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달카날 상륙
과달카날 상륙부대를 실은 터너 소장의 제62임무부대는 1942년 8월 7일 새벽 3시경에 사보 섬 서쪽에서 둘로 갈라졌다.
과달카날에 상륙할 Xray 부대는 사보 섬 남쪽을 지나 과달카날 북해안을 따라 동진했고, 툴라기 및 가부투-타남보고에 상륙할 Yoke 부대는 사보 섬의 북쪽을 통과했다.
(과달카날, 툴라기 및 가부투 상륙작전상황도)
8월7일 새벽 5시 45분부터 과달카날 남서쪽 140km 지점에 있던 제61기동부대의 함재기 85대가 이함하여, 6시 경에 과달카날 상공에 도달했다.
이 함재기들 중 44대는 과달카날 해안을 폭격했고 41대는 툴라기 섬과 가부투 섬의 일본군 수상기 기지를 공격하여 정찰용 비행정과 수상전투기를 합쳐 18대를 모두 수상에서 파괴하고 마침 휘발유를 싣고 툴라기에서 과달카날을 향해 가던 일본군의 돛단배 1척을 격침했다.
과달카날 상륙은 완전한 기습이었다.
라바울의 제17군사령부가 툴라기의 일본군으로부터 미군 상륙의 보고를 받은 것은 이미 폭격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오전 6시 12분이었다.
오전 6시 13분부터 중순양함 3척(퀸시, 빈센스, 아스토리아)과 구축함 4척(헐, 듀이, 엘렛, 윌슨)으로 이루어진 프레드릭 립콜 대령의 과달카날 포격부대가 퀸시의 일제사격을 신호로 일본군의 포대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되던 룽가 곶의 서쪽 해안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지역에는 해안포가 없었으며 제11설영대가 해안에서, 제13설영대가 내륙 쪽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기습적인 함포사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함포사격과 폭격으로 제11설영대는 약 55%, 제13설영대는 약 35%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1분 후인 6시 14분부터는 대공경순양함 1척(산 후앙)과 구축함 2척(몬센, 뷰캐넌)으로 이루어진 노만 스코트 소장의 툴라기 및 가부투 포격부대가 포격을 개시했다.
과달카날에 상륙할 엑스레이 부대 소속의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 15척은 2열을 이루어 12노트의 속력으로 상륙예정해안인 레드비치에서 8,200m 정도 떨어진 집결해역으로 향했다.
수송함들은 오전 6시 47분에 집결해역에 도달했고 6시 50분에 엑스레이 수송함대를 지휘하던 레입스나이더 대령은 상륙주정들을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엑스레이 부대와 요크 부대는 합쳐서 8척의 유레카 보트, 308척의 LCP(L) 과 LCP(R), 116척의 LCV, 그리고 48척의 기계화상륙정(LCM)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레카 보트는 길이 9.5m 로 병력 18명을 태울 수 있고, 램프 겸용의 문이 없다.
(유레카 보트)
LCP(L)(=Landig Craft, Personnel, Large) 는 유레카 보트의 확대판으로 길이는 11m 이고 병력 30명에서 36명을 태울 수 있다.
(LCPL)
LCP(R)(=Landing Craft, Personnel, Ramped)는 뱃머리에 램프 겸용의 문을 단 것으로 길이 11m 이며 30명에서 36명의 병력을 수송할 수 있다.
(LCPR)
LCV(Landing Craft, Vehicle)은 길이 11m 로 병력 36명이나 보급품 4.5톤 또는 1톤 트럭이나 105mm 곡사포를 운반할 수 있는 상륙주정으로 트럭이나 곡사포 등을 싣고 내리기 위하여 앞문이 LCP(R) 보다 더 크다.
(LCV)
기계화상륙정(LCM = Landing Craft, Mechanized) 는 중형전차나 155mm 곡사포급 이상의 대형 야포를 실을 수 있는 상륙정으로 길이가 15m 이며 앞의 상륙정들이 나무로 만들어진데 비하여 완전히 강철로 만들어져 있다.
(LCM)
미해군 상륙정의 대명사격인 LCVP(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는 LCV 의 후계주정으로 개발되었으나, 나중에 LCP(R) 의 기능을 흡수했다.
