투부대는 앞으로 오아후 섬의 진주만을 모항으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리처드슨 제독이 이유를 묻자 스타크 총장은 전투부대가 진주만에 머무름으로써 일본의 팽창 야욕을 억제하는 효과를 기대한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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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미일 통상조약 실효

 

1937년 12월의 파나이 호 격침 사건 직후 일본군은 남경에서 30만명의 중국인을 강간 및 학살하는 난징사건을 일으켰다.

난징학살은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일본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한 실질적 행동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하는 잔학 행위는 미국의 여론을 점차 악화시켰다.

 

일본이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충칭에 소이탄 공격을 가하여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는 처음으로 경제제재 카드를 빼들었다.

1938년 6월 11일에 코델 헐 국무장관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하고 있는 민간인 폭격을 비난하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3주 후인 7월 1일에 헐 국무장관은 미국정부는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는 국가에 비행기나 그 부품을 수출하는 행위를 강경하게 반대한다고 발표했다.

헐 장관은 일본을 겨냥한 이 무역제재 조치를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라고 불렀다.

 

비행기와 그 부품의 수출 금지는 일본에게 치명타라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만일 미국이 석유나 고철의 수출을 금지한다면 이는 일본에게는 큰 타격이 될 것이었다.

특히 석유는 일본이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석유와 고철의 수출을 계속했는데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석유와 고철 수출의 금지는 미일통상조약 위반이었다.

실질적인 고려로서 만일 일본이 석유를 수입할 수 없게 되면 석유가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침공할 것이 확실했는데 이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며 전쟁을 의미했다.

 

미국은 석유를 수출하여 일본의 침략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침략을 막기 위해 수출을 끊으면 전쟁을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일본 또한 침략을 할수록 석유가 더 많이 필요한데 비하여 수입선이 끊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안정적으로 석유를 얻으려면 침략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까지 확대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일본은 자체적으로 석유를 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인조 석유를 생산하고 만주국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전 영역에 걸쳐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곳이면 모두 시추공을 뚫었다.

그리하여 1년에 약 300만 배럴을 생산할 수 있었으나 이는 2,000 만 배럴이 넘는 소비량의 일부만을 충당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주로 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일본은 석유 수입이 끊기는 상황을 대비하여 국내에 대규모의 저유 시설을 건설하고 최대한 많은 석유를 수입하여 비축했다.

1940년에 일본이 수입한 원유와 각종 정제유는 3,716만 배럴에 달했다.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연말의 일본 석유 비축량은 4,890만 배럴이었다. 

 

일본의 고노에 내각은 1938년 12월 22일에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의 점령지를 인정하며 경제적 특혜를 요구하는 강압적인 조건으로 중국에 화평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당연히 거부했다.

고노에의 뒤를 이은 히라누마 내각에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히라누마 총리는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염려하여 독일과의 군사협정 체결에 반대했다.

 

1939년 2월 26일에 사이토 히로시 주미대사가 현지에서 사망했다.

국무성은 화해의 제스처로 중순양함 애스토리아에 사이토 대사의 유골을 실어 일본으로 보냈다.

애스토리아는 3월 18일에 아나폴리스를 출항하여 4월 17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함장 리치먼드 켈리 터너 대령을 비롯한 애스토리아의 승무원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타가키 육상이 그루 주일대사와 터너 대령을 초청한 만찬은 매스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그들이 중국에서 저지르고 있는 짓에 대하여 미국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증거라고 선전할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CA-34 애스토리아.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결론적으로 애스토리아의 항해는 효과가 없었다.

애스토리아가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일본군은 중국 남부의 하이난 섬을 점령했는데 그곳에는 철광산이 있었으며 말레이 점령을 위한 좋은 출발지였다.

일본은 이어서 인도차이나 근해의 스프래틀리 군도를 점령했다.

아리타 외상은 하이난 섬과 스프래틀리 군도의 점령은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1939년에 중국전선은 소강상태였다.

일본 육군은 1938년 10월에 한커우를 점령한 이후 사실상 공세를 중단했으며 충칭의 국민당 정부는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군은 체면이 깎이고 영향력이 감소했으며 해군의 발언권이 커지기 시작했다.

 

일본해군은 중일전쟁에 부정적이었다.

그들의 희망은 바다였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는 그들의 배를 아무 걱정없이 움직이기에 충분한 양의 석유가 펑펑 나고 있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점령하려면 네덜란드는 물론 영국 및 미국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보여준 태도는 그들이 싸우기를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1939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민의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7월 6일에 충칭의 대사관 부근에 있던 미국인 교회가 폭격을 받고 다음날 정박 중이던 미국포함 투툴리아 부근에 몇 발의 폭탄이 떨어지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본격적인 경제 제재를 가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1939년 7월 2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 미일통상조약의 실효를 선언했다. 

이로써 1911년부터 3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미일통상조약은 6개월 후인 1940년 1월 26일을 기하여 실효하게 되었다.

8월 25일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민의 80% 가 통상조약의 폐기를 지지했으며 조약이 실효되는 즉시 일본에 대해 금수조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비율 또한 80% 를 넘었다.

그러나 만일 통상조약의 폐기와 뒤이은 금수조치가 사실상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정도의 지지가 나왔을지는 의문이다.

불과 1달 전의 여론조사에서 중국에 걸려있는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과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미국민은 6% 에 불과했다.

 

일본정부는 미국의 통상조약 폐기 통고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국 정부가 동아시아의 여건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한 새로운 통상조약을 준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논평을 내면서 충격을 감추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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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태평양의 미해군

 

1922년부터 미해군은 주력을 태평양에 배치했다.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미해군의 고위 장교 대부분이 다음 전쟁은 일본과 싸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31년 4월 1일 현재 미해군의 주력 전투함은 전함 15척, 항공모함 3척(랭글리, 새러토가, 렉싱턴), 순양함 18척, 구축함 78척, 잠수함 55척이었으며 이외에 포함, 구잠함, 예인선 및 각종 모함 115척이 있었다.

이들 함정들은 1923년 이래로 미국함대(United States Fleet)와 소규모의 아시아 함대(Asiatc Fleet)로 나뉘어져 있었다.

 

미국함대는 다시 4개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1. 전투부대(Battle Force) : 전함 및 항공모함 세력과 순양함전단 1개, 구축함전대 3-4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태평양에 전개했다.

1941년 2월 1일자로 태평양함대로 이름이 바뀐다.

 

2. 정찰부대(Scouting Force) : 전투부대에 포함되지 않은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대서양과 카리브 해에 전개했다.

구형전함 3척과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훈련전단(Traing Squadron)을 포함하고 있었다.

1941년 2월 1일자로 대서양함대로 이름이 바뀐다.

 

3. 잠수함 부대(Submarine Force) : 태평양과 대서양에 양분되어 있었다.

 

4. 기지부대와 지원부대(Base Force and Train) : 역시 태평양과 대서양에 양분되어 있었다.

 

아시아 함대는 규모가 훨씬 작았으며 산뚱 반도의 옌타이에 기지를 두고 구축함 19척으로 이루어진 남중국 순찰대(South China Patrol), 상하이에 기지를 두고 강상포함들로 이루어진 양쯔강 포함대(Yangtze River Gunboat Flotilla), 잠수함 12척 및 약간의 지원함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835년에 동인도전대(East India Squadron)로 시작한 아시아 함대는 100 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민과 그들의 재산을 해적을 비롯한 위협으로부터 지켰다.

임시로 대장 계급을 가지는 아시아함대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Asiatic Fleet)는 상하이 조계에 주둔하는 제4해병연대와 베이징의 미국공관을 지키는 해병여단도 지휘했다.

아시아 함대의 함정들은 1년에 몇 달은 필리핀에 정박했으며 싱가포르, 하노이, 홍콩, 바타비아와 일본의 항구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항구들을 순방했다.

이러한 순방은 장교에게는 좋은 경력이 되었고, 수병에게는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동아시아의 미국인에게는 즐겁고 신나는 경험이었다.

 

미국함대는 매년 봄에 모두 모여 훈련을 했는데 이것을 함대훈련(Fleet Problem)이라고 불렀다.

함대 훈련은 주로 태평양에서 실시하여 정찰부대가 파나마 운하를 통하여 태평양으로 이동했는데 1939년에는 카리브 해에서 실시하여 전투부대가 운하를 통과했다.

 

함대훈련은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이 만주국을 만든 1932년의 함대훈련 때는 기간이 통상의 7주 보다 2주 더 길어져 5월 28일까지 정찰부대가 대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태평양에 머물렀으며 이어서 항공모함 3척이 동시에 훈련을 시작하여 여름 내내 함재기를 띄워대면서 태평양을 돌아다녔다.

이런 방식으로 미국정부는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불편한 속내를 내비쳤다.

 

1932년의 경우를 제외하면 함대 훈련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실시했다.

웨이크, 괌, 그리고 필리핀이 서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짜변경선을 넘는 경우는 없었으며 매년 일본해군의 참관을 허용했다. 

 

미해군과 일본해군은 1930년대 말까지 꾸준히 교류했다.

매년 미국함정이 요코하마나 나가사키를 방문했으며 일본함정도 일본인이 많이 사는 호놀룰루나 샌프란시스코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미해군 장교는 일본해군 장교가 대체로 신사이며 무식한 육군 장교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다.

일본해군 장교 중 많은 수가 영어를 할 줄 알았다는 사실도 이런 우호적인 평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해군은 일찌기 장교 일부를 일본어와 일본문화에 정통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하는 정책을 써 왔다.

이러한 정책의 효과는 좋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적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큰 공을 세운 로슈포트 중령이나 태평양 함대 내의 대표적인 일본통인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튼 중령이 이러한 정책에 따라 일본에 파견된 경력이 있다.

그러나 배출된 인원은 20년 동안 겨우 36명으로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1941년 10월에 해군언어학교(Navy Language School)를 설립하여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인원들을 대량으로 길러내어 수요를 맞출 수 있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미해군은 조약의 제한에다가 정부와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필수 인원을 확보하고, 함정과 무기를 정비할 예산을 따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미해군에게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였다.

 

1933년 6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불황 타개용 긴급 자금의 일부를 해군에 배정했다.

