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헨더슨 비행장

 

사보 섬 해전의 결과 외부의 지원이 끊어진 채 과달카날 섬에 고립된 미해병제1사단의 유일한 희망은 헨더슨 비행장으로 이름붙인 탈취한 일본군의 비행장을 완성하는 길 뿐이었다.

보급이 끊어진 상태로는 일본군의 공격에 오래 지탱할 수 없었고 보급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헨더슨 비행장을 완성하여 과달카날 근해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

시간이 관건이었다.

헨더슨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충분한 보급을 받는 일본군의 대부대가 상륙하여 공격하면 보급이 끊어진 상태의 해병제1사단은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사보 섬 해전으로 과달카날 부근 해역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일본군은 매일같이 잠수함이나 구축함, 가끔은 순양함을 파견하여 대낮에 해병대의 야포 사정거리 밖에서 교두보를 포격했다.

해병대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고 적의 함정이 너무 접근했다 싶으면 가끔씩 야포로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포대의 위치가 드러날 가능성 때문에 반격시에는 주로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야포를 사용하고 해병대의 75mm Pack Howitzer 나 105mm 곡사포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교두보에 대한 포격과 더불어 일본군은  매일같이 전투기들의 호위도 없이 폭격기들을 보내어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다.

아침에 라바울을 출격한 폭격기는 항상 정오 경에 과달카날 상공에 도달하여 폭격을 가했기 때문에 해병대원들은 정오 경을 도조 타임이라고 불렀다.

그나마 헨더슨 비행장 주변에 배치된 제3해병방어대대의 90mm 대공포들이 일본폭격기들을 7,500m 이상의 고공으로 몰아낼 수 있었고 따라서 폭격은 부정확했다.

 

이시기 일본군의 항공작전 중 해병대를 가장 괴롭힌 것은 야간에 혼자 날아오는 순양함의 수상정찰기들이었다.

이 정찰기들은 소량의 폭탄을 싣고 와서는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불규칙한 간격으로 투하했는데 해병대를 살상하는 것보다는 잠을 못자게 만들려는 속셈이었고 적을 달성했다.

밤새 저공으로 비행하며 불규칙한 간격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 단 1대의 일본수상기 때문에 교두보 내의 해병대원 대부분이 잠을 제대로 못자고 고통을 받았다.

 

1942년 8월 8일에 해병대가 비행장을 점령하자마자 사단의 공병장교인 프랭크 제라시 중령과 항공장교인 케네스 와이어 소령이 일본군의 비행장을 조사했다.

일본군은 800m 길이의 활주로를 양끝에서 만들기 시작하여 중앙의 60m 정도를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제라시 중령과 와이어 소령은 활주로를 400m 정도 연장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800m 짜리 활주로를 완성하는 데에는 이틀, 400m 를 연장하는 데에는 2주일 가량이 걸릴 것이라고 터너 제독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8월 9일 새벽에 벌어진 사보 섬 해전이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활주로 건설에 필요한 건설중장비 중 R-4 불도저 1대를 제외한 모든 건설용 중장비와 자재들은 수송함에 그대로 실린 채 누메아로 돌아가 버렸다.

제1공병대대장 조지 로완 대령은 유일하게 양륙된 1대의 불도저에 운전병 로이 케이트 상병 이외에는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고는 활주로 건설을 제외한 교두보의 거의 모든 토목공사에 이 불도저를 투입했다.

 

제1공병대대는 헨더슨 비행장과 룽가 강을 잇는 도로를 닦고 룽가 강에 다리를 건설했으며 해안을 따라 나있는 도로도 정비하고 강에는 모두 다리를 놓았다.

또한 쿠쿰 지역의 해안을 보급품을 양륙하기 쉽도록 정리했고 이 지역의 일본군 주둔지를 밀어버린 다음 보급품 집적소를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불도저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 불도저는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기 위하여 제방의 양쪽을 깎아내고 해안을 정리하고 일본군의 주둔지를 밀어버려 평평하게 만들었다.

불도저는 또한 일본군 시체를 매장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장비를 견인했으며 헨더슨 비행장이 폭격을 받으면 보수작업에도  투입되었다. 

이 사랑스럽고도 강인했던 불도저는 과달카날 전투 초기에 힘든 시기를 보내던 해병대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고는 10월 말의 어느날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R-4 불도저)

 

해안에 쌓여있던 보급품들과 일본군이 남기고 간 보급품들을 쿠쿰 지역의 새 보급품 저장소에 옮기는데는 4일이 걸렸다.

일부 보급품들은 일본제 트럭을 포함한 트럭으로 실어 날랐고 대부분은 해상수송했다.

LVT들이 보급품들을 상륙주정에 옮기면 상륙주정이 쿠쿰 해안에 양륙시켰다.

쿠쿰 지역에 옮겨진 보급품들은 폭격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작은 규모로 분산시켰다.

 

과달카날 전투의 초기에 해병제1사단이 사용한 주정들은 대부분 제62임무부대가 철수하면서 남겨놓고 간 것들이었다.

따라서 주정 승무원들 사이에 명확한 지휘체계가 없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임시방편으로 주정들을 지휘할 지휘체계를 만들었으나 그리 효율적으로 운용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주정 승무원에게 정비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구와 예비부품이 전무했고 연료가 부족하여 많은 주정들이 사용불능상태에 빠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문제들은 호전되기는 했으나 해병제1사단이 철수할 때까지 주정문제는 만족스러운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

 

사실 해병제1사단의 수송능력은 주정과 트럭 및 LVT 에 사용할 연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과달카날 섬에는 1942년 8월 15일부터 부분적으로 보급이 재개되었으나 가장 시급한 식량과 탄약, 그리고 항공유를 비롯하여 헨더슨 비행장의 작전을 지원하는 항공관련 보급품 때문에 차량이나 주정용 연료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고민 끝에 해병대는 해군의 수송함들을 상대로 '공식적인 등쳐먹기(Official Scrounging)' 라고 부르는 구걸에 나섰다.

과달카날에 보급함대가 도착하면 빈 드럼통을 가득 싣은 해병대의 차량상륙정이 다가가서는 휘발유나 경유를 한 드럼씩만 나누어 달라고 수송함의 승무원들을 붙잡고 읍소했다.

처음에는 이 방법이 잘 통하지 않았다.

물자를 양륙하느라 수송함과 해안을 바삐 오가던 상륙주정들은 연료를 구걸하러 다니는 이 차량상륙정들을 무시했고 일부 수송함의 함장들은 이 대형 기생충(?)이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마치 공습을 피할 때처럼 급히 이동하고는 했다.

그러나 곧 과달카날의 해병대가 오죽 답답하면 저런 짓까지 하겠냐는 동정론이 누메아의 해군 장병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과달카날로 오는 수송함의 함장들은 수송함에 싣는 상륙주정의 연료탱크와 수송함의 주정용 연료탱크를 일부러 가득 채워왔다. 

그리하여 주정이 양륙작업을 하는 동안 수송함의 주정용 연료를 해병대에게 나누어 주었고 양륙작업을 끝낸 주정들은 수송함에 싣기 전에 남은 연료를 해병대에게 완전히 넘겨준 다음에 수용했다.

이러한 해군 수송함장들의 따뜻한 배려와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해병대의 '공식적인 등쳐먹기'는 성공했고 이 편법 덕분에 본격적인 연료보급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해병대의 연료부족사태를 완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제1해병공병대대는 헨더슨 비행장 건설에 있어서 일본군이 남기고 간 장비와 자재를 적극 활용했다.

일본제 삽으로 땅을 파서 일본제 휘발유로 움직이는 일본제 트럭에 실어 활주로로 운반한 다음 일본제 손수레로 낮은 곳을 메꾸고 일본제 롤러로 다졌다. 

해병대는 일본군이 남긴 쌀로 만든 음식을 먹고 일본군이 만든 변소를 사용했으며 일본제 사이렌이 공습경보를 울리면 일본군이 파놓은 참호에 뛰어들었다.

 

과달카날에서 해병제1사단이 헨더슨 비행장 공사에 매달려 있는 동안 누메아의 곰리 제독은 제63임무부대를 지휘하는 맥케인 제독에게 헨더슨 비행장의 항공작전을 지원할 인원과 장비 및 보급품을 수송하라고 명령했다.

맥케인 제독은 1척당 약 40톤을 운반할 수 있는 고속수송함 4척(콜호운, 리틀, 그레고리, 맥킨)에 항공유 400 드럼, 윤활유 32드럼, 45kg 에서 225kg 에 이르는 각종 폭탄 282발, 기관총탄, 공구 및 예비부품들을 실어서 조지 포크 해군소위가 인솔하는 123명의 항공담당 해군건설대원들과 함께 과달카날에 파견했다.

이 고속수송함들에는 또한 헨더슨 비행장 최초의 항공작전 장교인 찰스 헤이즈 해병소령도 타고 있었다.

에스피리투산토를 출항한 4척의 고속수송함들은 일본기의 공습을 피하여 8월 15일 저녁에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밤새 양륙작업을 마치고 날이 밝기 전에 재빨리  철수했다.

곧 일본해군이 주로 애용하게 되는 도쿄특급의 미국판이었다.

8월 20일에는 고속수송함 3척(콜호운, 리틀, 그레고리)이 해병대의 4일치 식량에 해당하는 120톤의 전투식량을 양륙했다.

 

2번의 수송성공에 고무된 미해군은 좀 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누메아에는 미해군이 중국정부로부터 구입한 라카토이라는 소형 수송선이 있었다.

누메아의 해군공창에서 원래 양쯔강에서 쓰던 소형 화물선인 라카토이에 대공기관총을 설치하고 조타실 주위를 콘크리트로 보강했다.

개장을 마친 라카토이는 400톤의 전투식량과 탄약을 적재하고 과달카날로 출발했다.

그러나 기관총과 콘크리트는 배의 무게중심을 높였고 과달카날에 접근하면서 무게중심을 낮추어주던 연료탱크의 중유가 줄어들자 라카토이는 1942년 8월 24일에 과달카날 근해에서 전복되고 말았다. 

전원 자원자로 이루어진 라카토이의 승무원들 중 1명이 실종되었고 나머지 승무원들은 구명정 및 구명보트를 타고 솔로몬 해역을 2주일간이나 떠돌다가 구출되었다.

 

1942년 8월 12일, 헨더슨 비행장에 최초의 미군기가 착륙했다.

미해군의 샘슨 중위가 조종하는 1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맥케인 제독의 부관을 태우고 활주로에 시험적으로 착륙했다가 부상당한 해병대원 2명을 태우고 다시 이륙하여 에스피리투산토로 돌아갔다.

맥케인 제독의 부관은 활주로의 상태가 단발의 전투기, 급강하폭격기 및 뇌격기들은 이착륙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으나 활주로 바로 앞의 나무들 때문에 카탈리나 비행정은 급격한 각도로 착륙해야 했고 활주로 중앙이 완전히 다져지지 않아서 심하게 덜컹거렸다.

 

(1942년 8월 12일에 헨더슨 비행장에 최초로 착륙한 미군기인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의 착륙 장면)

 

공병대원들은 즉시 활주로 전방의 나무들을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폭약으로 날려버리고 활주로의 중간 부분을 다시 다져서 8월 18일에 드디어 활주로를 완성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날 정오 경에 헨더슨 비행장 공사가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의 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으로 공병대원 1명이 사망하고 9명이 다쳤으며 활주로에 17개의 폭탄이 명중했다.

일본기가 물러가자 해병대원들이 복구를 시작하여 19일 아침에는 다시 사용가능상태로 만들었다.

8월 20일 오후에 드디어 해병대의 전투기와 급강하폭격기들이 도착했다.

 

미군 최초의 호위항모인 롱아일랜드가 에파테를 출항하여 과달카날 동남방 320km 지점까지 접근하여 리처드 맹그럼 중령의 제232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VMSB-232)와 존 스미스 소령의 제223해병전투비행대대(VMF-223)를 이함시켰다.

롱아일랜드를 이함한 돈틀레스 19대와 와일드캣 전투기 12대는 곧 헨더슨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이로써 도조 타임도 끝났고 일본군 함정이 대낮에 교두보를 포격하는 짓도 끝났다.

 

(미해군 최초의 호위항공모함인 CVE-1 롱 아일랜드.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틀 후인 8월 22일에는 육군항공대 제67전투비행대대 소속인 P-400 전투기 5대가 도착했고 24일에는 동부솔로몬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인 해군 소속의 돈트레스 11대가 헨더슨 비행장에 합류하여 이후 3달간 함께 작전했다.

27일에는 제67전투비행대대의 나머지인 9대의 P-400 전투기가 마저 도착했다.

이제 헨더슨 비행장을 기지로 하는 칵터스 항공대가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P-400 전투기는 P-39 에어라코브라 전투기의 수출형이다.

P-39 전투기는 강력한 37mm 기관포를 가진 전투기였으나 고도 3,600m 이상에서는 사실상 공중전이 불가능하여 실전에서는 공중전보다 지상군 지원이나 일본함선 공격에 더 많이 활약했다.

 

(헨더슨 비행장에 주기 중인 미육군항공대 제67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400 전투기들)

 

헨더슨 비행장의 활주로가 연장됨에 따라 9월 초부터는 제25해병항공전대 소속의 C-47 쌍발수송기들이 매일 에스피리투산토 및 에파테와 헨더슨 비행장을 왕복했다.

C-47 한 대가 매일 1.4톤의 보급품을 싣고 왔다가 들것에 눕혀진 부상자 16명을 싣고 떠났다.

 

해병제1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비행장 공사를 진행하는 한편으로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방어태세를 정비했다.

 

(해병제1사단의 교두보 방어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일본군의 역상륙이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일루 강 서안에서 쿠쿰지역에 이르기까지 8,800m 길이의 해안선을 강력하게 방어했다.

교두보 내에는 룽가 강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쿠쿰 지역에서 룽가 강 서안에 이르는 서쪽지역은 제5연대가, 룽가 강에서 일루 강의 서안에 이르는 동쪽 지역은 제1연대가 담당했다.

길이가 8,200m 정도인 비행장 남쪽의 전선은 기복이 심한 정글지역이었는데 이곳은 포병, 공병, 그리고 수륙양용트랙터대대의 병력들이 지키는 초소가 군데군데 세워졌고 그 사이를 정찰대가 돌아다니면서 경계했다.

따라서 포병, 공병, 수륙양용트랙터대대의 병력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자신들에게 할당된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야만 했다.

 

일선병력은 강력하게 유지되지는 않았고 대부분의 병력은 교두보 중앙에서 기동 예비대의 형태로 대기했으며 포병연대인 제11연대도 교두보 부근의 어느 곳이든지 바로 포격할 수 있는 위치에 방열해놓고 있었다.

