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파나이 격침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2년 동안 미국은 외교적 수단을 통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사태는 외교로 해결될 단계를 넘었으나 미국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론은 중국을 지지했으나 부당한 침략을 당하여 고통받는 중국을 동정하는 것과 중국을 위하여 총을 잡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국민들이 중국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전쟁 상황이 존재했으므로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립법에 의거해 일본에 고철이나 항공유를 포함한 전쟁 물자의 수출을 금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립법은 교전 중인 국가 모두에게 적용해야 하므로 중국도 대상이 된다.

이럴 경우 원료만 수입하고 무기와 탄약은 자체 생산이 가능한 일본보다 무기와 탄약을 대부분 수입해야 하고 상선대도 빈약한 중국이 불리하다.

 

게다가 조셉 그루 주일 대사는 만약 일본이 교역을 통하여 원유, 고철, 고무, 주석 등의 전략 물자를 얻지 못하게 되면 이런 물자가 풍부한 영령 말레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할 것이라고 국무성에 여러 차례 경고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남진을 막을 힘이 없었다.

1935년에 118,000 명이었던 미육군은 2년 동안 30% 이상 팽창했음에도 1937년 현재 15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효과도 없는 외교적 노력에 매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1937년에 다른 18개국과 함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모여 중일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회의를 열었으나 일본은 불참했다.

나머지 19개국은 일본도 조인했던 9개국 조약을 재확인하고 일본이 9개국 조약의 정신에 따라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처리해 주길 요청했다.

일본은 지나사변은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대답했다.

 

일본 외무성은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존중하도록 군대에 요청했으나 일선 부대에서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미국인이 세운 교회나 학교 등은 성조기를 달고 있었고 일본군이 가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세운 교회나 학교는 200회 이상 일본기의 공격을 받아 많은 미국인 선교사와 가족들이 희생되었다.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공습시 가장 위험한 장소가 미국인이 세운 교회라고 생각했다.

미국 정부와의 충돌을 두려워하는 외무성과 달리 현지의 일본군은 미국인을 위협하여 중국에서 몰아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일본군의 의도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파나이 격침이었다.

 

파나이는 미해군이 발주하여 중국의 강남조선소에서 건조한 흘수가 낮은 하천용 포함이었다.

1928년 10월 10일에 취역한 파나이는 미국 아시아 함대의 양쯔강 포함대(Yangtze River Gunboat Flotilla) 소속으로 4척의 동료 포함들과 함께 양쯔 강을 운항하는 미국 선박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PR-5 파나이. 길이 : 58m, 폭 : 8.8m, 배수량 : 482톤, 흘수 : 1.6m, 속력 : 15노트, 승무원 : 59명, 무장 : 3인치 대공포 2문, 7.62mm 기관총 8정, https://en.wikipedia.org/wiki/USS_Panay_(PR-5)

 

1937년 11일 21일에 일본군이 수도인 난징에 접근하자 국민당 정부는 미국 대사에게 철수를 권고했다.

다음날인 22일에 미국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 및 가족 대부분이 미군함정 루손을 타고 난징을 떠났으며, 대사관 직원 3명이 남아서 마지막 업무를 처리하고 일본군의 난징 함락이 임박한 12월 11일 저녁에 파나이를 타고 난징을 떠났다.

당시 파나이에는 승무원 59명, 대사관 직원 3명, 그리고 민간인 10명이 타고 있었다.

파나이는 스탠더드 석유회사 소속의 소형 유조선 3척(메이안, 메이핑, 메이시아)와 함께 떠났는데 여기에는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중국인 종업원과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

파나이 선단의 바로 뒤에는 영국 포함 레이디버드와 비가 호위하는 소규모 선단이 뒤따랐다.

이들의 출항은 주일대사 조셉 그루에 의하여 며칠 전에 일본정부에 통지된 상태였다.

 

양쯔 강의 물살을 거슬러 느리게 항해하던 선단은 다음날인 12일 새벽에 안개 속에서 하시모토 포병대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포병의 포격을 받았다.

파나이 선단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뒤따르던 영국선단에서는 포함 레이디버드와 비가 피해를 입었다.

나중에 일본 정부는 이 일에 대하여 영국정부에 사과했다.

 

하시모토 대좌는 안개 속에서 표적을 잃어버리자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일본해군은 육군의 작전을 지원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중지나방면군 사령부에 파견나와 있던 아오키 다케시 해군소좌는 12일 오전에 육군 측으로부터

 

"난징 상류 19km 지점에 중국군 패잔병을 가득 실은 상선 10척이 상류 쪽으로 도주 중이니 해군항공부대로 공격해달라."

 

는 전화를 받았고 정오 경에는 다시

 

"수많은 중국군을 실은 선단이 난징 상류 35km 지점에서 도주 중"

 

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오키 소좌의 연락을 받은 제2연합항공대 제12항공대장 미키 대좌가 항공모함 카가로부터 95식 함상 전투기 10대, 94식 함상폭격기 6대, 96식 함상폭격기 6대, 96식 함상공격기 3대로 이루어진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12일 오전 11시, 파나이 선단은 난징에서 상류 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정박했다.

날씨는 맑았으며 미풍이 불고 있었다.

파나이 선단에서는 모두들 점심식사를 했으며 대공포에는 인원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오후 1시 30분에 일본기들이 파나이 선단 상공에 나타났다.

 

먼저 폭격을 가한 것은 96식 함상공격기 3대였다.

함상공격기들은 2,500m 높이로 선단 상공을 가로지르면서 60kg 짜리 폭탄 18발을 떨어뜨려 2발을 파나이에 명중시켰다.