덕분에 기능을 멈추었던 미국의 조선산업이 전해의 패러것 급 구축함 8척에 더하여 요크타운 급 항공모함 2척, 순양함 4척, 구축함 20척, 그리고 잠수함 4척의 주문을 받으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34년 3월에 미의회는 제1차 트라멜-빈슨 법을 통과시켜 미해군을 런던 조약이 허용하는 한계까지 키울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의회는 인력 충원을 위한 예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35년 현재 미해군은 8,063명의 장교와 82,500명의 부사관 및 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일선 함정들의 승조원 충원율은 81% 에 지나지 않았다.

 

미해군은 1935년부터 군축조약 실효에 대비해 신형 함정들의 설계에 들어갔다.

노스캐롤라이나 급 전함의 설계가 1935년에 시작되어 1937년에 완성되었고, 이어서 38년에는 사우스다코타 급, 39년에는 아이오와 급의 설계가 완성되었다.

대공경순양함 애틀랜타 급의 설계도 1937년에 완성되었다. 

 

1938년 5월 17일에 미해군 세력을 20% 증강하는 내용의 제2차 빈슨법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신형전함들과 항공모함들이 추가로 건조되기 시작했다.

6월에는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가 전함의 배수량을 35,000톤에서 45,000톤으로 늘리기로 합의함으로써 아이오와급 전함의 건조가 가능해졌다.

물론 일본은 이미 64,000톤짜리 야마토와 무사시를 건조하고 있었다.

 

1939년이 되자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가 취역했으며 와스프와 호넷은 건조 중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급 전함 2척도 건조 중이었으며 사우스다코타 급 3척이 새로 건조에 들어갔다.

이외에 구축함 31척과 잠수함 6척도 건조 중이었다.

 

(CV-5 요크타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미해군은 이제 성장하기 시작했으나 해군 관계자들의 눈에는 성장이 너무 느렸다.

1933년 7월 1일부터 1939년 6월 30일까지 6년간 새로 취역한 전투함은 항공모함 2척, 순양함 16척, 구축함 53척, 잠수함 20척에 지나지 않았다.

참고로 1943년 한해 동안 취역한 함정 숫자는 항공모함 6척, 경항공모함 9척, 호위항공모함 24척, 전함 2척, 순양함 11척, 구축함 129척, 호위구축함 221척, 잠수함 66척이었다.

 

1939년 7월 1일 현재 미해군은 전투함 수는 증강되었으나 수송함들은 부족했다.

당시 미해군이 보유한 수송함은 병력수송함 2척, 화물수송함 3척, 급유함 3척, 탄약수송함 1척이 전부였다.

신형의 시마론 급 고속급유함 2척과 수상기모함, 잠수모함, 그리고 구축함모함을 합쳐 5척이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병력도 39년 9월 8일 현재 126,418명으로 여전히 모자랐으며 훈련상태 또한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미해군의 가장 큰 문제는 기지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미해군은 태평양에서 항상 기지가 모자랐으며 덕분에 함정들의 해상작전 지속능력이 긴 편이었으며 해상보급에도 일찌기 눈을 떴다.

하지만 어쨌든 기지가 부족하다는 것은 공격을 받았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근거지가 없어 후퇴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의회는 1938년 5월에 해군장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만들어 미본토와 해외 영토에 추가적인 해군기지와 잠수함 및 해군항공기지를 만들 필요성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했다. 

위원장의 이름을 따서 헵번 위원회라고 불린 이 위원회는 12월 1일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 보고서는 이후 미국이 해군기지를 정비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헵번 보고서의 내용 중 태평양과 관련된 주요 권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알래스카 : 코디액 섬과 더치 하버에 잠수함 기지와 비행장을 만들고, 시트카에 비행장을 만든다.

오아후 섬 : 진주만의 포드 섬 비행장을 확장하고, 카네오헤에 비행장을 만든다.

미드웨이와 웨이크 :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를 만들고 초호에 커다란 모함이나 급유함이 들어갈 수 있도록 준설한다.

괌 :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를 만들고 대공포와 해안포를 배치하며 전면적인 공격에 대항하여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강력한 수비대를 주둔시킨다.

 

이외에도 햅번 보고서는 존스턴 섬, 팔미라 섬, 칸톤 섬, 그리고 사모아의 끝자락에 있는 로즈 섬에 유사시 수상기 모함이 전개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설비를 갖추고 대서양 지역의 기지들도 개발하라고 권고했다.

 

의회는 가급적 헵번 보고서의 권고를 따랐으나 괌의 개발에는 반대했다.

 

해군 전략가들은 일본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오면 필리핀 전토를 방어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미군에게 있어 최선은 바탄 반도에 들어가 일본군이 마닐라 만의 항구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때 괌은 반격의 출발점이 될 것이었다.

괌이 강력한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를 갖추고 주변의 사이판을 제압하면서 버티고 있으면 일본군은 필리핀 동쪽의 항로는 사용하지 못할 것이며 미해군은 미드웨이와 웨이크를 징검다리 삼아 괌에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필리핀을 구원하러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의회는 생각이 달랐다.

괌의 위치 때문에 일본도 전력을 다하여 괌을 점령하려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지탱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아프라 항을 준설하기 위한 500만 달러의 예산이 1939년 2월 23일에 하원에서 205대 168로 부결되자 미해군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괌은 무방비로 내버려졌고 개전과 동시에 점령되었다.

 

해군 관계자들은 의회가 일본을 자극할까봐 두려워 괌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만약 괌이 건재했다면 태평양 전쟁의 초기 진행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며 아위숴했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지만 일본군의 전면적 침공에서 괌을 지키려면 대규모 수비대를 주둔시켜야 했을 것이며 그렇게 해도 점령을 면할 뿐 고립되어 무력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키고자 했던 웨이크에도 방어병력을 충분히 배치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미국이 괌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능력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가능하다고 해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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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본해군(2)

 

어뢰는 일본해군이 거둔 뛰어난 공학적 업적이었다.

일본해군은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주력함의 비율이 제한을 받게 되자 화력을 보충할 방법으로 어뢰에 눈을 돌려 1933년에 수상함용 산소어뢰의 개발에 성공했다.

93식 어뢰라고 불린 직경 610mm(24인치) 짜리 어뢰는 490kg 짜리 탄두를 매달고 49노트로 20,000m, 37노트로는 무려 40,000m 를 항주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발사하면 명중율이 떨어졌으므로 1943년에 개발된 3형에서는 탄두를 780kg 으로 늘리는 대신 사정거리를 줄였다.

그래도 49노트로 15,000m, 37노트로 30,000m 를 항주했다.

 

(93식 산소어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31년부터 미국의 수상함과 잠수함에 쓰이던 21인치(533mm) 짜리 Mk 14 어뢰는 292kg 의 탄두를 달고 46노트로 4,100m, 31노트로 8,200m 를 달릴 수 있었다.

미군어뢰에 사용된 토펙스 폭약이 일본폭약보다 60% 정도 강력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93식 어뢰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93식 어뢰는 접촉신관을 사용했으며 일선에서 신관의 감도를 조절할 수 있었는데 불발을 없애기 위하여 지나치게 민감하게 조절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산소어뢰가 명중하기 전에 함정이 만드는 물결에 부딪혀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은 2년 후인 1935년에는 잠수함용 산소어뢰를 개발했다.

95식으로 불린 잠수함용 어뢰는 직경이 21인치(533mm)였으며 400kg 짜리 탄두를 달고 50노트로 9,000m, 46노트로 12,000m 를 항주할 수 있었다.

 

91식 어뢰라고 불린 직경 450mm 짜리 항공어뢰는 산소어뢰는 아니었으며 205kg 짜리 탄두를 장착하여 토펙스 262kg 을 장착한 미국의 22.4인치(569mm)짜리 Mk13 항공어뢰보다 위력이 약하고 사정거리가 짧은 대신 더 빨랐다.

하지만 91식 어뢰의 가장 큰 장점은 투하 조건으로 460 km/hr 이상의 속력으로 날면서 300m 높이에서 투하할 수 있었다.

반면 Mk13 어뢰는 200km/hr 의 속력으로 15m 높이에서 투하해야 했는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증명되듯 준비를 갖춘 적에게 이런 속도와 고도로 다가간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이후 미해군은 Mk13 어뢰의 투하조건을 완화시키는데 힘을 기울여 종전에 즈음해서는 760km/hr 의 속력으로 730m 높이에서 투하할 수 있었다.

 

어뢰 이외에 일본해군이 가진 뛰어난 장비로는 조명탄과 쌍안경이 있었다.

일본군의 조명탄은 미군 것보다 밝고 신뢰성이 좋았으며 쌍안경 또한 미군 것보다 뛰어났는데 특히 야간에 그러했다.

그리하여 미해군 장교들과 수병들은 일본군 포로를 잡으면 쌍안경을 뺏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일본해군장교들은 항해술이 뛰어났다.

따라서 솔로몬 제도와 필리핀 근해의 복잡한 해역에서 대규모 함대가 야간에 고속으로 기동하면서도 좌초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일본해군은 인력충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실제로 1932년 당시 일본해군은 전함 6척과 순양전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해군 병력은 83,822명으로 전함 15척을 보유한 미해군보다 불과 1,000 명 정도 적었다.

미국 중순양함에 평균 517명이 탄것에 비하여 일본 중순양함의 승조원은 평균 692명이었다.

당시 양국이 일선에 투입하고 있던 구축함은 공히 72척이었는데 미국 구축함 승조원이 합계 7,773명인 반면 일본 구축함 승조원은 9,547명이었다.

일본 함정 승조원들의 체력 조건은 까다로웠고 함정 생활은 미해군이나 영국해군보다 힘들었다. 

 

평화시 일본해군의 장교 충원은 미국의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히로시마 만의 에타지마 병학교에서 담당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해군도 미해군과 마찬가지로 장교 충원에 어려움을 겪었고 장교의 질적 저하가 심각했다.

그래도 일본해군의 경우는 육군보다는 사정이 나았다고 한다.

 

일본해군의 훈련은 철저하고 실전적이었다.

훈련은 대부분 먼바다에서 실시되었으며 악천후와 관계없이 실전과 비슷한 환경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이런 훈련을 1달 이상 실시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함정이 바다에 나가있는 동안에는 토요일과 일요일도 없는 고된 일과가 지속되었다.

혹독하고 실전에 가까운 훈련의 효과는 태평양 전쟁의 초기에 극명하게 드러났다. 

훈련 도중 사상자가 발생해도 언론에 의하여 보도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 미해군은 평화시에는 가급적 따뜻한 남쪽 바다에서 좋은 날씨를 가려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 도중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예상되는 언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해군 당국은 훈련 내용이 실전과 동떨어지더라도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일본해군의 맹렬한 훈련은 매년 4월이 되면 일단락되고 이후 6월까지 2달간 연합함대는 휴식을 취하면서 중국 해안을 따라 짧은 항해를 다녔다.