해안선 바로 뒷쪽에는 하프트랙에 75mm 대전차포를 탑재한 대전차 자주포가 대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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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보 섬 해전(5) - 에필로그

 

전투 시작과 동시에 호되게 얻어맞은 호주중순양함 캔버라의 승무원들은 부함장 월시 호주해군중령의 지휘 하에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함장 게팅 대령은 일본군의 포격에 중상을 입고 몇시간 후에 캔버라의 함교에서 사망했다.

오전 3시에 시카고의 함장 보데 대령의 명령을 받은 구축함 패터슨이 접근하여 소화활동을 도왔으나 캔버라의 손상이 워낙 심하여 침몰을 면할 길이 없었다.

 

오전 4시경에 패터슨은 서쪽에서 돌아오던 시카고와 서로 오인사격을 가했으나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오전 5시에 터너 제독으로부터 필요하면 캔베라를 포기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고 오전 6시 30분에 부함장 월시 중령은 퇴함명령을 내렸다.

살아남은 생존자 680명은 구축함 블루와 패터슨에 옮겨져서 과달카날에 상륙했고 캔버라는 구축함 엘렛이 발사한 어뢰 1발을 맞고 8월 9일 오전 8시에 침몰했다.

캔버라의 인명피해는 함장 게팅 대령을 포함하여 전사 84명, 부상 55명이었다.

 

북부부대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아스토리아도 화재와 싸우고 있었다.

함장 그린만 대령은  새벽5시에 부상자들을 구축함 버글리와 소해함 홉킨스로 옮긴 후 부상을 입지 않은 300 여명의 승무원들을 진두지휘하면서 정력적으로 진화작업을 지휘했다.

구축함 윌슨과 뷰캐넌이 달려와서 소화작업을 도왔고 보급함 알치바가 예인을 위하여 접근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아스토리아의 화재는 서서히 잡히기 시작하여 이제 아스토리아는 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오전 11시에 아스토리아의 탄약고가 폭발했고 이것으로 아스토리아의 운명도 끝났다.

구축함 뷰캐넌이 달려와 폭발로 새로 유입된 해수를 배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잠시 후 함장 그린만 대령은 퇴함 명령을 내렸다.

함에 남아있던 승무원들의 퇴함을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지휘한 그린만 대령은 함이 가라앉기 불과 15분 전인 9일 정오에 함을 떠났다.

당시 그린만 대령과 함께 마지막으로 아스토리아를 떠난 승무원들은 구명보트에 올라탈 시간 여유가 없어서 모두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8월 9일 오후 12시 15분에 아스토리아는 좌측으로 쓰러진 다음 침몰했다.

아스토리아에서는 216명이 전사하고 186명이 부상을 입었다.

아스토리아 같은 경우는 사실 처음부터 사보 섬의 해안에 좌초시킬 생각이 있었으면 가능하긴 했다.

 

(CA-34 아스토리아. 배수량 : 9,950톤, 길이 : 179m, 폭 : 18.8m, 속력 : 32.7노트, 승무원 : 899명, 무장 : 8인치 주포 9문, 5인치 포 8문, 37mm 포 2문, 12.7mm 기관총 8정)

 

사보 섬 해전에서 마지막으로 피해를 입었던 구축함 랠프탤벗은 동력이 끊어지고 배가 20도까지 기울면서 위기에 빠졌으나 승무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겨우 침몰을 면하고 보일러 2기를 가동시키는데 성공하여 9일 정오 경에 툴라기에 도착했다.

 

한편, 1942년 8월 8일 오후에

 

"주력부대의 탈출"

 

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격하게 반발하던 터너 제독을 무시하고 철수를 강행했던 제61기동부대의 플레처 제독은 9일 오전 1시가 되어서도 곰리 제독의 철수허락 명령이 내려오지 않자 항로를 바꾸어서 다시 과달카날 쪽으로 북상했다.

도중에 오전 3시경 과달카날 해역에서 대규모 야간해전이 벌어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항공모함 와스프의 함장 포레스트 셔먼 대령은 즉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던 노이즈 소장에게 연료가 많은 구축함들을 뽑아서 와스프를 호위하게 하면서 고속으로 북상하여 일본함대를 타격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와스프에는 야간공격 훈련을 받은 조종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의지만 있다면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항공모함의 안전을 걱정하는 플레처 중장의 심중을 잘 알고 있던 노이즈 소장은 포레스트 셔먼 대령의 거듭되는 주장을 계속 묵살했다.

결국 오전 3시 30분에 곰리 제독의 허락 전문이 도착하자 제61기동부대는 다시 변침하여 누메아를 향해 남하했다.

 

(사보 섬 해전을 전후한 항공모함 와스프의 이동경로)

 

제61기동부대가 떠나버린데 이어 사보 섬 해전으로 수상함대마저 사실상 전멸하자 과달카날 앞바다의 미군 수송함들은 졸지에 벌거숭이 신세가 되었다.

터너 제독의 참모들은 수송함들이 즉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터너 제독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휘하 수송함들에게 당장 양륙작업을 재개하라고 명령한 다음 반데그리프트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상황을 설명하고 오후 4시에는 수송함들이 떠나야 할 것 같으니 해병제1사단도 양륙작업에 최대한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해병제1사단에서는 외곽 방어를 위한 필수 인원 이외의 모든 인원과 장비를 총동원하여 양륙작업을 도왔다.  

해군과 해안의 해병대가 교대로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하역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4시에 수송함들이 마침내 철수했을 때 해안에 양륙된 보급품들은 싣고 왔던 양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탄약은 7.62mm 총탄 6백만 발과 90mm 대공포탄 800 발을 비롯하여 원래 싣고왔던 10일치의 40%인 4일치만 양륙되었다.

상륙한 지 1주일이 지난 8월 15일 현재 식량은 B 레이션 17일분, C 레이션 3일분 등으로 20일 분량만이 남아 있었고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열흘치 식량을 합쳐도 30일 분량만이 남아 있었다.

보급이 언제 다시 재개될지 기약이 없었으므로 8월 15일부터 해병대의 식사는 하루 두 끼로 줄어들었다.

 

제3해병방어대대의 5인치 해안포도 양륙되지 않았으므로 일본함정들이 해안 가까이 다가와서 포격을 가해도 쫓아낼 수가 없었고 레이더가 없었으므로 일본항공기의 접근을 미리 알 수도 없었다.

해병대의 정찰기가 도착하기까지 해병제1사단에 임시로 배속해주기로 되어있던 중순양함 퀸시의 정찰기들이 밤 사이의 해전에서 함과 함께 가라앉아 버렸으므로  제1사단은 항공정찰을 실시할 수도 없었다.

방어선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철조망도 18꾸러미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비행장 공사에 필수적인 건설용 중장비와 자재들 중 양륙된 것은 불도저 1대뿐이었다.

따라서 제1사단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장비와 자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비행장을 완성시켜야만 했다.

 

제62임무부대도 떠나버린 후 과달카날에 홀로 남겨진 해병제1사단의 병력은 과달카날에 제1연대와 제5연대를 중심으로 한 10,900 여명과 툴라기 지구에 제5연대와 제1기습대대 및 제1낙하산 대대를 주력으로 하는 6,075명 17,000 명 정도였다.

75mm Pack Howitzer 를 장비한 제3/10 대대의 G 포대와 본부포대를 비롯한 약 1,390 명의 병력은 과달카날에 상륙도 못해보고 누메아로 돌아가던 중 에스피리투산토에 상륙하여 수비대에 편입되었다. 

이 병력들은 과달카날에 대한 보급로가 열리자마자 돌아와서 툴라기 지구에 배치되었다.

 

항공모함도 떠나버리고 호위함대도 사실상 전멸해버린 상황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고 과달카날 앞바다에 하루 종일 머무르며 보급품을 양륙한 터너 제독의 결단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결단이었다.

터너 제독의 결단은 그날 하루종일 일본항공기들이 공습을 가하지 않음으로써 현명한 결단이 되었다.

 

사실 8월 9일에도 일본군은 어뢰를 장비한 1식 육상공격기 16대를 제로기 15대와 함께 발진시켰으나 일본기들은 과달카날로 직행하는 대신 과달카날 남쪽해상에서 행동 중이라고 생각한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이미 철수해버린 항모기동부대를 찾지 못하고 대신 8일의 공습에서 어뢰를 맞고 홀로 시드니로 향하던 구축함 자비스를 발견하고 뇌격을 가해서 오후 1시경 침몰시켰다.

자비스는 8일 낮에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어뢰에 맞았을 때 통신장비가 파괴되었고 이후 수리하면서 무게가 나가는 걸 모두 버리는 과정에서 구명정까지 전부 버린 상태였다.

결국 자비스는 구명정이 없는 상태에서 구조요청도 하지 못한 채 침몰했다.

함장 윌리엄 그레이엄 소령을 포함하여 승무원 247명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사실 자비스는 9일 새벽 3시경 사보 섬 서방 해상에서 8노트의 느린 속력으로 서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구축함 블루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소식이 끊어져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비스의 행방은 미해군의 미스테리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일본제25항공전대의 기록을 살펴본 미군은 그제서야 자비스의 불행한 운명을 알게 되었다.

자비스는 저승길에 몇대의 일본기와 승무원들을 데리고 갔다.

즉 항속거리의 한계점에서 자비스를 만나 폭격을 감행한 일본기 중 상당수가 돌아오는 길에 연료부족으로 해상에 불시착했고 승무원들은 대부분 실종되었다.

 

과달카날 해역을 벗어난 일본제8함대는 9일 오전 10시에 부갠빌 해협에서 둘로 갈라져서 중순양함 4척(아오바, 카고, 기누가사, 후루다카)는 캐비엥으로 향하고 기함 쵸카이와 경순양함 덴류, 유바리, 그리고 구축함 유나기는 라바울로 향했다.

사보 섬 해전에 대한 자그마한 보복은 다음날 아침에 이루어졌다.

캐비엥 북쪽을 초계하던 미국잠수함 S-44 호는 16노트의 속력으로 줄지어 달려오는 4척의 일본중순양함을 발견했다.

당시 상공에는 일본군 전투기가 떠 있었지만 호위하는 구축함은 없었다.

함장 존 무어 소령은 좋은 위치로 이동하여 기다리다가 불과 630m 거리에서 4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일본중순양함 카고는 근거리에서 달려오는 어뢰를 피할 틈이 없었고 순식간에 4발 중에 3발이 명중했다.

카고는 어뢰에 맞은 지 5분 만인 10일 오전 9시 8분에 전복, 침몰했다.

S-44 는 무사히 탈출했다.

 

(일본해군의 중순양함 카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카고를 시작으로 사보 섬 해전에 참가했던 일본함정들은 모두 종전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침몰했다. 

후루다카는 에스퍼란스 해전에서, 기누가사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침몰했으며, 덴류, 유바리, 유나기는 모두 카고처럼 미잠수함에게 당했다.

죠카이는 1944년 10월의 레이테만 해전에서 격침되었고 아오바는 1945년 7월의 구레 공습에서 격침되었다.

 

사보 섬 해전은 미해군 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교전에 참가했던 양측의 세력은 엇비슷했다.

일본함대는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척으로 이루어진데 비하여 미함대는 중순양함 5척, 구축함 5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화력을 비교해 보아도 일본함대가 8인치(203mm) 포 34문,  140mm(5.5인치) 포 10문, 5인치(127mm) 및 120mm(4.7인치) 포 27문인데 비하여 연합군 함대는 8인치 포 44문, 5인치 포 48문, 4인치포(102mm) 8문으로 오히려 일본함대보다 강했으며 어뢰 보유수도 일본함대가 62발인데 비하여 미함대는 72발로 10발이 더 많았다.

다만 일본어뢰 중 52발이 강력한 93식 산소어뢰였으므로 뇌격능력은 일본함대가 더 강했다.

 

엇비슷한 함대 세력과 달리 전투 결과는 일본함대의 압승이었다.

일본함대는 8월 9일 새벽 1시 43분부터 약 40분간 지속된 짧고 격렬한 해전에서 8인치 포탄 1,014발, 5인치 및 120mm 포탄 830발과 어뢰 62발을 사용하여 호주 중순양함 1척을 포함하여 연합군의 중순양함 4척을 격침하고 중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에 피해를 입혔다.

연합군의 인명피해만도 전사 1,023명, 부상 709명에 이르렀다.

 

반면 일본함대의 피해는 가벼웠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죠카이는 해도실이 박살났고 전방 포탑에 명중탄을 맞았다.

아오바는 어뢰발사관에 명중탄을 맞아 불이 났으나 곧 진화했다.

기누가사는 저장실에 명중탄을 맞아 침수가 일어났으며 1번 포탑이 명중탄을 맞았고 좌측 키가 약간 손상을 입었다.

카고는  정찰기 1대가 조종사와 함께 명중탄에 맞아 손실되었다.

그리고 모든 일본함정들이 기관총좌에 약간의 손상을 입은 정도였다.

일본군의 전사자는 58명, 부상자는 53명이었는데 죠카이의 해도실이 명중되었을 때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니미츠 제독은 전례없는 참사인 사보 섬 해전의 패전 원인으로 통신불량, 공중정찰 미비, 적의 의도에 대한 오판, 불완전한 레이더에 대한 맹신, 정체불명의 항공기를 무시한 점, 함대 지휘관의 부재 등을 꼽고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전반적으로 전투에 대비한 마음가짐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해군성의 지시로 1942년 12월부터 사보 섬 해전에 대하여 철저한 조사를 실시했던 헵번 제독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으며 패전의 책임은 당시 현장 지휘관 모두에게 물을 수 있으나 특정한 지휘관의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도 헵번 제독의 결론에 찬성함으로써 사보 섬 해전의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임되거나 좌천된 지휘관은 없었다.

 

사보 섬 해전의 책임을 특정한 지휘관에게 묻지 않은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사보 섬 해전 당시 현장의 최고위 지휘관으로 패전의 책임을 피해나가기 어려웠던 터너 제독은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거듭 성공시키면서 이전까지 미해군 내에서 상륙작전의 최고 권위자로 여겨지던 바비 제독의 명성을 가볍게 누르고 미해군 제일의 상륙작전 전문가로써 태평양 전쟁의 승리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사보 섬 해전 당시 호위함대를 지휘했던 크러칠리 제독도 이후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작전에서 훌륭하게 자신의 몫을 다했다.

 

사보 섬 해전의 참패는 미해군에게 여러 교훈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우선 미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의 도취감에서 깨어나 일본해군의 야전능력을 올바르게 평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해군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노력하여 결국은 야전에서 일본해군을 압도하게 된다.

 

장비 면에서는 통신장비가 개량되었고 수상함 탐지능력이 구형 SC 레이더보다 뛰어난 신형 SG 레이더의 보급이 가속화되었다.

함상 화재에 대비해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함정 내에서 나무 가구가 사라졌고 가연성 내장재와 페인트는 불연성으로 바뀌었다.

침구류도 불연성으로 바뀌었고 물방울을 분사하는 소방호스같이 효과적인 소화장비들의 개발과 보급이 촉진되었다.

