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만주사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특수를 누리던 일본경제는 1920년대 들어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사회 일각과 군부 내에서 일본판 파시즘이라고 부를만한 급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경향이 일어나 시간이 갈수록 세력을 키웠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에 대한 분노, 백인과 그들의 물질문명에 대한 혐오, 강력한 군대의 재건과 주변 국가에 대한 팽창 욕구를 대변하는 이러한 일본판 파시즘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인물 중 한 명이 기타 잇키였다.
기타 잇키는 1919년에 '일본개조법안대강' 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일본의 급진세력,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에 주도권을 빼앗겨 분노하고 있던 청년장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기타 잇키는 의회를 폐지하고 천황이 친정을 해야 하며 모든 정치적 비판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간 산업을 국유화하고 개인 재산의 한도를 설정하며 토지 분배로 자영농을 육성하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으로 진출하여 인도, 중국, 필리핀을 비롯하여 백인들의 압제에 신음하는 7억 아시아 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타 잇키는 1936년의 2.26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육군 내에서 이러한 급진사상에 경도된 장교들은 천황의 친정을 원한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황도파(皇道派)라고 불렀으며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급진적인 변화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빗대어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를 따 쇼와 유신(昭和維新)이라고 불렀다.
육군에서 황도파가 세력을 키우자 여기에 반대하는 장교들이 통제파(統制派)를 결성했으며 이후 양 파벌은 1936년의 2.26사건으로 황도파가 몰락할 때까지 사사건건 대립했다.
통제파는 기존의 법을 통하여 군 내부를 통제한다는 의미로서 문민통제를 비롯한 현존 질서를 존중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통제파는 온건하고 이성적인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황도파라는 강력한 파벌이 등장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황도파 장교들이 급조한 파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나아가 황도파와 통제파 사이의 대립은 이념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니며 똑같은 군국주의자들끼리 진급이나 보직같은 육군 내부의 잇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파벌을 만들어 이전투구를 벌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일본군국주의의 상징인 도죠 히데키 수상도 통제파 출신이다.
1920년대 들어 침체되는 경제와 심해지는 빈부격차로 일본인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일본판 파시즘이 점차 세력을 키웠으며 군축조약이나 미국의 이민법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부의 문민통제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있던 군부는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예전의 권력을 되찾게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러시아로부터 뺏은 랴오뚱 반도에 관동주를 설치했다.
이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를 지키기 위하여 파견된 군대가 관동군이었다.
관동군은 1928년에 일본의 후원을 받으면서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쭤린을 폭사시키는 월권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장쭤린의 폭사는 실책이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투항해 버렸고 이로써 국민당 정부는 세력을 만주까지 뻗치게 되었다.
이대로 두면 만주에 일본의 영향력을 끼칠 기회는 사라질 것이었다.
또한 일본육군은 소련이 경제건설과 군대 강화 그리고 시베리아 개발 등을 목표로 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1928년부터 시작하자 위협을 느꼈다.
관동군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소련보다 먼저 만주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마침내 1931년에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와 작전참모 이시하라 간지 중좌 등이 중심이 되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시하라 간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류타이호의 만주 철도 조차장을 고의로 폭파하고는 이를 중국 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병력을 동원하여 진격을 개시했다.
일본정부는 물론 대본영도 관동군의 계획을 전혀 몰랐으며 관동군이 출동한 이후에야 보고를 받았다.
정부는 다음날인 19일에 각의를 열어 사건 불확대를 결정하고 조선주둔군의 만주 진격을 금지했으나 관동군이 21일에 지린으로 진격하자 조선주둔군의 만주 진격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관동군은 남만주를 점령한 후 잠시 숨을 고르고는 11월에 군벌인 마점산의 군대가 만주철도 관리 하의 철교를 폭파했다는 구실로 진격을 재개하여 11월 19일에 치치하얼을 점령함으로써 북만주 점령에 나섰다.
관동군은 이후 순조롭게 진격하여 32년 1월에는 금주를, 2월에는 하얼빈을 함락함으로써 만주 전역을 장악했으며 3월 1일에 청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교로 푸이를 수반으로 하는 만주국을 수립했다.
만주국은 완전한 괴뢰국으로 푸이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관동군 사령관이 통치했다.
만주사변을 일으킬 당시 관동군 병력은 1만명 남짓했다.
관동군은 이러한 소수 병력을 결정적인 시점과 장소에 집중하여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20만명이 넘는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을 물리치고 일본본토의 3배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의 만주를 점령했다.
물론 공산당과 대치 중이던 국민당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북만주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소련 또한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려 했으며 대공황으로 서구 열강이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만주사변의 결과 일본군은 중국군의 전투력을 깔보게 되었고 이것이 중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만주사변의 외교적 후폭풍은 엄청났다.
미국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즉시 일본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만주국이 성립되기도 전인 1932년 1월 7일에 후버 행정부의 헨리 스팀슨 국무장관이 미국은 향후 만주에 들어서는 어떠한 정권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중국은 만주사변 발발 직후 국제연맹에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근거하여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9월 30일에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이며 만주 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 하에 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 총회에서 리튼 보고서와 이에 근거하여 만주국의 승인을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에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은 일본의 전체주의화와 맥이 닿아 있었다.
대공황으로 인하여 살림이 더욱 팍팍해진 일본인들은 정당정치에 염증을 내고 전체주의에 경도되고 있었으며 군국주의자들은 여기에 용기를 얻어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던 75세의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1932년 5월 15일에 암살되면서 정당정치인이 수상이 되는 정당내각 시대가 8년 만에 끝났고 동시에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 시대도 막을 내렸다.
만주사변은 1937년의 중일전쟁,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거쳐 1945년의 패전까지 일본인들이 말하는 15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만주사변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에서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 내의 항일운동이 거세어졌고 상하이 조계 내의 일본인들과 주변의 중국인들 사이도 험악해졌다.
이러던 와중에 1932년 1월 18일부터 양국 민간인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나왔는데 열강들의 관심을 만주사변으로부터 돌리기 위하여 일본 측이 고의로 충돌을 야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소요 사태가 확대되면서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해군육전대와 상하이 주변에 주둔하던 중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으며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군이 고전했다.
그러자 일본은 병력을 증파하기 시작하여 총 3개 사단을 투입하고 해군도 증강했으나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결국 1932년 3월 1일에 일본군의 일부가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군 후방에 상륙하자 마침내 중국군이 상하이 주변에서 철수했고 3월 3일자로 전투는 종료되었다.
이후 중일양국은 열강의 주재로 상하이에서 교섭에 들어갔다.
교섭에서 일본군은 큰 대가를 치르고 점령한 상하이 주변 지역에서 철수하고 중국군은 앞으로 상하이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져 1932년 5월 5일에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기간 중인 1932년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행사에서 단상의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켰다.
이 의거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사망하고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중장이 왼쪽 눈을 실명했으며, 주중공사 시게미츠 마모루가 중상을 입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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