이후 후반기 들어서면 다시 전대 및 함종별로 훈련을 시작하여 함대 훈련으로 이어졌으며 연말에는 연합함대가 모두 모여 대규모 훈련을 실시했다.

 

일본의 함대 세력은 중국 작전을 책임진 지나방면함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연합함대 소속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연합함대는 9개의 함대와 지상발진항공기 세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상세는 아래와 같다.

 

* 연합함대 직속(사령관 :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 - 본토근해의 방위를 담

기함 : 나가토, 기지 : 하시라지마

 

제 1전대 : 전함 나가토(長門), 무츠(陸奧)

제 24전대 : 특설순양함 호코쿠마루(報國丸), 아이코쿠마루(愛國丸), 세이토마루(淸燈丸)

제 11 항공전대 : 수상기모함 미즈호(瑞穗), 치토세(千歲)

수상기모함 : 치요다(千代田)

구축함 : 야카제(矢風)

표적함 : 셋츠(攝津)

공작함 : 아카시(明石)

 

* 제 1함대 (사령관 : 다카스 시로 중장) - 전함주축의 본토방어 주력함대

기함 : 이세​, 기지 : 하시라지마

 

제 2전대 : 전함 이세(伊勢), 휴가(日向), 후소(扶桑), 야마시로(山城)

제 3전대 : 전함 콘고(金剛), 하루나(捧名), 키리시마(霧島), 히에이(比叡)

제 6전대 : 중순양함 아오바(靑葉), 키누가사(衣笠), 후루타카(古應), 카고(加古)

제 9전대 : 경순양함 키타카미(北上), 오오이(大井)

제 3 항공전대 : 항공모함 호쇼(鳳翔), 즈이호(瑞鳳), 구축함 미카즈키(三日月), 유우카제(夕風)

제 1 수뢰전대 : 경순양함 아부쿠마(阿武猥)

I

제 6 구축대 : 구축함 이가즈치(雷), 이나즈마(電), 히비키(響), 아카즈키(曉)

제 17 구축대 : 구축함 우라카제(浦風), 이소카제(磯風), 야카제(谷風), 하마카제(浜風)

제 21 구축대 : 구축함 하츠하루(初春), 네노히(子日), 하츠시모(初霜), 와카바(若葉)

제 27 구축대 : 구축함 아리아케(有明), 유구레(夕暮), 시라츠유(白露), 시구레(時雨)

 

제 3 수뢰전대 : 경순양함 센다이(川內)

I

제 11 구축대 : 구축함 후부키(吹雪), 시라유키(白雪), 하츠유키(初雪)

제 12 구축대 : 구축함 무라쿠모(叢雲), 시노노메(東雲), 시라쿠모(白雲)

제 19 구축대 : 구축함 이소나미(磯波), 우라나미(浦波), 시키나미(敷波), 아야나미(綾波)

제 20 구축대 : 구축함 아마키리(天霧), 아사키리(朝霧), 유키리(夕霧), 사기리(狹霧)

 

* 제 2함대 (사령관 : 곤도 노부타게 중장) - 중순양함 주체의 남방전술함대

기함 : 다카오, 기지 : ​하이난

 

제 4전대 : 중순양함 다카오(高雄), 아타고(愛宕), 쵸카이(鳥海), 마야(摩耶)

제 5전대 : 중순양함 나치(那智), 하구로(羽黑), 묘고(妙高)

제 7전대 : 중순양함 모가미(最上), 쿠마노(熊野), 스즈야(鈴谷), 미쿠마(三猥)

제 8전대 : 중순양함 도네(利根), 치쿠마(筑摩)

제 2 수뢰전대 : 경순양함 진쯔(神通)

I

제 8 구축대 : 구축함 아사시오(朝潮), 미치시오(滿潮), 오오시오(大潮), 아라시오(荒潮)

제 15 구축대 : 구축함 쿠로시오(黑潮), 오야시오(親潮), 하야시오(早潮), 나츠시오(夏潮)

제 16 구축대 : 구축함 하츠카제(初風), 유키카제(雪風), 아마츠카제(天津風), 도키즈카제(時津風)

제 18 구축대 : 구축함 카스미(), 아라레(), 카게로(陽炎), 시라누이(不知火)

 

제 4 수뢰전대 : 경순양함 나가(那珂)

I

제 2 구축대 : 구축함 무라사메(村雨), 유다치(夕立), 하루사메(春雨), 사미다레(五月雨)

제 4 구축대 : 구축함 아라시(嵐), 하기카제(萩風), 노와키(野分), 마이카제(舞風)

제 9 구축대 : 구축함 아사쿠모(朝雲), 야마쿠모(山雲), 나츠쿠모(夏雲), 미네쿠모(峯雲)

제 24 구축대 : 구축함 우미카제(海風), 야마카제(山風), 카와카제(江風), 스즈카제(凉風)

 

* 제 3함대 (사령관 :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 - 필리핀 공략지원함대

기함 : 아시가라, 기지 : ​타이완

 

제 16전대 : 중순양함 아시가라(足柄), 경순양함 나가라(長良), 쿠마(球磨)

제 17전대 : 부설함 이츠쿠시마(嚴島), 야에야마(八重山), 설비함 신쿠마루(辰宮丸)

제 5 수뢰전대 : 경순양함 나토리(名取)

I

제 5 구축대 : 구축함 아사카제(朝風), 하루카제(春風), 마쓰카제(松風), 하타카제(旗風)

제 22 구축대 : 구축함 사츠키(皐月), 미나즈키(水無月), 후미즈키(文月), 나가즈키(長月)

 

제 6 잠수전대 : 잠수모함 쵸게이(長鯨)

I

제 9 잠수대 : 잠수함 伊 123, 伊 124

제 13 잠수대 : 잠수함 伊 121, 伊 122

 

제 1 근거지대 : 부설함 시라타카(白應), 아오타카(蒼應), 소해정, 구잠정, 수뢰정 일부.

 

* 제 4 함대 (사령관 : 이노우에 시게요시 중장) - 남양군도 방위함대

기함 : 연습순양함 가시마(鹿島), 기지 : ​트럭

제 18전대 : 경순양함 텐류(天龍), 타츠다(龍田)

제 19전대 : 부설함 오키노시마(沖島), 해방함 도키와(常磐), 쓰가루(津輕)

제 6 수뢰전대 : 경순양함 유바리(夕張)

I

제 29 구축대 : 구축함 오이테(追風), 하야테(疾風), 아사나기(朝), 유나기(夕)

제 30 구축대 : 구축함 무츠키(睦月), 키사라기(如月), 야요이(彌生), 모치즈키(望月)

제 7 수뢰전대 : 잠수모함 진게이(迅鯨)

I

제 26 잠수대 : 잠수함 呂 60, 61, 62

제 27 잠수대 : 잠수함 呂 65, 66, 67

제 33 잠수대 : 잠수함 呂 63, 64, 68

항공기 : 96식 함상전투기​ 36대, 육상공격기 38대, 비행정 24대, 수상기 54대

 

* 제 5함대 (사령관 :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 - 북방열도 방위함대

기함 : 다마, 기지 : 마이즈루

 

제 21전대 : 경순양함 타마(多摩), 키소(木曾)

제 22전대 : 특설순양함 쿠리타마루(粟田丸), 아사카마루(淺香丸)

제 7 근거지대 : 소해정, 구잠정 일부.

 

* 제 6함대 (사령관 : 시미즈 미츠미 중장) - 하와이방면 잠수함대

기함 : 연습순양함 카토리(香取), 기지 : 콰절린

 

제 1 잠수전대 : 특설잠수모함 야스쿠니마루(靖國丸), 잠수함 伊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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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잠수대 : 잠수함 伊 15, 16, 17

제 2잠수대 : 잠수함 伊 18, 19, 20

제 3잠수대 : 잠수함 伊 24, 25, 26

 

제 2 잠수전대 : 특설잠수모함 산토스마루(さんとす丸), 잠수함 伊 7, 伊 10

I

제 7잠수대 : 伊 1, 2, 3

제 8잠수대 : 伊 4, 5, 6

 

제 3 잠수전대 : 특설잠수모함 다이게(大鯨), 잠수함 伊 8

I

제 11잠수대 : 잠수함 伊 74, 75

제 12잠수대 : 잠수함 伊 68, 69, 70

제 20잠수대 : 잠수함 伊 71, 72, 73

 

* 제 1 항공함대 (사령관 : 나구모 주이치 중장) - 북태평양 공략을 담당한 항모기동부대

기함 : 아카기, 기지 : 구레​

 

제 1 항공전대 : 항공모함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I

제 7 구축대 : 구축함 아케보노(曙), 우시오(潮), 사자나미(漣)

 

제 2 항공전대 : 항공모함 소류(蒼龍), 히류(飛龍)

I

제 23 구축대 : 구축함 키쿠즈키(菊月), 유즈키(夕月), 우즈키(卯月)

 

제 4 항공전대 : 항공모함 류조(龍駿), 다이요(大應)

I

제 3 구축대 : 구축함 시오카제(汐風), 호카제(帆風)

 

제 5 항공전대 : 항공모함 쇼가쿠(翔鶴), 즈이가쿠(瑞鶴)

I

부속 구축함 : 오보로(朧), 아키쿠모(秋雲)

 

함재기

정규항모 6척 : 제로기 108대, 99식 함상폭격기 129대, 97식 함상공격기 144대

경항모 2척 : 96식 함상전투기 24대, 97식 함상공격기 24대

* 남파함대 (사령관 :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방함대. 말레이 작전을 지원.

기함 : 가시이, 기지 : 요코스카

 

경순양함 : 가시이(香椎), 해방함 시무슈(占守)

제 9 근거지대 : 소해정, 구잠정 일부.