지휘관의 의식도 일변하여 비상상태를 오래 유지함으로써 승무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을 금기시하는 바람직한 풍조가 생겨났다.

 

미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처절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사보 섬 해전은 과달카날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투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보 섬 해전은 일본군에게 있어서 미군에게 전초기지 하나 뺏기는 정도의 피해로 간단히 끝날 수 있었던 과달카날 전투의 성격을 바꾸어서 일본의 해군력과 항공력이 휘청거릴만큼 처절하고 무자비한 6개월 간의 소모전으로 만들었다. 

 

미군에게도 과달카날 전투는 쉬운 전투가 아니었다.

당시는 미국의 거대한 공업력이 전시체제로 전환되기 전이었으며 1942년 11월의 북아프리카 상륙을 앞두고 가뜩이나 모자라는 병력과 전쟁물자 중 점차 많은 양이 유럽 방면으로 돌려지고 있었다.

그나마 태평양 방면으로 돌려지는 병력과 물자의 분배를 놓고도 과달카날의 미군들은 뉴기니에서 역시 일본군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맥아더 장군과 다투어야만 했다.

과달카날의 미해병대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아직까지 미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는 막강한 일본육군과 겨루어야 했다.

미해군 또한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기세가 꺾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미태평양함대보다 더 많은 항공모함과 전함들을 가지고 숙련된 함정 승무원과 뛰어난 함재기 조종사를 다수 보유한 일본해군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사보 섬 해전은 이렇게 미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앞으로 6개월에 걸친 처절한 사투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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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보 섬 해전(4) - 북부해역의 전투

 

남부부대를 순식간에 제압한 일본제8함대는 북부부대를 공격하러 북진했다.

1942년 8월 9일 새벽 1시 46분에 경순양함 덴류가 12,000m 거리에서 북부부대의 기함 빈센스를 발견했다.

덴류가 빈센스를 확인한 2분 후인 오전 1시 48분에 일본함대의 기함 죠카이는 북부부대를 향하여 4발의 어뢰를 발사했고 50분부터는 탐조등으로 포착한 아스토리아에 8인치 주포로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보 섬 해전 상황도)

 

북부부대는 일직선을 왕복하던 남부부대와 달리 직사각형을 그리면서 초계를 하고 있었는데 오전 1시 40분에 90도로 꺾어서 10노트의 속력으로 북동쪽으로 항진 중이었다. 

중순양함들은 빈센스, 퀸시, 아스토리아의 순서로 550m 간격을 두고 항진하고 있었으며, 빈센스의 전방 좌측에는 구축함 헬름, 우측에는 구축함 윌슨이 빈센스로부터 1,200m 거리를 두고 초계하고 있었다.

 

북부부대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것은 후미의 아스토리아였다.

어쩐 일인지 오전 1시 43분에 패터슨이 발한 경고가 아스토리아의 함교에는 전달되지 않았고 동시에 일본정찰기가 투하한 조명탄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함장 윌리엄 그린먼 대령은 이틀 동안의 격무에 지쳐 함교 부속실에서 복장을 차려입은 채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오전 1시 50분, 갑자기 탐조등 불빛이 비치더니 곧 일본군의 8인치 포탄이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죠카이가 탐조등에 떠오른 아스토리아를 향하여 포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죠카이의 첫 일제사격은 너무 짧았고 두번째 일제사격은 너무 길어서 아스토리아를 넘어갔다.

이때 아스토리아의 포술장 트루스델 소령은 낮에 말썽을 일으킨 전방 사격통제용 레이더의 수리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는 부품을 교체하여 레이더 수리를 막 마쳤을 때 탐조등을 비추면서 죠카이가 일제사격을 가해왔다.

트루스델 소령은 즉시 반격명령을 내렸다.

 

1시 52분 30초에 아스토리아의 8인치 주포 8문이 죠카이를 향하여 포문을 열었고 함교에는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비상벨 소리에 놀라 함교로 뛰쳐나온 함장 그린먼 대령은 잠이 덜 깨어 정신이 없는 가운데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을 우려하여 발사중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트루스델 소령은 함장과 전화로 논쟁하면서 사격을 지속시켰다.

그리하여 아스토리아는 54분에 두번째 일제사격을 가할 수 있었으나 그린먼 대령이 재차 사격중지 명령를 내리자 결국 사격을 중지하고 말았다.

 

4번의 일제사격을 가했으나 좀처럼 명중탄을 내지 못하던 죠카이는 아스토리아가 갑자기 사격을 멈추자 거리를 계산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5번째 일제사격에서 아스토리아의 상부구조물을 명중시켰다.

그제서야 그린먼 대령은 함을 증속시키면서 사격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늦었다.

죠카이는 5,500m 에서 4,800 m 까지 접근하면서 착실하게 명중탄을 기록했다.

아스토리아는 상부구조물이 온통 화염에 뒤덮이고 동력이 끊어져 사격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죠카이에게 총 12회의 일제사격을 가했다. 

이들 중 2시 16분에 유일하게 살아있던 2번 포탑에서 발사한 마지막 12번째 일제사격이 죠카이의 전방 포탑에 명중했다.

 

아스토리아의 전방에 있던 퀸시는 사보 섬 해전에서 가장 심한 포격을 받았다.

1시 43분에 패터슨의 경고를 받는 순간 퀸시의 함교에서는 비상벨을 울림과 동시에 함교 옆의 부속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있던 함장 무어 대령을 즉시 깨웠다.

무어 대령은 당장 함교로 뛰쳐나왔으나 정확한 상황판단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일본중순양함 아오바의 탐조등이 퀸시를 비추고 이어서 아오바가 발사한 8인치 포탄이 해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어 대령도 즉각 탐조등을 향하여 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완전 무방비 상태로 앞뒤를 향해있던 포탑을 좌현으로 돌려서 포격을 시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퀸시가 2번의 일제사격을 마쳤을 때 앞장서던 빈센스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왼쪽으로 회전했는데 그 순간 아오바의 포탄 1발이 사출기에 얹혀있던 수상기에 명중하면서 화재가 발생하여 절호의 표적이 되었다.

 

이제 아오바를 따르던 기누가사도 포격에 가세했고 경순양함들의 뒤를 따르던 후루다카까지 퀸시를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3척의 중순양함이 쏘아대는 십자포화에 휘말린 퀸시는 잠시후 2번 포탑이 명중당하여 폭발이 일어났고 설상가상으로 죠카이가 발사한 어뢰 중 1발이 좌현의 4번 기관실에 명중했다.

잠시 후 아스토리아를 제압한 죠카이까지 가세함으로써 이제 퀸시는 4척의 일본중순양함에게 십자포화를 얻어맞았다.

 

(사보 섬 해전에서 아오바의 탐조등에 떠오른 퀸시의 모습)

 

퀸시는 마지막까지 함포로 반격을 가했다.

퀸시가 발사한 8인치 포탄 중 2발이 2시 5분에 죠카이의 해도실에 명중하여 34명의 전사자와 48명의 부상자를 기록했고 또 1발은 수상기용 크레인에 명중했다.

그러나 퀸시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다.

함장 무어 대령이 전사했으므로 포술장 헤네버거 소령이 퇴함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퀸시는 좌현으로 전복된 다음 함수부터 침몰했다.

이때가 1942년 8월 9일 오전 2시 35분..

이로써 퀸시는 앞으로 수많은 함정과 승무원들의 묘지가 될 아이언바텀사운드의 첫번째 멤버가 되었다.

퀸시에서는 함장 무어 대령을 포함하여 370명이 전사하고 167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보 섬 해전에서 사보 섬 동쪽의 좁은 해역에 중순양함 4척이 침몰하면서 미군은 이곳에 아이언바텀사운드(Ironbottom Sound)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후로도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이 해역에서는 수많은 미국과 일본함정들이 격침되어 말 그대로 해저를 쇳덩어리로 도배했다.

실제로 아이언바텀사운드에서는 해저에 가라앉은 어마어마한 양의 잔해 때문에 나침반이 오작동을 일으킨다고 한다.

 

(아이언바텀사운드에 가라앉은 미국과 일본함정들의 위치)

 

북부부대의 중순양함 중 선두에 섰던 빈센스는 가장 먼저 탐지되었으나 공격은 가장 늦게 받았다.

패터슨의 경보는 듣지 못했으나 일본군 정찰기가 떨어뜨린 조명탄을 본 빈센스의 함교에서는 즉시 부속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함장 립콜 대령을 깨웠다.

립콜 대령이 남부부대 쪽을 바라보자 함포의 불빛이 번쩍이며 포성이 은은하게 들려왔으나 립콜 대령은 남부부대가 대공사격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함의 속력을 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립콜 대령은 속력을 15노트로 올리라고 명령했다.

 

오전 1시 50분, 일본경순양함 유바리, 덴류, 그리고 중순양함 카고의 탐조등이 동시에 빈센스를 비추었다.

남부부대가 탐조등을 비춘다고 생각한 립콜 대령은 즉시 탐조등을 끄라고 방송했다.

그러나 포술장 애덤스 소령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8인치 주포들로 카고의 탐조등을 겨냥했다.

잠시 후 카고가 발사한 8인치 주포의 일제사격이 빈센스 전방 450m 지점에 떨어졌고 립콜 대령은 즉시 반격명령을 내렸다.

 

1시 53분부터 빈센스의 8인치 주포들이  6,400m 거리의 카고를 향하여 일제사격을 시작했다.

빈센스는 2번째 일제사격에서 카고를 넘어서 뒤에 있던 기누가사의 기관실과 창고를 명중시켜 약간의 인명피해를 입혔다.

 

(일본해군의 중순양함 기누가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러나 빈센스의 분전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1시 55분에 죠카이가 발사한 어뢰 중 2발이 좌현의 4번 기관실에 명중했다.

동시에 경순양함 유바리도 빈센스를 향하여 어뢰를 발사했는데 이 어뢰 중 1발이 2시 3분 30초 경에 1번 기관실에 명중하여 그곳의 승무원을 몰살시켰다.

일본군의  포탄과 어뢰에 의하여 함내의 전원과 통신망이 파괴되어 각 포탑은 자체적으로 포격을 계속했으나 곧 차례차례 침묵했고 배는 좌현으로 위험하리만큼 기울었다.

 

일본군이 사라진 후 함장 립콜 대령은 오전 2시 15분에 퇴함명령을 내렸다.

립콜 대령과 당직병인 해병대의 패트릭 상병, 그리고 부관은 함내 곳곳에서 퇴함 순서를 기다리는 부하들을 찾아다니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는데 중간에 침수된 구역을 헤엄쳐 건너가기도 했다.

립콜 대령이 마지막으로 함을 떠난 직후 빈센스는 좌현으로 전복했고 곧 침몰했다.

그때 시간이 오전 2시 50분..

빈센스는 퀸시의 뒤를 이어 아이언바텀사운드의 두번째 멤버가 되었다.

빈센스에서는 332명이 전사하고, 258명이 부상을 당했다.

 

(CA-44 빈센스. 배수량 : 9,400톤, 길이 : 179m, 폭 : 18.9m, 속력 : 32.7노트, 승무원 : 952명, 무장 : 8인치 주포 9문, 5인치 포 8문, 37mm 포 2문, 12.7mm 기관총 8정, 항공기 : 4대)

 

빈센스의 우현에서 앞서가던 구축함 윌슨의 함장 프라이스 소령은 패터슨의 경보와 일본정찰기의 조명탄 투하를 보고서도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1시 50분에 일본함대가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아군 중순양함들을 포격하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한 윌슨은 속력을 30노트로 올리면서 좌회전, 우회전, 이어서 좌회전으로 급기동하면서 5인치 주포 4문으로 주로 죠카이를 포격했다.

그러나 미군 중순양함 사냥에 정신이 팔려있던 죠카이는 윌슨을 무시했고 윌슨의 5인치 포는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빈센스의 좌현에서 앞서나가던 구축함 헬름도 마찬가지였다.

함장 캐럴 소령은 패터슨의 경보와 일본정찰기의 조명탄 투하를 보았고 이어서 남부부대가 교전하는 포성을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1시 50분에 일본함대가 북부부대의 중순양함들을 탐조등으로 비추자 그때서야 속력을 30노트로 올리면서 5인치 주포로 일본함정들을 공격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오전 2시에 우현쪽으로 멀어져가는 일본함대의 경순양함들과 후루다카를 발견한 헬름은 뒤늦게 쫓아가면서  5인치 포로 사격을 가했으나 정작 일본순양함들은 헬름이 쫓아오는지도 몰랐다.

 

북부해역의 전방에서 경계 임무를 맡았던 구축함 랠프탤벗의 함장 캘러헌 소령은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굉장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승부는 알 수 없었다.

오전 2시 15분에 철수하던 일본경순양함 유바리가  탐조등으로 랠프탤벗을 발견하자 유바리, 덴류, 후루다카가 7회의 일제사격을 가하여 1발을 명중시켰다.

캘러헌 소령은 미군함대가 오발했다고 생각하고 대응사격을 하지 않은 채 사격을 멈추라고 방송했다.

뜻밖의 반응에 놀란 일본함정들은 랠프탤벗이 아군인 유나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사격을 멈추었다.

그러나 3km 전방까지 다가와서 탐조등으로 랠프탤벗의 모습을 확인한 유바리가 다시 사격을 시작하자 곧 덴류와 후루다카도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랠프탤벗도 4발의 어뢰를 발사하고 5인치 함포로 반격하면서 전속력으로 도망갔으나 유바리의 2번째 일제사격에서 140mm 포탄 4발이 해도실, 사관실, 어뢰발사관, 후방 포탑에 명중하면서 11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랠프탤벗이 발사한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랠프탤벗은 함체가 20도나 우현으로 기울면서 위기에 처했으나 그때 마침 세찬 스콜에 진입하자 일본순양함들은 랠프탤벗을 포기하고 떠나 버렸다.

 

사보 섬 남쪽에서 후방경계 임무를 맡았던 일본구축함 유나기는 오전 1시 52분에 갑자기 나타난 미국중순양함 시카고에게서 함포사격을 받았다.

유나기는 즉시 도망치면서 120mm 주포로 반격했으나 서로 명중탄은 내지 못했다.

잠시 후 오전 2시에 천천히 서쪽을 향하는 구축함 자비스를 발견한 유나기는 다시 함포사격을 가했으나 역시 명중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북상하여 유바리, 덴류, 후루다카를 뒤따라갔다.

 

사보 섬 해전이 벌어지는 동안 미군 수송함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야간 양륙작업 중이던 수송함들은 일본정찰기의 조명탄이 바로 자기들 상공에서 터지자 즉시 하역작업을 중지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등화관제를 실시한 다음 불안한 마음으로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과달카날 북해안에 정박한 수송함 맥콜리에 타고 있던 터너 제독의 시야에는 세찬 스콜 속에서 사보섬 방면에서 번쩍이는 불빛만 보이고 요란한 포성만 들려올 뿐 정확한 상황을 알 수가 없었고 따라서 수송함들에게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이런 사정은 터너 제독보다 교전현장에서 더 멀리 떨어진 크러칠리 제독이나 동부부대의 스코트 제독도 마찬가지였다.

