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새러토가 피격

 

칵터스 항공대가 활동을 시작한 이후 미군과 일본군은 12시간마다 교대로 과달카날 근해를 지배했다.

일출부터 일몰까지는 미군이 과달카날 근해의 지배자였다.

대형수송함이 과달카날 앞바다에 정박하여 하역작업을 실시했고 상륙주정과 잡용정(YP)이 아이언바텀사운드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잡용정은 주로 하와이의 참치잡이 어선을 개조하여 간단한 무장을 설치한 것으로서 배수량이 50톤에서 175톤 정도 나가는 목선이었다.

이 잡용정은 과달카날 전투기간 동안 병력과 물자를 운반하고 예인선, 연락선, 구조선으로 활약했으며 소규모 상륙작전에 수송선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면 대형수송함과 호위함정은 급히 닻을 올리고 과달카날을 떠나 뉴헤브리디스 제도가 있는 남동쪽으로 사라졌으며 상륙주정과 잡용정은 마치 묘지에서 놀다가 해가 떨어지면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겁먹은 아이들처럼 툴라기항의 안전한 장소에 꼭꼭 숨었다.

 

어두워지면 과달카날 근해에서 욱일기가 득세했다.

일본구축함과 가끔씩 경순양함까지 포함된 도쿄급행이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해병대의 교두보를 제외한 과달카날 섬의 북해안 어디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지점에 병력과 보급품들을 양륙하고 교두보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일본함정이 살아남고 싶으면 자신들의 깃발에 표시된 찬란한 아침해를 과달카날 근해에서 볼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자신을 지켜줄 어둠이 충분히 남아있을 때 일본함정은 전속력으로 과달카날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하여 아침이 되면 다시 과달카날 근해는 성조기를 펄럭이며 돌아다니는 미군함정이 지배했다.

 

돈틀레스가 효과적인 대함공격을 할 수 있는 최대 범위는 320km 정도였다. 

따라서 도쿄급행에 참가한 일본함정들은 일몰 1시간 전에 320km 거리에 들어와서 전속력으로 달려 자정 쯤에 과달카날에 도착했다.

재빨리 양륙을 마친 일본함정들은 교두보에 잠깐 사격을 가한 다음 다시 전속력으로 빠져나가 해가 뜰 때 쯤이면 최소한 과달카날에서 280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헨더슨 비행장의 돈틀레스가 도쿄급행에 참가한 일본함정을 타격할 기회는 일몰 직전과 일출 직후의 1시간 정도였는데 일본함대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한 효과적인 공습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12시간마다 제해권을 교대로 행사하는 상황은 미군이나 일본군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이러한 구도를 깨려는 어설픈 시도는 항상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고 어느 일방이 이러한 구도를 깨뜨리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시도하면 항상 엄청난 유혈을 동반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의 낮을 지배하는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지속적인 공습을 가했으나 항상 칵터스 항공대의 반격을 받아  지속적으로 누적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헨더슨 비행장에 상응할만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미군 또한 일본해군의 도쿄급행을 저지하고 싶었으나 수상함대를 내보내어 일본함대와 야전을 벌이기에는 아직까지 사보 섬 해전 참패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다. 

미군은 그 대안으로 레이더를 장비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에 어뢰를 장착하여 야간에 일본함정들을 뇌격하고자 했다.

블랙캣 이란 별명이 붙은 이러한 야간형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미해군의 큰 기대를 모았으나 아직까지 원시적인 항공기용 레이더는 과달카날 근해같이 육지가 많은 연안에서는 육지와 일본함정들을 거의 구별해내지 못했다.

 

이런 팽팽한 균형 속에서 일본해군은 1942년 8월 31일에 큰 개가를 올렸다.

일본잠수함 I-26이 새러토가를 공격하여 3달간 전열에서 탈락시켜 버린 것이었다.

 

(CV-3 새러토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8월 31일 오전 7시 36분, I-26은 산크리스토발 섬 남쪽 해상에서 13노트의 속력으로 초계항해 중인 새러토가를 발견했다.

I-26호는 순항 중인 새러토가의 전방 2km 지점까지 접근하여 잠망경 심도에서 어뢰 6발을 발사했다.

 

I-26은 모르고 있었지만 I-26의 불과 10m 옆에는 새러토가를 호위하던 구축함 맥도너휴가 있었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연속적인 어뢰발사 소리를 들은 맥도너휴는 미친듯이 해상을 살피다가 함수에서 전방으로 불과 10m 떨어진 해면에서 잠망경을 발견했다.

맥도너휴는 즉각 어뢰경보를 발하면서 전속력으로 잠망경을 향해 돌진했다.

바로 옆에서 미구축함이 돌진하자 깜짝 놀란 I-26은 급히 잠항하여 가까스로 충돌을 면했다.

얼마나 아슬아슬했던지 맥도너휴의 승무원들은 일본잠수함의 상부구조물 일부가 자신들의 배 밑바닥을 긁으면서 나는 기분나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맥도너휴는 I-26 바로 위를 통과하면서 2발의 폭뢰를 투하했으나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라 폭발심도를 입력하지 못했다. 

 

맥도너휴의 경보를 들은 새러토가는 속력을 최대로 올리면서 어뢰가 달려오는 오른쪽 방향으로 최대한 급회전했다.

약 2분 후 어뢰 6발 중 1발이 우현 함교 부근에 명중했다.

즉각 새러토가를 호위하던 구축함들이 I-26이 발견된 해면으로 몰려들어 미친듯이 폭뢰를 투하했으나 I-26은 무사히 빠져나갔다.

I-26은 11월 13일에는 경순양함 쥬노를 격침한다.

 

어뢰에 의한 새러토가의 직접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화재도 발생하지 않았고 기관실 하나가 침수되었을 뿐이었다.

사망자는 없었고 대부분 경상인 1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함교에서 쓰러져 가벼운 상처를 입은 플레처 제독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어뢰는 새러토가의 추진계통에 큰 피해를 입혔다.

새러토가는 전기추진장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뢰의 폭발로 인하여 고압전류가 흐르는 추진계통이 큰 충격을 받아 통제실에서는 전기불꽃이 튀면서 전선들이 모두 타 버렸다.  

자동차단장치가 작동하여 주발전기 2대를 모두 정지시켰다.

몇시간 후에 새러토가는 다시 움직일 수 있었으나 12노트 이상은 낼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는 작전이 불가능했으므로 새러토가는 수리를 위하여 진주만으로 가야만 했다.

 

그날 오후 새러토가의 함재기들이 이함하여 560km 떨어진 에스피리투산토로 날아갔다.

이들은 나중에 헨더슨 비행장에 파견되어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새러토가는 9월 6일에 통가타부에 도착하여 12일까지 임시수리를 마치고 9월 21일에 진주만에 입항했다.

11월 10일에 수리를 마친 새러토가는 12월 5일이 되어서야 남태평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과달카날 해전에서 승리한 미해군이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완전하게 장악한 이후였다.

 

새러토가의 피격 당시 플레처 제독도 경상을 입었다는 보고를 접한 니미츠 제독은 지금이 플레처 제독에게 절실히 필요한 휴식을 취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플레처 제독은 진주만 기습 때부터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맡아서 태평양함대가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9개월 가까이 지속적으로 긴장과 육체적 격무의 연속인 해상근무를 해 왔다.

이러한 지속적인 해상근무가 사령관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상당한 것으로서 실제로 플레처 제독과 같이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던 헐지 제독은 이러한 지속적인 해상근무의 스트레스를 버텨내지 못하고 악성 피부병이 발병하여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쓰러져 입원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플레처 제독이 헐지 제독보다 스트레스가 적은 작전을 맡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플레처 제독은 헐지 제독이 지휘한 작전들보다 훨씬 중요한 웨이크 섬 구출작전,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상륙, 동부 솔로몬 해전 등을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이 과정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자신이 탔던 기함이 2번이나 침몰하는 불운을 겪었다.

따라서 과달카날 상륙시 보여준 지나친 소심함과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의 판단 착오 등도 단순히 피로누적으로 인한 현상일 수 있었다.

 

그러나 플레처 제독은 이때 불운한 제독이라는 미해군 내부의 평가를 받으면서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플레처 제독이 돌아올 자리라고는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지휘관 자리 밖에 없었는데 태평양함대 내에서는 이미 항공관계자들이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수상함 출신인 스프루언스 제독의 작전지도에 걸핏하면 시비를 거는 상황이었다.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미해군 제일의 전술가인 스프루언스 제독을 제외하고는 항공관계자가 아닌 고속항모기동부대의 지휘관들은 모조리 항공관계자들에게 밀려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상함대 출신의 플레처 제독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결국 플레처 제독은 1942년 11월에 제13해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가 1년 후인 1943년 11월에 킨케이드 제독의 후임으로 사실상 후방이 되어버린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 되어 그곳에서 종전을 맞게 된다. 

 

(프랭크 잭 플레처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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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칵터스 항공대

 

1942년 8월 20일에 헨더슨 비행장에서 칵터스 항공대가 활동을 시작하고, 8월 21일에 이치기 지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8월 24일에는 제61기동부대가 일본함대를 이김으로써 과달카날의 해병제1사단은 완전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진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치기 지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일본군이 다음번에는 더 많은 병력을 보내어 더 뛰어난 작전계획 하에 더 맹렬한 공격을 가해 올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칵터스 항공대는 헨더슨 비행장에 전개한 이래 매일 오전 5시 45분부터 8시 30분까지, 그리고 오후 2시부터 6시 30분까지 4대의 와일드캣을 투입하여 과달카날 주변 상공을 초계했다.

칵터스 항공대의 주력 전투기인 와일드캣은 일본군의 주력 전투기인 제로기와 비교할 때 기동성에서 열세를 보였으나 대신 더 튼튼하고 급강하 속력이 빨랐다.

와일드캣 조종사들은 2대가 1조로 제로기를 상대하는 태치 위브 전술을 사용하여 제로기와의 공중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칵터스 항공대는 8월 20일에 배치되고 나서 8월 말까지 열흘 동안 56대의 일본군 항공기를 격추하고 자신들은 11대를 잃었다. 

 

(그루먼 F4F  와일드캣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헨더슨 비행장과 칵터스 항공대가 과달카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핵심적인 열쇠임을 잘 알고 있는 미군 지휘관들은 칵터스 항공대의 작전을 지원하는데 보급의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1942년 9월 1일에 제6해군건설대대 A 중대 및 D중대원 392명이 수송함 베텔규스를 타고 과달카날에 상륙했다.

이들은 불도저 2대, 덤프트럭 6대, 도로건설용 그레이더 1대, 프론트엔드 로더 1대와 함께 상륙했다.

 

(도로건설용 그레이더)

 

(Front-end Loader)

 

해군건설대대와 함께 5인치 해안포 6문도 함께 양륙되었다.

 

해군건설대대는 상륙 즉시 해병대의 공병대대를 도와서 활주로를 연장하고 유도로를 만들고 또한 기존의 활주로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지점에 전투기용 보조 활주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라바울에서는 매일같이 제로기의 호위 하에 폭격기들을 보내어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고 공병들은 그때마다 활주로에 난 폭탄 구멍을 메워야 했다.

공병들은 미리 자갈과 모래를 덤프 트럭에 실어두고 있다가 일본폭격기가 물러가자마자 활주로를 복구했다.

활주로 복구에 필요한 공병들은 미리 항공분대라는 조직으로 만들어져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덤프 트럭과 같이 대기하고 있었다.

500kg 짜리 폭탄이 만든 구멍을 메우는데 약 30분이 걸렸다. 

 

해군건설대대의 도착에도 불구하고 헨더슨 비행장의 여건은 상당기간 열악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연료 주입은 수동펌프로 해야만 했기 때문에 단 몇대의 항공기에 급유하기 위하여 수십명이 몇시간 동안 땀을 흘려야만 했고 폭탄 장착도 인력으로 해야만 했다.

 

활주로에는 마스덴매트가 깔려있지 않아서 비가 많이 오면 사용이 불가능했다.

실제로 젖은 활주로에서 무리하게 이륙을 시도하던 항공기가 활주로 끝에서 추락하기도 했다. 