제 4 잠수전대 : 경순양함 키누(鬼怒)

I

제 18잠수대 : 잠수함 伊 53, 54, 55

제 19잠수대 : 잠수함 伊 56, 57, 58

제 21잠수대 : 잠수함 呂 33, 34

 

제 5 잠수전대 : 경순양함 유라(由良)

I

제 28잠수대 : 伊 59, 60

제 29잠수대 : 伊 62, 64

제 30잠수대 : 伊 65, 66

 

지상발진 항공기 세력

 

제 11 항공함대 (사령관 : 츠카하라 니시조 중장) - 타이완

구축함 : 미네카제(峯風), 오키노카제(沖風)

제 21 항공전대

제 23 항공전대

항공기 : 제로기 90대, 96식 함상전투기 33대, 육상공격기 122대, 수송기 25대, 98식 육상정찰기 12대, 비행정 24대, 수상기 38대

 

제22항공전대 - 인도차이나

항공기 : 제로기 25대, 96식 함상전투기 12대, 육상공격기 99대, 98식 육상정찰기 6대, 수상기 31대

 

북태평양 : 전투기 27대, 공격기 20대, 수상기 8대

일본본토 : 전투기 약 100대, 폭격기 및 공격기 약 70대, 훈련기 약 450대, 기타  약 60대

예비기 : 전투기 약 70대, 폭격기 및 공격기 약 50대, 연습기 약 60대, 기타 약 40대

 

제11및 제12 수상기모함 전대 : 수상기모함 8척, 수상기 약 70대

전함 및 순양함의 수상기 : 약 90대

 

(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Redirect=Log&logNo=110072963049&from=postView ,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Japanese naval Force Fighter Units and Their Aces 1932-1945, The Organization and Order of Battle of Militaries in World War 2, Vol.4 - Japan)

 

전반적으로 보아 일본해군은 막강한 상대였으며 미해군은 1814년에 영국해군과 겨루어 본 이래 이렇게 강력한 해군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일본해군의 약점은 가난한 나라의 해군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해군도 강력한 산업의 뒷받침없이 오래 버틸 수는 없었으며 일본의 산업 역량은 미국에 비해 치명적으로 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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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본해군(1)

 

1921년의 워싱턴 조약에서 일본은 주력함을 미국 및 영국에 대하여 10 :10 :6 의 비율로 제한하는 안을 받아들였다.

1931년의 런던 조약에서 일본은 주력함 비율에서 10 :10 :6 을 유지했으나 보조함 비율에서는 10 :10 :7,  잠수함은 동률을 인정받았다.

 

제2차 런던조약을 앞두고 군국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일본정부는 미국과 영국에게 주력함과 보조함 모두에서 동률을 요구했다.

이는 태평양에서 일본해군의 압도적 우세를 인정하라는 소리로 미국과 영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일본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본은 1936년 1월 15일에 군축조약에서 탈퇴했고 연말에 런던조약의 시효가 만료되면서 세계는 건함경쟁시대로 돌아갔다.

 

1922년 워싱턴 군축조약이 체결되던 당시, 1936년 군축조약이 실효되었을 때, 그리고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 영국, 및 일본의 전투함 배수량을 비교해보면 일본해군의 배수량이 늘어났다는 것이 눈에 띈다.

 

1922년 워싱턴 조약에 의하여 초과분을 폐기한 이후(단위 : 만톤)

 

 

미국

영국

일본

 전함 및 순양전함

52.6

55.9

30.1

 항공모함

1.3

8.8

1.5

 순양함

18.3

39.3

14.2

 구축함

36.3

24.5

6.5

 잠수함

4.9

7.6

2.4

 합계

113.4

136.1

54.7

 

 

1936년 런던군축조약 실효시(단위 : 만톤)

 

 

미국

영국

일본

전함 및 순양전함

46.4

47.5

31.2

항공모함

8.1

11.5

6.8

순양함

24.9

35.9

24.2

구축함

21.6

19.1

9.6

잠수함

6.8

5.2

6.6

합계

107.8

119.2

78.4

 

1941년 진주만 기습 당시(단위 : 만톤)

 

 

미국

영국

일본

전함 및 순양전함

53.4

44.3

35.7

항공모함

13.5

16.1

17.8

순양함

32.9

47.1

29.9

구축함

23.7

26.8

15.4

잠수함

11.7

5.5

10.7

합계

135.2

139.8

109.5

 

 

1922년에 워싱턴 조약이 발효되었을 때 일본해군의 배수량은 미해군의 48%, 그리고 영국해군의 40% 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19년 동안 미해군은 218,000 톤이 늘어나고 영국해군은 겨우 37,000 톤이 늘어나는 동안 일본해군은 548,000 톤이 늘어서 2배가 되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해군의 배수량은 미해군의 81%, 그리고 영국해군의 78% 에 달하였으며 태평양에서는 연합군 해군을 합친 것보다 우세했다.

게다가 일본해군의 함정들은 잘 정비되었고 대규모 개장을 실시하여 성능 또한 좋았다. 

 

육군과 해군을 통틀어 일본군 최고사령관은 천황이었으며 천황의 통수권 행사를 돕기 위하여 군사참의관회의가 있었다.

군사참의관회의에는 육상, 해상, 참모총장(육군), 군령부총장(해군)과 군의 원로인 군사참의관들,그리고 필요할 경우 내각의 각료들이 참석했다. 

작전은 참모본부(육군)와 군령부(해군)에서 짰으며 전쟁시에는 이 두 기관을 합쳐 대본영을 만들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중일전쟁이 터지자 1938년 11월에 대본영을 만들면서 군사참의관회의를 유명무실화하고 그 기능을 대본영-정부연락회의로 옮겼다.

연락회의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천황, 수상, 외상, 육상, 해상, 참모총장, 그리고 군령부총장이었으며 천황이 참석하기 때문에 어전회의라고도 불렀다.

미국 및 영국과의 개전을 결의한 것이 바로 이 대본영-정부연락회의였다.

 

해군의 작전은 군령부와 연합함대사령부에서 짰으며 협의를 통하여 의견을 조율했다.

만일 육군의 도움이 필요하면 참모본부와도 협의해야 했다.

육군도 상륙작전같은 경우 해군과 협의를 거쳐야 했다.

고위 레벨에서는 이런 식으로 육군과 해군 사이에 의사교환이 일어났으나 그 아래로는 거의 의사교환이 없었다.

 

일본의 육해군은 알력이 심하여 통합전력 발휘에 지장이 많았다.

전쟁 후반기의 섬 전투처럼 고립된 전장에서도 섬 사령관인 육군 장교가 휘하의 해군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일본은 섬나라였지만 해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존재였으며 일본의 오랜 전통에 뿌리를 박고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해군의 훈련이나 조직은 영국해군의 영향을 받았으며 러일전쟁 당시 함정들도 대부분 영국에서 건조한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함정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여 제1차 세계대전 즈음에는 함정을 대부분 국내에서 건조했다.

함정의 절반 가량은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그리고 마이즈루에 있는 4대 해군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나머지는 민간조선소가 건조했다.

일본의 조선소는 훌륭한 함정을 건조했으나 대량 건조 기술을 개발하거나 전시에 자재가 모자라는 상황에서 함정을 건조하거나 수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전함들은 미국의 구형전함들보다 빨랐으며 다른 면은 비슷했다.

일본이 건조한 야마토 급 전함은 기준배수량 64,000 톤에 460mm(18.1인치) 주포 9문을 장착하여 기준배수량 45,000 톤에 16인치(406mm) 주포 9문을 장착한 미해군 최대의 전함 아이오와 급보다 훨씬 컸다.

 

(일본전함 야마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 최강의 함대항공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항공모함 세력은 정규항공모함 6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가쿠, 즈이가쿠)을 포함하여 10척의 항공모함, 배수량 178,000 톤으로 항공모함 7척에 배수량 135,000 톤을 보유한 미해군이나 역시 7척에 배수량 161,000 톤을 보유한 영국해군보다 규모가 컸다.

함재기도 뛰어나 전투기인 제로기나 뇌격기인 97식 함상공격기는 당시 동급 기종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엄청난 경쟁율을 보이는 지원자 중에서 까다롭게 뽑아 혹독한 훈련을 거친 다음 중일전쟁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일본해군의 조종사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세계에서 최초로 여러 척의 항공모함을 뭉쳐 운용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위력을 극대화했다.

한마디로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세계 최강이었으며 진주만 기습을 비롯하여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의 놀라운 성공은 강력한 일본의 항모기동부대에 힘입은 바 컸다.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군축조약 시기 만들어진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조약이 실효한 후 대규모 개장을 실시했다.

개장으로 배수량이 30% 가까이 늘었으나 기관 출력 또한 증가하여 속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미국 중순양함들보다 훨씬 컸으며 속력은 비슷했다.

무장은 8인치 주포 10문을 갖추어 9문인 미국 중순양함보다 화력이 강했으며 미국 중순양함들과 달리 어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순양함들은 10,000 톤에 육박하는 미국 경순양함의 절반 정도 크기였으며 대부분 구축대의 기함을 맡았다.

 

여러 임무를 소화하는 만능함의 성격이 강한 미국 구축함에 비해 일본 구축함은 대함 전투에 특화된 경향이 있었다.

일본 구축함의 50구경장 5인치 양용포는 미국 구축함의 38구경장 5인치 양용포보다 대공포로서는 열세였으나 함포로서는 우수했다.

일본해군은 구축함의 주포인 5인치 함포의 배치 방식에서 미해군을 앞서갔다.

1928년에 취역한 후부키 급에서 5인치 양용포의 폐쇄형 연장포탑을 채택한 이래 일본 구축함들은 흔들림없이 5인치 양용포의 폐쇄형 연장포탑이라는 기조를 이어갔다.

미국은 1935년에 취역한 포터 급에서 5인치 함포의 폐쇄형 연장포탑을 채택했으나 당시의 5인치 포는 양용포가 아니었으며 이후 미국은 연장포탑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단장과 연장 포탑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결국 미국이 구축함의 5인치 양용포를 폐쇄형 연장포탑에 장착하는 방식을 확정한 것은 1944년에 취역한 알렌 섬너 급부터였다.

 

일본의 잠수함 부대는 20톤짜리 잠수정부터 기준배수량 3,530톤에 3대의 수상기를 실을 수 있는 대형잠수함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주력은 I 형 잠수함이었으며 보다 작은 구형 Ro 형 잠수함이 보조 역할을 했다.

I 형 잠수함은 미국의 함대형 잠수함들보다 배수량이 크고 속력이 빨랐으나 수중 소음이 심한 편이었는데 이는 일본해군의 잠수함 운용 사상과 관련이 있었다.

잠수함을 통상파괴의 수단으로 사용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일본해군은 잠수함을  함대결전에 앞서 정찰을 하고 뇌격을 가하여 적의 전력을 깎아두는 역할을 하는 전투함대의 보조전력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전투함들과 합동작전을 펼 수 있도록 속력이 중요한 요소였으며 수중 소음 문제는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1931년 이전의 일본해군은 상륙작전 능력이 빈약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상륙작전 능력 향상에 심혈을 기울여 상륙주정, 소형 수송선, 초계정 및 포정을 다수 확충했다.