 

북부부대를 제압한 순간 일본제8함대의 진형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기함 죠카이는 이제 기누가사의 뒤에 처져서 후미에 있었고 경순양함 2척과 후루다카는 따로 행동하고 있었다.

미카와 제독은 제8함대가 다시 진형을 갖추러면 3시간 정도가 걸릴 것으로 보았다.

그 말은 다시 진형을 갖추어 미군의 수송선단을 공격하려면 아침이 된다는 의미였다.

미카와 제독은 미국항공모함들이 아직 과달카날 근해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침까지 과달카날 근해에서 얼쩡거리다가는 십중팔구 미함재기의 공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카와 제독과 제8함대의 참모들은 더 이상의 행운을 시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죠카이의 함장 하야가와 미치오 대좌가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에 따라 수송선단을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이 정도면 할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미카와 제독과 참모들의 의견을 바꾸지는 못했다.

 

1942년 8월 9일 오전 2시 20분, 미카와 제독은 휘하 함정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일본제8함대는 30노트의 고속으로 과달카날 해역을 떠나 슬롯을 따라 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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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보 섬 해전(3) - 남부해역 전투

 

과달카날 해역을 향하여 접근하던 일본제8함대는 1942년 8월 9일 오전 0시 45분에 전원 전투배치 상태로 들어갔다.

당시 제8함대는 선두로부터 중순양한 죠카이, 아오바, 카고, 기누가사, 후루다카, 경순양함 덴류, 유바리, 구축함 유나기의 순으로 단종진을 이루고 있었으며 함정 사이의 간격은 약 1,200m, 함대 속력은 26노트였다.

 

(사보 섬 해전 상황도. 1942년 8월 9일)

 

전투배치 명령이 떨어진지 9분 후인 9일 0시 54분, 선두에 섰던 기함 죠카이의 견시가 우현쪽으로 약 8,000m 거리에서 남동쪽으로 멀어져 가는 미국구축함 블루를 발견했다.

미카와 제독은 계획을 바꾸어 사보 섬의 북쪽을 돌아서 진입하기로 하고 0시 59분에 북쪽으로 변침했다.

 

잠시 후 죠카이의 견시가 이번에는 북동쪽으로 멀어져가는 미국구축함 랠프탤벗을 발견했다.

죠카이의 견시가 보고한 랠프탤벗과의 거리는 약 16km 였는데 야간에 이정도 원거리에서 쌍안경으로 구축함 크기의 함정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죠카이의 견시가 그 먼거리에서 랠프탤벗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당시 일본군 견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를 보여준다.

 

죠카이가 블루를 발견했을 당시 블루의 레이더는 사보 섬의 간섭에 의하여 일본함대를 포착하는데 실패했고 블루의 견시들도 열심히 해상을 감시하고 있었으나 마침 블루의 함미 쪽은 깜빡 잊고 있었다.

원래 함미 쪽이 견시가 잘 놓치는 부분이다.

랠프탤벗은 레이더나 견시나 일본함대를 발견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미카와 제독은 원래 계획대로 사보 섬의 남쪽을 돌아 진입하기로 하고 1시 5분에 다시  남쪽으로 변침하여 26노트의 속력으로 사보 섬 남쪽을 통과했다.

오전 1시 33분에 미카와 제독은 지금부터 별도의 공격명령이 없더라도 함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별도의 공격승인을 요청하지 말고 자유롭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분 후인 오전 1시 34분, 억수같이 퍼붓는 스콜 속에서 죠카이의 좌현 견시가 북쪽으로 불과 2,700m  떨어진 지점에서 서쪽으로 서서히 항진하던 미국구축함 자비스를 발견했다.

아마 자비스에서도 일본함대를 발견했겠지만 낮에 어뢰에 맞아 통신수단이 망가진 자비스는 경고를 해줄 수 없었다.

자비스는 통신이 두절된 상태로 약 12시간 후에 승무원 전원과 함께 침몰해버려서 당시 자비스 함상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죠카이에 이어서 자비스를 발견한 일본함정이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고 기함인 죠카이가 포격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함정들도 자비스에 포격을 가하지 않았다. 

 

자비스를 발견한지 2분 후인 오전 1시 36분에 죠카이의 견시가 남부부대의 선두인 미국구축함 패터슨과 버글리를 발견했고 이어서 11,000m 거리에서 호주중순양함 캔버라와 뒤따르던 중순양함 시카고를 잇달아 발견했다.

남부부대는 구축함 패터슨과 버글리를 양쪽에 앞세우고 캔버라와 시카고가 나란히 10노트의 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카와 제독은 지체없이 어뢰발사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최후미에서 따라오던 구축함 유나기에게는 구축함 자비스나 버글리가 되돌아와서 일본함대의 뒷통수를 때리지 못하도록 함열을 떠나서 사보 섬 남쪽 해상을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즉시 일본함대의 어뢰발사관에 발사제원이 입력되었고 2분 후인 1시 38분부터 17발의 어뢰가 패터슨과 순양함들를 향하여 발사되었다.

이들 중 패터슨을 노렸던 어뢰들은 모두 빗나갔으나 순양함들을 향한 어뢰 중 3발이 명중했다.

 

남부부대가 일본함대의 출현을 알아차린 것은 일본함정들이 어뢰를 발사한지 5분이나 지난 1시 43분이었다.

패터슨이 4,600m 거리에서 일본함대의 함영을 발견하고 즉시 경보를 발했으나 이미 늦었다.

패터슨이 경보를 발하는 순간 미카와 제독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 정찰기들이 과달카날 북해안에 정박 중인 엑스레이 부대와 툴라기 방면에 정박 중이던 요크 부대의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했다.

엑스레이 부대의 상공에 투하된 조명탄 불빛에 남부부대 소속 캔버라와 시카고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러자 불과 4,100m 거리까지 접근해있던 죠카이와 5,000m 떨어진 아오바, 그리고 8,200m 떨어진 후루다카의 8인치 주포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일본해군의 중순양함 아오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캔버라의 견시들도 패터슨과 거의 동시에 일본함대를 발견하고 함교에 보고했다.

캔버라의 함장인 게팅 호주해군대령과 포술장이 견시가 보고한 방향을 자세히 보려고 함교의 유리창에 눈을 갖다 대는 순간 일본군 어뢰 2발이 캔버라의 우현에 명중했고 이어서 일본군의 첫번째 일제사격이 캔버라의 상부구조물에 떨어졌다.

포술장은 즉사했으며 중상을 입은 게팅 대령은 몇시간 후 사망했다.

캔버라는 어뢰 2발과 4인치 부포 몇발을 발사했으나 맹렬한 화재가 상부구조물을 휩쓸고 함체는 오른쪽으로 10도나 기울었다.

5분만에 캔버라는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호주해군의 중순양함 캔버라. 표준 배수량 : 10,000톤, 길이 :190m, 폭 : 20.8m, 속력 : 31.5노트, 항속거리 : 12노트로 24,600km, 승무원 : 848명, 무장 : 8인치 포 8문, 4인치 포 4문. 3파운드 포 4문, 항공기 : 1대)

 

다음은 시카고 차례였다.

패터슨의  경보를 받을 당시 시카고의 함장 보데 대령은 함교에 딸린 부속실에서 복장을 완전히 갖춘  채로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일본함대가 출현했다는 보고를 듣고 즉시 함교로 나온 보데 대령은 5인치 부포에게 조명탄을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1시 46분에 일본어뢰의 접근을 알아차린 보데 대령은 필사적인 회피운동을  시도했으나 이미 늦었다. 

1시 47분, 시카고의 좌현 함수 쪽에 일본군의 어뢰가 명중했으나 승무원들이 재빨리 대응하여 시카고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시카고의 5인치 부포들이 일제히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모두 불발탄이었다.

할 수 없이 시카고의 8인치 주포들은 대충 어림짐작으로 일본함대를 향하여 포격을 가하였으나 1발의 명중탄도 기록하지 못했다.

잠시 후 자신을 탐조등으로 비추는 일본구축함 유나기를 발견한 시카고는 그쪽으로 전진하면서 함포로 유나기를 공격했다.

 

사보 섬 해전에서 시카고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미카와 제독이 시카고를 상대하는 대신 북부부대 공격을 위하여 북진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카고가 일본함대를 따라가면서 뒤에서 포격을 계속 가했다면 북부해역의 전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북부부대에 경고만 해 주었어도 실제 역사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데 함장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하여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한 채 유나기를 쫓아가면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시카고의 피해는 전사 2명 부상 21명으로 시카고의 전사자 수는 사보 섬 해전에서 격침된 중순양함 4척은 물론 구축함 패터슨의 8명이나 랠프탤벗의 11명보다도 적었다.

 

(CA-29 시카고. 배수량 : 9,300톤, 길이 : 183m, 폭 : 20.1m, 속력 : 32노트 승무원 : 621명, 무장 : 8인치 포 9문, 5인치  포 4문, 21인치 어뢰발사관 6문)

 

구축함 패터슨은 1시 43분에 일본함대를 발견했을 때 캔버라의 좌현 전방에서 항진하던 중이었다.

함장 프랭크 워커 중령은 일본함대를 발견하자 즉시 경보를 발하면서 함포사격을 위하여 좌회전했다.

동시에 그는 어뢰발사를 명령했으나 이 명령은 혼란  통에 전달되지 못했다.

패터슨은 5인치 주포를 쉴 새 없이 쏘아대면서 왼쪽으로 완전히 한 번 회전한 후 일본함대와 나란히 북상하면서 포격전을 벌이다가 1시 49분에 4번 포탑에 명중탄을 맞아서 8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후 패터슨은 일본함대가 북부부대의 중순양함들을 상대하러 북상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DD-392 페터슨. 표준배수량 : 1,500톤, 길이 :104m, 폭 : 10.8m, 속력 : 38.5노트, 항속거리 : 12노트로 12,000km, 승무원 : 158명, 무장 : 5인치 포 4문, 12.7mm 대공기관총  4정, 21인치 어뢰발사관 12문, 폭뢰투하궤도 2조 )

 

캔버라의 우현 전방에서 항진하던 구축함 버글리는 페터슨보다 불과 몇 초 후에 일본함대를 발견햇다.

함장 싱클레어 소령은 즉시 좌회전하면서 어뢰발사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버글리의 어뢰요원들은 함이 죄회전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발사제원을 입력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우현 어뢰는 발사하지 못했고 함이 완전히 회전한 후에 죄현 어뢰 8발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일본함대가 북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속력이 느린 미국어뢰가 따라잡지 못했다.

초기에 우현의 어뢰가 발사되었다면 1-2발 정도는 명중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시카고가 어뢰를 맞기도 전인 1시 44분부터 이미 일본함대는 북쪽으로 변침하여 북부부대를 향하고 있었다.

변침과정에서 일본함대는 2개로 갈라졌다.

즉 4번함 기누가사가 갑자기 속력을 늦추자 뒤를 따르던 5번함 후루다카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오른쪽으로 변침하여 함열을 이탈했다.

그러자 후루다카를 따르던 경순양함 덴류와 유바리도 나란히 우회전했는데 곧 후루다카가 다시 죄회전하는 것을 보자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좌회전하여 앞장섰다.

그리하여 일본함대는 죠카이를 선두로 하는 중순양함 4척과 경순양함 유바리, 덴류, 그리고 중순양함 후루다카로 이루어진 부대로 양분되어 북부부대를 공격하게 되었다. 

 

(일본해군의 중순양함 후루다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8월 9일 오전 1시 43분에 캔버라에 가한 포격을 시작으로 49분에 패터슨을 패퇴시킬 때까지 일본제8함대는 어뢰 17발을 발사하여 3발을 명중시키고 집중적인 함포사격을 퍼부어서 불과 6분 만에 단 1발의 포탄도 맞지 않은 채 중순양함 2척과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남부부대를 제압했다.

이제 일본함대는 북부부대를 공격하러 북상하고 있었으며 본게임이 시작될 참이었다.

사보 섬 해전에서 북부부대가 입은 피해가 야구방망이로 호되게 얻어터진 수준이라면 남부부대의 피해는 회초리로 찰싹 맞은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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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보 섬 해전(2)-연합군 함대의 상황

 

일본제8함대가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오고 있던 1942년 8월 8일 오후 6시 7분, 제61기동부대 사령관 플레처 제독은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에게 와일드캣의 숫자가 99대에서 78대로 줄어들고, 일본군 뇌격기의 세력이 강대하므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즉시 철수시키겠다고 통보했다.

 

이 전문을 곰리 제독과 동시에 수신한 터너 제독은 분통을 터뜨렸다.

전투기의 숫자가 이틀 동안 21% 나 줄었다지만 아직도 제61기동부대는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함대와의 일전을 앞둔 6월 4일 아침에 3척의 미항공모함들이 보유했던 와일드캣보다 1대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사보 섬 해전의 참패가 문제가 되자 종전 이후에 플레처 제독은 당시 제61기동부대의 연료보유량이 적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또한 틀린 주장이었다.

당시 제61기동부대 소속 함정들의 전투보고서에 나타난 8월 8일 오전 당시의 연료보유량은 충분한 수준이었다.

기함 새러토가는 4,000 톤이 넘는 중유를 보유하여 미해군이 전투에 적합한 상한선으로 설정한 3,600 톤보다 오히려 400톤이나 초과하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도 1,850톤의 중유를 보유하여 충분한 수준이었고 와스프는 나중에 격침되면서 전투보고서가 소실되어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중유가 모자라는 상태는 아니었다.

전함 노스캐롤라이나도 3,120톤의 중유를 보유하고 있었다.

2,200 톤에서 3,000 톤 가량의 연료용량을 가진 순양함들도 모두 50% 이상의 중유를 보유한 상태였다.

450톤에서 650톤 정도의 연료용량을 가지는 구축함들의 중유보유량은 다양하지만 가장 연료를 적게 보유한 그레이슨도 142톤의 중유를 가지고 있었다. 

구축함들의 1일 중유사용량이 40톤에서 80톤 가량이란 걸 생각해보면 제61기동부대는 수일간 활동할 수 있는 중유를 가지고 있었다.

정 급하면 구축함들은 순양함이나 항공모함으로부터 급유를 받을 수도 있었고 누메아에는 제61기동부대 소속 급유함 5척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플레처 제독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 급유함들을 불러서 급유를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플레처 제독은 곰리 제독에게 보낸 전문에서 철수 도중에 만날 수 있도록 이 급유함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구했다. 

 

플레처 제독의 전문을 받은 곰리 제독은 오후 10시 41분에 철수를 허가하는 전문을 보냈으나 이 전문은 불안정한 통신망 때문에 9일 새벽 3시 30분에야 플레처 제독에게 도달했다.