또한 항공기가 착륙하면서 활주로에 고랑이 패였는데 특히 해군의 돈틀레스들이 심했다.

함재기용 돈틀레스들은 항모착함을 위하여 뒷바퀴가 대단히 단단한 고무로 되어 있어서 한 번 착륙하면 마치 쟁기처럼 활주로에 깊은 고랑을 내었다.

이 고랑은 즉시 메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위험했다.

실제로 9월 초의 어느 안개 자욱한 날 착륙하던 와일드캣이 이 고랑에 튕겨서 불도저와 충돌했다.

활주로에 전면적으로 마스덴매트가 깔린 것은 1942년 9월 25일이 되어서였고 이때부터 B-17 중폭격기도 헨더슨 비행장에 이착륙하기 시작했다.

 

(마스덴매트)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칵터스 항공대는 착실히 세력을 키워갔다.

8월 31일에는 로버트 게일러 소령이 지휘하는 제224전투비행대대의 와일드캣 19대와 레오 스미스 소령의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의 돈틀레스 12대가 추가로 도착했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31일 현재 칵터스 항공대는 총 64대의 항공기와 86명의 조종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항공기 중 10대는 엔터프라이즈에서 날아온 해군 소속의 돈틀레스였고 3대는 육군항공대의 P-400 전투기였다.

 

일본군은 계속 공습을 가해왔다.

1942년 9월 2일 11시 35분에 일본군이 떨어뜨린 폭탄 1발이 마침 탄약더미 부근에 주기해있던 돈틀레스에 명중하면서 90mm 대공포 탄약더미로 불이 옮겨붙었다.

해병대원들이 몇명의 부상자를 내면서까지 용감하게 화염과 맞서서 더 이상의 유폭을 막고 화재를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새삼 화재의 위험에 놀란 해병대는 전쟁 전에 코코넛 농장에서 사용하던 대형 물통을 탄약더미 부근에 옮겨놓고 화재에 대비했다.

덕분에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폭격으로 인한 더 이상의 치명적인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날 칵터스 항공대의 와일드캣들은 자신들의 희생은 전혀 없이 1식 육상공격기 3대와 제로기 4대를 격추함으로써 화재로 인한 배상을 톡톡히 받아내었다.

 

다음날인 9월 3일, 제1해병비행단장인 로이 가이거 해병소장이 과달카날에 부임함으로써 이제 칵터스 항공대는 확실한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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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동부 솔로몬 해전(4) - 다나카 선단의 회항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주력함대 사이의 전투는 1942년 8월 24일 저녁에 끝났지만 전투 자체가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24일 밤에 다나카 라이조 제독은 호위함대 중에서 구축함 5척(가게로, 무츠기, 야요이, 이소카제, 가와카제)을 파견하여 야간에 해병대의 교두보를 포격했고 중순양함 죠카이와 기누가사, 그리고 경순양함 유라에서 떠오른 수상정찰기들이 밤새 교두보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소형 폭탄을 떨어뜨려 해병대의 신경을 긁었다.

참다못한 맹그럼 중령은 돈틀레스 8대를 이끌고 25일 새벽에 밤하늘로 날아올라 밝은 달빛에 의지하여 해상을 수색했다.

맹그럼 중령이 이끄는 돈틀레스들은 새벽 3시에 교두보를 포격하던 일본구축함들을 찾아내어 폭격을 가했다.

비록 폭탄은 빗나갔지만 야간이라 마음놓고 포격하던 일본구축함들은 갑작스런 폭격을 당하자 놀라서 달아났다.

 

8월 23일 오후에 일시 북쪽으로 반전했던 다나카 제독의 수송선단은 24일 정오 경에 다시 반전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24일 하루 동안 일본함대와 미국제61기동부대는 처절한 혈투를 치렀지만 다나카 수송선단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남하를 계속했다.

그러나 25일 오전 9시 35분에 수송선단이 과달카날 북방 240km 지점에 도달했을 때 선단 상공에 일단의 돈틀레스들이 나타났다.

아침 일찍 헨더슨 비행장을 떠나 북쪽으로 일본항공모함을 찾아 나섰던 맹그럼 중령의 제232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 소속 돈틀레스들이었다.

일본항공모함을 찾지 못해 허탕을 치고 돌아오던 중에 다나카 선단을 발견한 돈틀레스들은 꿩 대신 닭이라고 다나카 수송선단에게 달려들어 폭격을 가했다.

 

로렌스 발디누스 중위가 투하한 폭탄 1발이 다나카 제독의 기함인 경순양함 진츠의 제1번 포탑과 제2번 포탑 사이에 명중하여 갑판을 뚫고 탄약고 바로 부근에서 폭발하여 화재를 일으켰다.

이 폭발로 진츠의 통신실이 파괴되었고 사령관 다나카 제독이 잠깐 정신을 잃었으며 몇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진츠의 함장은 탄약고의 유폭을 막기 위하여 침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진츠는 결국 구축함 스즈카제의 호위를 받으면서 트럭으로 되돌아갔고 다나카 제독은 사령기를 구축함 가게로에 옮겨 달았다.

 

(일본해군의 경순양함 진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크리스찬 핑크 소위가 조종하는 돈틀레스는 9,300톤급의 수송선 긴류마루에 폭탄을 명중시켰다.

긴류마루는 화재를 일으키면서 해상에 멈췄다.

다나카 제독은 구축함 무츠기에게 긴류마루에 탑승한 병력들과 승무원들을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도 칵터스 항공대의 활동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라바울을 출발한 1식 육상공격기 21대가 제로기 13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25일 정오에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러나 8,000m 의 고공에서 투하한 폭탄은 대부분 빗나갔고 해병대의 피해는 전사 4명과 활주로에 약간의 피해를 입은 것이 전부였다.

25일 밤에는 죠카이, 아오바, 기누가사, 후루다카 및 유라의 정찰기들이 밤새 해병대의 교두보를 폭격했다.

 

칵터스 항공대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다나카 수송선단은 여전히 과달카날을 향해 전진했다.

25일 오전 10시 15분에는 에스피리투산토를 출격한 B-17 중폭격기 8대가 수송선단의 상공에 나타났으나 하늘을 힐끗 올려본 무츠기의 함장 하타노 대좌는 무시하고 긴류마루의 병력과 승무원들을 구하러 갔다.   

B-17 이나 B-24 같은 미군 중폭격기들이 실시하는 고공수평폭격의 명중율이 보잘것 없었기 때문에 일본함정들은 미군의 중폭격기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만은 달랐다.

8대의 B-17 중폭격기들이 투하한 폭탄들은 정확하게 무츠기를 감싸면서 떨어졌고 무츠기는 3발의 명중탄을 얻어맞고 침몰했다. 

이로써 무츠기는 고공수평폭격에 의하여 격침된 최초의 일본구축함이 되었다. 

이때 구축함 우즈키도 지근탄에 의하여 피해를 입었다.

 

(B-17 중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긴류마루는 무츠기가 격침된 후 화재로 탄약들이 유폭하면서 침몰했고 탑승 병력 중 700 명이 실종되었다.

다나카 제독은 항공지원이 없이 더 이상 과달카날에 접근하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 쇼틀랜드로 회항했다.

이로써 동부 솔로몬 해전이 끝났다.

 

동부 솔로몬 해전은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미해군의 판정승이었다.

일본해군은 경항공모함 류조, 구축함 무츠기, 수송선 긴류마루가 격침되고 항공기 59대를 상실했으며 수송선단이 과달카날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과호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다.

반면 미해군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가 중파되었으며 20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다.

 

상처입은 엔터프라이즈는 8월 25일에 중순양함 포틀랜드와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통가타부를 거쳐 진주만으로 향했다.

엔터프라이즈는 9월 10일에 진주만에 입항하여 전면적인 수리를 받고 10월 23일에 남태평양으로 돌아왔다.

제16기동부대의 호위함정들 중 전함 노스캐롤라이나와 대공경순양함 애틀랜타 및 구축함 2척은 새러토가 중심의 제11기동부대에 편입되었고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도 대부분 남태평양에 남아서 지상 비행장을 기지로 삼아 활동했다.

 

플레처 제독은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사보 섬 해전으로 완전히 일본해군에게 넘어가 있던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부분적으로나마 되찾아 오는데 성공하여 과달카날에 대한 본격적인 보급과 증원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결국 과달카날 전투의 승리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이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의 플레처 제독의 작전지도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일본함대와의 결전을 앞두고 급유를 위하여 와스프를 남쪽으로 보내 버림으로써 쇼가쿠와 즈이가쿠에게 일격을 가할 기회를 놓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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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동부 솔로몬 해전(3) - 엔터프라이즈의 피격

 

류조의 피격소식을 들은 나구모 제독은 자신의 계획이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제 미국함대가 미끼를 물었으니 공격대를 보내어 더 큰 대가를 받아내는 일만 남았다.

8월 24일 오후 2시 5분, 치쿠마를 떠난 수상정찰기 1대가 미국 항공모함기동부대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격추당했다.

오후 3시 7분에 쇼가쿠로부터 제로기 4대와 99식 급강하폭격기 18대, 즈이가쿠로부터 제로기 6대와 99식 급강하폭격기 9대가 발진했고, 오후 4시에 쇼가쿠로부터 제로기 3대와 99식 급강하폭격기 9대, 즈이가쿠로부터 제로기 6대와 99식 급강하폭격기 18대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가 출격했다.

 

(동부솔로몬 해전 상황도)

 

새러토가 중심의 제11기동부대와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는 서로 15km 정도 떨어져서 각자 원형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제16기동부대는 가운데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순양함 및 구축함들이 반지름 약 1,600m 에서 1,800m 크기의 대공원형진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전함 노스캐롤라이나는 엔터프라이즈 후방 약 2,300m 지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부 솔로몬 해전 당시 엔터프라이즈 그룹의 대공원형진)

 

24일 오후 4시, 플레처 제독은 일본함대에 보다 가까이 있는 엔터프라이즈에게 제61기동부대 전체의 전투기 유도 임무를 맡겼다.

2분 뒤인 오후 4시 2분에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거리 140km, 방위 320도에서 접근 중인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전투공중초계(CAP = Combat Air Patrol)중이던 와일드캣에 더하여 항공모함의 갑판에서 대기 중이던 와일드캣들이 긴급발진하여 제61기동부대의 가용한 53대의 와일드캣 중 절반 정도가 적기가 발견된 방향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에서 렉싱턴과 요크타운을 잃었던 플레처 제독은 적기의 공습을 막아내려면 많은 숫자의 와일드캣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와일드캣을 최대한 모아서  53대라는 상당한 숫자의 와일드캣을 요격에 동원할 수 있었다.

 

엔터프라이즈에 남아있던 돈틀레스 11대와 아벤저 7대, 그리고 새러토가에 남아있던 돈틀레스 2대와 아벤저 5대도 즉시 일본함대를 찾아 모함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일본기가 발견된 지 2분 후인 , 오후 4시 4분에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서북서 방향, 거리 70km 에서 접근 중인 정체불명의 항공기들을 발견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전투기 유도장교인 레너드 도우 소령과 헨리 로우 소령은 고민 끝에 절반의 와일드캣을 이 항공기들에게 돌렸다.

불행하게도 이 항공기들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군 항공기들이었다.

당시의 초보적인 피아식별장치의 수준으로는 레이더 상에 나타난 항공기들을 식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동안 처음에 접촉했던 일본기들의 항적이 레이더에서 사라졌다가 4시 19분에야 다시 나타났다.

전투기 유도장교들은 일본기의 고도가 약 3,600m 라고 추정했다.

오후 4시 25분, 제61기동부대의 북서쪽을 담당하던 와일드캣들이 육안으로 일본기들을 발견하고 경보를 발했다.

 

이 순간부터 또다른 문제인 통신장애가 전투기 유도장교들을 괴롭혔다.

53대에 달하는 전투공중초계 세력과 대잠작전 중인 몇 대의 돈틀레스, 그리고 정찰에서 돌아오는 돈틀레스 및 아벤저들이 모두 단 하나의 주파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유일한 주파수는 일본기를 발견한 와일드캣의 조종사들이 내지르는 "탤리호!!"(Tally-hos!!, 적기를 발견했을때 쓰는 용어) 소리와 이어서 터져나오는 온갖 욕설과 흥분해서 조종사들끼리 떠들어대는 잡담 등으로 순식간에 통신불능상태에 빠졌다.

