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보 섬 해전(5) - 에필로그
전투 시작과 동시에 호되게 얻어맞은 호주중순양함 캔버라의 승무원들은 부함장 월시 호주해군중령의 지휘 하에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함장 게팅 대령은 일본군의 포격에 중상을 입고 몇시간 후에 캔버라의 함교에서 사망했다.
오전 3시에 시카고의 함장 보데 대령의 명령을 받은 구축함 패터슨이 접근하여 소화활동을 도왔으나 캔버라의 손상이 워낙 심하여 침몰을 면할 길이 없었다.
오전 4시경에 패터슨은 서쪽에서 돌아오던 시카고와 서로 오인사격을 가했으나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오전 5시에 터너 제독으로부터 필요하면 캔베라를 포기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고 오전 6시 30분에 부함장 월시 중령은 퇴함명령을 내렸다.
살아남은 생존자 680명은 구축함 블루와 패터슨에 옮겨져서 과달카날에 상륙했고 캔버라는 구축함 엘렛이 발사한 어뢰 1발을 맞고 8월 9일 오전 8시에 침몰했다.
캔버라의 인명피해는 함장 게팅 대령을 포함하여 전사 84명, 부상 55명이었다.
북부부대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아스토리아도 화재와 싸우고 있었다.
함장 그린만 대령은 새벽5시에 부상자들을 구축함 버글리와 소해함 홉킨스로 옮긴 후 부상을 입지 않은 300 여명의 승무원들을 진두지휘하면서 정력적으로 진화작업을 지휘했다.
구축함 윌슨과 뷰캐넌이 달려와서 소화작업을 도왔고 보급함 알치바가 예인을 위하여 접근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아스토리아의 화재는 서서히 잡히기 시작하여 이제 아스토리아는 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오전 11시에 아스토리아의 탄약고가 폭발했고 이것으로 아스토리아의 운명도 끝났다.
구축함 뷰캐넌이 달려와 폭발로 새로 유입된 해수를 배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잠시 후 함장 그린만 대령은 퇴함 명령을 내렸다.
함에 남아있던 승무원들의 퇴함을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지휘한 그린만 대령은 함이 가라앉기 불과 15분 전인 9일 정오에 함을 떠났다.
당시 그린만 대령과 함께 마지막으로 아스토리아를 떠난 승무원들은 구명보트에 올라탈 시간 여유가 없어서 모두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8월 9일 오후 12시 15분에 아스토리아는 좌측으로 쓰러진 다음 침몰했다.
아스토리아에서는 216명이 전사하고 186명이 부상을 입었다.
아스토리아 같은 경우는 사실 처음부터 사보 섬의 해안에 좌초시킬 생각이 있었으면 가능하긴 했다.
(CA-34 아스토리아. 배수량 : 9,950톤, 길이 : 179m, 폭 : 18.8m, 속력 : 32.7노트, 승무원 : 899명, 무장 : 8인치 주포 9문, 5인치 포 8문, 37mm 포 2문, 12.7mm 기관총 8정)
사보 섬 해전에서 마지막으로 피해를 입었던 구축함 랠프탤벗은 동력이 끊어지고 배가 20도까지 기울면서 위기에 빠졌으나 승무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겨우 침몰을 면하고 보일러 2기를 가동시키는데 성공하여 9일 정오 경에 툴라기에 도착했다.
한편, 1942년 8월 8일 오후에
"주력부대의 탈출"
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격하게 반발하던 터너 제독을 무시하고 철수를 강행했던 제61기동부대의 플레처 제독은 9일 오전 1시가 되어서도 곰리 제독의 철수허락 명령이 내려오지 않자 항로를 바꾸어서 다시 과달카날 쪽으로 북상했다.
도중에 오전 3시경 과달카날 해역에서 대규모 야간해전이 벌어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항공모함 와스프의 함장 포레스트 셔먼 대령은 즉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던 노이즈 소장에게 연료가 많은 구축함들을 뽑아서 와스프를 호위하게 하면서 고속으로 북상하여 일본함대를 타격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와스프에는 야간공격 훈련을 받은 조종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의지만 있다면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항공모함의 안전을 걱정하는 플레처 중장의 심중을 잘 알고 있던 노이즈 소장은 포레스트 셔먼 대령의 거듭되는 주장을 계속 묵살했다.