일본의 대형 상선들은 간단한 개조를 통하여 수송함, 급유함, 수상기모함 등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러한 상선들은 만들 때부터 전시 징발을 조건으로 건조비의 상당 부분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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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파나이 격침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2년 동안 미국은 외교적 수단을 통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사태는 외교로 해결될 단계를 넘었으나 미국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론은 중국을 지지했으나 부당한 침략을 당하여 고통받는 중국을 동정하는 것과 중국을 위하여 총을 잡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국민들이 중국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전쟁 상황이 존재했으므로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립법에 의거해 일본에 고철이나 항공유를 포함한 전쟁 물자의 수출을 금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립법은 교전 중인 국가 모두에게 적용해야 하므로 중국도 대상이 된다.

이럴 경우 원료만 수입하고 무기와 탄약은 자체 생산이 가능한 일본보다 무기와 탄약을 대부분 수입해야 하고 상선대도 빈약한 중국이 불리하다.

 

게다가 조셉 그루 주일 대사는 만약 일본이 교역을 통하여 원유, 고철, 고무, 주석 등의 전략 물자를 얻지 못하게 되면 이런 물자가 풍부한 영령 말레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할 것이라고 국무성에 여러 차례 경고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남진을 막을 힘이 없었다.

1935년에 118,000 명이었던 미육군은 2년 동안 30% 이상 팽창했음에도 1937년 현재 15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효과도 없는 외교적 노력에 매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1937년에 다른 18개국과 함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모여 중일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회의를 열었으나 일본은 불참했다.

나머지 19개국은 일본도 조인했던 9개국 조약을 재확인하고 일본이 9개국 조약의 정신에 따라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처리해 주길 요청했다.

일본은 지나사변은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대답했다.

 

일본 외무성은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존중하도록 군대에 요청했으나 일선 부대에서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미국인이 세운 교회나 학교 등은 성조기를 달고 있었고 일본군이 가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세운 교회나 학교는 200회 이상 일본기의 공격을 받아 많은 미국인 선교사와 가족들이 희생되었다.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공습시 가장 위험한 장소가 미국인이 세운 교회라고 생각했다.

미국 정부와의 충돌을 두려워하는 외무성과 달리 현지의 일본군은 미국인을 위협하여 중국에서 몰아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일본군의 의도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파나이 격침이었다.

 

파나이는 미해군이 발주하여 중국의 강남조선소에서 건조한 흘수가 낮은 하천용 포함이었다.

1928년 10월 10일에 취역한 파나이는 미국 아시아 함대의 양쯔강 포함대(Yangtze River Gunboat Flotilla) 소속으로 4척의 동료 포함들과 함께 양쯔 강을 운항하는 미국 선박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PR-5 파나이. 길이 : 58m, 폭 : 8.8m, 배수량 : 482톤, 흘수 : 1.6m, 속력 : 15노트, 승무원 : 59명, 무장 : 3인치 대공포 2문, 7.62mm 기관총 8정, https://en.wikipedia.org/wiki/USS_Panay_(PR-5)

 

1937년 11일 21일에 일본군이 수도인 난징에 접근하자 국민당 정부는 미국 대사에게 철수를 권고했다.

다음날인 22일에 미국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 및 가족 대부분이 미군함정 루손을 타고 난징을 떠났으며, 대사관 직원 3명이 남아서 마지막 업무를 처리하고 일본군의 난징 함락이 임박한 12월 11일 저녁에 파나이를 타고 난징을 떠났다.

당시 파나이에는 승무원 59명, 대사관 직원 3명, 그리고 민간인 10명이 타고 있었다.

파나이는 스탠더드 석유회사 소속의 소형 유조선 3척(메이안, 메이핑, 메이시아)와 함께 떠났는데 여기에는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중국인 종업원과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

파나이 선단의 바로 뒤에는 영국 포함 레이디버드와 비가 호위하는 소규모 선단이 뒤따랐다.

이들의 출항은 주일대사 조셉 그루에 의하여 며칠 전에 일본정부에 통지된 상태였다.

 

양쯔 강의 물살을 거슬러 느리게 항해하던 선단은 다음날인 12일 새벽에 안개 속에서 하시모토 포병대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포병의 포격을 받았다.

파나이 선단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뒤따르던 영국선단에서는 포함 레이디버드와 비가 피해를 입었다.

나중에 일본 정부는 이 일에 대하여 영국정부에 사과했다.

 

하시모토 대좌는 안개 속에서 표적을 잃어버리자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일본해군은 육군의 작전을 지원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중지나방면군 사령부에 파견나와 있던 아오키 다케시 해군소좌는 12일 오전에 육군 측으로부터

 

"난징 상류 19km 지점에 중국군 패잔병을 가득 실은 상선 10척이 상류 쪽으로 도주 중이니 해군항공부대로 공격해달라."

 

는 전화를 받았고 정오 경에는 다시

 

"수많은 중국군을 실은 선단이 난징 상류 35km 지점에서 도주 중"

 

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오키 소좌의 연락을 받은 제2연합항공대 제12항공대장 미키 대좌가 항공모함 카가로부터 95식 함상 전투기 10대, 94식 함상폭격기 6대, 96식 함상폭격기 6대, 96식 함상공격기 3대로 이루어진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12일 오전 11시, 파나이 선단은 난징에서 상류 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정박했다.

날씨는 맑았으며 미풍이 불고 있었다.

파나이 선단에서는 모두들 점심식사를 했으며 대공포에는 인원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오후 1시 30분에 일본기들이 파나이 선단 상공에 나타났다.

 

먼저 폭격을 가한 것은 96식 함상공격기 3대였다.

함상공격기들은 2,500m 높이로 선단 상공을 가로지르면서 60kg 짜리 폭탄 18발을 떨어뜨려 2발을 파나이에 명중시켰다.

1발은 전방 3인치 대공포에 명중했고 다른 1발은 전방 선실에 명중했다.

 

(96식 함상공격기. https://en.wikipedia.org/wiki/Yokosuka_B4Y)

 

이어서 함상폭격기들도 달려들어 급강하 폭격을 실시했고 전투기들은 저공으로 내려와 기총소사를 가했다.

 

(95식 함상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최초의 폭격에서 2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은 파나이는 치명적 타격을 입고 곧 침몰했다.

승조원 2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고 승조원 43명과 민간인 5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승조원 중 11명은 중상이었다.

함장 휴이 소령도 부상을 입었다.

유조선 3척도 공격을 받아 메이안이 침몰하고 나머지 2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메이안의 선장과 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파나이에는 촬영기사 2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 과정과 파나이가 침몰하는 광경을 필름으로 남겼다.

 

(침몰하는 파나이의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USS_Panay_incident)

 

미국 아시아 함대는 12일 오후에 파나이와의 통신이 끊어지자 상하이에 정박 중이던 일본 제3함대의 기함 이즈모에 연락장교를 파견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본해군은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다음날인 13일 오전에 제3함대사령관 하세가와 키요시 해군중장은 아시아 함대의 기함인 순양함 오거스타 호에 참모장을 파견하여 아시아함대사령관 야넬 해군대장에게 사과하는 한편 뉴욕타임즈 지국장을 이즈모로 초청하여 파나이를 격침했음을 시인하고 사죄와 배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세가와 중장은 오후에는 직접 오거스타 호를 방문하여 야넬 대장에게 사과했다.

 

일본정부도 발빠르게 대응했다.

히로타 고키 외상은 13일에 미국 대사관에 찾아와 조셉 그루 주일대사에게 사과했다.

워싱턴에서는 사이토 히로시 주미대사가 라디오 중계료를 지불하고 3분 52초짜리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사이토 주미대사는 다음날 코델 헐 국무장관을 만나 다시 사과했다.

13일 오후 5시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차관이 성명을 발표하여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미국에 대해 사과하고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14일에 미국무부는 그루 주일대사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으며 상하이에서는 미해군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오후 9시에 일본해군은 공식발표를 통해 파나이 격침은 오폭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사후 처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15일에 일본정부는 제2연합항공대 사령관 미나미 소장을 경질하여 소환했으며, 17일에는 공격을 실시했던 4명의 공격대장을 질책했다.

다만 이것은 미국에 보이기 위한 것으로 실제로 미나미 소장은 곧 제2항공함대 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공격대장들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17일에 헐 국무장관은 사이토 대사를 불러 파나이 격침이 고의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나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당시 미해군이 함재기와 카가 사이의 통신을 방수했지만 극비 사항이었으므로 헐 장관이 보고를 받고서도 사이토 대사에게 공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23일 오후 5시에 야마모토 해군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이 미대사관을 방문하여 2시간 30분 동안 설명회를 가졌다.

여기서 일본 측은 파나이가 중국군을 수송하는 중이라고 오인하여 폭격했다고 다시 한번 변명했다.

 

24일 히로타 외상은 그루 주일대사에게 일본정부의 공식답변문서를 전달했다.

여기서 일본정부는 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충분한 배상을 실시하고 앞으로 중국에서 일본군이 미국인을 공격하지 않도록 단속할 것이며 사건 관계자들을 추가로 처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파나이 격침이 고의는 아니고 오폭이었다는 변명은 빼놓지 않았다.

반면 같은날 오후 8시(현지시각) 워싱턴에서 발표된 미해군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파나이 격침이 고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26일 미국정부의 공식답변이 그루 주일대사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전달되었다.

답변에서 미국정부는 파나이 격침이 실수였다는 일본 측의 해명을 인정하지 않으며 고의였다는 미해군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일본정부의 공식답변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파나이 격침으로 발생한 미일간의 외교적 위기는 2주 만에 일단락되었다.

 

일본정부가 필사적으로 해명하는 동안 일본인들도 범국가적으로 미국에게 사죄의 제스처를 보였다.

주일 미대사관과 일본 각지의 미국 영사관에는 파나이 격침에 사죄하는 일본인들의 편지가 쇄도했으며 8세 - 13세 사이의 여자초등학생 37명이 워싱턴의 미해군성으로 영어로 사죄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사죄편지와 함께 주일 미대사관과 영사관, 그리고 신문사에는 파나이 격침의 사망자와 부상자에게 보내는 성금이 답지했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들은 만나는 일본인마다 파나이 격침에 대해 사과하는 바람에 당황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일본국민의 움직임에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관여한 흔적은 없었으며 현지의 미국인들도 일본인의 태도가 결코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이지 않으며 진심으로 슬퍼하고 사죄하고 있다고 느꼈다.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해명과 함께 일본국민이 보여준 진심어린 사죄의 태도는 미국의 여론이 악화되는 걸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당장 일본을 응징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미국정부는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적당한 선에서 물러설 수 있었다.