전투기 유도장교들이 그 난장판 속을 비집고 들어가 어떻게든 다른 구역의 와일드캣 조종사들에게 일본기들의 위치와 고도를 알려주어 일본기가 발견된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기를 썼다.

 

사실 비행 중에 조종사들끼리 하는 대화는 대부분 잡담 수준으로 전술적 가치는 거의 없다.

미해군은 함재기 조종사들에게 비행 중 의미없는 잡담을 하지 말도록 지속적으로 교육했고, 그 결과 1944년이 되면 잡담의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따라서, 전투기 유도장교들이 보다 원활해진 통신망을 활용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CAP 세력들을 적시에 필요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됨으로써 CAP 의 효율이 크게 높아졌다. 

함재기에 의한 함대방공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인 1944년 6월의 필리핀해 해전같은 경우 동부 솔로몬 해전처럼 전투기 조종사들 간의 잡담으로 통신망이 마비되었다면 결코 칠면조 쏘기 라고 부를 정도의 혁혁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교육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들의 잡담을 완전히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전투기 조종석에 앉은 조종사는 외로운 존재이며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잡담이라도 나누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를 교육만으로 근절할 수는 없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전투기 유도장교들은 일본기들이 흩어지기 전에 최대한 많은 전투기들을 그 지역으로 집결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오후 4시 29분, 엔터프라이즈 전방 40km 지점까지 접근한 일본기들이 제16기동부대를 발견하고 소규모 편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전투기 유도장교의 역할은 끝났다.

이후 최초의 일본기가 제16기동부대 상공에 도달할때까지 12분간 만사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막으려는 자와 뚫고 지나가려는 자와의 싸움에서 일단은 일본기들이 승리했다.

99식 급강하폭격기들을 호위하던 10대의 제로기는 와일드캣에게 과감하게 달려들어 싸움을 걸었고 그 와중에 27대의 99식 급강하폭격기 중 25대가 와일드캣의 방공망을 무사히 통과하여 제16기동부대 상공에 도달했다.

치열한 대공포화를 뚫고 급강하한 일본기들은 모든 공격력을 엔터프라이즈에게 집중시켰다.

 

오후 4시 41분부터 약 7초 간격으로 20발이 넘는 폭탄이 엔터프라이즈를 노리고 떨어졌다.

함장인 데이비스 대령은 교묘한 조함으로 첫 2분간 15발 이상을 무사히 피했다.

99식 급강하 폭격기 1대가 폭탄을 떨구기도 전에 대공포화에 피격되자 엔터프라이즈를 노리고 돌격해 왔다.

 

(피격되어 불을 뿜으면서 엔터프라이즈를 노리고 달려드는 99식 급강하폭격기)

 

이 일본기는 엔터프라이즈의 우현에서 불과 10m 떨어진 곳에 추락하면서 폭발했다.

이 충격으로 20mm 대공포좌의 포수 1명이 5m 나 날아가서 다른 대공포좌에 떨어졌다.

 

(엔터프라이즈의 우현에서 불과 10m 떨어진 해면에 추락한 일본기가 일으킨 커다란 화염과 물기둥)

 

폭격이 시작된지 2분 후인 오후 4시 43분에 1대의 99식 급강하 폭격기가 450m 높이에서 70도 각도로 투하한 250kg 폭탄 1발이 후방갑판의

제3번 엘리베이터 전방 모서리 부근에 명중했다.

이 폭탄은 12m 를 뚫고 내려가 부사관 거주 지역의 제2갑판과 제3갑판 사이에서 폭발하여 엘리베이터 운용팀, 탄약관리요원들과 손상관리반 요원들 35명이 즉사했다.

폭발의 충격으로 우현 수선 하에 직경 1.8m 구멍이 뚫렸고 거기로 쏟아져들어온 바닷물 때문에 배가 3도나 우측으로 기울었으며 폭발의 충격이 2만톤짜리 배를 흔들어 잠시동안 사람이 서있지 못할 정도였다.

격납고 갑판에는 직경 5m 짜리 구멍이 뚫렸고 구멍의 가장자리는 60cm 나 위쪽으로 우그러졌다.

 

(엔터프라이즈의 후방갑판에 일본군의 폭탄이 명중하는 순간. CA-33 포틀랜드에서 찍은 사진이다.)

 

첫 번째 폭탄이 명중한지 30초 뒤에 첫번째 폭탄이 명중한 자리에서 5m 정도 후방 오른쪽에 두번째 폭탄이 떨어졌다.

이 폭탄은 2.4m 깊이에서 폭발하면서 우현 고물 쪽에 있던 제5번과 제7번 5인치 포대에 쌓여있던 장약 40개를 유폭시켰다.

이 폭발로 38명이 사망했는데 그중의 10명은 새까맣게 타서 신원확인이 불가능했다.

 

첫번째 폭탄이 떨어진 지 2분후인 4시 45분에 3번째 폭탄이 제2번 엘리베이터 전방의 비행갑판에 명중했다.

450m 고도에서 60도 각도로 투하된 이 폭탄은 천만다행으로 지연신관이 오작동하여 명중과 동시에 폭발했다.

이 폭탄은 비행갑판에 직경 3m 짜리 구멍을 내고 제2번 엘리베이터와 어레스팅 기어를 망가뜨렸으며 1명의 사망자를 기록했으나 앞의 두 폭탄에 비하면 피해는 가벼운 수준이었다.

 

(세번째 폭탄의 폭발 장면. 이 장면은 원래 이 해전에서 전사한 로버트 리드 하사가 전사하는 순간에 찍은 사진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마리온 릴리 하사가 찍은 사진이다. 리드 하사는 1분 30초 전에 명중한 두번째 폭탄에 의하여 전사했다. 릴리 하사의 사진기는 이 장면을 찍는 순간 망가졌으나 필름은 살아남았고 릴리 하사도 무사했다.)

 

3발의 명중탄을 맞은 엔터프라이즈에서는 74명이 전사하고 95명이 부상을 입었다. 

 

폭격을 마친 일본의 급강하폭격기들은 이탈하는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와일드캣 편대장인 도널드 러니언 준위는 제로기 2대와 99식 급강하 폭격기 3대를 격추했으며 그의 부하들이 99식 급강하폭격기 4대를 더 격추했다.

 

돈틀레스도 격추 대열에 동참했다.

류조를 격침하고 돌아오던 새러토가의 제3정찰비행대대장 루이스 컨 소령은 오후 5시 10분에 전방에서 일본군의 99식 급강하폭격기 4대가 150m 고도로 비행 중인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돈틀레스 9대와 함께 마치 퍼레이드 하듯이 나란히 일자대형을 만들고는 일본기들의 후방에서 몰래 접근해 갔다.

일본기들이 자신들의 후방에서 다가오는 위험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10대의 돈틀레스가 동시에 쏘아대는 기관총탄을 뒤집어 쓴 3대의 99식 급강하폭격기가 추락했고 1대는 검은 연기를 끌면서 도망쳤다.

돈틀레스를 타고 대잠작전을 수행 중이던 하어드 버넷 소위도 저공비행 중인 일본군의 99식 급강하폭격기 1대를 발견하고 공중전을 벌여 격추했다.

 

일본기들 중 6대의 제로기와 18대의 99식 급강하 폭격기가 격추당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는 승무원들이 함을 구하기 위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화재가 발생한 구역은 우선 부상자들을 후송시킨 다음 폐쇄하고 소화기를 든 승무원들이 진화에 나섰다.

수선하 구역에 난 구멍은 매트리스로 일단 막았고 목수들은 구멍난 비행갑판을 보수했다.

손상관리반장인 허셀 스미스 소령의 지휘 하에 평소 맹렬하게 훈련해 온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은 실전에서 처음 당하는 피격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폭탄을 맞은 이후 1시간 이내에 화재를 진압하고 수선하 구멍을 막고 비행갑판을 보수했다.

그리하여 엔터프라이즈는 오후 5시 49분부터 24노트의 속력으로 함재기의 이착륙을 실시할 수 있었다.

 

진짜 위기는 그 다음에 찾아왔다.

첫번째 폭탄이 떨어졌을 때 함정의 후방에 있는 조타기계실과 연결된 환풍기 배관이 찢어졌다.

두번째 폭탄으로 인하여 화재가 일어나자 불타는 연기와 함께 엄청난 열기가 찢어진 환풍기 배관을 통하여 조타기계실로 흘러들었다.

조타기계실에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들어차면서 실내온도가 섭씨 80도까지 상승하자 조타기계실 내의 인원들은 긴급대피했다.

 

이제 화재가 잡히고 조타기계실로 돌아온 승무원들이 실내의 연기를 배출하기 위하여 환풍기를 가동시켰다.

그러자 찢어진 환풍기 배관을 타고 엄청난 양의 물과 소화액이 조타기계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혼비백산한 승무원들은 실내가 완전히 잠기기 전에 극적으로 탈출했다.

사상자가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오후 6시 21분에 조타기계실이 침수되면서 엔터프라이즈의 키가 우현 20도로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함장 데이비스 대령이 우현 프러펠러를 전속전진시키고, 좌현 프러펠러를 전속 후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직진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조향기능을 상실한 엔터프라이즈는 하마터면 구축함 발치와 충돌할 뻔했다.

이제 엔터프라이즈는 오른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상태에서 공습을 당하면 엔터프라이즈는 회피운동도 못한 채 꼼짝없이 폭탄이나 어뢰를 얻어맞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는 독일전함 비스마르크가 최후를 맞을 때와 비슷했다.

 

실제로 즈이가쿠를 출발한 일본의 제2차 공격대는 엔터프라이즈를 향하여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보 섬 해전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일본해군의 손을 들어주었던 행운의 여신은 이번에는 마음을 바꾸어 노골적으로 엔터프라이즈를 편들었다.

엔터프라이즈를 향하여 직진하던 일본군의 제2차 공격대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중간에 침로를 40도 가량 남쪽으로 꺾어서 엔터프라이즈의 남쪽 80km 지점까지 날아갔다.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는 남쪽 80km 지점에서 제2차 공격대를 발견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일본기들이 바로 북상한다면 곧 엔터프라이즈 상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료가 달랑거리던 일본의 제2차 공격대는 모함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직선거리를 따라 북서쪽으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윌리엄 스미스 준위가 2번의 실패 끝에 보조모터의 구동에 성공하여 엔터프라이즈는 조타기계실이 침수된지 38분 만인 오후 6시 51분에 조향기능을 회복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다. 

 

한편 일본군의 공습 당시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던 돈틀레스 11대와 아벤저 7대는 일본함대를 찾는데 실패했다.

아벤저 7대는 오후 8시에 무사히 엔터프라이즈에 돌아왔지만 어두운 밤바다에서 모함을 찾지 못한 돈틀레스 11대는 헨더슨 비행장에 착륙하여 해병대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뜻하지 않게 굴러들어온 해군 소속의 돈틀레스 11대를 칵터스 항공대에 편입시켜 달라고 요구했고 모함인 엔터프라이즈가 피해를 입었으므로 해군 측은 요청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돈틀레스들은 9월 27일까지 1달 동안 칵터스 항공대의 일부로서 헨더슨 비행장을 기지로 삼아 활동하게 되었다.

 

새러토가를 떠난 돈틀레스 2대와 아벤저 5대는 오후 5시 40분에 전속력으로 남하하던 곤도 제독의 지원부대를 만나서 수상기 모함 치토세를 공격했다.

치토세는 아벤저들이 발사한 어뢰 5발은 겨우 피했으나 함이 최대한 회전한 상태에서 돈틀레스 2대가 떨어뜨린 폭탄이 연거푸 명중하여 좌현 기관실이 침수되면서 함체가 순식간에 좌현으로 7도나 기울었다.

치토세의 기울기는 한때 30도에 이르렀으나 필사적인 보수작업 끝에 침몰을 면하고 트럭으로 돌아갔다.

(일본해군의 수상기모함 치토세.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새러토가의 함재기들은 귀함 도중 2대의 아벤저가 길을 잃어 산크리스토발 섬 근해에서 해상에 불시착했으나 승무원은 모두 구조되었다.