하지만 플레처 제독은 곰리 제독의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철수를 요청한 직후 바로 누메아를 향하여 남동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제61기동부대가 떠나버리자 과달카날 교두보를 보호할 임무는 제62임무부대의 호위함대 사령관인 크러칠리 영국해군소장에게 떨어졌다.

크러칠리 소장은 호주해군에 파견되어 태평양으로 오기 전에 영국에서 2년 이상 대서양 전투에 참가하는 함정 승무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었다.

따라서 그는 대잠작전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잠수함의 위협에 예민했다.

크러칠리 소장의 과달카날 교두보 방어계획을 보면 일본잠수함의 위협을 염두에 두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과달카날과 툴라기 사이의 해역을 남부,북부, 그리고 동부 해역으로 삼등분했다.

 

(사보 섬 해전 당시 연합군 함정들의 배치상황도)

 

과달카날 북서해안의 에스퍼란스 곶과 사보 섬 사이를 방어하는 남부부대는 호주중순양함 2척(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중순양함 1척(시카고), 그리고 구축함 2척(패터슨, 버글리)로 이루어져 기함인 오스트레일리아에 승좌한 크러칠리 제독 자신이 지휘했다.

사보 섬에서 북쪽의 플로리다 섬 사이를 방어하는 북부부대는 중순양함 3척(빈센스, 아스토리아, 퀸시), 구축함 2척(헬름, 윌슨)으로 이루어져 빈센스의 함장인 립콜 대령이 지휘했다.

동쪽을 방어하는 동부부대는 호주 경순양함 1척(호바트), 대공경순양함 1척(산후앙), 그리고 구축함 2척(몬센, 뷰캐넌)으로 이루어져서 기함 산후앙에 승좌한 노만 스코트 소장이 지휘했다.

그리고 남부부대와 북부부대의 전방 15km 에서 20km 전방에는 조기 경보를 위하여 구형의 SC 레이더를 장비한 구축함 블루와 랠프탤벗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함정들의 배치는 5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는 남부부대와 북부부대가 분리되어서 강력한 일본수상함대와 조우시 각개격파당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이 사태는 사보 섬 해전에서 실제로 발생했다.

만일 남부부대와 북부부대가 한덩어리가 되어 해전을 치렀다면 비록 기습을 당했어도 적어도 실제 역사에서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싸웠을 가능성이 많았다.

 

둘째로는 조기 경보를 위한 구축함과 남부부대 및 북부부대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수상함이 공격해 올 경우 사전 경보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고속을 낼 수 있는 적의 수상함을 의식했다면 구축함들과 남부부대 및 북부부대와의 거리는 실제보다 최소한 2배 이상 떨어져야 했다.

 

셋째로는 조기 경보를 맡은 구축함 블루와 랠프탤벗에 장비된 구형 SC 레이더의 성능을 과신했다는 점이었다.

구형 SC 레이더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적의 함정을 약 15km 정도 거리에서 탐지할 수 있었으나 과달카날 근해처럼 육지가 가까이 있는 지형에서는 성능이 떨어졌다.

 

넷째로는 SC 레이더보다 우수한 신형 SG 레이더를 보유한 유일한 함정인 대공경순양함 산후앙을 적의 수상함이 들어올 확률이 거의 없는 동부부대에 배치했다는 점이었다.

만일 산후앙이 남부부대나 북부부대에 배치되어 있었으면 적어도 연합군 함대가 실제처럼 완전히 기습을 당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산후앙은 노만 스코트 소장의 기함이었으므로 그를 북부부대로 보내버리면 동부부대의 지휘관이 애매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으나 터너 제독이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8월 7일과 8일에 걸쳐 일본기는 계속해서 공습을 가해왔었다.

안 그래도 미함대의 가장 큰 위협을 일본군 항공기로 보고 수상함의 대공전술연구에 푹 빠져 있던 터너 제독은 8일 오전에 발견되었다는 일본함대도 다음날 수상기에 의한 공습을 가하려는 의도라는 선입견에 빠져서 일본수상함대의 출현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따라서 유일하게 SG 레이더를 가진 산후앙을 적의 수상함대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재배치한다든지 하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62임무부대는 미해군 전사가인 새뮤얼 모리슨 제독이 신의 선물이라고까지 격찬했던 SG 레이더를 갖추고도 일본함대의 기습을 허용하여 사보 섬 해전에서 미해군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해야만 했다.

 

마지막 다섯번째 문제는 서로 떨어져 활동하는 3개의 부대 사이에 유사시 협동작전을 펴기위한 어떠한 사전협의나 작전지시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크러칠리 제독은 남부부대의 함장들과는 몇 개월간 같이 일해왔었으나 북부부대와 동부부대의 함장들과는 긴밀한 전술적인 협의는 커녕 서로 얼굴을 보면서 인사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이또한 급하게 진행된 과달카날 상륙작전이 가져온 문제점의 하나였다. 

 

8월 8일 오후 8시, 터너 제독은 제61기동부대가 떠난 이후 상황을 논의하기 위하여 이미 남부해역에서 초계 중이던 크러칠리 제독과 과달카날에 상륙해 있던 반데그리프트 장군을 기함 맥콜리로 급히 호출했다.

크러칠리 제독은 기함 오스트레일리아를 타고 맥콜리가 정박 중인 과달카날 북해안 쪽으로 이동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초계를 하도록 남겨두고 주정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면 몇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는데 터너 제독은 최대한 빨리 오라는 전문을 보내왔다.

결국 안 그래도 전력이 양분된 남부부대는 전투를 앞두고 강력한 중순양함 1척을 잃고 말았다. 

 

(크러칠리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HMAS 오스트레일리아. 표준 배수량 : 10,000톤, 길이 :190m, 폭 : 20.8m, 속력 : 31.5노트, 항속거리 : 12노트로 24,600km, 승무원 : 848명, 무장 : 8인치 포 8문, 4인치 포 4문. 3파운드 포 4문, 항공기 : 1대)

 

이때 터너 제독이 주재한 회의가 필요했는지는 의문이다.

크러칠리 제독은 제61기동부대의 철수도 알고 있었고 오전에 발견되었다는 일본함대의 소식은 터너 제독보다 30분 가량 일찍 받았다.

그렇다고 터너 제독이 크러칠리 제독의 교두보 방어계획에 불만이 있어서 변경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이런 내용을 알 필요도 없었다. 

 

회의는 반데그리프트 소장의 도착이 늦어져서 오후 11시 15분에 시작하여 40분 만인 55분에 끝났다.

이 회의에서 크러칠리 제독이 새로 알게 된 것은 터너  제독이 제61기동부대의 철수에 따라 다음날인 9일에 제62임무부대도 철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것 뿐이었다.

맥콜리를 떠난 크러칠리 제독은 소해정 수타드를 타고 툴라기 섬으로 가기로 한 반데그리프트 장군과 함께 주정을 타고 1시간 동안 수타드를 찾아다녔다.

9일 새벽 1시가 훌쩍 넘겨서야 기함으로 돌아온 그는 남부부대와 합류하는 대신 엑스레이 부대의 동쪽 11km 해역을 초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남부부대는 강력한 중순양함 1척을 잃게 되었으나 만일 이때 오스트레일리아가 남부부대와 합류했다면 일본군이 공격하는 난리통에서 오히려 혼란만 더 가중시켰을 가능성이 많았다.

 

한편 과달카날 서쪽해상에서 접근 중이던 일본제8함대는 오후 11시에서 13분 사이에 중순양함 죠카이, 아오바, 카고에서 각각 1대씩의 정찰기를 발진시켰다.

정찰기 조종사들은 연합군 함대의 최종상태를 보고하고 연합군 함대 상공에 대기하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연합군 함대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한 후 쇼틀랜드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잠시 후 정찰기들은 연합군 함대의 배치 상태가 낮과 동일하다는 보고를 보내왔다.

일본함대가 과달카날 해역에 접근하자 저 멀리서 불타는 조지 엘리엇의 화염이 보였다.

미카와 제독은 최종 진입 단계에서 불타는 조지 엘리엇을 등대삼아 항로를 결정했다.

 

일본정찰기들은 사보 섬 전방에서 초계 중이던 미국구축함 블루와 랠프탤벗을 보지 못했지만 랠프탤벗은 오후 11시 35분에 사보 섬 상공을 통과하는 순양함에서 운용하는 형식의 정체불명 항공기를 발견하고 즉시 TBS(Talk Between Ship) 를 통하여 경보를 발했다.

당시 이 경보를 많은 함정들이 들었으나 정작 기함 맥콜리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잠시 후 블루도 레이더로 정체불명의 항공기를 확인하고 다시 경보를 발했으나 이 경보도 맥콜리에 도달하지 않았다.

맥콜리와 블루의 거리는 약 30km 쯤 되었는데 마침 11시 30분 경부터 사보 섬 상공에서 발생한 세찬 스콜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기상상황에서는 30km 밖에서 TBS 를 듣기 어려웠다.

동부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구축함 패터슨이 터너 제독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무조건 랠프탤벗에게 반복해주기로 되어 있었으나 반대 방향으로의 이 경보는 반복하지 않았다.

 

사실 이 일본군 정찰기는 랠프탤벗과 블루 이외에도 많은 함정에서 보았다.

북부부대를 지휘하던 빈센스의 함장 립콜 대령은 이 정찰기를 직접 보았으나 등화를 환하게 켜고 비행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군기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크러칠리 제독 휘하의 함장들은 제61기동부대가 이미 과달카날 인근해역을 떠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순양함 퀸시에서는 몇명의 초급 장교들이 정찰기의 엔진소리가 미군 비행기와 다르다면서 함장에게 당장 알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고급 장교들은 초급 장교들의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졌다고 생각하고 안 그래도 피곤에 쩔어있는 함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랠프탤벗과 블루의 경보를 받은 다른 함정들에게서도 피로에 찌든 함장들이  만일 정체불명의 항공기가 일본기라면 당연히 터너 제독에게서 무슨 명령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크러칠리 제독은 휘하 함정들에게 8월 6일 저녁부터 전원 전투배치 상태인 제1호 상태(Condition 1)를 발령했다가 48시간이 경과한 8일 저녁에야 터너 제독과의 회담을 위하여 맥콜리로 출발하면서 일부 병력이 식사를 위하여 전투배치지역을 떠날 수 있는 제2호 상태로 완화했다.

따라서 이무렵 연합군 함대의 승무원들은 극도의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고 함장들과 사령관들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맥콜리에서 터너 제독 및 크러칠리 제독을 만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훗날 그 당시 자신도 대단히 피곤했지만 두 제독은 완전히 피로에 쩔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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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보 섬 해전(1)-일본제 8함대의 접근

 

1942년 6월 11일, 일본해군은 중부태평양과 남태평양의 일본군 점령지 외곽 지역을 모두 관장하던 이노우에 제독의 제4함대를 분리하여 라바울에 기지를 두고 남태평양 지역을 전담하는 제8함대를 창설했다.

초대 사령관으로는 미카와 군이치 중장이 임명되어 6월 29일에 기함인 중순양함 죠카이를 타고 라바울에 부임했다.

 

(일본제8함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8월 7일 오전에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보고를 받은 미카와 제독은 즉시 자신이 보유한 제8함대의 주력을 사용하여 과달카날의 미함대를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캐비엥을 떠나 애드미럴티 제도로 향하던 3척의 중순양함들을 포함하여 제8함대의 중순양함 5척을 모두 라바울로 불러모았다.

미카와 제독의 계획을 알게된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미카와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미군의 수송선단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점을 강조했다. 

 

라바울을 향하여 급히 남하하던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남서태평양해역군의 B-17 에게 발견되었으며 이 정보는 8월 7일 밤 11시 19분에 터너 제독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해군기지 부근에서 일본함정들이 활동하는 것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항은 아니었다.

 

중순양함들 중 기함 죠카이는 라바울 항에 입항했고 나머지 4척은 합류지점인 세인트조지 해협으로 향했다.

미카와 제독은 8월 7일 오후 4시 28분에 기함 죠카이에 승선하여 경순양함 덴류, 유바리, 그리고 구축함 유나기를 이끌고 라바울을 출항하여 오후 7시 30분경 세인트조지 해협에서 중순양함 4척과 만났다.

당시 라바울 지역의 구축함들은 주로 수송임무를 맡아서 바빴기 때문에 순양함이 7척이나 포함된 함대에 구축함을 1척밖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이러한 구축함의 부족 현상은 사보 섬 해전을 끝내고 돌아오던 중순양함 카고가 미잠수함에 의하여 격침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중순양함 5척(죠카이, 아오바, 카고, 기누가사, 후루다카), 경순양함 2척(덴류, 유바리), 그리고 구축함 1척으로 이루어진 제8함대는 세인트조지 해협을 남하하여 과달카날을 향했다.

 

(일본해군 중순양함 죠카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때 세인트조지 해협의 입구를 감시하고 있던 미잠수함 S-38 호는 8월 7일 오후 8시에 제8함대를 발견했다.

제8함대의 함정들은 북쪽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S-38 호로부터 너무 가까운 곳을 고속으로 통과하는 바람에 S-38 호는 어뢰공격을 가할 기회를 놓쳤다.

S-38 호의 함장 먼슨 소령은 브리즈번에 구축함 2척과 함종 미상의 대형함 3척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가 남동쪽으로 고속항진 중이라고 보고했고 이 정보는 다음날인 8일 아침에 제62임무부대를 호위하던 크러칠리 영국해군소장에게 도달했다.

라바울의 남동쪽에서 목격된 일본함대가 과달카날 방향인 남동쪽으로 고속항진 중이라는 사실은 크러칠리 제독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으나 일본함대가 목격된 곳은 아직도 과달카날로부터 890km 나 떨어진 곳이었으므로 그는 후속 정보를 기다렸다.  

 

한편 미카와 제독은 라바울을 출항하기 전에 과달카날에 역상륙을 감행할 해군육전대 519명을 2척의 수송선에 실어서 과달카날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원래는 제17군으로부터 1개 대대를 지원받아서 해군육전대와 함께 5척의 수송선으로 역상륙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뉴기니 방면에 집중하고 있던 제17군 사령관 햐쿠다케 하루요시 중장이 병력파견을 거절하는 바람에 엔도 해군대위가 지휘하는 해군육전대만 파견했다.

이들 수송선 2척은 7일 오후 11시에 구축함 3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라바울 항을 출항했는데 다음날인 8일 오전 11시경 미카와 중장으로부터 라바울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카와 중장은 미함대가 항공모함까지 포함한 대규모 함대라는 것을 알자 519명의 병력으로는 타격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세인트조지 해협을 여전히 감시하던 S-38 은 8일 밤늦게 세인트조지 곶에서 서쪽으로 23km 떨어진 해상에서 구축함 1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항진 중인 메이요마루를 발견했다.

