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군의 진출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하여 영령 말레이와 필리핀,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예정보다 훨씬 빠른 1942년 3월 초까지 석권한 일본군은 차기 전략방향을 두고 일본육군과 해군의 견해가 갈라졌다.
진주만 기습의 성공과 뒤이은 잇단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자신감에 넘치던 일본해군은 미함대가 태평양을 건너 쳐들어올 때 점진적으로 세력을 약화시킨 다음 전함을 중심으로 하는 주력함대를 투입하여 단 한번의 결정적인 해전을 통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기존의 점감요격작전을 폐기했다.
대신 그들은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미함대를 포착한 다음 각개격파하고자 하였으며 예정에 없던 호주 침공까지 주장했다.
반면 일본육군은 태평양 지역에서 더 이상 진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버마 방면에 전력을 집중하여 가능하면 인도까지 진출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중국을 완전히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낸 다음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는 지구전을 주장했다.
특히 호주 침공 문제는 가용 사단 수의 부족과 함께 보급문제 때문에 절대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육군도 호주가 태평양 방면에서 연합군 반격의 전초기지가 되리라는 점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주를 고립시켜 무력화시킬 필요성은 인정했다.
따라서 대본영의 육군부와 해군부는 호주와 미국의 연락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뉴기니 남부의 포트모레스비를 점령하는 MO 작전과 솔로몬 제도 및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거쳐 피지와 사모아를 점령하는 FS 작전에 동의했다.
그런데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의 생각은 대본영과 달랐다.
태평양에서 일본해군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미국항공모함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는 FS 작전 이전에 미드웨이와 알류샨으로 진출하면서 그 과정에서 요격하러 나오는 미국 항공모함들을 격멸하기 위하여 연합함대 함정 대부분이 참가하는 대규모 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본영에서는 육군부와 해군부가 공히 미드웨이 작전을 반대했으나 진주만 기습의 성공으로 권위가 한껏 높아진 야마모토 제독의 의견을 쉽사리 꺾지 못하여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차기전략방향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1942년 4월 18일, 미국 항공모함 호넷에서 이함한 B-25 쌍발폭격기들이 벌건 대낮에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를 폭격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했다.(관련 내용은 여기로)
둘리틀 폭격이라고 불리는 이 기습적인 도교 공습은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미국 항공모함의 위험성을 크게 부각시키면서 결국 야마모토 제독의 미드웨이 공격작전인 MI 작전이 채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대본영은 1942년 4월 말에 MO 작전(5월 7일), MI 작전(6월 7일), FS 작전(7월 7일)을 1달 간격으로 차례로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MO 작전은 산호해 해전으로 인하여 실패했고 MI 작전은 일본해군이 미드웨이 해전 에서 참패함으로써 전국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 FS 작전은 실시해보지도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포트모레스비 공략작전인 MO 작전의 일환으로 툴라기를 점령했다.
1942년 5월 1일, 뉴조지아 남방해상에 진출한 고토 아리토모 제독이 지휘하는 엄호부대의 경항모 쇼호로부터 출격한 함재기들이 가부투 섬을 공습하여 주기 중이던 호주공군의 카탈리나 비행정 3대를 파괴하고 주변 시설을 폭격했다.
일본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툴라기 지역의 연합군 병력은 소형 코프라 운반선 2척을 타고 툴라기를 탈출했다.
이 2척 중 AIF(Australian Imperial force) 소속의 호주군 22명과 툴라기의 백인들 및 중국인들을 태운 28톤짜리 코프라 운반선 발루스는 간간히 가해지는 일본기들의 공습을 피해가면서 과달카날의 아올라를 거쳐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에파테에 도착했고 최종적으로 호주의 시드니로 철수했다.
한편 포트모레스비를 떠나 툴라기로 파견되어 가던 호주공군의 카탈리나 비행정 1척이 비행 도중에 시마 기요히데 소장이 이끄는 툴라기 침공부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툴라기 침공부대는 수송선 아즈마산마루, 구잠정을 개조한 수송선 도시마루 3호 및 다마마루 8호, 역시 소해정을 개조한 수송선인 하고로모마루 및 다마마루로 이루어져 구축함 2척(기쿠즈키, 유즈키)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기뢰부설함 오키노시마, 고에이마루, 그리고 소해정 제1호와 제2호도 동행하고 있었다.
아즈마산마루를 비롯한 수송선에는 구레제3해군육전대의 1개 중대와 설영대, 요코야마 항공대 소속 항공요원들과 수상기 기지 건설을 위한 자재 등이 실려 있었다.
일본군은 1942년 5월 3일 오전 8시에 툴라기에 도착하여 무혈상륙했고 그날 저녁에는 라바울을 출발한 97식비행정 3대가 가부투 섬에 도착했다.
(가와니시 H6K 97식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군의 툴라기 상륙 당시 툴라기 남방 800km 지점에 있던 플레처 제독 휘하의 제17기동부대는 툴라기 공습을 위하여 즉시 북상했다.
5월 4일 오전 8시 30분부터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떠난 미군 함재기들이 3차례에 걸쳐 툴라기에 정박 중이던 일본함정들을 공격했다.
공습 결과 구축함 기쿠즈키, 기뢰부설함 오키노시마, 소해정을 개조한 수송선인 다마마루, 그리고 소해정 2척이 격침되었다.
5월 8일에는 8대의 B-17 플라잉포트레스가 툴라기를 폭격했으나 치명타를 입히지는 못했다.
이후 일본군은 툴라기 기지를 수상기 기지로서 착실히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초가 되자 툴라기에는 97식 비행정 9대와 제로기를 수상기로 개조한 2식 수상전투기 9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방어병력의 주력은 제84경비대 300 명이었으며 이외에도 요코야마 항공대 소속 342명과 설영대원 144명 등 총 786명이었다.
(나카지마 A6M2N 2식 수상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한편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해군 제25항공전대장 야마다 사다요시 소장은 남부 솔로몬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남부 솔로몬 지역에 건설된 비행장은 포트모레스비 공격시 측면 엄호를 제공할수 있을 뿐 아니라 향후 뉴헤브리디스 제도와 뉴칼레도니아 공격시 강력한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도에서 1942년 5월 25일에 제25항공전대와 제8근거지대의 기술자들이 남부 솔로몬 지역에 대한 항공정찰을 실시하여 과달카날 섬 북해안의 룽가 강 동쪽 평원을 비행장 건설의 적지로 선택했다.
1942년 7월 6일 오후 2시 10분, 제11설영대와 제13설영대를 실은 아즈마산마루, 히로도쿠마루,호쿠리쿠마루, 아즈마마루가 과달카날 북해안에 도착하여 11일까지 인원과 물자를 양륙했다.
몬젠 가나에 해군대좌가 지휘하는 제11설영대는 보병 230명과 건설노무자 1,3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오카무라 노리나가 소좌의 제13설영대는 보병 50명과 건설노무자 1,300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설영대는 8월 15일로 예정된 건설기한을 맞추기 위하여 매일 오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작업을 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7일에 미해병대가 상륙했을 때 일본군 비행장에는 병사용 막사, 무전시설, 전투기용 방호벽 등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길이 800m의 활주로는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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