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새러토가 피격
칵터스 항공대가 활동을 시작한 이후 미군과 일본군은 12시간마다 교대로 과달카날 근해를 지배했다.
일출부터 일몰까지는 미군이 과달카날 근해의 지배자였다.
대형수송함이 과달카날 앞바다에 정박하여 하역작업을 실시했고 상륙주정과 잡용정(YP)이 아이언바텀사운드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잡용정은 주로 하와이의 참치잡이 어선을 개조하여 간단한 무장을 설치한 것으로서 배수량이 50톤에서 175톤 정도 나가는 목선이었다.
이 잡용정은 과달카날 전투기간 동안 병력과 물자를 운반하고 예인선, 연락선, 구조선으로 활약했으며 소규모 상륙작전에 수송선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면 대형수송함과 호위함정은 급히 닻을 올리고 과달카날을 떠나 뉴헤브리디스 제도가 있는 남동쪽으로 사라졌으며 상륙주정과 잡용정은 마치 묘지에서 놀다가 해가 떨어지면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겁먹은 아이들처럼 툴라기항의 안전한 장소에 꼭꼭 숨었다.
어두워지면 과달카날 근해에서 욱일기가 득세했다.
일본구축함과 가끔씩 경순양함까지 포함된 도쿄급행이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해병대의 교두보를 제외한 과달카날 섬의 북해안 어디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지점에 병력과 보급품들을 양륙하고 교두보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일본함정이 살아남고 싶으면 자신들의 깃발에 표시된 찬란한 아침해를 과달카날 근해에서 볼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자신을 지켜줄 어둠이 충분히 남아있을 때 일본함정은 전속력으로 과달카날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하여 아침이 되면 다시 과달카날 근해는 성조기를 펄럭이며 돌아다니는 미군함정이 지배했다.
돈틀레스가 효과적인 대함공격을 할 수 있는 최대 범위는 320km 정도였다.
따라서 도쿄급행에 참가한 일본함정들은 일몰 1시간 전에 320km 거리에 들어와서 전속력으로 달려 자정 쯤에 과달카날에 도착했다.
재빨리 양륙을 마친 일본함정들은 교두보에 잠깐 사격을 가한 다음 다시 전속력으로 빠져나가 해가 뜰 때 쯤이면 최소한 과달카날에서 280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헨더슨 비행장의 돈틀레스가 도쿄급행에 참가한 일본함정을 타격할 기회는 일몰 직전과 일출 직후의 1시간 정도였는데 일본함대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한 효과적인 공습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12시간마다 제해권을 교대로 행사하는 상황은 미군이나 일본군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이러한 구도를 깨려는 어설픈 시도는 항상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고 어느 일방이 이러한 구도를 깨뜨리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시도하면 항상 엄청난 유혈을 동반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의 낮을 지배하는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지속적인 공습을 가했으나 항상 칵터스 항공대의 반격을 받아 지속적으로 누적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헨더슨 비행장에 상응할만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미군 또한 일본해군의 도쿄급행을 저지하고 싶었으나 수상함대를 내보내어 일본함대와 야전을 벌이기에는 아직까지 사보 섬 해전 참패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다.
미군은 그 대안으로 레이더를 장비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에 어뢰를 장착하여 야간에 일본함정들을 뇌격하고자 했다.
블랙캣 이란 별명이 붙은 이러한 야간형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미해군의 큰 기대를 모았으나 아직까지 원시적인 항공기용 레이더는 과달카날 근해같이 육지가 많은 연안에서는 육지와 일본함정들을 거의 구별해내지 못했다.
이런 팽팽한 균형 속에서 일본해군은 1942년 8월 31일에 큰 개가를 올렸다.
일본잠수함 I-26이 새러토가를 공격하여 3달간 전열에서 탈락시켜 버린 것이었다.
(CV-3 새러토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8월 31일 오전 7시 36분, I-26은 산크리스토발 섬 남쪽 해상에서 13노트의 속력으로 초계항해 중인 새러토가를 발견했다.
I-26호는 순항 중인 새러토가의 전방 2km 지점까지 접근하여 잠망경 심도에서 어뢰 6발을 발사했다.
I-26은 모르고 있었지만 I-26의 불과 10m 옆에는 새러토가를 호위하던 구축함 맥도너휴가 있었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연속적인 어뢰발사 소리를 들은 맥도너휴는 미친듯이 해상을 살피다가 함수에서 전방으로 불과 10m 떨어진 해면에서 잠망경을 발견했다.