나머지 돈틀레스 2대와 아벤저 3대는 오후 7시 30분에 안전하게 새러토가에 착함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조향기능이 회복되자 플레처 제독은 철수를 명했다.

 

한편 일본함대에서도 나구모 제독의 공격부대는 철수했으나 곤도 제독은 자신의 강력한 수상함대를 사용하여 야전을 기도했다.

오후 4시 30분에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를 지원부대에 통합한 곤도 제독은 전속력으로 남하했다.

오후 5시 40분에 새러토가의 함재기에 의하여 치토세가 중파되어 트럭으로 돌아갔으나 나머지 함정들은 남하를 계속했다.

전함 2척과 순양함 10척을 기간으로 하는 강력한 일본의 수상함대는 순양함에서 연거푸 정찰기를 띄워 미국함대의 흔적을 찾았으나 8월 24일 밤 11시 30분까지 접촉하는데 실패했다.

항공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자정을 넘겨서까지 추격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자정이 막 지난 8월 25일 새벽에 곤도 제독은 추격을 포기하고 28노트의 속도로 북상하여 철수했다.

 

곤도 제독의 철수는 현명한 결정이었다.

당시 남쪽에서는 급유를 마친 와스프가 북상하고 있었다.

만일 철수결정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일본함대는 25일 오전에 와스프가 보유한 80대의 함재기에 의하여 치명적인 추가 피해를 입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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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동부 솔로몬 해전(2) - 류조 격침

 

1942년 8월 23일 아침,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정찰기가 일본잠수함 2척을 발견했다.

통상 일본잠수함은 대규모 수상함대의 전방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제61기동부대는 조만간 큰 전투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8월 23일 오전 9시 50분, 산타크루즈 제도의 은데니 섬에 정박한 수상기 모함 맥키낙에서 발진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과달카날 북방해상에서 남진하는 다나카 제독의 수송선단을 발견하고 보고했다.

제61기동부대 사령관 플레처 제독은 참모들과의 회의를 거친 후 함대의 침로를 되돌려 북서쪽으로 나아간 다음 오후 2시 45분에 새러토가로부터 돈틀레스 31대와 아벤저 6대로 이루어진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오후 4시 15분에는 헨더슨 비행장에서도 23대의 항공기가 다나카 수송선단을 노리고 출격했다.

그러나 다나카 제독은 자신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오후 1시에 북서쪽으로 변침해 버렸다.

따라서 새러토가와 헨더슨 비행장을 떠난 공격대는 모두 다나카 선단을 찾는데 실패했다.

새러토가의 함재기들은 모함으로 돌아가는 대신 헨더슨 비행장으로 향했다.

 

8월 23일 오후 4시 경에 플레처 제독은 일본항공모함들의 위치에 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미군의 정찰기들은 이 시각까지 일본항공모함을 찾지 못했고 8월 1일에 일본해군이 난수표를 바꾼 이래 아직 일본해군의 암호를 완전하게 해독하지 못하던 진주만의 암호해독반은 일본항모들이 트럭 북방 해상에 있는 것 같다는 그릇된 정보를 전해왔다.   

 

플레처 제독은 당분간 전투가 없을 것으로 믿고 23일 오후 6시에 구축함들의 연료를 보충하도록 와스프 중심의 제18기동부대를 남쪽으로 보내어 해상급유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시 구축함들의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연료보유량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즉 제18기동부대의 구축함 7척은 23일 정오 현재 240톤에서 370톤 정도의 연료를 보유하여 평균 300톤을 보유하고 있었다.

구축함의 하루 연료 사용량이 40톤에서 80톤 정도란 걸 생각해 보면 가장 연료가 적은 구축함도 최소한 3일 연속 격렬한 전투를 치를만한 연료를 가지고 있었다. 

이 그릇된 결정 때문에 제61기동부대는 결정적인 전투를 앞두고 3척의 항공모함 중 1척이 전열에서 탈락했다.

 

이제 2척의 항공모함으로 줄어든 제61기동부대에게 23일 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다음날인 8월 24일에는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에 이어 사상 3번째의 함대항공전이 벌어질 것이었다.

 

(동부 솔로몬 해전 상황도)

 

트럭 환초를 출발하여 남진하던 일본함대는 23일 오후 6시에 일시적으로 북서쪽으로 변침했다.

24일 오전 4시, 하라 소장이 지휘하는 류조 중심의 견제부대가 나구모 제독의 공격부대에서 분리되어 과달카날을 향하여 남진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주력함대는 24일 오전 6시에 다시 변침하여 제61기동부대와의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8월 24일 아침이 되자 전날 헨더슨 비행장에 착륙했던 새러토가의 함재기들이 모함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CAP 임무를 맡고 있던 와일드캣 4대가 새러토가 전방 30km 까지 접근한 일본군의 2식 비행정 1대를 격추했다.

 

(일본해군의 가와니시 H8K 2식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8월 24일 오전 9시 5분에 은데니 섬을 떠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대가 말라이타 섬 북쪽 350km 지점, 제61기동부대로부터 450km 떨어진 지점에서 류조와 그 호위함들을 발견했다.

11시 28분에는 역시 은데니 섬에서 발진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제61기동부대로부터 380km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류조와 그 호위함들을 발견했다.

일본항공모함이 출현하자 플레처 제독은 와스프를 남하시킨 결정을 후회했으나 물러서지 않고 2척의 항공모함만으로 전투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플레처 제독은 지금 발견된 일본항공모함은 일본함대의 일부일 뿐이며 최소한 1척 아니면 2척의 항공모함이 더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16기동부대의 킨케이드 소장에게 북서쪽 방면으로 400km 거리를 정찰하라고 명령했다.

24일 12시 29분에 돈틀레스 16대와 아벤저 7대가 폭탄과 어뢰를 장비한 채로 정찰비행을 위하여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한편 류조는 아군 정찰기로부터 미국항공모함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자 24일 오후 1시에 과달카날 북방해상에서 예정대로 제로기 15대와 99식 함상폭격기 6대를 헨더슨 비행장 폭격에 내보냈다.

이 공격대는 과달카날 섬 부근에서 라바울에서 출격한 1식 육상공격기들과 합류하여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러나 일본항공기의 접근을 미리 알고 있던 칵터스 항공대는 제223해병전투비행대대 소속의 와일드캣 12대를 내보내어 요격했다.

이 공습에서 일본군은 제로기 6대와 1식 육상공격기 9대를 잃었으며 99식 함상폭격기 6대는 전멸했다.

제232해병전투비행대대는 4대의 와일드캣을 상실했고 헨더슨 비행장의 피해는 가벼웠다.

 

24일 오후1시 45분, 플레처 제독은 결단을 내려서 제3비행전대장 펠트 중령의 지휘 하에 돈틀레스 30대와 아벤저 8대를 류조를 향하여 출격시켰다.

 

45분 후인 오후 2시 30분에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돈틀레스 2대와 산타크루즈 제도에서 이륙한 카탈리나 정찰비해정 1대가 거의 동시에 370km 거리에서 일본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를 발견했다.

2대의 돈틀레스는 폭격을 가해서 쇼가쿠에 지근탄 1발을 기록했다. 

다시 10분 후인 2시 40분에는 다른 돈틀레스 2대가 360km 거리에서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를 발견하고 역시 폭격을 가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헀다.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아벤저 7대 중 6대는 류조 중심의 견제부대를 발견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패했다.

4대의 아벤저가 류조를 노리고 달려들었으나 2대는 어뢰를 발사해보기도 전에 제로기에 의하여 쫓겨났고 2대는 어뢰발사에 성공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중순양함 도네를 노리고 달려든 아벤저 2대도 역시 제로기에 의하여 어뢰를 발사해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으며 1대는 격추당했다.

 

오후 2시를 넘어가면서 통신불량 문제가 제61기동부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를 출격한 돈틀레스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2시 30분에 발신한 쇼가쿠 및 즈이가쿠 발견보고는 새러토가에서는 수신되었으나 정작 출격시킬 예비대를 가진 엔터프라이즈에서는 수신되지 않았다.

플레처 제독은 류조를 향해 날아가는 펠트 공격대 중에서 돈틀레스 1개 비행대대를 새로 발견된 일본항공모함 쪽으로 돌리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펠트 공격대와 통신이 되지 않았다.

 

펠트 공격대는 일본군의 강력한 항공모함부대가 새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24일 오후 3시 50분에 류조 상공에 도달했다.

펠트 중령은 모든 공격력을 항공모함에 집중시키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30대의 돈틀레스들이 4,300m 상공에서 급강하하면서 류조를 노리고 30발의 450kg 짜리 폭탄을 투하했다. 

앞서 엔터프라이즈를 출격한 뇌격기들의 공격을 무사히 막아낸 제로기 9대가 다시 요격했으나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많았다.

류조는 교묘한 기동으로 처음 몇 발의 폭탄은 무사히 피했으나 결국 4발을 얻어맞았다.

 

돈틀레스들이 급강하 폭격을 하는 동안 8대의 아벤저들은 저공으로 내려와 어뢰공격을 가하였다.

아벤저들은 4대씩 2개 편대로 나뉘어 류조의 함수 쪽에서 접근하다가 거리가 800m 에 이르자 60m 상공에서 일제히 어뢰를 발사하고는 이탈했다.

이 어뢰들 중 1대가 명중했다.

 

불과 3달 전인 미드웨이 해전 당시 투하고도가 15m 불과했던 미해군의 항공어뢰는 그 동안의 개량으로 투하고도가 4배나 완화된 것이었다.

이후로도 미해군의 항공어뢰는 뇌격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좀 더 빠른 속력으로 좀 더 높은 곳에서 투하할 수 있도록 투하조건의 완화에 중점을 두고 지속적으로 개량하게 된다. 

 

전투 개시 10분 만에 450kg 짜리 대형폭탄 4개와 어뢰 1발에 명중당한 류조는 화염에 휩싸인 채 우현으로 20도나 기울면서 모든 기능을 상실했다.

류조의 함장은 퇴함명령을 내렸다.

류조는 1942년 8월 24일 오후 8시, 과달카날 북방 320km 해상에서 전복, 침몰했으며 중순양함 도네를 비롯한 호위함정들이 생존자를 수용했다.

승무원 924명 중에서 100여명이 사망했고 류조의 함재기들은 모두 부카 기지로 날아갔다.

류조를 공격한 펠트 공격대는 1대의 희생도 없이 전원 살아 돌아왔다.

 

제61기동부대는 류조를 격침함으로써 서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제 일본의 정규함공모함인 쇼가쿠와 즈이가쿠의 공격을 막아내어야 할 입장이었다.

8월 24일 오후 2시 5분에 일본군의 수상정찰기 1대가 엔터프라이즈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했다가 격추되었다.

이로써 일본함대가 제61기동부대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플레처 제독과 제61기동부대의 승무원들은 모두 다 숨을 죽이고 일본기들의 내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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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동부 솔로몬 해전(1) - 일본함대의 남하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일본해군은 1942년 7월 14일에 잔존항공모함 6척(쇼가쿠, 즈이가쿠, 준요, 히요, 즈이호, 류조)을 모두 포함하는 제3함대를 창설하고 나구모 주이치 중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를 설욕할 기회를 노리던 야마모토 제독은 사보 섬 해전의 승리로 인하여 과달카날 부근 해역의 제해권이 일본해군에게 넘어오자 미국이 항모기동부대를 보내어 제해권을 되찾으려고 시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1942년 8월 16일에 제3함대에게 즉시 동원가능한 항공모함 3척(쇼가쿠, 즈이가쿠, 류조)를 이끌고 트럭 섬으로 남하하라고 명령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이치기 대좌의 공격 실패를 알게 되자 과달카날의 앞머리를 딴 '과호 작전' 을 발령했다.

이 작전은 트럭 섬에 있던 곤도 노부다케 중장의 제2함대와 남하 중인 나구모 중장의 제3함대를 동원하여 제8함대가 호위하는 이치기 지대의 제2진 1,500 여명을 실은 수송선단을 무사히 과달카날로 보내는 동시에 수송선단을 차단하러 나오는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를 공격하여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에 이어 사상 3번째의 함대항공전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과호 작전에 의거하여 라바울에서는 약 1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제11항공함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연일 폭격했으나 칵터스 항공대도 지지않고 와일드캣을 내보내어 반격을 가했기 때문에 비행장에 끼친 피해는 미미했다.  