당시 미군 장교들 중에서는 일본을 응징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 자국 정부의 조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일기장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도였다.

파나이 격침에 대해 일본이 지불한 배상금은 220만 달러 정도였는데 징벌적 배상이 아닌 실제 발생한 손해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산출한 액수였다고 한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당시 일본기들의 통신 내용을 근거로 파나이 격침을 오폭이 아닌 고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일본정부나 중지나사령부 또는 제3함대사령부가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며 그 이하의 단위 부대에서 극단주의적인 장교들이 중국에서 미국인들을 몰아내려 저지른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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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일전쟁 발발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이 성립되었지만 관동군의 군사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병력이 크게 증강된 관동군은 1933년 초까지 만주국 내의 항일 게릴라들을 소탕했고 이후로는 남쪽 리허 성으로 진격하여 1933년 3월 말에는 만리장성에 도달했다.

 

관동군은 1933년 5월 7일에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베이징과 텐진 북방 50km 지점까지 진격했다.

위협을 느낀 중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5월 31일 텐진의 외항인 탕구에서 협정이 성립되었다.

탕구협정에서 만리장성과 일본군이 진격한 선 사이를 비무장 지대로 설정했으나 일본은 1935년 11월 비무장 지대에 기동방공자치정부라는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관동군은 만주국을 만들자 이번에는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항일 게릴라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논리로 화북 5성(허베이, 산뚱, 산시, 차하얼, 쑤이위안)을 중국에서 분리하여 괴뢰정부를 세우려는 화북분리공작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당연히 중국이 반발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이러던 중 1937년 7월 7일 오후 10시 30분 경에 일본 지나주둔군 제1연대 제2대대 제8중대가 베이징 외곽의 루거오차오 부근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는 중일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나 제8중대장이었던 시미즈 세츠로 대위의 주장에 의하면 훈련 도중 갑자기 중국군이 사격을 가하여 급히 병사를 집결시켜 점검해 보니 1명이 행방불명이었다고 한다.

시미즈 대위는 즉시 제2대대장 이치기 기요나오 소좌에게 보고했고 이치기 소좌는 대대 주력을 출동시켜 부근의 중국군과 대치했다.

사실 그 병사는 설사가 난 것으로서 20분 뒤 돌아왔으나 이미 일이 커졌으므로 시미즈 대위는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8일 오전 4시 20분에 다시 중국군이 3발의 총격을 가하자 이치기 소좌는 제1연대장 무다구치 렌야 대좌에게 보고했고 무다구치 대좌가 오전 5시에 공격 명령을 내림으로써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측은 8일 오전 5시에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할 때까지 중국군의 발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며칠 동안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루거오차오 사건이라 부른다.

 

당시 지나주둔군의 숫자는 약 5,800 명으로 대치 중이던 중국 제29군의 10만명에 비하여 크게 열세했으며 중국군 또한 일본군과 충돌을 지속하여 일본정부에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충돌이 일어난 지 4일 만인 7월 11일에 중국군이 크게 양보하는 내용으로 현지의 양군 사이에 협정이 맺어지면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이렇게 해결되는 듯하던 루거오차오 사건을 중일전쟁으로 끌고간 것은 일본의 고노에 내각이었다.

고노에 내각은 11일에 각의를 열어 중국군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도전행위로 규정하고 관동군의 혼성 제1 및 제10여단, 조선에 주둔 중이던 제20사단, 그리고 일본본토로부터 제5, 제6, 그리고 제10사단을 화북에 파견한다는 스기야마 육상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일본정부는 이 사태를 북지사변으로 명명했다.

 

1936년 말의 서안사변으로 공산당과의 내분을 봉합한 국민당 정부도 일본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강경하게 나왔다.

장제스는 장시성 루산에서 중국 내의 유력한 정치 세력들이 참가한 회의를 가진 후 1937년 7월 19일에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천명하는 루산담화를 발표했다.

이로써 병사 1명의 설사로 시작된 루거오차오 사건은 8년 간의 처절한 대전쟁인 중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아닌 루거오차오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의 초기 흐름은 일본에게 유리했다.

제20사단, 제1 및 제10여단과 임시항공병단으로 강화된 지나주둔군은 1937년 7월 30일에 베이징과 텐진을 점령했다.

 

남쪽 상하이에서도 1937년 8월 13일부터 전투가 벌어졌다.

75만명에 달하는 중국군과 30만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상하이 부근에서 3개월 간 처절하게 싸웠다.

결국 11월 5일에 8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상하이 남쪽의 항조우 만에 상륙하여 중국군의 배후를 찌르자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철수했고 상하이는 11월 12일에 함락되었다.  

 

일본은 1937년 11월 21일에 러일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본영을 설치했으며 1945년 패전까지 유지했다.

 

상하이를 점령한 후 일본정부는 소련을 의식하여 전선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으나 현지 부대는 이를 무시하고 300km 떨어진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상하이 전투에서 정예병력 30만명을 잃은 국민당군은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국민당 정부는 한커우로 이동했고 일본군은 12월 13일에 난징을 점령했다.

이후 일본군은 난징에서 7주간 무려 30만명에 달하는 포로와 민간인을 강간 및 살해하는 난징학살을 저질렀다. 

 

중국군은 1938년 2월에 쉬저우 부근에서 벌어진 타이얼좡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사상자 16,000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히면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1938년 10월 21일에 광둥을 점령했으며 26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한커우를 점령했다.

국민당 정부는 다시 양쯔강 상류의 충칭으로 수도를 옮겼다.

 

한커우 점령을 전후하여 일본군도 힘이 다했다.

드넓은 중국에서 끝없는 소모전에 휘말리자 대본영은 소련을 의식하여 1938년 11월 18일에 전선을 확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40년 현재 일본의 점령 지역.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Sino-Japanese_War)

 

중일전쟁의 와중에 일본군은 소련군과 대규모로 2번 충돌했다.

1938년 8월 초에 조선에 주둔 중이던 제19사단이 만주국, 조선, 그리고 소련의 국경선에 접한 장고봉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여 사단의 22% 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했다.

 

1년 후에는 관동군이 훨씬 큰 규모로 소련군과 격돌했다.

1939년 8월 말에 만주국과 몽고의 변경에 있는 노몬한에서 제23사단을 중심으로 한 관동군은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이끄는 소련군과 대결하여 17,000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했다.

노몬한 사건을 통하여 일본육군은 자신들의 실력이 소련군보다 떨어진다는 사실을 절감했으며 이후 육군 내에서도 남진론이 세력을 넓히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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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26사건

 

만주사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일본과의 사이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은 1935년에 실효된 런던 군축조약에 이은 제2차 런던 군축조약에 불참함으로써 15년에 걸친 군축 시대가 끝나고 세계는 다시 건함경쟁 시대로 들어섰다.

 

일본에서는 1936년 2월 26일에 커다란 정변이 발생했다.

도쿄에 주둔 중이던 제1사단 소속 병사들을 중심으로 한 1,483명의 반란군이 수상관저, 국회의사당, 경시청, 육군성, 육상 관저, 참모본부 등 정부와 군부의 주요 기관을 점거하거나 포위했다.

반란군들은 육군 대위였던 노나카 시로, 코다 기요사다, 안도 데루조 등의 지휘에 따라 26일 오전 4시에 병영을 빠져나와 6개로 나뉘어 오전 5시부터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대신, 다카하시 고레기요 대장대신, 사이토 마고토 내대신, 와타나베 죠다로 육군교육총감,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 등을 습격했다.

다카하시 대장대신, 사이토 내대신, 그리고 와타나베 교육총감은 피살되었으며 스즈키 시종장은 중상을 입었다. 

(2.26 사건에 참가한 반란군들. https://en.wikipedia.org/wiki/February_26_incident)

반란군이 들이닥칠 당시 오카다 수상은 자고 있었으며 대신 비서관이자 처남인 마츠오 렌조 대좌가 반란군에게 수상 행세를 하다가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반란군들이 마츠오 대좌를 수상으로 착각한 덕분에 수상은 반란군의 눈을 피하여 벽장에 숨을 수 있었다.

수상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숨어 있다가 다음날인 27일 정오경 헌병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문상객으로 가장하여 반란군에 포위된 수상 관저를 탈출했다.

당시 일본육군 내에서는 황도파와 통제파의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 제1사단은 황도파의 본거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2월 22일에 제1사단에게 만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19 및 제20사단이 붙박이로 배치된 조선주둔군과 달리 관동군에는 사단이 돌아가면서 파견되었으며 제1사단의 만주 파견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사단은 러일전쟁 이후 해외로 파견된 적이 없었으므로 황도파인 제1사단의 장교들은 통제파가 자신들을 만주로 쫓아내려 한다고 판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란군 수괴 중 1명인 고다 대위는 1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육상 관저를 포위한 후 육상 가와시마 요시유키 대장에게 자신들의 8개조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쇼와 유신의 실현을 요구했다.

8가지 요구사항은 유신회천을 바라는 자신들의 뜻을 천황에게 전달할 것, 자신들이 지목한 통제파 장교들을 체포할 것,​ 황도파의 수장인 아라키 사다오 대장을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할 것 등이었다.

당시 육군 요직에는 황도파가 많아서 반란군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았다.

육상 가와시마도 황도파에 가까웠다.​

반란이 실패한 것은 히로히토 천황 때문이었다.

천황은 오전 5시 40분에 첫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오전 9시에 가와시마 육상이 들어와 반란군들의 요구사항을 보고하면서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내각을 만들 것을 요청하자 천황은 반란군을 당장 진압하지 않고 자기에게 그들의 요구사항이나 읊어대느냐며 역정을 내었다.

​이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모차장 스기야마 하지메 중장은 천황의 의중을 알게 되자 반란을 진압할 부대를 도쿄로 불러들이는 안을 천황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천황을 만나고 나온 가와시마 육상은 궁중에서 육군수뇌부를 소집하여 군사참의회를 열었다.