LCVP 는 LCV 와 비교하여 수송함 내에서 수납공간을 줄이기 위하여 조종석이 적재 공간 내로 들어갔고 방어력의 강화를 위하여 선체의 측면과 램프에 6.5mm 두께의 강철판을 둘렀다.
LCVP 는 1942년 11월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램프가 없는 유레카 보트와 LCPL은 일찍 도태되었고, LCP(R)과 LCV가 LCVP로 통합되면서 1943년부터 미해군의 소형 상륙주정 세력은 LCVP와 LCM으로 단순화되었다.
(LCVP의 사진. 적재공간 후방에 따로 운전석이 있던 LCV 와 달리 운전석이 적재공간 내로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의 저항이 없었으므로 과달카날 상륙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상륙한 것은 제5해병연대였다.
1942년 8월 7일 오전 9시 13분, 예정보다 3분 늦게 최초의 상륙주정이 테나루 강의 동쪽에 연한 1,500m 넓이의 레드비치에 상륙했다.
윌리엄 맥스웰 중령의 제1/5대대가 서쪽에, 프레드릭 비에부시 중령의 제3/5대대가 동쪽에 상륙했다.
(엑스레이 수송함대의 집결지에서 바라본 과달카날 섬 상륙장면. 해안에 포격으로 인한 연기가 보인다.)
제5연대는 상륙하자마자 해안교두보를 내륙으로 500m 까지 확장했다.
이어서 9시 30분부터는 케이츠 대령의 제1연대가 제2/1대대, 제3/1대대, 제1/1대대의 차례로 상륙했다.
다음은 포병 차례였다.
가벼운 75mm Pack Howitzer들은 쉽게 상륙했으나 무거운 105mm 곡사포들은 견인할 수 있는 2.5톤 트럭이 모자라서 양륙하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과달카날 전투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LVT(Landing Vehicle, Tracked)들이 105mm 곡사포를 견인해야만 했다.
(LVT)
해안에서 적의 저항이 전혀 없자 오전 11시에 수송함들이 해안에 접근하여 물자양륙을 위하여 주정들이 왕복하는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문제는 상륙해안의 혼잡상황이었다.
해안에서의 양륙을 위하여 조지 로완 대령이 지휘하는 제1공병대대 500 명이 배정되어 있었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보다못한 해군 수병들이 상륙하여 양륙작업을 거들었으나 여전히 모자랐다.
주로 인력으로 양륙작업을 감당하려면 수송선 1척 당 최소한 15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했고 수송함이 15척이니 전투부대에서 1,500 명 이상을 차출하여 양륙작업에 투입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과달카날의 일본군 병력을 최소한 5,000 명 이상으로 예상하고 있던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그렇게 많은 전투병을 양륙작업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정오가 되자 상륙해안은 온통 양륙물자들로 가득 찼고 상륙주정들은 보급품을 내려놓을 공간을 찾지 못하여 몇 시간씩 해안을 헤매고 다녔다.
게다가 오후들어서 일본군이 수송함대에 2차례 공습을 가해 옴에 따라 양륙작업은 더욱 늦어졌다.
이러한 양륙작업의 지연은 사보 섬 해전의 결과 제62임무부대가 양륙작업을 미처 못 마치고 철수함에 따라 해병제1사단이 과달카날 전투 초기에 보급품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생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미군은 이후로 상륙작전시 불도저, 견인용 트랙터, 기중기, 권양기는 물론 야간작업용 조명장치에다가 현장에서 간단하게 설치할 수 있는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까지 갖춘 공병중대인 전문적인 해안양륙반(Shore Party) 을 대대마다 하나씩 배치하게 된다.(관련 내용은 여기로)
(과달카날 해안에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는 해병대원들)
'1942년 > 과달카날 전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달카날 전투(7)-비행장 점령 (0) | 2018.08.21 |
---|---|
과달카날 전투(6)-일본군의 공습 (0) | 2018.08.21 |
과달카날 전투(4)-슈스트링 작전 (0) | 2018.08.18 |
과달카날 전투(3)-미군의 반격계획 (0) | 2018.08.17 |
과달카날 전투(2)-일본군의 진출 (0) | 2018.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