그러자 라바울의 제17군과 제8함대 사령부는 수송선단의 안전을 위하여 제3함대의 함재기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드웨이에서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나구모 제독은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해 달라는 요청은 거절하고 대신 경항공모함인 류조가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헨더슨 비행장이 마음에 걸린 제8함대는 8월 22일 밤에 수송선단의 호위를 맡은 제2수뢰전대에서 구축함 가게로와 가와카제를 빼내어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게 했으나 구축함 2척의 화력으로는 비행장에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기 어려웠다.

가게로와 가와카제는 8월 23일 새벽에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아이언바텀사운드에서 수송함 포말하우트와 알헤나

를 호위하고 과달카날에 도착한 구축함 블루, 헨리 및 헬름과 마주쳤다.

미구축함들보다 먼저 상대를 발견한 가게로와 가와카제는 교전을 회피하고 산소어뢰를 잔뜩 뿌린 다음 고속으로 달아났다.

 

미구축함의 선두에 섰던 블루는 23일 새벽 3시 55분에 4,600m 전방을 고속항진 중인 가와카제을 레이더로 발견했다.

블루와 가와카제 간의 거리가 2,900m 로 줄어든 3시 59분에 가와카제가 발사한 산소어뢰 중 1발이 블루의 함미 바로 뒷쪽으로 접근했다.

이 어뢰는 함미를 약 2m 정도 비껴갔으나 예민한 어뢰의 신관이 블루가 만든 물살에 부딪혀서 폭발했다.

블루의 함미 쪽에서 커다란 오렌지빛 폭발이 일어나면서 블루의 키와 프로펠러가 흔적도 없이 날아갔고 함미의 수병과 장비들이 15m 나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 폭발로 수병 9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다.

재빠른 승무원들의 대처 덕분에 블루는 침몰을 면하고 툴라기 항에 예인되었으나 전투함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다.

결국 그날 저녁에 터너 제독은 블루를 처분하라고 명령했다.

 

8월 23일 오전 7시 50분에 칵터스 항공대의 와일드캣 1대가 툴라기 북방 160km 해상에서 가와카제를 발견하고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수병 1명을 부상시키는데 그쳤다. 

 

제3함대 사령관 나구모 중장은 트럭 섬에 도착하면 제2함대 사령관인 곤도 중장과 작전을 협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치기 지대가 전멸했다는 보고를 받은 야마모토 제독이 급히 출항을 명령하는 바람에 제대로 작전을 조율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해상으로 나섰다.

그리하여 안 그래도 제2함대, 제3함대, 제8함대가 연합한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의 일본함대는 사전 조율이 미흡한 이유도 있어서 상당히 복잡한 전투서열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 전력의 핵심은 나구모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공격부대였다.

항공모함 2척(쇼가쿠, 즈이가쿠)과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공격부대는 제로기 53대, 99식 함상폭격기 41대, 97식 함상공격기 36대등 총 130대의 함재기와 수상정찰기 1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의 항공모함 쇼가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공격부대의 전방에는 아베 히로아키 소장이 지휘하는 전위부대가 있었다.

전위부대는 전함 2척(히에이, 기리시마), 중순양함 3척(스즈야, 구마노, 치쿠마), 경순양함 1척(나가라), 그리고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본해군의 전함 기리시마.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다시 전위부대의 전방에는 곤도 제독이 지휘하는 지원부대가 있었다.

지원부대는 중순양함 5척(아타고, 마야, 다카오, 묘고, 하구로), 경순양함 1척(유라), 수상기 모함 1척(치토세), 그리고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수상정찰기 2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실전에서는 아베 소장의 전위부대와 곤도 중장의 지원부대는 사실상 같이 움직였고 아베 소장은 제3함대 소속이지만 전술적으로는 제2함대 사령관인 곤도 제독의 명령을 받았다.

 

하라 다다이치 소장의 견제부대는 일종의 미끼역할을 맡았다.

경항공모함 1척(류조), 중순양함 1척(도네),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져 제로기 16대와 97식함상공격기 21대를 보유한 견제부대는 공격부대의 90km 전방에 나아가서 헨더슨 비행장을 공습함으로써 미국항모기동부대의 공습을 유도할 예정이었다.

그 동안 쇼가쿠와 즈이가쿠를 출발한 일본함재기들이 미국항모들을 덮친다는 계획이었다.

 

(일본해군의 경항공모함 류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치기 지대의 제2진 1,500명을 실은 수송선단은 주력함대의 서쪽에서 남하했다.  

선단은 수송선 3척(보스턴마루, 다이후쿠마루, 긴류마루)와 제1차 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한 경비함 4척(제1호, 제2호, 제34호, 제35호)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비함 4척도 인원과 물자를 수송하고 있었다.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호위함대는 경순양함 1척(진츠) 및 구축함 5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별도로 사보 섬 해전의 영웅인 미카와 군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중순양함 4척(죠카이, 아오바, 기누가사, 후루다카)이 외곽에서 이중으로 호위했다.

 

주력함대의 전방에서는 트럭 섬에서 파견한 잠수함 6척이 정찰과 함께 필요하면 공격을 가할 목적으로 일렬로 전진했고 렌넬 섬 남쪽 해상에는 라바울에서 파견한 잠수함 3척이 역시 같은 목적을 띄고 파견되었다.

이외에도 약 1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라바울의 제25항공함대에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하여 수송선단의 안전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러한 일본함대의 총 전력은 항공모함 2척, 경항공모함 1척, 전함 2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3척, 수상기 모함 1척, 구축함 25척, 잠수함 9척에 함재기 167대, 수상정찰기 23대(전함 및 순양함 소속의 수상정찰기는 제외)로 이루어져 있어서 상당히 강력한 편이었다.

 

한편 진주만의 암호해독반은 일본해군의 통신을 해석하여 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의 일본함대가 트럭 섬으로 남하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고 이 첩보는 해안감시대원과 연합군의 정찰로 확인되었다.

 

일본해군은 1942년 8월 1일을 기하여 해군용 암호인 JN25 의 해독용 난수표를 전면 교체했다.

이 조치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함대의 구성, 목적 및 항로, 지휘관까지 정확하게 파악하여 미해군의 승리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진주만의 암호해독반은 8월 초부터 완전한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만일 진주만의 암호 해독반이 8월 초에도 여전히 미드웨이 해전 때처럼 일본군의 통신을 모두 해석할 수 있었다면 사보 섬 해전의 결과도 전혀 다르게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암호 해독반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부분적으로 해독에 성공한 첫 성과물이 바로 일본제3함대의 남하를 탐지해 낸 것이었다.

8월 말이 되어서도 진주만의 암호해독반은 일본해군의 암호를 정확하게 해독해내지 못했고 결국 현장지휘관인 플레처 제독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어서 판단을 그르치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된다.

 

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의 일본함대가 트럭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곰리 제독은 제61기동부대 사령관 플레처 제독에게 과달카날 동방 해상으로 나아가서 남하하는 일본함대를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진주만에서는 니미츠 제독이 하와이를 지키던 마지막 항공모함인 호넷 중심의 제17기동부대를 8월 17일에 남태평양으로 파견했으나 제17기동부대는 동부 솔로몬 해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제61기동부대는 항공모함 3척(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 와스프)을 중심으로 하는 3개의 기동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플레처 제독 자신이 지휘하는 제11기동부대는 항공모함 새러토가를 중심으로 중순양함 2척(미니애폴리스, 뉴올리언스), 구축함 5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와일드캣 36대, 돈틀레스 37대, 아벤저 15대 등 88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토머스 킨캐이드 소장이 지휘하는 제16기동부대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신형전함 1척(노스캐롤라이나), 중순양함 1척(포틀랜드), 대공경순양함 1척(애틀랜타),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와일드캣 36대, 돈틀레스 37대, 아벤저 15대 등 총 88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레이 노이즈 소장이 지휘하는 제18기동부대는 항공모함 와스프를 중심으로 중순양함 2척(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대공경순양함 1척(산후앙), 그리고 구축함 7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와일드캣 29대, 돈틀레스 36대, 아벤저 15대 등 총 80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61기동부대 전체로는 항공모함 3척, 신형전함 1척, 중순양함 5척, 대공경순양함 2척, 구축함 1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와일드캣 101대, 돈틀레스 110대, 아벤저 45대 등 총 256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CV-3 새러토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따라서 제61기동부대는 일본함대에 비하여 수상함 전력은 다소 열세이나 함재기 전력은 256대로 167대를 보유한 일본함대보다 오히려 훨씬 강했다. 

그러나 플레처 제독의 판단 실수로 제18기동부대가 전투에 참가하지 못함에 따라 제61기동부대의 함재기 수는 176대로 대폭 감소하여 일본함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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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테나루 전투(3) - 이치기 지대의 전멸

 

베린다 강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이치기 대좌는 브러시 대위의 공격을 받고 겨우 살아돌아온 정찰대원들로부터 시부야 정찰대가 전멸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이치기 대좌는 이제 해병대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았으니 방어선을 굳히기 전에 공격을 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일루 강을 향하여 출발했다.

 

8월 20일 오후 10시 30분경 일루 강 동쪽 3km 지점에 설치된 청음초의 해병대원들은 동쪽으로부터 접근해 오는 이치기 지대를 발견하고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하여 일루 강 방어선의 해병대원들에게 일본군의 출현을 알린 다음 재빠르게 후퇴하여 일루 강 하구의 모래사장을 통하여 교두보 내로 철수했다.

21일 새벽이 되자 이치기 지대의 선두가 일루 강 동쪽 제방에 도달하여 일루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 제방에 방어선을 펴고 있던 제2/1대대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이치기 대좌는 일루 강 하구에 모래사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모래사장을 통하여 주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주공으로 선정된 약 200 명은 전원 착검하고 최대한 빨리 모래사장을 건너는 것을 목표로 하여 도중에 사격하느라고 멈추지 말고 바로 해병대의 방어선까지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2년 8월 21일 오전 3시 10분, 일본군이 쏘아올린 붉은 빛 조명탄을 신호로 일본군의 제1차 돌격이 실시되었다.

이에 질세라 미군 측에서도 즉시 조명탄을 쏘아올려 모래사장을 비추었다.

조명탄 불빛 아래 일본군 장교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돌격명령을 내리자 착검한 200 명의 일본군들은 총알 1발도 쏘지 않은 채 무서운 속력으로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곧 제2/1대대의 모든 화기가 이들을 맞았다.

소총과 BAR 는 정면에서 총알을 쏟아내었고, 화기중대인 H 중대에서 파견된 7.62mm 기관총들은 주로 일본군의 좌측에서 치명적인 측사를 가했다.

제1해병연대의 화기대대인 제1화기대대의 37mm 대전차포들이 산탄을 발사하여 한꺼번에 일본군들을 쓸어버렸다.

중간에 철조망에 걸려서 조금이라도 멈칫거리면 바로 기관총탄이 날아들어 벌집을 만들었다.

 

해병대의 방어선에는 미처 철조망이 처져 있지 않은 곳이 있어서 일본군의 일부가 이틈을 통해 제2/1대대의 방어선에 도달하여 개인호 몇 곳을 차지했다.

그러나, 주변의 해병대원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일루 강 방어선 일부가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2/1대대장 폴록 중령은 망설이지 않고 즉각 대대의 예비대인 G 중대를 투입했다.

그동안 방어선에서는 해병대원들이 일본군이 차지한 개인호 부근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곧이어 G 중대가 도착하여 개인호를 차지한 일본군들을 몰아내었다.

일본군들은 대부분 개인호 안에서 죽음을 당했고, 일부는 부상을 당한 채 다시 강 건너로 달아났다.

 

첫 돌격이 이렇듯 비참한 실패로 끝났으나 이치기 대좌는 포기하지 않고 제2차 돌격을 준비했다.

제2차 돌격은 모래사장을 바로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해안쪽으로 우회하여 제2/1대대의 해안 쪽 방어선을 공격하기로 했다.

