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본군의 공습
제1해병연대는 1942년 8월 7일 오전 11시 15분에 오스텐 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제5연대의 방어선을 초월하여 내륙으로 진격했다.
공병들이 해안을 따라 평행하게 흐르는 테나루 강의 지류에 LVT 를 띄우고 그 위에 통나무를 깔아서 부교를 만들어 주었다.
(과달카날 상륙작전 상황도. 아랫쪽의 화살표는 제1연대의 진격로이고, 해안을 따라가는 북쪽의 화살표는 제5연대의 진격로이다. 원본은 여기로)
당시 미군이 가지고 있던 과달카날의 지도는 상당히 부정확하여 실제로 상륙해안에서 약 13km 정도 떨어져 있는 오스텐 산이 지도상에서는 상륙해안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나와 있었다.
따라서 적의 저항이 전혀 없었음에도 제1연대는 저녁까지 험악한 정글을 뚫고 오스텐 산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오스텐 산이 지도보다 훨씬 멀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해병제1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오후 늦게 제1연대에게 오스텐 산 점령을 포기하고 서북쪽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의 비행장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제1연대는 전진을 중단하고 테나루 강 부근에서 야영했다.
한편 제5해병연대도 오후 3시부터 테나루 강의 하구를 건너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했다.
역시 공병대가 3대의 LVT 를 테나루 강에 띄우고 그 위에 통나무를 깔아서 부교를 만들어 주었다.
제5연대의 선두인 제1/5대대는 8월 7일 저녁까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일루 강에 도달하여 야영했다.
(LVT 3대를 이용해 만든 테나루 강의 부교. 상륙 당일인 1942년 8월 7일에 찍은 사진이다.)
라바울의 일본제17군 사령부가 과달카날 상륙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8월 7일 오전 6시 12분이었다.
사실은 약 두 시간 전인 7일 오전 4시 25분에 툴라기의 일본군들이 요크부대를 발견하고 라바울에 무전을 쳐서 혹시 선단을 파견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문은 약 1시간 정도 지연되어 5시 30분경에야 보고되었다.
라바울에서는 즉시 툴라기에 선단을 파견한 사실이 없으니 다시 확인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돌아온 보고는 오전 6시 12분에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후 툴라기의 일본군은 오전 8시 10분에 마지막 한사람까지 사수하겠다는 무전을 끝으로 통신이 두절되었다.
대공경순양함 산후앙이 발사한 5인치 함포의 일제사격이 일본군의 통신실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제25항공전대장 야마다 사다요시 소장은 라바울에 32대의 1식 육상공격기, 16대의 99식 급강하폭격기, 그리고 15대의 대형비행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에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폭격기는 밀른 만의 연합군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하여 육상공격용 폭탄을 장비하고 있던 27대의 1식 육상공격기와 호위를 맡은 다이난 항공대 소속 제로기 18대였다.
나카지마 다다시 소좌가 이끌던 다이난 항공대는 다다시 소좌를 비롯하여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로 유명한 일본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 상사, 사사이 주니치 중위, 니시자와 히로요시 상사 등 당시 일본 제일의 조종사들이 집결한 최정예 전투기부대였다.
(일본해군의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야마다 소장은 폭격목표를 밀른 만에서 과달카날의 미군수송선단으로 변경한 다음 출격명령을 내렸다.
긴급명령을 받은 1식 육상공격기들과 제로기들이 8시 30분부터 이륙하기 시작했다.
지상공격용 폭탄을 함선 공격에 보다 효과적인 어뢰로 바꿀 시간도 없었다.
만일 이날 1식 육상공격기 27대와 제로기 18대가 예정대로 밀른 만의 거니 비행장을 공습했다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을 것이며 이후 밀른 만 전투도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달카날에 미군이 상륙하면서 밀른 만의 호주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대의 위기를 넘겼다.(관련내용은 여기로)
이것은 과달카날 전투와 뉴기니 전투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오전 11시 30분에 일본기들이 부갠빌 섬 상공을 통과하자 부갠빌 섬에 숨어있던 호주군 해안감시대원 폴 메이슨이 이 사실을 무전으로 보고했다.
폴 메이슨의 보고를 받은 브리즈번에서는 즉시 플레처 제독에게 중계하여 불과 25분 후인 11시 55분에 플레처 제독은 일본기의 접근을 통보받았다.
해안에서의 양륙작업은 중단되고 수송함들은 닻을 올리고 해안을 벗어나 회피운동에 들어갔다.
제61기동부대의 엔터프라이즈가 보유한 와일드캣 36대 전부와 새러토가의 와일드캣 16대 등 52대의 와일드캣이 요격을 위하여 날아올랐다.
전투공중초계(CAP)는 와스프의 와일드캣들이 전담했다.
(미해군의 F4F 와일드캣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오후 1시 15분, 중순양함 시카고의 레이더가 70km 전방에서 일본기들을 포착했다.
곧 미군의 와일드캣들이 사보 섬 상공에서 일본기들을 덮침으로써 어지러운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1식 육상공격기들은 와일드캣의 방해를 뿌리치고 미군 함정을 겨냥하여 고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모두 빗나갔다.
오후 3시, 이번에는 15대의 99식 함상폭격기가 호위도 없이 폭격을 가해왔다.
이번에도 부갠빌 섬 북부에 숨어있던 호주군 해안감시대원 잭 리드 중위의 경보를 받은 와일드캣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나 일본기는 미군의 예상을 깨고 플로리다 섬 북쪽으로 우회한 다음 남하하여 폭격을 가했다.
미함대의 치열한 대공포화를 뚫고 폭격을 감행한 일본기들은 구축함 머그포드에 1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22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군은 이날 두 차례의 폭격에서 43대의 폭격기 중 11대와 18대의 제로기 중 2대를 상실했다.
미군의 피해는 와일드캣 11대, 돈틀레스 1대가 격추되고 구축함 머그포드가 1발의 폭탄을 맞았다.
당시 미군의 와일드캣 조종사들은 대부분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 배치된 신참 조종사들이었다.
거기에 비하여 제로기를 몰았던 다이난 항공대 소속 조종사들은 일본 제일의 정예 조종사들이었다.
또한 일본군 전투기인 제로기는 미군의 와일드캣보다 성능이 약간 앞서고 있었다.
미군의 신참 파일럿들은 자신들의 전투기보다 성능이 뛰어난 전투기를 모는 일본 최고의 조종사들과 대등하게 겨루면서 함대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조종사의 기량 차이를 감안하면 대단한 성공이었으며 당시 항공기의 성능으로는 라바울에서 출격한 항공기가 1,000km 나 떨어진 과달카날을 공습하는 것이 상당한 무리였다는 말도 된다.
실제로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는 폭격기의 속력으로 왕복 6시간이나 걸리는 장거리 비행이었다.
따라서 연료문제로 과달카날 상공에서의 체공시간은 15분을 넘지 못했으며 피탄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라바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불시착해야 할 확률이 높았다.
또한 일본기의 접근은 거의 언제나 북부 솔로몬 제도의 해안감시대원에게 발각되어 미군기들은 준비를 갖추고 유리한 조건에서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조종사라도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에이스 중 한 사람인 사카이 사부로 상사도 이날 미군의 돈틀레스 편대를 와일드캣으로 착각하여 후방에서 접근하다가 후방 기총에 맞아 중상을 입고 겨우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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