맥도너휴는 즉각 어뢰경보를 발하면서 전속력으로 잠망경을 향해 돌진했다.
바로 옆에서 미구축함이 돌진하자 깜짝 놀란 I-26은 급히 잠항하여 가까스로 충돌을 면했다.
얼마나 아슬아슬했던지 맥도너휴의 승무원들은 일본잠수함의 상부구조물 일부가 자신들의 배 밑바닥을 긁으면서 나는 기분나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맥도너휴는 I-26 바로 위를 통과하면서 2발의 폭뢰를 투하했으나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라 폭발심도를 입력하지 못했다.
맥도너휴의 경보를 들은 새러토가는 속력을 최대로 올리면서 어뢰가 달려오는 오른쪽 방향으로 최대한 급회전했다.
약 2분 후 어뢰 6발 중 1발이 우현 함교 부근에 명중했다.
즉각 새러토가를 호위하던 구축함들이 I-26이 발견된 해면으로 몰려들어 미친듯이 폭뢰를 투하했으나 I-26은 무사히 빠져나갔다.
I-26은 11월 13일에는 경순양함 쥬노를 격침한다.
어뢰에 의한 새러토가의 직접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화재도 발생하지 않았고 기관실 하나가 침수되었을 뿐이었다.
사망자는 없었고 대부분 경상인 1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함교에서 쓰러져 가벼운 상처를 입은 플레처 제독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어뢰는 새러토가의 추진계통에 큰 피해를 입혔다.
새러토가는 전기추진장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뢰의 폭발로 인하여 고압전류가 흐르는 추진계통이 큰 충격을 받아 통제실에서는 전기불꽃이 튀면서 전선들이 모두 타 버렸다.
자동차단장치가 작동하여 주발전기 2대를 모두 정지시켰다.
몇시간 후에 새러토가는 다시 움직일 수 있었으나 12노트 이상은 낼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는 작전이 불가능했으므로 새러토가는 수리를 위하여 진주만으로 가야만 했다.
그날 오후 새러토가의 함재기들이 이함하여 560km 떨어진 에스피리투산토로 날아갔다.
이들은 나중에 헨더슨 비행장에 파견되어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새러토가는 9월 6일에 통가타부에 도착하여 12일까지 임시수리를 마치고 9월 21일에 진주만에 입항했다.
11월 10일에 수리를 마친 새러토가는 12월 5일이 되어서야 남태평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과달카날 해전에서 승리한 미해군이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완전하게 장악한 이후였다.
새러토가의 피격 당시 플레처 제독도 경상을 입었다는 보고를 접한 니미츠 제독은 지금이 플레처 제독에게 절실히 필요한 휴식을 취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플레처 제독은 진주만 기습 때부터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맡아서 태평양함대가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9개월 가까이 지속적으로 긴장과 육체적 격무의 연속인 해상근무를 해 왔다.
이러한 지속적인 해상근무가 사령관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상당한 것으로서 실제로 플레처 제독과 같이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던 헐지 제독은 이러한 지속적인 해상근무의 스트레스를 버텨내지 못하고 악성 피부병이 발병하여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쓰러져 입원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플레처 제독이 헐지 제독보다 스트레스가 적은 작전을 맡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플레처 제독은 헐지 제독이 지휘한 작전들보다 훨씬 중요한 웨이크 섬 구출작전,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상륙, 동부 솔로몬 해전 등을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이 과정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자신이 탔던 기함이 2번이나 침몰하는 불운을 겪었다.
따라서 과달카날 상륙시 보여준 지나친 소심함과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의 판단 착오 등도 단순히 피로누적으로 인한 현상일 수 있었다.
그러나 플레처 제독은 이때 불운한 제독이라는 미해군 내부의 평가를 받으면서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플레처 제독이 돌아올 자리라고는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지휘관 자리 밖에 없었는데 태평양함대 내에서는 이미 항공관계자들이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수상함 출신인 스프루언스 제독의 작전지도에 걸핏하면 시비를 거는 상황이었다.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미해군 제일의 전술가인 스프루언스 제독을 제외하고는 항공관계자가 아닌 고속항모기동부대의 지휘관들은 모조리 항공관계자들에게 밀려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상함대 출신의 플레처 제독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결국 플레처 제독은 1942년 11월에 제13해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가 1년 후인 1943년 11월에 킨케이드 제독의 후임으로 사실상 후방이 되어버린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 되어 그곳에서 종전을 맞게 된다.
(프랭크 잭 플레처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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