제1차 돌격 때 제2/1대대의 방어선 전체를 포격했던 일본군의 보병포 2문과 척탄통들, 그리고 모든 기관총들은 모래사장에 바로 인접한 방어선만 집중 공격했다.

 

21일 오전 5시에 2번째 돌격이 실시되었다.

참가인원은 300 명으로 더 많았으나, 전과는 제1차 돌격 때보다 훨씬 떨어졌다.

모래사장을 우회하여 바닷물을 헤치고 돌격하려니 속력이 떨어졌고 환한 조명탄 아래에서 해병대원들은 침착하게 사격연습을 하듯 느릿느릿 접근하는 일본군들을 하나하나 저격했고, 37mm 대전차포들은 산탄을 발사하여 한꺼번에 쓸어 버렸다.

그 동안 75mm 곡사포 12문을 보유한 제3/11포병대대와 81mm 및 60mm 박격포들은 화력지원을 위하여 일루 강 동쪽에 집결한 일본군들을 사정없이 두드렸기 때문에 돌격하는 일본군 병력들은 약속된 화력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결국 제2차 돌격은 방어선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21일 동이 트자 제2/1대대장 폴록 중령은 상황을 평가했다.

비록 접전 지역에서 병력은 열세였지만 제2/1대대는 절대적인 지형적 잇점을 누리고 있었으며 충분한 화력지원을 받고 있었다.

폴록 중령은 사단본부에 추가병력 지원없이도 방어선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사단작전참모 제럴드 토마스 중령은 반데그리프트 사단장에게 사단예비대인 크리스웰 중령의 제1/1대대를 즉각 투입하여 일본군을 포위섬멸하자고 주장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이 이 주장을 받아들임에 따라 제1/1대대는 21일 오전 7부터 일루 강 상류에 만들어 둔 다리를 건너 이치기 지대의 배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선두의 C 중대는 가장 멀리 전진하여 테나루 마을을 점령함으로써 해안을 통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동안 A 중대와 B 중대가 일본군을 배후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며, 화기중대인 D 중대는 일루 강 동쪽 제방을 따라 전진하면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테나루 전투 상황도)

 

21일 오전 9시가 되자 제1/1대대의 각 중대는 전투개시선을 통과했다.

테나루 마을에 접근한 C 중대는 마을을 방어하고 있는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을 발견했다.

C 중대는 곧 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제1/1대대의 나머지 중대들은 이치기 지대의 뒷쪽으로부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갔다.

포위될 위험성에 처한 일본군들은 필사적으로 탈출로를 찾았다.

일부 병력은 무모하게도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치다가 해병대의 조준사격에 좋은 표적이 되어 모두 사망했다.

이치기 지대의 살아남은 병력들은 아직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은 해안지역을 통하여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했다.

 

테나루 마을을 공격하던 C 중대는 즉시 서진하여 일본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긴급명령을 받고 테나루 공격을 포기하고 서진하여 오후 2시에 이치기 지대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미 100 명 가까운 일본군이 포위망의 틈을 통해서 탈출에 성공한 후였다.

 

이제 포위망 속에 갇힌 일본군에게는 절망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과 동쪽에서는 제1/1대대가 시시각각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고, 서쪽으로 밀려나갔다가는 여지없이 일루 강 대안에 포진한 제2/1대대가 쏘아대는 총알과 박격포탄 세례를 받았다.

하늘에서는 전날 도착한 와일드캣들이 저공비행하면서 일본군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하고, 해병대가 기다리는 죽음의 덫 속으로 일본군들을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치기 지대는 일본육군에서도 상당한 정예부대였으므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휘체계를 유지하면서 처절하게 저항을 계속했다.

 

포위된 일본군들이 예상 밖으로 격렬하게 저항하자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해가 지기 전에 전투를 끝내기 위하여 오후 3시에 경전차 5대로 이루어진 1개 소대를 모래사장을 통하여 투입했다.

일본군들은 대전차 지뢰를 사용하여 5대 중 2대를 파괴했다.

승무원은 다행히 모두 구출되었으나, 일본군의 저항에 놀란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전차를 보호하기 위하여 제2/1대대를 급히 투입했다.

나머지 3대의 스튜어트 경전차들은 제2/1대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제1/1대대와 맞서고 있는 일본군의 배후를 강타했다.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 드디어 일본군의 전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차는 달아나는 일본군의 등 뒤에 기관총을 난사하고, 37mm 주포로 산탄을 발사하면서 가차없이 추격했고, 전차의 캐터필러는 쓰러진 자들을 산 자건 죽은 자건 죽어가는 자건 가리지 않고 모두 깔아뭉개면서 전진했다.

전투의 마지막 부분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던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경전차의 캐터필러가 꼭 고기 으깨는 기계처럼 되었다고 회고했다.

오후 7시가 되자 마침내 포위망 속의 일본군이 전멸하면서 처절한 전투가 끝났다.

 

테나루 전투에 참가했던 이치기 지대의 병력들 중 부상자 30 여명을 포함하여 탈출에 성공한 126명은 그날 밤에 타이부 곶에 집결했다.

테나루 전투에서 이치기 지대의 피해는 엄청났다.

포위망에 남겨진 일본군 중 부상자 12명을 포함한 15명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는데 이치기 대좌도 이때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타이부 곶에 상륙한 병력 916명에서 탈출한 병력 126명과 포로 15명, 그리고 브러시 정찰대에게 사살당한 하야시 정찰대의 31명을 빼면 테나루 전투의 전사자는 744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미해병대의 기록은 약 800명이며 일본측의 기록은 약 770 명인데 일본측 기록에는 하야시 정찰대의 전사자도 포함되어 있다.

 

미해병대의 전사자는 34명, 부상자는 75명이었다.

제2/1대대가 25명의 전사자와 44명의 부상자를 기록했고, 제1/1대대가 7명의 전사자와 13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사단 직속의 화기대대에서 2명의 전사자와 14명의 부상자, 제1해병연대의 화기중대에서 1명의 부상자, 그리고, 본부요원및 지원요원 중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테나루 전투 이후 일루 강 하구의 모래사장에 널브러진 일본군 시체들)

 

테나루 전투가 끝난 후에 해병대는 소총 700 정, 중기관총 10정, 경기관총 20정, 척탄통 20문, 권총 20정, 군도와 수류탄들, 70mm 보병포 2문, 대량의 폭약, 그리고 12정의 화염방사기를 노획했다.

일본군은 이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노획한 일본군의 화염방사기를 시험해보고 있는 해병대원)

 

미군이 집계한 일본군 전사자 수가 대략적인 이유는 악어들이 많은 일본군 시체를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시체 썩는 냄새를 맡은 악어들은 테나루 전투 다음날부터 일루강 하구에 몰려들어 매일같이 강가에 쓰러진 일본군 시체를 포식했다.

아무 생각없이 일루강을 헤엄쳐 건너기도 했던 해병대원들은 몰려든 악어들을 보고 기겁했고 곧 일루강에 악어샛강(Alligator Creek) 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밤마다 악어들이 일루강 동쪽 제방의 개인호에 뛰어들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해병대가 서둘러 일본군 시체를 매장해버린 뒤에야 악어들은 원래 서식지로 돌아갔다.

 

해병제1사단 장병들은 처절한 전투의 전장이었던 일루강 하구의 모래사장에 '지옥의 곶' 이란 뜻을 가진 헬즈포인트(Hell's Point) 라는 별명을 붙였다.

따라서 이치기 지대와의 전투도 과달카날 전투기간 동안에 제1해병사단의 장병들은 '헬즈포인트 전투' 로 불렀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후 미해병대는 이 전투의 이름을 당시 잘못 표시된 지도의 명칭을 따서 '테나루 전투(Battle of Tenaru)' 로 명명했다.

 

지도가 잘못된 걸 해병대가 언제 알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종전 이후에는 테나루 전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당시 지도가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해병대의 공식전사에서는 이 전투의 이름이 '일루 전투(Battle of Ilu)' 로 바뀔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병대는 1949년에 편찬한 종전 이후 최초의 미해병대 공간전사인 존 짐머만 소령의 'The Guadalcanal Campaign' 에서 테나루 전투라는 기존의 잘못된 용어를 공식화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미해군 전사를 편찬한 모리슨 제독도 뜻밖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미해병대는 1965년부터 1972년 사이에 편찬한 'History of Marine Corps Operations in World War II' 시리즈에서도 테나루 전투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1995년에 종전 50주년을 기념하여 편찬한 'Marines in World War 2 Commemorative Series' 에서는 테나루 전투 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고 별도의 공식적인 용어없이 제1해병연대와 이치기 지대와의 전투를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는 1942년 8월 21일에 과달카날 섬의 일루 강 하구에서 제1해병연대와 일본육군 이치기 지대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무력충돌을 일컫는 미해병대의 공식 명칭은 여전히 '테나루 전투(Battle of Tenaru)'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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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테나루 전투(2) - 이치기 지대의 접근

 

미해병제1사단은 상륙 초기부터 교두보의 동쪽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교두보 동쪽의 테테레 마을 부근에는 약 13 x 13km 크기의 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었는데 미군은 이곳에 2번째 비행장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8월 12일에 일단의 공병대원들이 존 자침 소위가 지휘하는 A/1/1 중대 소속 1개 소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비밀리에 이 초원지대를 조사했다.

다음날 자침 소위는 테테레 마을에서 두하메 신부를 만났는데 그는 일단의 일본군들이 동쪽의 타이부 곶과 오스텐 산 사이를 돌아다닌다고 제보했다.

이시모토 병조와 그 부하들이었다.

자침 소위는 교두보로 복귀하면서 미국인인 두하메 신부에게 일본군에게 잡히면 생명을 잃기 십상이니 같이 해병대의 방어선 안으로 들어가자고 설득했으나 두하메 신부는 사양했다.

결국 두하메 신부는 나중에 다른 신부 1명 및 수녀 2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살해되었다. 

 

8월 14일에 해병대 교두보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영령 솔로몬 제도 방어군(BSIDF = British Solomon Islands Defence Force)' 이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원주민 의용군 60명이 사령관 마틴 클레멘스 영국육군대위의 지휘 하에 주둔지인 아올라 만 지역을 떠나 고립된 동맹군인 미해병제1사단을 '지원' 하기 위하여 도착한 것이었다.

전쟁 전에 툴라기와 과달카날 지역에서 경찰로 일했던 원주민들로 구성된 BSIDF 의 병사 중 소총으로 무장한 인원은 20명 정도였고 나머지 40명은 비무장이었다.

비무장의 원주민 40명은 양손 가득 신선한 열대과일을 들고 도착하여 해병대원의 환영을 받았다.

원주민들은 미군이나 일본군보다 정글에 익숙하고 청각과 후각도 예민했기 때문에 정찰병과 안내역으로 해병대의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8월 18일에 클레멘스 대위는 원주민 정찰병의 보고를 토대로 일본군이 해병대의 교두보에서 동쪽으로 35km 정도 떨어진 타이부 곶에 통신장비를 설치했다고 보고했다.

 

그날밤 교두보의 해안을 경비하던 해병대원들은 일본구축함이 앞바다를 항행하는 소리를 들었고 잠시 후에는 배가 지나갈 때 생기는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왔다.

새벽이 가까워왔을 때 돌아가던 일본구축함들이 툴라기와 과달카날에 함포 사격을 가하고 사라졌다.

 

8월 19일 오전 7시, 제1해병연대 제1대대 A 중대장인 찰스 브러시 대위가 A 중대원 중 자침 소위를 비롯한 80명을 이끌고 BSIDF 소속의 원주민 4명의 안내를 받으면서 동쪽으로 정찰을 떠났다.

BSIDF 의 지휘관 클레멘스 대위는 브러시 정찰대와는 별도로 25년간 툴라기에서 경찰로 일하여 영어가 유창하고 8월 10일부터 교두보에 들어와서 해병대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자콥 보자 상사를 정찰목적으로 파견했다.

 

19일 정오를 막 지난 시간에 브러시 정찰대를 안내하던 원주민들이 일단의 일본군을 발견했다. 

시부야 대위가 이끄는 34명의 일본군 정찰대가 제대로 경계도 하지 않은 채 해안도로와 북해안 사이의 평지를 걸어오고 있었다.

