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툴라기 상륙

 

툴라기와 가부투-타남보고 상륙부대를 실은 요크부대는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 4척(네빌, 자일린, 헤이우드, 프레지던트 잭슨)과 고속수송함 4척(콜호운, 리틀, 맥킨, 그레고리)으로 이루어져 조지 애쉬 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1942년 8월 7일 새벽 3시에 과달카날 서쪽 해상에서 엑스레이 부대와 헤어진 요크부대는 사보 섬 북방 해역을 지나 오전 6시 30분에 집결해역에 도착하여 상륙준비를 서둘렀다.

그 동안 제61기동부대에서 출격한 와일드캣 전투기와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들이 툴라기 섬과 가부투-타남보고 섬을 폭격하고 항구에 주기하고 있던 일본수상기 18대를 모두 파괴했다.

 

(공습을 받고 있는 툴라기 섬. 배후에 보이는 섬은 플로리다 섬이며 그 사이의 바다가 툴라기 항의 정박지이다.1942년 8월 7일 오전에 툴라기 섬을 공습하던 미군기가 찍은 사진이다.)

 

요크부대에 대한 화력지원은 대공경순양함 산 후앙과 구축함 뷰캐넌, 몬센으로 이루어진 노만 스코트 소장의 M 화력지원그룹이 담당했다.

 

(X-ray 부대와 Yoke 부대의 접근 상황도)

 

툴라기 상륙부대의 좌측을 엄호하기 위하여 툴라기 상륙 20분 전인 오전 7시 40분에 애드워드 크레인 대위가  지휘하는 B/1/2 중대가 플로리다 섬의 할레타 부근 해안에 상륙했다.

대공경순양함 산후앙과 구축함 뷰캐넌이 7시 27분부터 32분까지 각각 100 발의 5인치 포를 상륙해안에 쏟아부었고, B 중대원 252명이 탑승한 8척의 상륙주정이 이 해역의 수로를 잘 아는 호주공군 스펜서 소위의 안내를 받아 7시 40분 정각에 할레타 해안에 상륙했다.

7월 25일자 정찰보고에는 이 지역에 일본군이 있다고 되어 있었으나, 막상 상륙해 보니 일본군은 없었다.

 

(요크부대의 상륙작전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툴라기 섬 서해안의 화살표 부분이 목수부두, 섬 중앙의 삼각형이 280피트고지, 서해안의 화살표 머리 부분이 208피트고지이다.)

 

툴라기 섬에 대한 상륙은 예정대로 8월 7일 오전 8시에 진행되었다.

고속수송함에서 상륙주정으로 옮겨탄 제1기습대대의 B 중대 및 D 중대는 툴라기 해안의 산호초에 걸려 해안에서 90m 내지 30m 떨어진 곳에서 상륙주정에서 내려야만 했다.

해병대원들은 허리에서 겨드랑이까지 차는 바닷물을 헤치고 걸어서 목표해안인 블루비치에 상륙했다.

 

툴라기 섬의 방어를 맡은 것은 일본해군 제84경비대의 250명이었다.

섬의 남쪽 1/3 지역에 집중배치되어 있던 일본군 수비대는 대공경순양함 산후앙과 구축함 뷰캐넌이 쏟아붓는 포격에 눌려서 기습대대의 상륙을 방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기습대대의 상륙 10분 후인 8시 10분에 툴라기의 일본군 통신소는 산후앙의 일제사격을 받아 날아가 버렸다.

 

B 중대와 D 중대에 이어서 A 중대와 C 중대도 상륙했다.

 

B 중대와 D 중대는 즉시 전진하여 섬을 가로지른 다음 우회전하여 일본군의 주방어선을 향했다.

로이드 닉커슨 소령의 B중대는 섬을 가로질러 중국인들이 살았던 툴라기 섬 동해안의 아사피 마을을 점령한 후 우회전하여 동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저스티스 챔버스 소령의 D 중대가 B 중대의 우익에서 함께 남하했다.

B 중대 및 D 중대는 오전 11시 20분에 동해안의 목수부두와 섬 중앙의 281피트 고지를 연결한 일본군의 주저항선에 부딪혔다.