여기서 참모차장 스기야마 하지메 중장은 토벌을 주장했으나 황도파로서 반란군에게 동정적인 군사참의관 아라키 사다오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 등이 반대했으며 특히 토벌을 책임져야 할 도쿄경비사령관 가시이 고헤이 중장도 황도파였으므로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26일 오후에는 미사키 대장이 주도하여 가와시마 육상 이름으로 5개 항을 작성하여 고시했다.

나중에 미사키 대장은 반란군의 투항을 권고하는 의도였다고 변명했는데 고시의 내용은 반란군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으며 실제로 반란군들은 이 소식을 듣고 거사가 성공했다고 기뻐했다.

더구나 오후 3시에 도쿄경비사령관 가시이 중장이 제1사단에게 반란군들이 장악한 지역을 포함한 전시 경비 명령을 내리면서 반란군들을 제1사단 보병 제1연대 지휘 하에 두었다.

이로써 반란군들은 임지를 이탈한 상태에서 벗어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26일 오후 8시 40분에 살아남은 각료들이 궁중으로 들어와 회의를 열고 계엄령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경시청과 해군은 육군이 전권을 장악할 것을 두려워하여 계엄령에 반대했으나 조속한 진압을 원하는 천황의 뜻에 따라 계엄령 발동이 결정되었다.

계엄령은 27일 오전 3시에 발령되었는데 쇼와 시대 들어와서 첫 계엄령이었다.

이제 계엄사령관이 된 도쿄경비사령관 가시이 중장은 여전히 토벌을 망설였다.

실제로 가시이 중장은 계엄명령 제1호에서 반란군들을 단지 '26일 새벽에 출동한 부대' 라고 지칭함으로써 이들의 행동을 반란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사태의 진전이 느리자 천황은 짜증을 내었다.

27일 오전 8시 20분에 천황은 자신의 이름으로 반란군의 토벌을 명령하는 봉칙명령을 재가했다.

황도파인 시종무관장 혼조 시게루 대장은 반란군으로 낙인찍혀 소탕되는 상황만은 막으려고 천황에게 상주했으나 거절당했다.

27일 하루동안 천황은 혼조 시종무관장을 13번이나 불러 왜 빨리 토벌하지 않느냐고 닦달했다.​

27일 오후 12시 45분에 천황은 가와시마 육상을 불러 육군이 계속 미적거린다면 자신이 직접 근위사단을 이끌고 토벌하겠다고 말했다.

천황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황도파는 27일 오후부터 발을 빼기 시작했다.​

마사키 대장을 비롯한 황도파 군사참의원들은 반란군이 점거하고 있던 육상관저에 들어가 원대복귀를 권했다.

28일 새벽에 반란군들은 천황이 직접 자신들을 토벌하라는 봉칙명령을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28일 오후에 장교는 모두 자결하고 부사관과 병은 원대복귀시키겠다면서 자결 장소에 천황의 칙사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혼조 시종무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천황은 칙사 파견을 거절했고 화가 난 반란군들은 자결 및 원대복귀 결정을 번복했다.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천황의 봉칙명령이 계엄사령부에 정식으로 도착한 것은 28일 오전 5시였다.

계엄사령관 가시이 중장은 계속 토벌을 미루면서​ 반란군과 접촉했다.

그는 일본군끼리 전투를 벌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천황에게 쇼와유신을 받아들이도록 상주하겠다고 말했으나 스기야마 참모차장과 계엄참모가 된 전략과장 이시하라 간지 대좌가 반대하고 즉각 토벌을 주장했다.

어쩔 도리가 없게 된 가시이 중장은 마침내 28일 오후 4시에 토벌을 표명했으며 토벌 시간은 29일 오전 5시로 결정했다. 

​근위 사단을 중심으로 전차까지 포함한 약 2만명의 토벌군이 전개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반란군을 포위하고 주위 교통을 차단했다.

계엄사령부는 29일 오전 5시 10분에 토벌 명령을, 오전 8시 30분에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일선에서는 발포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반란군에게 기회를 주었다.

오전 8시 55분에 라디오에서 '병사에게 고함' 이라는 제목으로 간곡하게 투항을 권유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반란군 지도부는 항복을 결정하고 오후 2시까지 부사관과 병들을 원대복귀시켰다.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는 자결하고 나머지 장교들은 오후 5시에 육상 관저에서 체포되면서 4일에 걸친 반란이 끝났다.

2.26사건의 처리는 엄격했다.

군사법원은 반란에 참가한 장교 중 자결한 노나카 대위를 제외한 19명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1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5명은​ 종신금고형, 1명은 금고 4년형을 받았다.

기타 잇키를 포함한 민간인 5명도 처형되었다.​

반란군의 주력이었던 제3연대장은 29일 새벽에 권총자살했다.​

황도파는 몰락했다.

아라키, 마사키 등 육군참의관이던 대장 4명이 한꺼번에 옷을 벗었고, 육상 가와시마, 시종무관장 혼조도 예편되어 대장 6명이 모두 군에서 쫒겨났다.

계엄사령관 가시이 중장도 예편되었으며 반란군이 소속된 제1사단장과 근위사단장을 포함하여 3,000 명에 달하는 황도파 장교들이 강제로 예편당했다.

2.26사건 당시 관동군 헌병사령관이던 도죠 히데키는 관동군 내의 황도파 장교들을 모두 체포했다.​

황도파에서 살아남은 인물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소장 정도가 유일했다.

이제 육군은 통제파의 천하가 되었다. ​

2.26사건은 군부의 쿠데타가 실패한 사건이었으나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군부는 세력을 잃지 않았다.

몰락한 것은 황도파 뿐으로 군부의 세력은 더 커졌다.

군부의 광기를 목격한 일본정치가들은 이후로는 감히 군부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2.26사건으로 무너진 오카다 내각의 뒤를 이어 1936년 3월 5일 히로타 내각이 성립되었다.

히로타 내각에서 육군은 1호 군비를 승인받았다.

이는 1937년 - 42년까지 6년 동안 41개 사단과 142개 항공중대를 증강한다는 야심찬 것이었다.

런던 군축조약의 실효로 군축의 짐을 벗어던진 해군 또한 제3차 보충계획을 결정하여 향후 4년 동안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를 포함한 함정 66척을​ 건조하고 기지항공대 14개 항공대를 증강하기로 했다.

1935년까지만 해도 20억엔대 초반이었던 국가 예산은 군사비의 급증으로 1937년에는 30억엔을 넘어섰다.

이렇듯 2.26 사건은 일본군부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드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군비확장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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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주사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특수를 누리던 일본경제는 1920년대 들어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사회 일각과 군부 내에서 일본판 파시즘이라고 부를만한 급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경향이 일어나 시간이 갈수록 세력을 키웠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에 대한 분노, 백인과 그들의 물질문명에 대한 혐오, 강력한 군대의 재건과 주변 국가에 대한 팽창 욕구를 대변하는 이러한 일본판 파시즘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인물 중 한 명이 기타 잇키였다.

 

기타 잇키는 1919년에 '일본개조법안대강' 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일본의 급진세력,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에 주도권을 빼앗겨 분노하고 있던 청년장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기타 잇키는 의회를 폐지하고 천황이 친정을 해야 하며 모든 정치적 비판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간 산업을 국유화하고 개인 재산의 한도를 설정하며 토지 분배로 자영농을 육성하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으로 진출하여 인도, 중국, 필리핀을 비롯하여 백인들의 압제에 신음하는 7억 아시아 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타 잇키는 1936년의 2.26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육군 내에서 이러한 급진사상에 경도된 장교들은 천황의 친정을 원한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황도파(皇道派)라고 불렀으며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급진적인 변화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빗대어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를 따 쇼와 유신(昭和維新)이라고 불렀다.

육군에서 황도파가 세력을 키우자 여기에 반대하는 장교들이 통제파(統制派)를 결성했으며 이후 양 파벌은 1936년의 2.26사건으로 황도파가 몰락할 때까지 사사건건 대립했다.

 

통제파는 기존의 법을 통하여 군 내부를 통제한다는 의미로서 문민통제를 비롯한 현존 질서를 존중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통제파는 온건하고 이성적인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황도파라는 강력한 파벌이 등장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황도파 장교들이 급조한 파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나아가 황도파와 통제파 사이의 대립은 이념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니며 똑같은 군국주의자들끼리 진급이나 보직같은 육군 내부의 잇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파벌을 만들어 이전투구를 벌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일본군국주의의 상징인 도죠 히데키 수상도 통제파 출신이다.

 

1920년대 들어 침체되는 경제와 심해지는 빈부격차로 일본인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일본판 파시즘이 점차 세력을 키웠으며 군축조약이나 미국의 이민법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부의 문민통제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있던 군부는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예전의 권력을 되찾게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러시아로부터 뺏은 랴오뚱 반도에 관동주를 설치했다.

이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를 지키기 위하여 파견된 군대가 관동군이었다.

 

관동군은 1928년에 일본의 후원을 받으면서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쭤린을 폭사시키는 월권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장쭤린의 폭사는 실책이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투항해 버렸고 이로써 국민당 정부는 세력을 만주까지 뻗치게 되었다.

이대로 두면 만주에 일본의 영향력을 끼칠 기회는 사라질 것이었다.

또한 일본육군은 소련이 경제건설과 군대 강화 그리고 시베리아 개발 등을 목표로 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1928년부터 시작하자 위협을 느꼈다.

관동군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소련보다 먼저 만주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마침내 1931년에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와 작전참모 이시하라 간지 중좌 등이 중심이 되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시하라 간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류타이호의 만주 철도 조차장을 고의로 폭파하고는 이를 중국 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병력을 동원하여 진격을 개시했다.

일본정부는 물론 대본영도 관동군의 계획을 전혀 몰랐으며 관동군이 출동한 이후에야 보고를 받았다.

정부는 다음날인 19일에 각의를 열어 사건 불확대를 결정하고 조선주둔군의 만주 진격을 금지했으나 관동군이 21일에 지린으로 진격하자 조선주둔군의 만주 진격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관동군은 남만주를 점령한 후 잠시 숨을 고르고는 11월에 군벌인 마점산의 군대가 만주철도 관리 하의 철교를 폭파했다는 구실로 진격을 재개하여 11월 19일에 치치하얼을 점령함으로써 북만주 점령에 나섰다.

관동군은 이후 순조롭게 진격하여 32년 1월에는 금주를, 2월에는 하얼빈을 함락함으로써 만주 전역을 장악했으며 3월 1일에 청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교로 푸이를 수반으로 하는 만주국을 수립했다.

