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일전쟁 발발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이 성립되었지만 관동군의 군사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병력이 크게 증강된 관동군은 1933년 초까지 만주국 내의 항일 게릴라들을 소탕했고 이후로는 남쪽 리허 성으로 진격하여 1933년 3월 말에는 만리장성에 도달했다.
관동군은 1933년 5월 7일에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베이징과 텐진 북방 50km 지점까지 진격했다.
위협을 느낀 중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5월 31일 텐진의 외항인 탕구에서 협정이 성립되었다.
탕구협정에서 만리장성과 일본군이 진격한 선 사이를 비무장 지대로 설정했으나 일본은 1935년 11월 비무장 지대에 기동방공자치정부라는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관동군은 만주국을 만들자 이번에는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항일 게릴라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논리로 화북 5성(허베이, 산뚱, 산시, 차하얼, 쑤이위안)을 중국에서 분리하여 괴뢰정부를 세우려는 화북분리공작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당연히 중국이 반발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이러던 중 1937년 7월 7일 오후 10시 30분 경에 일본 지나주둔군 제1연대 제2대대 제8중대가 베이징 외곽의 루거오차오 부근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는 중일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나 제8중대장이었던 시미즈 세츠로 대위의 주장에 의하면 훈련 도중 갑자기 중국군이 사격을 가하여 급히 병사를 집결시켜 점검해 보니 1명이 행방불명이었다고 한다.
시미즈 대위는 즉시 제2대대장 이치기 기요나오 소좌에게 보고했고 이치기 소좌는 대대 주력을 출동시켜 부근의 중국군과 대치했다.
사실 그 병사는 설사가 난 것으로서 20분 뒤 돌아왔으나 이미 일이 커졌으므로 시미즈 대위는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8일 오전 4시 20분에 다시 중국군이 3발의 총격을 가하자 이치기 소좌는 제1연대장 무다구치 렌야 대좌에게 보고했고 무다구치 대좌가 오전 5시에 공격 명령을 내림으로써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측은 8일 오전 5시에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할 때까지 중국군의 발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며칠 동안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루거오차오 사건이라 부른다.
당시 지나주둔군의 숫자는 약 5,800 명으로 대치 중이던 중국 제29군의 10만명에 비하여 크게 열세했으며 중국군 또한 일본군과 충돌을 지속하여 일본정부에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충돌이 일어난 지 4일 만인 7월 11일에 중국군이 크게 양보하는 내용으로 현지의 양군 사이에 협정이 맺어지면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이렇게 해결되는 듯하던 루거오차오 사건을 중일전쟁으로 끌고간 것은 일본의 고노에 내각이었다.
고노에 내각은 11일에 각의를 열어 중국군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도전행위로 규정하고 관동군의 혼성 제1 및 제10여단, 조선에 주둔 중이던 제20사단, 그리고 일본본토로부터 제5, 제6, 그리고 제10사단을 화북에 파견한다는 스기야마 육상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일본정부는 이 사태를 북지사변으로 명명했다.
1936년 말의 서안사변으로 공산당과의 내분을 봉합한 국민당 정부도 일본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강경하게 나왔다.
장제스는 장시성 루산에서 중국 내의 유력한 정치 세력들이 참가한 회의를 가진 후 1937년 7월 19일에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천명하는 루산담화를 발표했다.
이로써 병사 1명의 설사로 시작된 루거오차오 사건은 8년 간의 처절한 대전쟁인 중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아닌 루거오차오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의 초기 흐름은 일본에게 유리했다.
제20사단, 제1 및 제10여단과 임시항공병단으로 강화된 지나주둔군은 1937년 7월 30일에 베이징과 텐진을 점령했다.
남쪽 상하이에서도 1937년 8월 13일부터 전투가 벌어졌다.
75만명에 달하는 중국군과 30만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상하이 부근에서 3개월 간 처절하게 싸웠다.
결국 11월 5일에 8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상하이 남쪽의 항조우 만에 상륙하여 중국군의 배후를 찌르자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철수했고 상하이는 11월 12일에 함락되었다.
일본은 1937년 11월 21일에 러일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본영을 설치했으며 1945년 패전까지 유지했다.
상하이를 점령한 후 일본정부는 소련을 의식하여 전선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으나 현지 부대는 이를 무시하고 300km 떨어진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상하이 전투에서 정예병력 30만명을 잃은 국민당군은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국민당 정부는 한커우로 이동했고 일본군은 12월 13일에 난징을 점령했다.
이후 일본군은 난징에서 7주간 무려 30만명에 달하는 포로와 민간인을 강간 및 살해하는 난징학살을 저질렀다.
중국군은 1938년 2월에 쉬저우 부근에서 벌어진 타이얼좡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사상자 16,000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히면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1938년 10월 21일에 광둥을 점령했으며 26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한커우를 점령했다.
국민당 정부는 다시 양쯔강 상류의 충칭으로 수도를 옮겼다.
한커우 점령을 전후하여 일본군도 힘이 다했다.
드넓은 중국에서 끝없는 소모전에 휘말리자 대본영은 소련을 의식하여 1938년 11월 18일에 전선을 확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40년 현재 일본의 점령 지역.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Sino-Japanese_War)
중일전쟁의 와중에 일본군은 소련군과 대규모로 2번 충돌했다.
1938년 8월 초에 조선에 주둔 중이던 제19사단이 만주국, 조선, 그리고 소련의 국경선에 접한 장고봉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여 사단의 22% 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했다.
1년 후에는 관동군이 훨씬 큰 규모로 소련군과 격돌했다.
1939년 8월 말에 만주국과 몽고의 변경에 있는 노몬한에서 제23사단을 중심으로 한 관동군은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이끄는 소련군과 대결하여 17,000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했다.
노몬한 사건을 통하여 일본육군은 자신들의 실력이 소련군보다 떨어진다는 사실을 절감했으며 이후 육군 내에서도 남진론이 세력을 넓히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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