결국 오전 3시 30분에 곰리 제독의 허락 전문이 도착하자 제61기동부대는 다시 변침하여 누메아를 향해 남하했다.
(사보 섬 해전을 전후한 항공모함 와스프의 이동경로)
제61기동부대가 떠나버린데 이어 사보 섬 해전으로 수상함대마저 사실상 전멸하자 과달카날 앞바다의 미군 수송함들은 졸지에 벌거숭이 신세가 되었다.
터너 제독의 참모들은 수송함들이 즉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터너 제독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휘하 수송함들에게 당장 양륙작업을 재개하라고 명령한 다음 반데그리프트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상황을 설명하고 오후 4시에는 수송함들이 떠나야 할 것 같으니 해병제1사단도 양륙작업에 최대한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해병제1사단에서는 외곽 방어를 위한 필수 인원 이외의 모든 인원과 장비를 총동원하여 양륙작업을 도왔다.
해군과 해안의 해병대가 교대로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하역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4시에 수송함들이 마침내 철수했을 때 해안에 양륙된 보급품들은 싣고 왔던 양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탄약은 7.62mm 총탄 6백만 발과 90mm 대공포탄 800 발을 비롯하여 원래 싣고왔던 10일치의 40%인 4일치만 양륙되었다.
상륙한 지 1주일이 지난 8월 15일 현재 식량은 B 레이션 17일분, C 레이션 3일분 등으로 20일 분량만이 남아 있었고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열흘치 식량을 합쳐도 30일 분량만이 남아 있었다.
보급이 언제 다시 재개될지 기약이 없었으므로 8월 15일부터 해병대의 식사는 하루 두 끼로 줄어들었다.
제3해병방어대대의 5인치 해안포도 양륙되지 않았으므로 일본함정들이 해안 가까이 다가와서 포격을 가해도 쫓아낼 수가 없었고 레이더가 없었으므로 일본항공기의 접근을 미리 알 수도 없었다.
해병대의 정찰기가 도착하기까지 해병제1사단에 임시로 배속해주기로 되어있던 중순양함 퀸시의 정찰기들이 밤 사이의 해전에서 함과 함께 가라앉아 버렸으므로 제1사단은 항공정찰을 실시할 수도 없었다.
방어선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철조망도 18꾸러미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비행장 공사에 필수적인 건설용 중장비와 자재들 중 양륙된 것은 불도저 1대뿐이었다.
따라서 제1사단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장비와 자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비행장을 완성시켜야만 했다.
제62임무부대도 떠나버린 후 과달카날에 홀로 남겨진 해병제1사단의 병력은 과달카날에 제1연대와 제5연대를 중심으로 한 10,900 여명과 툴라기 지구에 제5연대와 제1기습대대 및 제1낙하산 대대를 주력으로 하는 6,075명 17,000 명 정도였다.
75mm Pack Howitzer 를 장비한 제3/10 대대의 G 포대와 본부포대를 비롯한 약 1,390 명의 병력은 과달카날에 상륙도 못해보고 누메아로 돌아가던 중 에스피리투산토에 상륙하여 수비대에 편입되었다.
이 병력들은 과달카날에 대한 보급로가 열리자마자 돌아와서 툴라기 지구에 배치되었다.
항공모함도 떠나버리고 호위함대도 사실상 전멸해버린 상황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고 과달카날 앞바다에 하루 종일 머무르며 보급품을 양륙한 터너 제독의 결단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결단이었다.
터너 제독의 결단은 그날 하루종일 일본항공기들이 공습을 가하지 않음으로써 현명한 결단이 되었다.
사실 8월 9일에도 일본군은 어뢰를 장비한 1식 육상공격기 16대를 제로기 15대와 함께 발진시켰으나 일본기들은 과달카날로 직행하는 대신 과달카날 남쪽해상에서 행동 중이라고 생각한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이미 철수해버린 항모기동부대를 찾지 못하고 대신 8일의 공습에서 어뢰를 맞고 홀로 시드니로 향하던 구축함 자비스를 발견하고 뇌격을 가해서 오후 1시경 침몰시켰다.