1발은 전방 3인치 대공포에 명중했고 다른 1발은 전방 선실에 명중했다.

 

(96식 함상공격기. https://en.wikipedia.org/wiki/Yokosuka_B4Y)

 

이어서 함상폭격기들도 달려들어 급강하 폭격을 실시했고 전투기들은 저공으로 내려와 기총소사를 가했다.

 

(95식 함상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최초의 폭격에서 2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은 파나이는 치명적 타격을 입고 곧 침몰했다.

승조원 2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고 승조원 43명과 민간인 5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승조원 중 11명은 중상이었다.

함장 휴이 소령도 부상을 입었다.

유조선 3척도 공격을 받아 메이안이 침몰하고 나머지 2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메이안의 선장과 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파나이에는 촬영기사 2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 과정과 파나이가 침몰하는 광경을 필름으로 남겼다.

 

(침몰하는 파나이의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USS_Panay_incident)

 

미국 아시아 함대는 12일 오후에 파나이와의 통신이 끊어지자 상하이에 정박 중이던 일본 제3함대의 기함 이즈모에 연락장교를 파견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본해군은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다음날인 13일 오전에 제3함대사령관 하세가와 키요시 해군중장은 아시아 함대의 기함인 순양함 오거스타 호에 참모장을 파견하여 아시아함대사령관 야넬 해군대장에게 사과하는 한편 뉴욕타임즈 지국장을 이즈모로 초청하여 파나이를 격침했음을 시인하고 사죄와 배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세가와 중장은 오후에는 직접 오거스타 호를 방문하여 야넬 대장에게 사과했다.

 

일본정부도 발빠르게 대응했다.

히로타 고키 외상은 13일에 미국 대사관에 찾아와 조셉 그루 주일대사에게 사과했다.

워싱턴에서는 사이토 히로시 주미대사가 라디오 중계료를 지불하고 3분 52초짜리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사이토 주미대사는 다음날 코델 헐 국무장관을 만나 다시 사과했다.

13일 오후 5시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차관이 성명을 발표하여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미국에 대해 사과하고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14일에 미국무부는 그루 주일대사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으며 상하이에서는 미해군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오후 9시에 일본해군은 공식발표를 통해 파나이 격침은 오폭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사후 처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15일에 일본정부는 제2연합항공대 사령관 미나미 소장을 경질하여 소환했으며, 17일에는 공격을 실시했던 4명의 공격대장을 질책했다.

다만 이것은 미국에 보이기 위한 것으로 실제로 미나미 소장은 곧 제2항공함대 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공격대장들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17일에 헐 국무장관은 사이토 대사를 불러 파나이 격침이 고의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나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당시 미해군이 함재기와 카가 사이의 통신을 방수했지만 극비 사항이었으므로 헐 장관이 보고를 받고서도 사이토 대사에게 공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23일 오후 5시에 야마모토 해군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이 미대사관을 방문하여 2시간 30분 동안 설명회를 가졌다.

여기서 일본 측은 파나이가 중국군을 수송하는 중이라고 오인하여 폭격했다고 다시 한번 변명했다.

 

24일 히로타 외상은 그루 주일대사에게 일본정부의 공식답변문서를 전달했다.

여기서 일본정부는 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충분한 배상을 실시하고 앞으로 중국에서 일본군이 미국인을 공격하지 않도록 단속할 것이며 사건 관계자들을 추가로 처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파나이 격침이 고의는 아니고 오폭이었다는 변명은 빼놓지 않았다.

반면 같은날 오후 8시(현지시각) 워싱턴에서 발표된 미해군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파나이 격침이 고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26일 미국정부의 공식답변이 그루 주일대사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전달되었다.

답변에서 미국정부는 파나이 격침이 실수였다는 일본 측의 해명을 인정하지 않으며 고의였다는 미해군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일본정부의 공식답변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파나이 격침으로 발생한 미일간의 외교적 위기는 2주 만에 일단락되었다.

 

일본정부가 필사적으로 해명하는 동안 일본인들도 범국가적으로 미국에게 사죄의 제스처를 보였다.

주일 미대사관과 일본 각지의 미국 영사관에는 파나이 격침에 사죄하는 일본인들의 편지가 쇄도했으며 8세 - 13세 사이의 여자초등학생 37명이 워싱턴의 미해군성으로 영어로 사죄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사죄편지와 함께 주일 미대사관과 영사관, 그리고 신문사에는 파나이 격침의 사망자와 부상자에게 보내는 성금이 답지했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들은 만나는 일본인마다 파나이 격침에 대해 사과하는 바람에 당황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일본국민의 움직임에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관여한 흔적은 없었으며 현지의 미국인들도 일본인의 태도가 결코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이지 않으며 진심으로 슬퍼하고 사죄하고 있다고 느꼈다.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해명과 함께 일본국민이 보여준 진심어린 사죄의 태도는 미국의 여론이 악화되는 걸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당장 일본을 응징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미국정부는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적당한 선에서 물러설 수 있었다.

당시 미군 장교들 중에서는 일본을 응징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 자국 정부의 조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일기장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도였다.

파나이 격침에 대해 일본이 지불한 배상금은 220만 달러 정도였는데 징벌적 배상이 아닌 실제 발생한 손해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산출한 액수였다고 한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당시 일본기들의 통신 내용을 근거로 파나이 격침을 오폭이 아닌 고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일본정부나 중지나사령부 또는 제3함대사령부가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며 그 이하의 단위 부대에서 극단주의적인 장교들이 중국에서 미국인들을 몰아내려 저지른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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