브러시 대위는 자침 소위에게 병력의 절반을 이끌고 일본군의 남쪽으로 우회하여 포위공격하라고 명령한 다음 진형을 갖추고 일본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19일 오후 1시 15분에 일본군이 전방 100m 지점에 도달하자 브러시 대위는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동시에 자침 소위의 병력도 남쪽으로부터 일본군을 공격했다.

55분간의 치열한 총격전 끝에 34명의 일본군 중 장교 4명을 포함한 31명이 사살되고 3명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브러시 정찰대에서는 3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의 시체를 조사한 브러시 대위는 이들이 새로 상륙한 병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전사한 일본군의 헬멧에는 해군육전대의 표식인 닻과 국화 대신 일본육군의 표식인 별이 그려져 있었고 깨끗한 군복의 상태는 그들이 최근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본육군의 표식)

 

(해군육전대를 포함한 일본해군의 표식)

 

사살된 일본군들은 모두 깨끗하게 면도를 한 상태였고 잘 먹어서 피둥피둥한 것이 며칠째 하루 두끼로 버티고 있는 해병대보다 영양상태가 좋아 보였다.

일본군 장교들의 시체에서는 육지에서 함정을 호출하는 암호를 비롯한 몇몇 문건이 나왔는데 브러시 대위를 놀라게 한 것은 손으로 그린 여러장의 지도였다.

비록 손으로 그렸지만 대단히 정확한 이 지도에는 해병대의 외곽 방어 상태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해병대 방어선의 약점이 낱낱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시모토 병조와 그 부하들이 오스텐 산에서 교두보를 관찰하면서 그린 지도였다.

 

한편 브러시 대위보다 더 전방에서 단신으로 일본군을 정찰하던 보자 상사는 베란드 강 부근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보자 상사가 성조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일본군들이 그를 잡아서 이치기 대좌에게 끌고 갔다.

이시모토 병조가 전쟁 전에 툴라기에서 경찰로 일하던 보자를 알아보았다.

일본군은 해병대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으라면서 총검으로 보자의 손목을 찌르는 등 고문을 가했다.

보자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이치기 대좌는 공격을 위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보자를 살해하라고 명령했으나 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마음이 급해서 결박당한 채 누워있는 보자의 목을 총검으로 한차례 찌른 다음 급히 부대를 따라갔다.

천만다행으로 이 총검은 보자의 후두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가서 보자는 목숨을 건졌다.

 

중상을 입은 보자 상사는 혼자서 결박을 풀고 기어서 해병대 교두보로 돌아와 클레멘스 대위에게 이치기 지대가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보자의 상태를 보고 놀란 클레멘스 대위가 즉시 후송하려 했으나 보자는 거부하고 이치기 지대의 규모와 무기 등 막대한 전술적 가치를 지닌 귀중한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한 이후에야 정신을 잃고 야전병원으로 실려갔다.

애당초 보자는 출혈이 심하여 살아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뿐 아니라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어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정찰병으로서 미군을 위하여 일했다.

 

당시 보자 상사의 행동은 정예 병사들도 하기 힘든 용감하고 훌륭한 행동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12월 31일에 보자의 용기를 기려 은성훈장을 주었으며 5일 후인 1943년 1월 4일에는 영국정부에서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영예인 죠지 메달을 수여했다.

보자는 1979년 11월 12일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자콥 보자는 1984년 3월 15일에 사망했는데 그의 장례식에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조전을 보내왔고 미해병대는 리스톤 웨익필드 대령을 파견하여 진주만의 전함 애리조나 기념관에 게양되었던 성조기를 보자의 미망인에게 기증했다. 

지금도 호니아라의 솔로몬 제도 공화국 경찰청사 앞에는 자콥 보자의 동상이 서 있고 그를 모델로 하는 우표가 발행된다.

 

해병대는 교두보 방어를 위하여 5개 대대 중 4개 대대를 주로 해안방어에 투입하고 제1/1대대를 예비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제1/1대대를 동쪽으로 진격시켜 이치기 지대와 전투를 벌여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치기 지대가 미끼가 아닐까 의심했다.

만일 이치기 지대를 찾아 사단의 유일한 예비대인 제1/1대대를 동쪽으로 진출시킨 사이에 일본군 주력이 해안에 역상륙하면 예비대없이는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게다가 교두보 서쪽을 방어하는 제5연대의 1개 대대는 19일에 교두보 서쪽의 마타니카우 마을과 코컴보나 마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일시 점령했다가 19일 저녁에야 교두보 내로 막 철수한 상태였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유일한 예비대를 교두보 밖으로 파견하는 모험을 하기보다 제2/1대대가 방어선을 펴고 있는 일루 강 하구에서 이치기 지대를 막아내기로 결정했다.

 

일루 강 하구를 방어하고 있던 제2/1대대장 에드윈 폴록 중령은 방어선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폴록 중령이 받은 명령에는 75mm 곡사포에 의한 화력지원 이외에 제2/1대대에 대한 병력지원은 없다고 되어 있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이치기 지대가 해병대 병력을 동쪽으로 끌어내어 일본군 주력의 역상륙을 용이하게 만들려는 미끼일 수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증원불가 방침은 당연한 조치였다. 

 

폴록 중령은 즉시 일루 강 하구에 방어선을 펴고 있던 E 중대 및 F 중대에게 방어선을 강화하라고 명령하고 화기중대인 H 중대를 전방으로 진출시켰다.

그리하여 H 중대의 7.62mm 수랭식 기관총을 보유한 기관총 소대들이 보병중대 사이에 자리잡았고 6문의 37mm 대전차포도 보병에 치명적인 산탄을 준비하고 방어선 바로 뒤쪽에서 대기했다.

81mm 박격포들도 중대의 60mm 박격포들과 함께 화력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었으며 후방에서는 75mm 곡사포가 20일 저녁까지 일루 강 하구를 겨냥하여 시험사격을 실시, 사격제원을 확보했다.

일루 강으로부터 3km 동쪽으로 떨어진 지점에는 일련의 청음초를 설치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감시했고, 보병중대의 방어선 앞쪽에는 철조망을 쳤다.

그러나 철조망이 모자라서 방어선 전체를 완전히 둘러치지는 못했다.

이렇듯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제2/1대대는 숨을 죽이고 이치기 지대의 공격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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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테나루 전투(1) - 이치기 지대의 상륙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일루 강 하구이지만 당시 해병대의 지도에 일루 강이 테나루 강이라고 잘못 기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테나루 전투라는 명칭이 붙었다.)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보고를 받은 일본대본영은 상륙한 미군의 규모와 그 목적에 대하여 육군부와 해군부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우왕좌왕했다.

 

처음에는 육군부와 해군부 공히 상륙한 미군의 규모는 2,000 명 정도이며 그 목적은 과달카날에 건설 중인 일본해군의 비행장을 파괴하고 철수하는 일종의 견제작전으로 생각했으나 8월 10일에 해군부는 입장을 바꾸었다.

연합함대는 과달카날 상륙에 투입된 미군수송선을 40척으로보고 있었는데 이는 단순한 견제작전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결국 8월 10일에 대본영 해군정보부는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군이 15,000명의 병력을 가진 해병1개 사단이며 목적은 과달카날을 점령하여 확보하는데 있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과달카날을 탈환할 지상군 병력을 제공해야 하는 육군부는 해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향후 서아시아와 중경공략작전에 중점을 두고 싶어하던 육군작전부장 다나카 중장은 과달카날 상륙 직후 트럭으로 진출하겠다고 결정한 연합함대의 저의를 의심했다.

그는 야마모토 제독이 미드웨이에서 격멸하지 못한 미함대와 함대결전을 치르고 싶어서 과달카날 상륙을 이용한다고 보았으므로 해군정보부가 제시한 1개 사단이라는 숫자도 그러한 이유로 과장한 것으로 생각했다.

육군부가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군이 1개 사단 규모라는 해군부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피의 능선 전투 이후였다.

 

육군부는 원래 과달카날에서 작전한다는 어떠한 구체적인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남태평양 지역에서 육군의 당면 목표는 뉴기니 남부의 항구이자 비행장인 포트모레스비였다.

해상으로부터 포트모레스비를 탈취하려는 계획이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으로 무산된 이후 육지로부터의 공격을  통하여 포트모레스비를 점령하기 위하여 뉴기니 북해안에 대군을 상륙시켜 오웬스탠리 산맥을 넘어가는 작전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 과달카날에 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육군부 내에서 그 섬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라바울에 위치한 현지 사령부인 제17군 사령관 햐쿠다케 하루요시 중장조차도 미해병대가 상륙한 이후에야 해군이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였다.

 

대본영 육군부는 이러한 상황판단에 근거하여 1942년 8월 10일에 제17군 사령부에 제7사단 제28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부대를 과달카날에 상륙시켜 미군을 물리치고 과달카날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약 2,300 명의  병력을 보유한 이 공격부대는 제28연대장 이치기 기요나오 대좌의 이름을 따서 이치기 지대로 명명되었다.

이에 해군부는 적의 전력이 약 1개 사단에 해당하므로 최소한 2-3개 사단 이상을 상륙시켜 동시에 대규모 공세를 펼쳐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부의 병력증강요구에 시달리던 육군부는 며칠 후 약 4,000 명의 병력을 가진 가와구치 소장의 제35여단을 추가로 과달카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더 이상의 요구는 단호히 거절했다.

 

사실 육군부 입장에서 더 이상의 차출은 무리였다. 

가와구치 지대라고 이름붙여진 제35여단만 해도 원래 포트모레스비 공격의 조공 격인 밀른 만 전투에 증원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과달카날로 돌려지면서 밀른 만 전투에서 호주군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과달카날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려면 포트모레스비 점령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상당기간 연기해야만 했는데 그러려면 과달카날에 1개 사단의 미군이 있다는 합당한 근거가 필요했다.

그러나 해군부는 과달카날에 미군 1개 사단이 있다는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괌에 주둔하고 있다가 미드웨이 해전 당시 상륙부대로 선정되었던 제28연대는 일본함대의 참패로 미드웨이 상륙이 무산되자 다시 괌에 돌아가 있었다.

제28연대는 8월 12일에 2척의 수송선(보스턴마루, 다이후쿠마루)에 실려 트럭환초에 도착했다.

트럭환초에서 과달카날 섬까지는 안전을 위하여 구축함으로 수송하기로 했다.

 

8월 11일에 갑자기 제8함대로부터 수송명령을 받은 다나카 라이조 해군소장은 불안을 느꼈다. 

예행연습은 물론 작전계획을 세우기에도 빠듯한 일정으로 공중지원도 없이 미군 1개 사단이 지킨다는 낯선 해안에 상륙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해군에서도 손꼽히는 유능한 제독 중 한 사람인 다나카 소장은 주어진 짧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단순하면서도 견조한 상륙계획을 세웠다.

안전을 위하여 상륙시간은 달이 밝은 1942년 8월 18일 야간, 상륙장소는 헨더슨 비행장에서 동쪽으로 35km 떨어진 타이부 곶으로 결정했다. 

과달카날 섬에 숨어있던 이시모토 병조와 그 부하들은 타이부 곶에 미리 나와서 무선과 손전등을 이용하여 구축함의 접안을 유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병조란 일본해군의 부사관이다.

이시모토 병조는 일본해군의 첩보부대 소속 부사관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몇년 전부터 솔로몬 군도에서 코프라를 거래하던 영국계 레버브라더스 사의 목수로 위장하여 툴라기에서 정보를 수집하다가 일본군의 툴라기 상륙 당시에는 안내 역할을 맡았다.

이후 미해병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하자 이시모토 병조는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교두보 남쪽의 오스텐 산에 은거하면서 해병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보고하는 한편 해병대 방어선의 약점을 상세하게 묘사한 지도를 여러 장 그렸다.

 

이치기 지대의 수송에 사용가능한 구축함이 6척(하마카제, 가게로, 하기카제, 다니가제, 우라가제, 아라시) 뿐이었으므로 이치기 지대 전원을 동시에 수송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치기 대좌는 병력이 약 2,300 명인 제28연대를 2개로 나누어서 제1진을 자신이 직접 이끌기로 했다.