만주국은 완전한 괴뢰국으로 푸이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관동군 사령관이 통치했다.

 

만주사변을 일으킬 당시 관동군 병력은 1만명 남짓했다.

관동군은 이러한 소수 병력을 결정적인 시점과 장소에 집중하여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20만명이 넘는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을 물리치고 일본본토의 3배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의 만주를 점령했다.

물론 공산당과 대치 중이던 국민당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북만주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소련 또한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려 했으며 대공황으로 서구 열강이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만주사변의 결과 일본군은 중국군의 전투력을 깔보게 되었고 이것이 중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만주사변의 외교적 후폭풍은 엄청났다.

미국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즉시 일본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만주국이 성립되기도 전인 1932년 1월 7일에 후버 행정부의 헨리 스팀슨 국무장관이 미국은 향후 만주에 들어서는 어떠한 정권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중국은 만주사변 발발 직후 국제연맹에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근거하여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9월 30일에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이며 만주 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 하에 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 총회에서 리튼 보고서와 이에 근거하여 만주국의 승인을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에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은 일본의 전체주의화와 맥이 닿아 있었다.

대공황으로 인하여 살림이 더욱 팍팍해진 일본인들은 정당정치에 염증을 내고 전체주의에 경도되고 있었으며 군국주의자들은 여기에 용기를 얻어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던 75세의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1932년 5월 15일에 암살되면서 정당정치인이 수상이 되는 정당내각 시대가 8년 만에 끝났고 동시에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 시대도 막을 내렸다.

만주사변은 1937년의 중일전쟁,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거쳐 1945년의 패전까지 일본인들이 말하는 15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만주사변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에서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 내의 항일운동이 거세어졌고 상하이 조계 내의 일본인들과 주변의 중국인들 사이도 험악해졌다.

이러던 와중에 1932년 1월 18일부터 양국 민간인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나왔는데 열강들의 관심을 만주사변으로부터 돌리기 위하여 일본 측이 고의로 충돌을 야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소요 사태가 확대되면서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해군육전대와 상하이 주변에 주둔하던 중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으며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군이 고전했다.

 

그러자 일본은 병력을 증파하기 시작하여 총 3개 사단을 투입하고 해군도 증강했으나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결국 1932년 3월 1일에 일본군의 일부가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군 후방에 상륙하자 마침내 중국군이 상하이 주변에서 철수했고 3월 3일자로 전투는 종료되었다.

이후 중일양국은 열강의 주재로 상하이에서 교섭에 들어갔다.

교섭에서 일본군은 큰 대가를 치르고 점령한 상하이 주변 지역에서 철수하고 중국군은 앞으로 상하이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져 1932년 5월 5일에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기간 중인 1932년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행사에서 단상의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켰다.

이 의거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사망하고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중장이 왼쪽 눈을 실명했으며, 주중공사 시게미츠 마모루가 중상을 입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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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군부와 대외정책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되어 1945년 패전과 함께 사라진 일본제국에서 군대는 대다수 민주국가와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군부는 내각보다 권위가 높았으며 1920년대를 제외하고는 외무성을 제치고 일본의 대외정책을 사실상 결정했다.

원칙적으로 일본의 모든 남성들은 현역 2년, 예비역 10년, 합계 12년의 병역을 이수해야했다.

현역 입영률은 높지 않았으나 군대는 국민개병제를 매개로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75년 당시 일본군의 복장. http://en.wikipedia.org/wiki/Imperial_Japanese_Army)

 

일본의 하층 계급에게 군대는 신분 상승의 통로이기도 했다.

1927년에 일본 장교의 30% 가 중산층 이하 계층 출신이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비율이 높아졌다. 

병사들은 가난한 농촌 출신이 많았다.

 

일본군 내부는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상명하복의 신분사회였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국가에 봉사한 기간에 따라 획득하는 계급에 의하여 신분이 결정되는 군대는 하층민 출신에게는 신세계였다.  

군대는 막부를 타도하고 신정부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면서 일본제국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국민개병제를 통해 근대적인 사상과 문물, 사고 방식을 사회로 전파했다.

주로 생선과 밥을 먹던 일본인들이 고기와 빵을 먹기 시작한 것도 군대에 가서 이런 음식들을 먹어본 예비역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소개한 것이 계기였다.

일본제국 시기 군대는 가장 강력할 뿐 아니라 근대적이고 혁신적이며 선진적인 집단이었다.

 

당연히 군대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군대의 위상이 너무 높아서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나라처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만들어 군대의 비리나 모순 또는 어리석은 짓을 풍자하는 만화를 그리거나 개그의 소재로 삼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1889년에 제정된 일본제국 헌법에서 군대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일본군의 규모와 전력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정부가 아닌 천황에게 주어졌다.

이는 일본제국의 설계자들이 강력한 군대를 근대화된 정부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로 서구 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군대가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국가의 특성상 정부에 의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군대가 정부를 제압하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일본군은 정부를 사실상 쥐락펴락했다.

 

20세기 초까지 일본군은 자신이 휘두르던 막대한 권한에 걸맞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일본군은 1895년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만을 식민지로 획득했고, 10년 후에는 서구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와 싸워 이김으로써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열강들의 말석에 자리를 얻었다.

1910년에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군부는 이 시기를 전후해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서구 세력을 몰아내겠다는 야심을 품기 시작했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이 야심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동아시아의 독일 영토를 차지할 속셈으로 영국 및 프랑스 편으로 참전했다.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산뚱반도의 칭타오, 괌을 제외한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및 마셜 제도를 장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1915년 1월에 일본은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었다.

중국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이러한 요구에 굴복했으나 중국인들은 5.4운동으로 대표되는 격렬한 배일운동을 벌였다.

 

또한 21개조는 광범위한 지역과 분야에 걸쳐 일본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미국 외교의 원칙으로 유럽 열강은 물론 일본도 동의하고 있던 문호개방(Open Door)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문호개방원칙은 중국에 진출하려는 국가들은 중국의 통일과 주권을 존중해야 하며 그 바탕 위에서는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다.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원칙이 위협받자 미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도 반발했다.

 

중국인들과 서구 열강의 반발에 직면한 일본정부는 워싱턴 조약에서 21개조 요구를 거두어 들였다.

21개조 요구는 중국에서 서구 열강들을 배제하려는 일본의 야심을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었으며 미국과 유럽 열강들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적도 이북의 태평양에 있던 독일영토들을 신탁통치하게 되었다.

미국의 윌슨 행정부는 국제연맹의 이러한 결정에 반발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일본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전에 이 섬들을 점령했으며 자신의 전리품을 지킬 각오였다.

전쟁을 통해서만 일본을 저지할 수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태평양에서 실리를 거둔 일본군은 내전에 휩싸인 러시아로 눈을 돌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함께 시베리아에 출병했다.

이때 일본정부가 군부에 통렬한 일격을 가했다.

1922년에 정부는 군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거부해 버렸고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철병해야 했다.

 

5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정부의 예산안 거부는 일본제국을 통틀어 유일했던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가능했던 시절을 상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렸으며 종전 이후 국제연맹이라는 집단안전보장체제가 마련되자 일본인들은 서구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들이 민주주의와 군부에 대한 민간 부문의 우위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양당제에 가까운 정치체제가 나타나고 군사비는 삭감되어 민간 부문으로 돌려졌으며 일본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이 시기에 일본은 유화적으로 행동했다.

일본은 1921년 - 22년에 걸친 워싱턴 조약에서 5-5-3 이라는 주력함 비율을 받아들였으며 산뚱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었다.

1922년 2월 6일에는 9개국 조약에 서명했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 및 다른 7개국과 함께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고 문호개방원칙을 지지하며 특권적 지위를 요구하지 않고 중국이 부당한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국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1928년에는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서명했다.

 

돌이켜보면 태평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부에 대해 문민통제를 유지하면서 양보와 타협의 정신으로 일본을 이끌던 당시의 자유주의적인 정치 세력을 고무하고 지지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구 열강에게는 그만한 지혜와 관대함, 그리고 요령이 없었으며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924년에 미국은 3년 전의 법을 더 강화한 이민제한법을 통과시켰다.

1921년의 이민제한법은 1890년 이후에 이민이 급증한 동유럽, 남유럽 및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을 제한하기 위하여 매년 이민을 1890년 당시 각국 출신의 3% 이내로 제한한 것이었다.

1924년의 이민법은 이 제한을 2%로 강화하면서 아시아에 대해서는 아예 이민을 금지했는데 여기에 일본이 포함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최소한의 숫자만이라도 허용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

 

이민법에 일본을 예외로 두어 매년 200 명 정도만 허용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1년에 200명이라는 한 줌도 안 되는 인원으로는 법의 실효성에 아무런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일본정부는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이 전면 금지되면서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남유럽이나 동유럽 국가들보다도 낮은 취급을 받은 꼴이 되었다.

비록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자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격이 다른 열강의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본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일본인들은 분개했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에 협조하는 대외 정책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이로써 미국은 전해인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미국 여론이 보여준 특기할만한 동정과 재정 지원으로 우호를 돈독하게 만들었던 효과를 간단히 날려먹었다.

 

워싱턴 군축조약도 일본군부를 자극하고 자유주의적인 정부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군부도 서구 열강, 특히 경제력이 월등한 미국과의 건함경쟁보다 군축조약이 일본의 안보에 이익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체결한 군축조약에 의하여 건조 중이던 함정이 폐기되고 해군의 전력이 제한되는 상황은 헌법이 보장해 준 군부의 특권, 즉 군대의 규모와 전력에 대하여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무너뜨렸다.

이제 정부는 필요하면 외국과의 조약을 통하여 군대의 규모와 전력을 조절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한 셈이었고 군부는 칼자루를 쥔 정부에 끌려다니게 되면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좋은 시절은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었다. 

군부내 강경파인 군국주의자들, 특히 워싱턴 군축조약과는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육군까지 군축조약에 대하여 그토록 반발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군축조약을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열등한 상태로 묶어두려는 음모에 정부가 가담한 것이라고 선동하면서 일본인들의 국가적 자존심에 호소했다.

군부의 이런 시도는 다른 요인들과 맞물려 일본인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면서 정부를 약화시켰고 1931년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정부에 의한 문민통제가 끝나게 된다.

길게 보았을 때 군비 감소를 위하여 미국과 영국이 추진한 군축조약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게 절호의 선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자유주의적인 정부를 약화시키고 군부가 다시 권력을 차지하는데 일조하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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