D 중대장 챔버스 소령은 이곳에서 일본군의 박격포에 의하여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고 윌리엄 스펄링 대위가 중대장직을 이어받았다.

 

그 동안 케네스 베일리 소령의 C 중대는 208피트 고지와 서해안 사이를 지나 남하하려다가 208피트 고지의 일본군들로부터 일제사격을 받았다.

C 중대는 계획을 바꾸어 208피트 고지를 공격하여 격전 끝에 점령했다.

C 중대의 좌익에서는 루이스 월트 대위의 A 중대가 역시 281피트 고지 기슭에서 일본군의 저항에 직면하여 진격을 중단했다.

 

제1기습대대장 에드슨 대령은 281고지에 대한 포격을 요청했고 대공경순양함 산후앙이 281고지에 대해 7분간 280발의 5인치 포탄을 퍼부었다.

이어서 D 중대와 A 중대가 공격을 시작했으나 일본군의 저항이 심하여 전진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281고지 점령에 실패했다.

 

한편 블루비치에는 오전 9시 16분부터  1,085 명의 병력을 가진 로제크란 중령의 제2/5대대가 상륙했다.

제2/5대대는 가벼운 저항만을 받으며 툴라기 섬의 서쪽을 소탕한 다음 오후가 되자 제1기습대대의 후방에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오후 늦게 로제크란 중령으로부터 제2/5대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제1기습대대장 에드슨 대령은 다음날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툴라기 섬을 점령하기로 했다.  

 

해가 떨어지자 일본군들이 해병대의 방어선에 소규모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자정 때까지 4번의 소규모 공격을 통하여 해병대 방어선의 빈틈을 찾던 일본군은 서해안의 C 중대와 그 좌익의 A 중대 사이의 전투지경선에 본격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돌격은 처음에 성공하여 일시 C 중대와 A 중대 사이의 방어선이 돌파당하면서 C 중대가 해안 쪽에 고립되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전열을 가다듬은 A 중대가 반격을 개시하자 일본군은 26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철수했다.

이후로도 일본군은 날이 밝을 때까지 5차례의 소규모 공격을 실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군은 개인적으로 또는 소규모 부대로 밤새 방어선 침투를 기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성공한 일본군도 날이 밝으면서 사살되었다.

 

8월 8일 날이 밝자 에드슨 대령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공격의 초점은 281고지였다.

281고지 남쪽으로는 깊은 계곡이 있었는데 양편이 가팔라서 기어오르기가 까다로웠다.

일본군은 방어에 유리한 이 계곡 양편에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를 평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281고지를 점령하여 계곡에 진입하지 않고 일본군을 공격해야만 했다.

 

281고지 공격은 기습대대의 B 중대와 D 중대, 그리고 E/2/5 중대와 F/2/5 중대가 맡았다.

281고지의 일본군은 진지에 틀어박혀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4개 중대의 공격을 버텨내지는 못했다.

281고지를 점령한 4개 중대는 곧 우회전하여 일본군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계곡을 지키던 일본군 방어선의 우익은 후방에서 강력한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이제 남은 것은 계곡을 지키던 일본 방어선의 좌익뿐이었다.

에드슨 대령은 제1기습대대의 60mm 박격포와 제2/5대대의 81mm 박격포로 일본군 방어선을 두드린 다음 오후 3시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기습대대의 A 중대 및 C 중대, 그리고 F/2/5중대가 전진하여 일본군 방어선을 휩쓸었다.

 

이리하여 저녁 때까지 툴라기 섬에서의 조직적 저항은 끝이 났고 에드슨 대령은 툴라기 섬을 장악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일부 패잔병이 살아남아서 향후 며칠간 해병대원들은 섬을 샅샅이 뒤지면서 일본군 패잔병을 사살했다.

툴라기 섬을 지키던 일본제84경비대의 250명은 거의 전멸했다.

200 명 이상이 전사했고 3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40명 가량이 플로리다 섬으로 헤엄쳐 도망갔다.

미해병대의 전사자는 36명, 부상자는 54명이었다.

해병대는 툴라기 섬에서 3인치 야포 1문, 13mm 대공기관총 2정, 기관총 10정, 탄약, 트럭들, 오토바이들, 무전기, 그리고 휘발유를 노획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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