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칵터스 항공대

 

1942년 8월 20일에 헨더슨 비행장에서 칵터스 항공대가 활동을 시작하고, 8월 21일에 이치기 지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8월 24일에는 제61기동부대가 일본함대를 이김으로써 과달카날의 해병제1사단은 완전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진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치기 지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일본군이 다음번에는 더 많은 병력을 보내어 더 뛰어난 작전계획 하에 더 맹렬한 공격을 가해 올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칵터스 항공대는 헨더슨 비행장에 전개한 이래 매일 오전 5시 45분부터 8시 30분까지, 그리고 오후 2시부터 6시 30분까지 4대의 와일드캣을 투입하여 과달카날 주변 상공을 초계했다.

칵터스 항공대의 주력 전투기인 와일드캣은 일본군의 주력 전투기인 제로기와 비교할 때 기동성에서 열세를 보였으나 대신 더 튼튼하고 급강하 속력이 빨랐다.

와일드캣 조종사들은 2대가 1조로 제로기를 상대하는 태치 위브 전술을 사용하여 제로기와의 공중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칵터스 항공대는 8월 20일에 배치되고 나서 8월 말까지 열흘 동안 56대의 일본군 항공기를 격추하고 자신들은 11대를 잃었다. 

 

(그루먼 F4F  와일드캣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헨더슨 비행장과 칵터스 항공대가 과달카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핵심적인 열쇠임을 잘 알고 있는 미군 지휘관들은 칵터스 항공대의 작전을 지원하는데 보급의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1942년 9월 1일에 제6해군건설대대 A 중대 및 D중대원 392명이 수송함 베텔규스를 타고 과달카날에 상륙했다.

이들은 불도저 2대, 덤프트럭 6대, 도로건설용 그레이더 1대, 프론트엔드 로더 1대와 함께 상륙했다.

 

(도로건설용 그레이더)

 

(Front-end Loader)

 

해군건설대대와 함께 5인치 해안포 6문도 함께 양륙되었다.

 

해군건설대대는 상륙 즉시 해병대의 공병대대를 도와서 활주로를 연장하고 유도로를 만들고 또한 기존의 활주로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지점에 전투기용 보조 활주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라바울에서는 매일같이 제로기의 호위 하에 폭격기들을 보내어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고 공병들은 그때마다 활주로에 난 폭탄 구멍을 메워야 했다.

공병들은 미리 자갈과 모래를 덤프 트럭에 실어두고 있다가 일본폭격기가 물러가자마자 활주로를 복구했다.

활주로 복구에 필요한 공병들은 미리 항공분대라는 조직으로 만들어져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덤프 트럭과 같이 대기하고 있었다.

500kg 짜리 폭탄이 만든 구멍을 메우는데 약 30분이 걸렸다. 

 

해군건설대대의 도착에도 불구하고 헨더슨 비행장의 여건은 상당기간 열악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연료 주입은 수동펌프로 해야만 했기 때문에 단 몇대의 항공기에 급유하기 위하여 수십명이 몇시간 동안 땀을 흘려야만 했고 폭탄 장착도 인력으로 해야만 했다.

 

활주로에는 마스덴매트가 깔려있지 않아서 비가 많이 오면 사용이 불가능했다.

실제로 젖은 활주로에서 무리하게 이륙을 시도하던 항공기가 활주로 끝에서 추락하기도 했다. 

또한 항공기가 착륙하면서 활주로에 고랑이 패였는데 특히 해군의 돈틀레스들이 심했다.

함재기용 돈틀레스들은 항모착함을 위하여 뒷바퀴가 대단히 단단한 고무로 되어 있어서 한 번 착륙하면 마치 쟁기처럼 활주로에 깊은 고랑을 내었다.

이 고랑은 즉시 메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위험했다.

실제로 9월 초의 어느 안개 자욱한 날 착륙하던 와일드캣이 이 고랑에 튕겨서 불도저와 충돌했다.

활주로에 전면적으로 마스덴매트가 깔린 것은 1942년 9월 25일이 되어서였고 이때부터 B-17 중폭격기도 헨더슨 비행장에 이착륙하기 시작했다.

 

(마스덴매트)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칵터스 항공대는 착실히 세력을 키워갔다.

8월 31일에는 로버트 게일러 소령이 지휘하는 제224전투비행대대의 와일드캣 19대와 레오 스미스 소령의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의 돈틀레스 12대가 추가로 도착했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31일 현재 칵터스 항공대는 총 64대의 항공기와 86명의 조종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항공기 중 10대는 엔터프라이즈에서 날아온 해군 소속의 돈틀레스였고 3대는 육군항공대의 P-400 전투기였다.

 

일본군은 계속 공습을 가해왔다.

1942년 9월 2일 11시 35분에 일본군이 떨어뜨린 폭탄 1발이 마침 탄약더미 부근에 주기해있던 돈틀레스에 명중하면서 90mm 대공포 탄약더미로 불이 옮겨붙었다.

해병대원들이 몇명의 부상자를 내면서까지 용감하게 화염과 맞서서 더 이상의 유폭을 막고 화재를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새삼 화재의 위험에 놀란 해병대는 전쟁 전에 코코넛 농장에서 사용하던 대형 물통을 탄약더미 부근에 옮겨놓고 화재에 대비했다.

덕분에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폭격으로 인한 더 이상의 치명적인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날 칵터스 항공대의 와일드캣들은 자신들의 희생은 전혀 없이 1식 육상공격기 3대와 제로기 4대를 격추함으로써 화재로 인한 배상을 톡톡히 받아내었다.

 

다음날인 9월 3일, 제1해병비행단장인 로이 가이거 해병소장이 과달카날에 부임함으로써 이제 칵터스 항공대는 확실한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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