자비스는 8일 낮에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어뢰에 맞았을 때 통신장비가 파괴되었고 이후 수리하면서 무게가 나가는 걸 모두 버리는 과정에서 구명정까지 전부 버린 상태였다.
결국 자비스는 구명정이 없는 상태에서 구조요청도 하지 못한 채 침몰했다.
함장 윌리엄 그레이엄 소령을 포함하여 승무원 247명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사실 자비스는 9일 새벽 3시경 사보 섬 서방 해상에서 8노트의 느린 속력으로 서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구축함 블루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소식이 끊어져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비스의 행방은 미해군의 미스테리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일본제25항공전대의 기록을 살펴본 미군은 그제서야 자비스의 불행한 운명을 알게 되었다.
자비스는 저승길에 몇대의 일본기와 승무원들을 데리고 갔다.
즉 항속거리의 한계점에서 자비스를 만나 폭격을 감행한 일본기 중 상당수가 돌아오는 길에 연료부족으로 해상에 불시착했고 승무원들은 대부분 실종되었다.
과달카날 해역을 벗어난 일본제8함대는 9일 오전 10시에 부갠빌 해협에서 둘로 갈라져서 중순양함 4척(아오바, 카고, 기누가사, 후루다카)는 캐비엥으로 향하고 기함 쵸카이와 경순양함 덴류, 유바리, 그리고 구축함 유나기는 라바울로 향했다.
사보 섬 해전에 대한 자그마한 보복은 다음날 아침에 이루어졌다.
캐비엥 북쪽을 초계하던 미국잠수함 S-44 호는 16노트의 속력으로 줄지어 달려오는 4척의 일본중순양함을 발견했다.
당시 상공에는 일본군 전투기가 떠 있었지만 호위하는 구축함은 없었다.
함장 존 무어 소령은 좋은 위치로 이동하여 기다리다가 불과 630m 거리에서 4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일본중순양함 카고는 근거리에서 달려오는 어뢰를 피할 틈이 없었고 순식간에 4발 중에 3발이 명중했다.
카고는 어뢰에 맞은 지 5분 만인 10일 오전 9시 8분에 전복, 침몰했다.
S-44 는 무사히 탈출했다.
(일본해군의 중순양함 카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카고를 시작으로 사보 섬 해전에 참가했던 일본함정들은 모두 종전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침몰했다.
후루다카는 에스퍼란스 해전에서, 기누가사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침몰했으며, 덴류, 유바리, 유나기는 모두 카고처럼 미잠수함에게 당했다.
죠카이는 1944년 10월의 레이테만 해전에서 격침되었고 아오바는 1945년 7월의 구레 공습에서 격침되었다.
사보 섬 해전은 미해군 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교전에 참가했던 양측의 세력은 엇비슷했다.
일본함대는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척으로 이루어진데 비하여 미함대는 중순양함 5척, 구축함 5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화력을 비교해 보아도 일본함대가 8인치(203mm) 포 34문, 140mm(5.5인치) 포 10문, 5인치(127mm) 및 120mm(4.7인치) 포 27문인데 비하여 연합군 함대는 8인치 포 44문, 5인치 포 48문, 4인치포(102mm) 8문으로 오히려 일본함대보다 강했으며 어뢰 보유수도 일본함대가 62발인데 비하여 미함대는 72발로 10발이 더 많았다.
다만 일본어뢰 중 52발이 강력한 93식 산소어뢰였으므로 뇌격능력은 일본함대가 더 강했다.
엇비슷한 함대 세력과 달리 전투 결과는 일본함대의 압승이었다.
일본함대는 8월 9일 새벽 1시 43분부터 약 40분간 지속된 짧고 격렬한 해전에서 8인치 포탄 1,014발, 5인치 및 120mm 포탄 830발과 어뢰 62발을 사용하여 호주 중순양함 1척을 포함하여 연합군의 중순양함 4척을 격침하고 중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에 피해를 입혔다.
연합군의 인명피해만도 전사 1,023명, 부상 709명에 이르렀다.
반면 일본함대의 피해는 가벼웠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죠카이는 해도실이 박살났고 전방 포탑에 명중탄을 맞았다.