제1진은 연대본부 163명, 대대본부 23명, 4개 중대에서 차출된 보병 420명, 기관총 중대 110명, 92식 보병포 2문을 보유한 소대 50명, 공병중대 150명, 합계 916명으로 이루어져 각자 총탄 150발, 식량 7일치를 휴대했다.

이치기 지대의 제2진은 2척의 수송선을 타고 4일 후인 8월 22일 밤에 상륙할 예정이었고 제124보병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의 가와구치 지대는 28일 밤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일본육군의 92식보병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치기 지대의 제1진을 태운 구축함 6척은 8월 16일 오전에 트럭 섬을 출발하여 8월 18일 밤에  이시모토 병조의 협조를 받아 아무런 사고없이 타이부 곶에 상륙했다.

이치기 지대를 내려준 구축함 6척은 돌아가는 길에 과달카날과 툴라기의 해병대 진지에 함포사격을 가했으나 별 피해는 입히지 못했다.

 

이치기 대좌가 13일 오후 3시에 제17군에서 받은 명령은 이러했다.

 

1. 솔로몬 방면에 상륙한 적의 병력은 불명이지만 상륙 후의 활동은 활발하다고 할 수 없다. 오늘 13일이 되도록 과달카날의 비행장을 이용하지 않고 있음은 확실하다.

2. 군은 적 점거가 끝나지 않은 것을 기회로 해군과 협동하여 신속히 솔로몬 방면의 적을 격멸하여 요충지를 탈환할 것.

3. 이치기 지대는 해군과 협동하여 우선 신속히 과달카날 비행장을 탈환할 것. 어쩔 수 없는 상황에는 과달카날 섬의 일부를 점령하여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릴 것. 이를 위해 선견대(약 900명)을 편성하여 우선 구축함 6척에 분할승함 후 곧바로 과달카날을 향해 전진할 것.

 

이 명령을 보면 당시 제17군 사령부가 과달카날을 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즉 뉴기니에 신경쓰기도 바빠 죽겠는데 갑자기 자기에게 떨어진 과달카날이라는 성가신 숙제를 어떻게든 빨리 처리해 버리려는 조급성과 함께 과달카날에 주둔한 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경향을 알 수 있다.

이치기 대좌 또한 자신감에 넘쳐서 트럭 섬에서 승선하기 직전에 제17군 참모 마츠모토 대좌에게

 

"툴라기 섬도 우리가 탈환해도 되나?"

 

라고 물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치기 대좌는 후속부대를 기다리지도 않고 916명의 제1진 병력만으로 해병대를 격멸하고 비행장을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상륙하자마자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8월 19일 새벽에 베란데 강을 건넌 이치기 대좌는 해병대가 방어선을 펴고 있는 일루 강 하구를 정찰하기 위하여 시부야 대위가 이끄는 34명의 정찰대를 서쪽으로 파견했다.

시부야 정찰대도 이치기 대좌와 마찬가지로 자신감에 넘쳐서 제대로 경계도 하지 않은 채 서쪽으로 정찰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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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게티지 정찰대

 

헨더슨 비행장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해병대의 정찰대는 교두보 서쪽을 정찰하면서 비행장 지역에서 철수한 일본군 수비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고 있었다.

해병제1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해병대의 기습적인 상륙에 놀라 전열이 흩어진 상태의 일본군 수비대에게 빠른 시간 내에 치명타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을 주면 일본군은 증원군을 파견하여 기존의 일본군 수비대를 증강시키고 재정비할 것이었다. 

 

정찰 결과 비행장 지역에서 밀려난 일본군 대다수는 교두보에서 서쪽으로 6,400m 떨어진 마타니카우 강과 그곳에서 다시 6,900m 서쪽으로 떨어진 코컴보나 마을 사이에 몰려 있었다.

 

8월 9일에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려던 해병대의 소규모 정찰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서 몇명이 부상을 입었다.

마타니카우 강의 서안에는 일본군의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어서 강을 건너기가 어려웠다.

 

8월 11일에 제1/5대대의 정찰대가 일본군 준위 한사람을 생포했다.

그는 해병대에게 자신이 소속되었던 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면서 자신의 부대는 식량도 없이 정글 속을 헤매고 다녔다면서 그들이 항복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날 오후에 해병대의 정찰대가 마타니카우 강 서안에서 백기를 보았다는 잘못된 정보가 들어왔다.

이 말을 들은 사단 정보참모 프랭크 게티지 중령은 자신이 직접 정찰대를 이끌고 가서 일본군을 항복시키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사단정보부의 스티븐 커스터 상사는 2개 분대를 거느리고 마타니카우 강 서쪽을 정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정찰대는 8월 12일 아침 6시에 상륙주정을 타고 교두보를 출발, 오전 10시경에 마타니카우 강 서쪽의 크루즈 곶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이후에는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마타니카우 강까지 전진하고 마타니카우 강에 도달하면 강의 서안을 따라 내륙 쪽으로 해가 질때까지 전진하다가 야영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강을 건너서 육로로 교두보에 복귀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정찰대의 주요 임무는 마타니카우 강 서안지역의 정찰이었지만 전원 전투병력으로 구성하여 전투에도 대비했다.

 

그런데 게티지 중령은  커스터 상사의 정찰계획을 바꾸어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찰대를 꾸렸다.

그리하여 25명의 병력 중에 전투병력은 1개 분대로 줄어들고 나머지 1개 분대는 일본어 통역인 랠프 코리 소위를 비롯한 사단정보부의 비전투병력으로 채워졌다.

항복한 일본군을 현장에서 돌보아 주기 위하여 제5해병연대의 군의관인 말콤 프랫 해군소령까지 동행했다.

게다가 출발도 12시간이나 늦어져서 정찰대를 실은 상륙주정은 오후 6시에야 출발하여 밤 10시에 크루즈 곶과 마타니카우 강 사이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3일 전에 마타니카우 강 서쪽 지역을 정찰했던 제5해병연대의 한 장교는 크루즈 곶과 마타니카우 강 사이에는 일본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티지 중령의 계획을 알고 깜짝 놀란 이 장교는 8월 12일 낮에 게티지 중령을 찾아와서 야간에 그 지역에 상륙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경고했으나 게티지 중령은 무시했다.

 

8월 12일 밤 10시에 크루즈 곶과 마타니카우 강 사이의 해안에 상륙한 게티지 중령의 정찰대는 상륙 직후 일본군의 매복공격을 받았다.

야간에 정확한 지형지물도 모르는 상황에서 적의 맹공을 받은 게티지 정찰대는 자정 무렵 3명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생존자 중 찰스 앤트 병장이 13일 새벽 5시 30분에 교두보에 도착하여 게티지 정찰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즉시 제5해병연대의 A 중대가 기관총 2정을 보유한 1개 섹션과 함께 구조를 위하여 출동했다.

이어서 제5연대 L 중대의 2개 소대도 기관총 1개 섹션을 대동하고 출발했다.

이들은 크루즈 곶 서쪽에 상륙하여 A 중대는 해안을 따라 L 중대의 2개 소대는 내륙쪽으로 들어가서 마타니카우 강을 향하여 동진하면서 수색을 벌였으나 게티지 정찰대의 흔적을 찾는데 실패했다.

일본군은 강력한 전력을 갖춘 A 중대 및 L 중대와의 충돌을 회피하여 가벼운 총격전만 있었을 뿐 수색과정에서 큰 전투는 없었다.

A 중대와 L 중대는 14일 낮에 교두보로 돌아왔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의 예측대로 일본군은 라바울에서 증원군을 파견했다.

다카하시 대위가 이끄는 요코스카 제5해군육전대 소속 113명이 8월 15일 라바울을 출발하여 16일 밤에 과달카날의 서쪽 타사파롱가 해안에 상륙했다.

제5해군육전대는 곧 동쪽으로 이동하여 17일 밤에 마타니카우 마을에 도착, 설영대와 합류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8월 17일에 헨더슨비행장에서 쫓겨난 일본군 수비대의 주력이 마타니카우 마을에 주둔 중인 사실이 확인되자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1942년 8월 18일에 제5연대의 L 중대가 교두보를 출발하여 마타니카우 강 상류에서 도하하여 남쪽으로부터 마타니카우 마을에 접근했다. 

다음날인 8월 19일 아침부터 제5연대의 B 중대가 제11연대의 75mm 및 105mm 곡사포의 화력지원 하에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 일본군의 방어선 정면을 압박했다.

 

(1942년 8월 19일의 마타니카우 마을 및 코컴보나 마을 공격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19일 오후 2시경에 L 중대가 마타니카우 마을의 남쪽 방어선에 도달하자 마타니카우 마을의 일본군들은 남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되었다.

새로 도착한 요코스카 제5해군육전대가 주축이 된 일본군들이 해병대의 맹공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마타니카우 마을의 남쪽과 동쪽에서는 오후 내내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75mm 와 105mm 곡사포의 화력지원을 등에 업은 B 중대와 L 중대는 오후 6시에 결국 일본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마타니카우 마을을 점령했다.

살아남은 일본군들은 정글로 도망갔다.

 

한편 I 중대는 상륙주정을 타고 마타니카우 마을에서 서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코컴보나 마을의 서쪽에 상륙하여 코컴보나 마을을 점령하고, 마타니카우 마을에서 쫓겨난 일본군들이 해안선을 따라 도망가지 못하도록 해안도로를 봉쇄하는 역할을 맡았다.

I 중대의 공격은 하마터면 재앙으로 끝날 뻔했다.

 

I 중대를 실은 상륙주정들이 코컴보나 마을 서쪽의 상륙해안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일본군의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이 나타나서 포격을 퍼부었다.

다행히 1척도 포탄을 맞지는 않았으나 대경실색한 주정 승무원들이 가장 가까운 해안에 무조건 주정을 접안시켰는데 하필이면 바로 일본군의 방어선 코앞이었다.

주정이 해안에 접근하자 일본군의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배후에 일본군의 순양함과 구축함이 버티고 있어서 I 중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장한 각오로 전원 착검한 I 중대의 해병대원들은 주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섬이 떠나갈듯한 함성을 지르면서 뛰쳐나와 일본군 방어선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돌격했다.

일본군이 즐겨쓰던 반자이 돌격의 해병대판이었다.

 

I 중대는 운이 좋았다.

코컴보나를 지키던 소수의 일본군은 자기편 해군에게 쫓겨온 줄도 모르고 자기들 바로 코앞에 보란듯이 주정을 들이미는 미군의 뻔뻔함에 이미 반쯤 기가 죽어 있던 상태였다.

거기다가 기관총 사격에도 불구하고 미친듯이 괴성을 지르면서 전속력으로 돌격해 오는 살기등등한 해병대원들을 보고는 그만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1개 소대가 채 안되는 소수의 일본군 수비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일제히 등을 돌려 정글로 도망갔다.

그리하여 I 중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코컴보나 마을을 점령했다.

 

교두보 해안을 지키던 제5연대 M 중대 제1소대장 드류 바렛 소위는 교두보에 접근한 일본군 순양함을 발견하자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2문의 80mm 양용포를 사용하여 포격을 가했다.

제1소대는 20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나 명중탄을 내지는 못했다.

일본순양함도 함포로 반격했으나 역시 명중탄을 기록하지 못했다.

 

(1942년 8월 19일 오전에 일본순양함과 포격전을 벌인 제5해병연대 M 중대 제1소대 소속 일본제 80mm 양용포 중 1문)

 

오전 내내 교두보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며 해병대의 신경을 건드리던 일본순양함과 구축함들은 정오 경에 B-17 폭격기 2대가 나타나서 폭격을 가하자 허둥지둥 사라졌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현재 해병대의 병력상황으로는 마타니카우 마을과 코컴보나 마을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교두보 서쪽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타격을 입힌다는 당초의 목적은 달성했으므로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코컴보나와 마타니카우 마을을 점령한 해병대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마타니카우 및 코컴보나 공격작전에서 해병대는 전사 4명, 부상 11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해병대가 확인한 일본군 전사자는 65명이었다.

 

제5해병연대가 교두보 서쪽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동안 교두보의 동쪽에서는 일본육군 제28연대장 이치기 기요나오 대좌가 지휘하는 이치기 지대가 제1해병연대의 일루 강 방어선을 향하여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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