S-38 은 900m 전방까지 접근한 다음 잠망경을 사용하지 않고 소나로 거리를 측정한 후 2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는 2발 다 메이요마루에 명중했고 이 불운한 수송선은 침몰하여 해군육전대원과 승무원 등 총 373명의 사망 및 실종자를 기록했다.

S-38은 분노한 일본구축함의 폭뢰 세례를 피하여 탈출에 성공했고 다음날 또다시 폭뢰 공격을 받았으나 역시 도망치는데 성공하여 8월 22일에 브리즈번에 도착했다.

 

(S-38 호. 길이 : 67m, 폭 : 6.3m, 수상배수량 : 868톤, 수중배수량 : 1,079톤, 수상속력 : 14.5노트, 수중 속력 : 11노트, 승무원 : 42명, 무장 : 533mm 어뢰발사관 4문, 어뢰 12발, 4인치 갑판포 1문)

 

부카 섬의 북부를 통과한 제8함대는 8일 오전 6시 25분에 부겐빌 섬 북방 90km 해역에서 5척의 중순양함으로부터 각각 1대씩의 수상정찰기를 발진시켰다.

이들 5대의 정찰기 중 4대가 정오 경에 돌아왔다.

중순양함 죠카이와 아오바를 떠난 정찰기 2대는 과달카날과 툴라기 부근에 전함 1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9척, 수송선 18척이 있다고 보고했고 카고를 떠난 정찰기는 산타이사벨 섬 남쪽해상에서 항공모함 와스프의 함재기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제8함대는 부겐빌 섬 북방해상에서 정찰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밀른 만에서 출격한 호주공군의 허드슨 정찰기에게 오전 10시 26분과 11시 1분에 발견되었다.

정오가 지나서 정찰기를 수용한 제8함대는 24노트의 속력으로 슬롯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사보 섬 해전에서 일본제8함대의 접근상황도)

 

8일 오후 4시 28분에 쵸이셀 섬 남방해역을 통과하던 제8함대는 죠카이와 아오바에서 다시 2대의 정찰기를 사출했다.

이 정찰기들은 미함대의 상황은 오전과 동일하다고 보고한 다음 쇼틀랜드로 날아갔다.

오후 4시 40분, 미카와 제독은 휘하 함장들에게 간단한 내용의 전투계획을 하달했다.

즉 야간에 사보 섬 남쪽으로부터 진입하여 과달카날 해역의 연합군 함정을 먼저 어뢰와 함포로 공격한 다음 툴라기 방면으로 북상하여 이곳의 연합군 함정들도 역시 어뢰와 함포로 공격한 후 사보 섬 북부를 통하여 퇴각한다는 것이었다.

미카와 제독의 전투계획에서 미군 수송함에 대한 별도의 언급은 없었다.

 

일본제8함대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동안 연합군의 감시체계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면서 일본함대의 접근을 놓치고 있었다.

사실 8일 오전 10시 26분과 11시 1분에 호주군의 허드슨 폭격기들이 일본함대를 발견한 정찰성공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사건이었다.

그러나 호주군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정찰결과를 즉시 보고하기 위하여 무선침묵을 깨는 대신 지정된 구역을 마저 정찰하기 위하여 오후 시간 대부분을 소비한 후 밀른 만에 돌아와서 커피 한잔 마시고 느긋하게 정찰내용을 보고했다.

더군다나 함종을 오인하여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수상기모함 2척으로 보고했다.

이 보고는 브리즈번의 맥아더 사령부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복잡한 전달체계를 거친 후에 결국 8시간 이상 경과한 오후 6시 45분에야 터너 제독에게 도달했고 11시 1분의 정찰결과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오후 10시 30분경에야 터너 제독 책상에 올라왔다.

 

더구나 정찰기의 조종사가 함종을 오인한 것이 터너 제독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8월 7일과 8일 낮동안 잇달아 일본군의 공습을 받았던 터너 제독은 정찰보고에 나타난 수상기 모함이란 함종을 보자 반사적으로 일본군이 수상기에 의한 공습을 기도한다고 생각했다.  

터너 제독은 일본함대가 사보 섬에서 불과 250km 떨어진 산타이사벨 섬의 레카타 만으로 향한다고 짐작했다.

그는 일본군이 수상기 운용에 적합한 레카타 만에서 아마도 다음날인 9일에 수상기를 이용한 공습을 가할 예정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수상함으로 야간공격을 감행할 생각이라면 수상기모함을 대동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정찰보고의 지연과 상관없이 일본함대를 발견할 기회는 있었다.

정찰계획에 따르면 남서태평양해역군은 라바울 부근과 동경 158도까지를 정찰하고 남태평양해역군은 트럭 섬과 과달카날 사이의 북방해상을 정찰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슬롯 해역에 대한 정찰은 제61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이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8월 7일과 8일에 일본군의 공습을 경험한 플레처 제독은 한시라도 빨리 철수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8일 오후에 정찰기를 띄우지 않았다.

플레처 제독의 소극적 태도를 알고 있던 터너 제독은 미리 7일 저녁에 제63임무부대 사령관 맥케인 제독에게 슬롯 해역의 정찰을 의뢰했다.

 

맥케인 제독은 터너 제독의 정찰요청을 수락했다.

그는 8일 아침에 누메아에서 슬롯 해역으로 2대의 B-17 을 발진시키는 한편 말라이타 섬에 정박한 수상기 모함을 기지로 삼아 트럭 섬과 과달카날 사이를 정찰 중이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에게 슬롯 해역 정찰도 추가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시간 간격을 두고 차례로 누메아에서 발진한 2대의 B-17 폭격기들은 90km 차이로 일본제8함대와 접촉하는데 실패했고 말라이타 섬에서 출격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슬롯 해역의 기상이 나빠서 정찰을 포기하고 귀환했다.

8일 저녁에 자신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이 슬롯 해역을 정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맥케인 제독은 즉시  터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전문을 보냈으나 불안정한 통신망 때문에 맥케인 제독의 전문은 8일 자정이 가까워서야 터너 제독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과달카날 작전을 둘러싼 통신망의 불안정성 또한 상륙작전을 촉박한 시간표에 따라 밀어붙이다 보니 나타난 부작용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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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부투-타남보고 상륙

 

가부투-타남보고 섬은 툴라기 섬에서 동쪽으로 2,700m 정도 떨어져 있다.

가부투 섬은 크기가 200m x 450m 정도이며, 서북쪽으로 450m 정도 떨어져서 둑길로 가부투 섬과 연결된 타남보고 섬은 약간 작다. 

양섬은 둘다 고지를 가지고 있는데 가부투 섬의 148 피트 고지가 타남보고 섬보다 10m 정도 높았으므로 먼저 가부투 섬에 상륙하기로 했다.

가부투 섬 상륙부대는 가부투 섬의 동쪽으로 진입하여 섬의 북동쪽에 있는 수상기용  램프에 상류할 예정이었으므로 진입수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대안인 플로리다 섬의 할라보 반도에 미리 상륙하기로 했다.

 

(툴라기 섬 및 가부투-타남보고 상륙작전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8월 7일 오전 7시 27분부터 32분까지 5분간 로널드 스무트 중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몬센이 60발의 5인치 포탄을 할라보 반도의 상륙예정해안에 발사했다.

오전 8시 45분에 로버트 힐 중령이 지휘하는 제1/2대대 중 할레타 해안에 상륙한 B 중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들이 할라보 반도에 아무런 저항을 받지않고 상륙했다.

 

(플로리다 섬의 할라보 반도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하는 제1/2대대의 모습)

 

가부투 섬 상륙은 상륙주정의 부족 때문에 툴라기 상륙 4시간 후인 정오에 실시했다.

따라서 기습은 불가능했다.

병력수송함 헤이우드에 탑승하고 있던 로버트 윌리엄스 소령의 제1낙하산 대대 395명은 13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11km 를 항해해야 했다. 

11시 45분부터 55분까지 항공모함 와스프를 출격한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들이 가부투 섬을 폭격했고 이어서 11시 55분부터 59분까지 4분간 대공경순양함 산후앙이 280발의 5인치 함포탄을 가부투 섬에 쏟아부었다.

 

그 직후 제1낙하산 대대가 가부투 섬에 상륙했다.

돈틀레스들이 원래 상륙하기로 계획했던 콘크리트로 만든 일본군의 수상기용 경사로를 부수어 버리는 바람에 제1낙하산대대는 더 북쪽의 부두에 상륙해야 했고 따라서 타남보고 섬으로부터 사격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선두의 A 중대는 아무런 피해없이 상륙에 성공했으나 뒤따르던 B 중대와 마지막의 C 중대는 가부투 섬과 타남보고 섬에서 쏟아지는 일본군의 소화기 사격을 받아서 전 병력의 10% 정도가 상륙과정에서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B 중대는 즉시 섬의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타남보고에서 쏘아대는 측사로부터 벗어났다.

잠시 숨을 고른 B 중대는 가부투 섬의 148피트 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A 중대와 C 중대도 가세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공격 도중에 대대장 로버트 윌리엄스 소령이 부상을 입어 찰스 밀러 소령이 대대장직을 이어받았다.

 

오후 2시 30분이 되자 제1낙하산 대대는 섬의 서쪽 및 남서쪽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가부투 섬을 거의 점령했다.

그러나 타남보고 섬에서 쏘아대는 총탄 때문에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대대장 밀러 소령은 타남보고 섬에 폭격과 함포 사격을 요청했다.

곧 제61기동부대에서 날아온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들이 타남보고 섬을 10분간 폭격했고 구축함 뷰캐넌과 몬센이 5인치 포탄을 쏟아부었다.

이때 대공경순양함 산후앙은 포탑 내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서 5명이 죽고 13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함포 사격에 참가하지 못했다.

타남보고 섬의 일본군들이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머리를 들지 못하는 사이에 제1낙하산 대대는 가부투 섬의 일본군 진지에 최후의 공격을 가하여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일본군들을 섬멸하고 오후 6시에 마침내 가부투 섬을 점령했다.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들의 폭격을 받고 있는 타남보고 섬. 왼쪽에 보이는 섬이 가부투 섬이다. 앞쪽에 보이는 작은 섬이 가오미 섬)

 

밀러 소령은 폭격과 함포사격을 요청할 때 기진맥진한 제1낙하산대대 병력으로 타남보고 섬 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고 윌리엄 루퍼투스 준장에게 증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해병제1사단의 부사단장인 루퍼투스 준장은 당시 톨라기 및 가부투-타남보고를 점령할 임무를 지닌 북부부대의 지휘관이었다.

밀러 소령의 요청을 받을 당시 루퍼투스 준장 휘하의 예비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루퍼투스 준장은 아침에 할레타 해안에 상륙했던 에드워드 크레인  대위의 B/1/2 중대를 상륙주정에 태워 가부투 섬으로 파견했다.

가부투 점령을 끝낸 직후인 오후 6시에 B/1/2 중대원 252명을 태운 6척의 상륙정이 도착하자 제1낙하산 대대장 밀러 소령은 B 중대장 크레인 대위에게 야간을 틈타 타남보고 섬에 상륙하라고 명령했다.

오후에 제1낙하산 대대의 일부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둑길을 통하여 타남보고 섬으로 건너가려고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총격이 맹렬하여 건너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야간이라도 둑길을 건너는 것은 위험했다.

이번에도 호주공군의 스펜서 소위가 수로안내인으로서 동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주정 1척이 가부투 섬에서 산호초에 걸려 좌초하는 바람에 5척의 상륙주정이 타남보고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윽고 해가 떨어지자 구축함의 엄호사격 하에 상륙주정들은 타남보고 섬의 북동쪽에 있는  부두와 그 부근의 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상륙주정은 무사히 병력을 상륙시켰으나, 두번째 상륙주정의 마지막 병력이 상륙하는 순간 엄호하던 구축함의 포탄 1발이 상륙해안 주변의 일본군 연료저장고를 명중시켰다.

곧 연료가 환하게 타오르면서 상륙 중인 B 중대를 환하게 비추었다.

이제야 미군의 상륙을 알아차린 타남보고의 일본군들이 집중사격을 가해왔다.

M 중대에서 파견된 기관총 소대가 부두에 기관총 2정을 거치하고 반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상륙한 병력과 아직 상륙주정에 타고 있던 병력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다.

상륙주정 중의 1척은 승무원이 전멸해 버리는 바람에 어깨 너머로 주정 조작법을 익혀두었던 해병대원이 주정을 조작했다. 

 

B 중대장 크레인 대위는 후퇴를 명령했다.

B 중대의 부상자 전원과 12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모두 수용한 상륙주정들은 급히 철수했다.

중대장 크레인 대위 및 제2소대장 존 스미스 소위는 10명의 부하들과 함께 해안에 남았다. 

이들 중 병사 2명은 노 젓는 보트를 발견하여 그걸 타고 밤 10시경에 가부투 섬으로 돌아왔고 크레인 대위 및 스미스 소위와 8명의 병사들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가며 타남보고 섬의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 다음 콘크리트 둑길을 건너 자정 무렵에 전원 무사히 가부투 섬으로 복귀했다.

 

타남보고 섬 상륙실패를 보고받은 루퍼투스 준장은 사단예비대 투입을 요청했다.

반데그리프트 사단장과 터너 제독이 요청을 받아들임에 따라 8일 오전 3시 30분에 예비대인 제1/2대대와 제3/2대대를 실은 병력수송함 프레지던트 헤이즈와 프레지던트 애덤스가 과달카날 섬의 정박지를 떠나 툴라기로 향했다.

이들 중 프레지던트 애덤스에 탑승한 로버트 헌트 중령의 제3/2대대는 바로 가부투로 향하여 다음날인 8일 오전 10시부터 상륙하기 시작했다.

 

제1낙하산 대대장 밀러 소령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한 헌트 중령은 즉시 가부투 섬의 일본군 패잔병을 완전히 소탕한 다음 오후부터 타남보고 섬을 향하여 사격을 가하여 일본군을 압박했다.

그는  타남보고 공격을 위하여 전차를 요구했고 오후 1시 15분에 스위니 소위가 지휘하는  제2해병연대 제2전차대대 C 중대 소속의 경전차 2대가 상륙했다.

헌트 중령은 경전차 1대는 틴슬리 대위의 I/3/2 중대와 함께 타남보고 섬의 동해안에 상륙하고, 나머지 1대는 K 중대의  선두에 서서 둑길을 따라서 진격하기로 했다.

 

오후 4시부터 20분간 미구축함들이 타남보고 섬에 함포사격을 가했고 4시 20분에 경전차 1대를 앞세운 I 중대가 타남보고 섬의 동해안에 상륙했다.

 

동시에 가부투 섬으로부터는 경전차 1대가 K 중대의 선두에 서서 타남보고 섬으로 돌진해 갔는데 경전차의 뒤를 따르던 K 중대는 적의 치열한 사격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고 둑길 중간에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경전차는 혼자서 전진했다.