아오바는 어뢰발사관에 명중탄을 맞아 불이 났으나 곧 진화했다.
기누가사는 저장실에 명중탄을 맞아 침수가 일어났으며 1번 포탑이 명중탄을 맞았고 좌측 키가 약간 손상을 입었다.
카고는 정찰기 1대가 조종사와 함께 명중탄에 맞아 손실되었다.
그리고 모든 일본함정들이 기관총좌에 약간의 손상을 입은 정도였다.
일본군의 전사자는 58명, 부상자는 53명이었는데 죠카이의 해도실이 명중되었을 때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니미츠 제독은 전례없는 참사인 사보 섬 해전의 패전 원인으로 통신불량, 공중정찰 미비, 적의 의도에 대한 오판, 불완전한 레이더에 대한 맹신, 정체불명의 항공기를 무시한 점, 함대 지휘관의 부재 등을 꼽고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전반적으로 전투에 대비한 마음가짐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해군성의 지시로 1942년 12월부터 사보 섬 해전에 대하여 철저한 조사를 실시했던 헵번 제독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으며 패전의 책임은 당시 현장 지휘관 모두에게 물을 수 있으나 특정한 지휘관의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도 헵번 제독의 결론에 찬성함으로써 사보 섬 해전의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임되거나 좌천된 지휘관은 없었다.
사보 섬 해전의 책임을 특정한 지휘관에게 묻지 않은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사보 섬 해전 당시 현장의 최고위 지휘관으로 패전의 책임을 피해나가기 어려웠던 터너 제독은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거듭 성공시키면서 이전까지 미해군 내에서 상륙작전의 최고 권위자로 여겨지던 바비 제독의 명성을 가볍게 누르고 미해군 제일의 상륙작전 전문가로써 태평양 전쟁의 승리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사보 섬 해전 당시 호위함대를 지휘했던 크러칠리 제독도 이후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작전에서 훌륭하게 자신의 몫을 다했다.
사보 섬 해전의 참패는 미해군에게 여러 교훈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우선 미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의 도취감에서 깨어나 일본해군의 야전능력을 올바르게 평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해군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노력하여 결국은 야전에서 일본해군을 압도하게 된다.
장비 면에서는 통신장비가 개량되었고 수상함 탐지능력이 구형 SC 레이더보다 뛰어난 신형 SG 레이더의 보급이 가속화되었다.
함상 화재에 대비해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함정 내에서 나무 가구가 사라졌고 가연성 내장재와 페인트는 불연성으로 바뀌었다.
침구류도 불연성으로 바뀌었고 물방울을 분사하는 소방호스같이 효과적인 소화장비들의 개발과 보급이 촉진되었다.
지휘관의 의식도 일변하여 비상상태를 오래 유지함으로써 승무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을 금기시하는 바람직한 풍조가 생겨났다.
미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처절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사보 섬 해전은 과달카날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투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보 섬 해전은 일본군에게 있어서 미군에게 전초기지 하나 뺏기는 정도의 피해로 간단히 끝날 수 있었던 과달카날 전투의 성격을 바꾸어서 일본의 해군력과 항공력이 휘청거릴만큼 처절하고 무자비한 6개월 간의 소모전으로 만들었다.
미군에게도 과달카날 전투는 쉬운 전투가 아니었다.
당시는 미국의 거대한 공업력이 전시체제로 전환되기 전이었으며 1942년 11월의 북아프리카 상륙을 앞두고 가뜩이나 모자라는 병력과 전쟁물자 중 점차 많은 양이 유럽 방면으로 돌려지고 있었다.
그나마 태평양 방면으로 돌려지는 병력과 물자의 분배를 놓고도 과달카날의 미군들은 뉴기니에서 역시 일본군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맥아더 장군과 다투어야만 했다.
과달카날의 미해병대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아직까지 미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는 막강한 일본육군과 겨루어야 했다.
미해군 또한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기세가 꺾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미태평양함대보다 더 많은 항공모함과 전함들을 가지고 숙련된 함정 승무원과 뛰어난 함재기 조종사를 다수 보유한 일본해군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사보 섬 해전은 이렇게 미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앞으로 6개월에 걸친 처절한 사투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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