일본군들은 갑작스러운 경전차의 돌격에 당황했으나 뒤따르는 보병이 없다는 것을 알자 캐터필러에 굵은 쇠막대기를 집어넣어 멈추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차의 출현을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은 화염병을 만들어 두지 못했고 동시에 동쪽에서도 경전차를 앞세우고 I 중대가 상륙하여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화염병을 만들 여유가 없었다.

일본군들은 급한대로 천을 휘발유에 적신 후 불을 붙여 경전차에 던졌으나 이런 어설픈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멈추어 선 경전차 앞에서 우와좌왕하다가 경전차의 37mm 주포에서 발사하는 산탄과 기관총 세례를 받고 몰살당했다.

저녁이 되어 마침내 미군이 전선을 장악했을 때 경전차는 망가진 상태였으나 승무원들은 상처 하나 없었고 경전차 주위에는 42구의 일본군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미군의 M3 스튜어트 경전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I 중대와 함께 상륙한 경전차 1대도 제몫을 충분히 했다.

소대장 스위니 소위는 상륙하자마자 전사했으나 경전차는 보병의 근접엄호를 받아가며 공격을 이끌었다. 

I 중대는 상륙하자마자 경전차를 앞세우고 동쪽 사면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도 동굴이나 참호에 틀어박혀서 악착같이 저항했다.

 

오후 5시경 타남보고 섬에서 동쪽으로 수백 m 떨어진 가오미 섬에서 몇명의  일본군이 소총을 쏘았다.

I 중대의 요청을 받은 구축함 그리들리가 달려와서 가오미 섬에 5인치 함포사격을 가하자 가오미 섬의 일본군들은 곧 침묵했다. 

 

오후 5시가 되자 K 중대의 제1소대가 마침내 둑길을 건너 망가진 경전차가 있는 위치에 도달하여 방어선을 편성했다.

해병대는 오후 9시까지 타남보고 섬의 남동쪽 2/3를 장악했다.

 

오후 11시에 M 중대의 기관총 소대가 I 중대의 방어선에 증강되었는데 그 직후 일본군이 I 중대의 정면에 결사적인 돌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의 공격 기세는 대단하여 순식간에 I 중대의 방어선에 도달하면서 어둠 속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 대다수는 요코야마 항공대 소속의 항공요원이었고 전투병력인 제84경비대 소속 병사는 소수였기 때문에 전원이 전투병력인 I 중대원들에 비해 체력이나 백병전 기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의 역습은 실패하고 I 중대는 방어선을 지켜내었다.

8월 9일 날이 밝자 해병대는 공격을 개시하여 저녁까지 타남보고 섬을 완전히 점령했다.

 

가부투-타남보고 섬을 지키던 일본군 수비대는 요코야마 항공대의 항공요원 342명과 제84경비대에서 파견된 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 중 20명이 포로가 되었고 30명 정도가 플로리다 섬으로 탈출했다.

나머지 340 명 가량은 모두 전사했다.

해병대도 전사 108명, 부상 140명이라는 결코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다.

 

타남보고 점령과정에서 LVT 는 유용성을 충분히 과시했다.

8일 정오부터 제2수륙양용트랙터대대 A 중대 제3소대 소속 5대의 LVT 가  가부투 섬과 프레지던트 애덤스 호 사이를 오가면서 식수, 보급품, 탄약, 병력들을 해안으로 실어나르고 돌아가는 길에 부상자들을 후송했다.

이들 중 1대는 내륙까지 들어가서 일단의 해병대를 못박아두고 있던 일본군 방어진지에 돌격하여 기관총으로 일본군들을 몰살시키고 해병대의 부상자를 후송했다.

그러나 LVT 는 수송차량이지 전투차량은 아니었기 때문에 저런 경우는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되었다.

나중에 미군은 LVT 에 포탑을 얹어 본격적인 수륙양용장갑차인 LVT(A) 를 만든다.

 

툴라기 섬과 가부투-타남보고 섬에서 조직적 저항이 끝나자 해병대는 소탕 및 점령작업을 시작했다.

가부투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제1낙하산 대대는 9일 저녁 5시에 툴라기의 옛 행정청 지구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전쟁 전에 지어진 건물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툴라기-과달카날 지구에서 주거요건이 가장 양호했다.

 

툴라기, 가부투-타남보고 지구를 방어하는 임무는 제2해병연대가 담당했다.

제1/2대대 및 제3/2대대가 툴라기 섬을 방어했다.

 

제2/2대대는 1942년 8월 9일까지 주변의 작은 섬들을 장악했다.

E 중대가 마캄보 섬, F 중대가 음방가이 섬, G 중대가 코콤탐부 및 송오난고나 섬을 점령했다. 

이들 섬에서의 일본군 저항은 미미했다.

E 중대는 마캄보 섬에 그대로 주둔했고, F 중대와 G 중대는 가부투-타남보고 섬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이후 과달카날 전투 기간을 통하여 툴라기 섬과 가부투-타남보고 섬은 전투의 중심에서 비껴서 있었다.

일본군의 폭격기들은 헨더슨 비행장에 집중하느라 툴라기 섬과 가부투-타남보고 섬에는 폭격을 하지 않았다.

일본함정들이 가끔 툴라기 섬에 포격을 가하기는 했지만 헨더슨 비행장에 가한 포격에 비하면 강도는 무시할만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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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툴라기 상륙

 

툴라기와 가부투-타남보고 상륙부대를 실은 요크부대는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 4척(네빌, 자일린, 헤이우드, 프레지던트 잭슨)과 고속수송함 4척(콜호운, 리틀, 맥킨, 그레고리)으로 이루어져 조지 애쉬 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1942년 8월 7일 새벽 3시에 과달카날 서쪽 해상에서 엑스레이 부대와 헤어진 요크부대는 사보 섬 북방 해역을 지나 오전 6시 30분에 집결해역에 도착하여 상륙준비를 서둘렀다.

그 동안 제61기동부대에서 출격한 와일드캣 전투기와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들이 툴라기 섬과 가부투-타남보고 섬을 폭격하고 항구에 주기하고 있던 일본수상기 18대를 모두 파괴했다.

 

(공습을 받고 있는 툴라기 섬. 배후에 보이는 섬은 플로리다 섬이며 그 사이의 바다가 툴라기 항의 정박지이다.1942년 8월 7일 오전에 툴라기 섬을 공습하던 미군기가 찍은 사진이다.)

 

요크부대에 대한 화력지원은 대공경순양함 산 후앙과 구축함 뷰캐넌, 몬센으로 이루어진 노만 스코트 소장의 M 화력지원그룹이 담당했다.

 

(X-ray 부대와 Yoke 부대의 접근 상황도)

 

툴라기 상륙부대의 좌측을 엄호하기 위하여 툴라기 상륙 20분 전인 오전 7시 40분에 애드워드 크레인 대위가  지휘하는 B/1/2 중대가 플로리다 섬의 할레타 부근 해안에 상륙했다.

대공경순양함 산후앙과 구축함 뷰캐넌이 7시 27분부터 32분까지 각각 100 발의 5인치 포를 상륙해안에 쏟아부었고, B 중대원 252명이 탑승한 8척의 상륙주정이 이 해역의 수로를 잘 아는 호주공군 스펜서 소위의 안내를 받아 7시 40분 정각에 할레타 해안에 상륙했다.

7월 25일자 정찰보고에는 이 지역에 일본군이 있다고 되어 있었으나, 막상 상륙해 보니 일본군은 없었다.

 

(요크부대의 상륙작전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툴라기 섬 서해안의 화살표 부분이 목수부두, 섬 중앙의 삼각형이 280피트고지, 서해안의 화살표 머리 부분이 208피트고지이다.)

 

툴라기 섬에 대한 상륙은 예정대로 8월 7일 오전 8시에 진행되었다.

고속수송함에서 상륙주정으로 옮겨탄 제1기습대대의 B 중대 및 D 중대는 툴라기 해안의 산호초에 걸려 해안에서 90m 내지 30m 떨어진 곳에서 상륙주정에서 내려야만 했다.

해병대원들은 허리에서 겨드랑이까지 차는 바닷물을 헤치고 걸어서 목표해안인 블루비치에 상륙했다.

 

툴라기 섬의 방어를 맡은 것은 일본해군 제84경비대의 250명이었다.

섬의 남쪽 1/3 지역에 집중배치되어 있던 일본군 수비대는 대공경순양함 산후앙과 구축함 뷰캐넌이 쏟아붓는 포격에 눌려서 기습대대의 상륙을 방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기습대대의 상륙 10분 후인 8시 10분에 툴라기의 일본군 통신소는 산후앙의 일제사격을 받아 날아가 버렸다.

 

B 중대와 D 중대에 이어서 A 중대와 C 중대도 상륙했다.

 

B 중대와 D 중대는 즉시 전진하여 섬을 가로지른 다음 우회전하여 일본군의 주방어선을 향했다.

로이드 닉커슨 소령의 B중대는 섬을 가로질러 중국인들이 살았던 툴라기 섬 동해안의 아사피 마을을 점령한 후 우회전하여 동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저스티스 챔버스 소령의 D 중대가 B 중대의 우익에서 함께 남하했다.

B 중대 및 D 중대는 오전 11시 20분에 동해안의 목수부두와 섬 중앙의 281피트 고지를 연결한 일본군의 주저항선에 부딪혔다.

D 중대장 챔버스 소령은 이곳에서 일본군의 박격포에 의하여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고 윌리엄 스펄링 대위가 중대장직을 이어받았다.

 

그 동안 케네스 베일리 소령의 C 중대는 208피트 고지와 서해안 사이를 지나 남하하려다가 208피트 고지의 일본군들로부터 일제사격을 받았다.

C 중대는 계획을 바꾸어 208피트 고지를 공격하여 격전 끝에 점령했다.

C 중대의 좌익에서는 루이스 월트 대위의 A 중대가 역시 281피트 고지 기슭에서 일본군의 저항에 직면하여 진격을 중단했다.

 

제1기습대대장 에드슨 대령은 281고지에 대한 포격을 요청했고 대공경순양함 산후앙이 281고지에 대해 7분간 280발의 5인치 포탄을 퍼부었다.

이어서 D 중대와 A 중대가 공격을 시작했으나 일본군의 저항이 심하여 전진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281고지 점령에 실패했다.

 

한편 블루비치에는 오전 9시 16분부터  1,085 명의 병력을 가진 로제크란 중령의 제2/5대대가 상륙했다.

제2/5대대는 가벼운 저항만을 받으며 툴라기 섬의 서쪽을 소탕한 다음 오후가 되자 제1기습대대의 후방에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오후 늦게 로제크란 중령으로부터 제2/5대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제1기습대대장 에드슨 대령은 다음날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툴라기 섬을 점령하기로 했다.  

 

해가 떨어지자 일본군들이 해병대의 방어선에 소규모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자정 때까지 4번의 소규모 공격을 통하여 해병대 방어선의 빈틈을 찾던 일본군은 서해안의 C 중대와 그 좌익의 A 중대 사이의 전투지경선에 본격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돌격은 처음에 성공하여 일시 C 중대와 A 중대 사이의 방어선이 돌파당하면서 C 중대가 해안 쪽에 고립되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전열을 가다듬은 A 중대가 반격을 개시하자 일본군은 26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철수했다.

이후로도 일본군은 날이 밝을 때까지 5차례의 소규모 공격을 실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군은 개인적으로 또는 소규모 부대로 밤새 방어선 침투를 기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성공한 일본군도 날이 밝으면서 사살되었다.

 

8월 8일 날이 밝자 에드슨 대령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공격의 초점은 281고지였다.

281고지 남쪽으로는 깊은 계곡이 있었는데 양편이 가팔라서 기어오르기가 까다로웠다.

일본군은 방어에 유리한 이 계곡 양편에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를 평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281고지를 점령하여 계곡에 진입하지 않고 일본군을 공격해야만 했다.

 

281고지 공격은 기습대대의 B 중대와 D 중대, 그리고 E/2/5 중대와 F/2/5 중대가 맡았다.

281고지의 일본군은 진지에 틀어박혀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4개 중대의 공격을 버텨내지는 못했다.

281고지를 점령한 4개 중대는 곧 우회전하여 일본군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계곡을 지키던 일본군 방어선의 우익은 후방에서 강력한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이제 남은 것은 계곡을 지키던 일본 방어선의 좌익뿐이었다.

에드슨 대령은 제1기습대대의 60mm 박격포와 제2/5대대의 81mm 박격포로 일본군 방어선을 두드린 다음 오후 3시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기습대대의 A 중대 및 C 중대, 그리고 F/2/5중대가 전진하여 일본군 방어선을 휩쓸었다.

 

이리하여 저녁 때까지 툴라기 섬에서의 조직적 저항은 끝이 났고 에드슨 대령은 툴라기 섬을 장악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일부 패잔병이 살아남아서 향후 며칠간 해병대원들은 섬을 샅샅이 뒤지면서 일본군 패잔병을 사살했다.

툴라기 섬을 지키던 일본제84경비대의 250명은 거의 전멸했다.

200 명 이상이 전사했고 3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40명 가량이 플로리다 섬으로 헤엄쳐 도망갔다.

미해병대의 전사자는 36명, 부상자는 54명이었다.

해병대는 툴라기 섬에서 3인치 야포 1문, 13mm 대공기관총 2정, 기관총 10정, 탄약, 트럭들, 오토바이들, 무전기, 그리고 휘발유를 노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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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행장 점령

 

일본기들은 과달카날 상륙 다음날인 8월 8일에도 공습을 가해왔다.

이번에도 부갠빌 섬의 해안감시대원인 호주군 잭 리드 중위로부터 80분 전에 미리 경보를 받은 터너 제독은 다시 양륙작업을 중단하고 공습에 대비했다.

터너 제독은 전날과 달리 수송함들을 가운데 두고 외곽에 구축함들과 순양함들을 배치하는 원형진을 형성하고 자신의 지시에 따라 대공포화를 집중시키면서 일사불란하게 기동하도록 명령했다.

제62임무부대는 과달카날을 향해 오는 도중에 이러한 기동훈련을 강도높게 실시했었다.

 

(과달카날 상륙부대에 대한 일본기의 뇌격상황도. 1942년 8월 8일)

 

전날과 달리 대함공격에 효과적인 어뢰를 장비한 27대의 1식 육상공격기는 제로기 17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플로리다 섬 북쪽을 돌아서 남하했다.

제61기동부대에서 출격한 와일드캣들이 제로기들과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면서 요격했다.

와일드캣에 의하여 4대의 1식육상공격기가 격추되었고 살아남은 23대는 플로리다 섬 동쪽을 돌아서 남하했다.

이들 중 폭탄을 장비한 2대의 1식육상공격기는 과달카날 섬의 상륙해안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나머지 21대는 미군 함대를 노리고 해면 약 6m 까지 내려오는 초저공 비행으로 제62임무부대에 접근했다.

 

(해면에 닿을듯한 저공으로 비행하며 뇌격을 시도하고 있는 1식육상공격기. 1942년 8월 8일에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제62임무부대의 함정들은 접근하는 일본기들에게 대공포화를 집중시키면서 터너 제독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변침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뱃머리를 일본기의 진행방향으로 계속 유지함으로써 어뢰에 취약한 선체 측면의 노출을 최소화했다.

미함대의 대공포화는 상당히 치열하고 정확하여 절반이 넘는 11대의 1식 육상공격기가 어뢰를 발사하기도 전에 격추되었다.

8월 8일 오전 11시 58분에 살아남은 10대의 1식육상공격기가 차례차례 어뢰를 발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1발이 구축함 자비스에 맞았다.

 

어뢰를 투하하고 이탈하는 과정에서 2대의 1식육상공격기가 추가로 격추되었다.

피탄된 1식육상공격기 중 1대가 불타는 기체를 이끌고 병력수송함 조지 엘리엇의 갑판에 충돌하여 화재를 일으켰고 조지 엘리엇은 결국 침몰했다.

 

정오를 막 넘긴 12시 6분에 1식육상공격기를 뒤따라 온 8대의 99식급강하폭격기가 제62임무부대를 노리고 폭탄을 투하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어뢰에 맞은 자비스는 중파되면서 통신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터너 제독은 공습이 끝난 후 해상에서 열심히 수리 중이던 자비스에게 광학신호를 보내어 항해가 가능해지면 별도의 출발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바로 구축모함 도빈이 있는 시드니 항으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8일 저녁에 터너 제독은 마음이 바뀌어 자비스에게 9일 날이 밝으면 호위를 받아 시드니로 출발하라고 광학신호를 보냈으나 자비스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자비스의 함장 윌리엄 그레이엄 소령은 터너 제독의 두번째 명령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자비스는 결국 9일 새벽에 사보 섬 해전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에 과달카날 앞바다를 떠나서 시드니로 향하다가 9일 오후 1시경에 일본기의 공습을 받고 침몰했다.

승무원 247명 중 생존자는 없었다.

 

일본군은 이날 공습에서 27대의 1식육상공격기 중 와일드캣에게 4대, 대공포화에 13대를 잃어서 모두 17대를 상실했다.

호위를 맡았던 제로기는 17대중에 2대가 격추되었고, 99식 급강하폭격기는 모두 무사히 살아 돌아갔다.

미군은 11대의 와일드캣을 상실했고 구축함 1척과 병력수송함 1척을 상실했다.

그러나 제25항공전대장 야마다 사다요시 소장은 중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그리고 수송선 10척을 격침했다고 보고했다.

 

사실  조지 엘리엇의 화재는 제대로만 대처했으면 충분히 진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한 조지 엘리엇의 수병들이 초동 진화에 실패했고 격실마저 밀폐하지 않아 화재가 빨리 퍼져나갔으며 조지 엘리엇을 도우러 접근했던 구축함도 너무 소극적으로 행동했다.

게다가 조지 엘리엇의 함장 왓슨 베일리 대령은 당황한 나머지 너무 일찍 퇴함명령을 내렸다는 지적을 받았다.  

조지 엘리엇의 승무원들이 모두 퇴함하자 터너 제독은 구축함에게 4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조지 엘리엇을 처분하라고 명령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결국 조지 엘리엇은 해상을 떠돌다가 좌초하여 밤새 불타면서 그날 밤에 접근해 온 미카와 제독의 일본제8함대에게 등대 노릇을 했다.  

 

(과달카날 상륙 및 비행장 점령 상황도. 1942년 8월 7일 -8일. 원본은 여기로)

 

한편 과달카날 섬에서는 해병제1사단이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진격했던 레너드 크리스웰 중령의 제1/1대대는 날이 밝자 비행장 방면으로 진격하여 그날 해가 지기 전에 비행장을 완전히 점령하고 룽가 강의 동안에 연하여 방어선을 편성했다.

해병대는 탈취한 일본군의 비행장에 2달 전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한 해병항공부대의 지휘관인 로프톤 헨더슨 소령의 이름을 따서 헨더슨 비행장이라고 명명했다.

제2/1대대와 제3/1대대는 활주로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지점에 방어선을 편성했다.

 

(헨더슨 비행장의 초기 모습. 해병대가 탈취한 직후에 찍은 사진이다.)

 

북쪽의 해안선 쪽에서는 제5연대가 전진했다.

8월 8일 오전 9시 30분에 제1/5대대는 제1전차대대 A 중대 소속의 경전차들과 함께 일루 강을 건너서 해안선을 따라 서진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주둔지에 접근함에 따라서 일본군들이 산발적으로 소총 사격을 가해왔다.

경전차들이 앞서나가면서 일본군의 저항을 분쇄했고 제1/5대대는 몇명의 포로를 잡았다.

포로심문 결과 과달카날 섬의 일본군이 약하다는 걸 알게된 제1/5대대는 진격속도를 높여서 오후 2시 30분에는 목표지점인 룽가 강에 도달했고 일본군이 비행장 북쪽에 만들어 둔 다리를 건너 진격을 계속하여 오후 3시에는 룽가곶 부근의 일본군 기지를 점령했다.

무장병력이 280명 수준이던 일본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제1/5대대는 일본군 주둔지에서 일본군이 남기고 간 많은 물자를 노획했다.

일본군은 해병제1사단 전체가 약 10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쌀과 건빵 및 국수를 비롯하여 각종 차, 말린 김, 생선 통조림과 대량의 맥주 및 정종들을 남겨 놓았고 품질이 좋은 외과수술기구들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군의관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제1/5대대는 소총과 기관총에 더하여 70mm 야포 2문과 75mm 야포 2문도 탄약과 함께 노획했다.

 

(노획한 일본군의 70mm 야포를 살펴보고 있는 해병대원)

 

해병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건설장비들이었다.

제1/5대대가 노획한 일본군의 건설장비는 도로건설용 롤러 9대(6대 사용가능), 협궤철도와 가솔린 엔진으로 구동되는 소형 기관차 2량, 가솔린 발전기 6대(4대 사용가능), 권양기 1개, 운반용 손수레 50개, 삽 75자루였으며, 건설용 폭약도 280개가 있었다.

 

(일본군이 남겨놓고 간 도로건설용 롤러)

 

제1/5대대는 차량용 연료 57만리터와 항공유 19만리터도 찾아내었다.

그러나 옥탄가 90짜리인 일본군 항공유는 미군 항공기에 쓰기에는 저품질이었고 미군 트럭이나 상륙주정에 쓰기에는 옥탄가가 너무 높았으며 매연이 많이 생겼다.

따라서 미군은 자신들의 옥탄가 72 짜리 휘발유에 적당량을 섞어서 사용했다.

옥탄가 60에서 65짜리 차량용 연료도 미군 트럭에 쓰기에는 저품질이었으나 연료가 부족했던 해병대는 자신들의 옥탄가 72짜리 휘발유와 적당히 혼합하여 비전투 차량에 사용했다.

일본군의 차량용 연료는 또한 노획한 일본제 트럭 35대의 연료로 사용되었다.

 

(해병대가 노획한 일본군 트럭)

 

일본군이 남기고 간 물품 가운데서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은 제빙기계였다.

해병대는 제빙기계가 설치되어 있던 오두막에

 

'도조 제빙 회사, 새 경영진에 의함'

 

이라는 익살스러운 간판을 붙여 놓고 즐거워했다.

 

이렇듯 과달카날에 상륙한 제1해병연대와 제5해병연대는 큰 어려움없이 일본군의 비행장을 탈취하여 작전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툴라기 섬과 가부투-타남보고 섬에 상륙한 해병대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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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군의 공습

 

제1해병연대는 1942년 8월 7일 오전 11시 15분에 오스텐 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제5연대의 방어선을 초월하여 내륙으로 진격했다.

공병들이 해안을 따라 평행하게 흐르는 테나루 강의 지류에 LVT 를 띄우고 그 위에 통나무를 깔아서 부교를 만들어 주었다. 

 

(과달카날 상륙작전 상황도. 아랫쪽의 화살표는 제1연대의 진격로이고, 해안을 따라가는 북쪽의 화살표는 제5연대의 진격로이다. 원본은 여기로)

 

당시 미군이 가지고 있던 과달카날의 지도는 상당히 부정확하여 실제로 상륙해안에서 약 13km 정도 떨어져 있는 오스텐 산이 지도상에서는 상륙해안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나와 있었다.

따라서 적의 저항이 전혀 없었음에도 제1연대는 저녁까지 험악한 정글을 뚫고 오스텐 산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오스텐 산이 지도보다 훨씬 멀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해병제1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오후 늦게 제1연대에게 오스텐 산 점령을 포기하고 서북쪽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의 비행장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제1연대는 전진을 중단하고 테나루 강 부근에서 야영했다.

 

한편 제5해병연대도 오후 3시부터 테나루 강의 하구를 건너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했다. 

역시 공병대가 3대의 LVT 를 테나루 강에 띄우고 그 위에 통나무를 깔아서 부교를 만들어 주었다.

제5연대의 선두인 제1/5대대는 8월 7일 저녁까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일루 강에 도달하여 야영했다.

 

(LVT 3대를 이용해 만든 테나루 강의 부교. 상륙 당일인 1942년 8월 7일에 찍은 사진이다.) 

 

라바울의 일본제17군 사령부가 과달카날 상륙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8월 7일 오전 6시 12분이었다.

사실은 약 두 시간 전인 7일 오전 4시 25분에 툴라기의 일본군들이 요크부대를 발견하고 라바울에 무전을 쳐서 혹시 선단을 파견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문은 약 1시간 정도 지연되어 5시 30분경에야 보고되었다.

라바울에서는 즉시 툴라기에 선단을 파견한 사실이 없으니 다시 확인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돌아온 보고는 오전 6시 12분에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후 툴라기의 일본군은 오전 8시 10분에 마지막 한사람까지 사수하겠다는 무전을 끝으로 통신이 두절되었다.

대공경순양함 산후앙이 발사한 5인치 함포의 일제사격이 일본군의 통신실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제25항공전대장 야마다 사다요시 소장은 라바울에 32대의 1식 육상공격기, 16대의 99식 급강하폭격기, 그리고 15대의 대형비행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에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폭격기는 밀른 만의 연합군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하여 육상공격용 폭탄을 장비하고 있던 27대의 1식 육상공격기와 호위를 맡은 다이난 항공대 소속 제로기 18대였다.

나카지마 다다시 소좌가 이끌던 다이난 항공대는 다다시 소좌를 비롯하여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로 유명한 일본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 상사, 사사이 주니치 중위, 니시자와 히로요시 상사 등 당시 일본 제일의 조종사들이 집결한 최정예 전투기부대였다.

 

(일본해군의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야마다 소장은 폭격목표를 밀른 만에서 과달카날의 미군수송선단으로 변경한 다음 출격명령을 내렸다.

긴급명령을 받은 1식 육상공격기들과 제로기들이 8시 30분부터 이륙하기 시작했다.

지상공격용 폭탄을 함선 공격에 보다 효과적인 어뢰로 바꿀 시간도 없었다.

 

만일 이날 1식 육상공격기 27대와 제로기 18대가 예정대로 밀른 만의 거니 비행장을 공습했다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을 것이며 이후 밀른 만 전투도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달카날에 미군이 상륙하면서 밀른 만의 호주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대의 위기를 넘겼다.(관련내용은 여기로)

이것은 과달카날 전투와 뉴기니 전투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오전 11시 30분에 일본기들이 부갠빌 섬 상공을 통과하자 부갠빌 섬에 숨어있던 호주군 해안감시대원 폴 메이슨이 이 사실을 무전으로 보고했다.

폴 메이슨의 보고를 받은 브리즈번에서는 즉시 플레처 제독에게 중계하여 불과 25분 후인 11시 55분에 플레처 제독은 일본기의 접근을 통보받았다.

해안에서의 양륙작업은 중단되고 수송함들은 닻을 올리고 해안을 벗어나 회피운동에 들어갔다.

 

제61기동부대의 엔터프라이즈가 보유한 와일드캣 36대 전부와 새러토가의  와일드캣 16대 등 52대의 와일드캣이 요격을 위하여 날아올랐다.

전투공중초계(CAP)는 와스프의 와일드캣들이 전담했다.

 

(미해군의 F4F 와일드캣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오후 1시 15분, 중순양함 시카고의 레이더가 70km 전방에서 일본기들을 포착했다.

곧 미군의 와일드캣들이 사보 섬 상공에서 일본기들을 덮침으로써 어지러운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1식 육상공격기들은 와일드캣의 방해를 뿌리치고 미군 함정을 겨냥하여 고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모두 빗나갔다.

 

오후 3시, 이번에는 15대의 99식 함상폭격기가 호위도 없이 폭격을 가해왔다.

이번에도 부갠빌 섬 북부에 숨어있던 호주군 해안감시대원 잭 리드 중위의 경보를 받은 와일드캣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나 일본기는 미군의 예상을 깨고 플로리다 섬 북쪽으로 우회한 다음 남하하여 폭격을 가했다.

미함대의 치열한 대공포화를 뚫고 폭격을 감행한 일본기들은 구축함 머그포드에 1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22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군은 이날 두 차례의 폭격에서 43대의 폭격기 중 11대와 18대의 제로기 중 2대를 상실했다.

미군의 피해는 와일드캣 11대, 돈틀레스 1대가 격추되고 구축함 머그포드가 1발의 폭탄을 맞았다.  

 

당시 미군의 와일드캣 조종사들은 대부분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 배치된 신참 조종사들이었다.

거기에 비하여 제로기를 몰았던 다이난 항공대 소속 조종사들은 일본 제일의 정예 조종사들이었다.

또한 일본군  전투기인 제로기는 미군의 와일드캣보다 성능이 약간 앞서고 있었다.

 

미군의 신참 파일럿들은 자신들의 전투기보다 성능이 뛰어난 전투기를 모는 일본 최고의 조종사들과 대등하게 겨루면서 함대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조종사의 기량 차이를 감안하면 대단한 성공이었으며 당시 항공기의 성능으로는 라바울에서 출격한 항공기가 1,000km 나 떨어진 과달카날을 공습하는 것이 상당한 무리였다는 말도 된다.

실제로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는 폭격기의 속력으로 왕복 6시간이나 걸리는 장거리 비행이었다.

따라서 연료문제로 과달카날 상공에서의 체공시간은 15분을 넘지 못했으며 피탄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라바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불시착해야 할 확률이 높았다.

또한 일본기의 접근은 거의 언제나 북부 솔로몬 제도의 해안감시대원에게 발각되어 미군기들은 준비를 갖추고 유리한 조건에서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조종사라도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에이스 중 한 사람인 사카이 사부로 상사도 이날 미군의 돈틀레스 편대를 와일드캣으로 착각하여 후방에서 접근하다가 후방 기총에 맞아 중상을 입고 겨우 귀환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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