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슈스트링 작전( Operation Shoestring)
제1호 임무인 과달카날 상륙작전의 정식명칭은 망루작전(Operation Watchtower)이었다.
그러나 물자와 시간이 촉박한 가운데 급하게 추진되는 과달카날 상륙작전 준비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미군병사들은 망루작전에 슈스트링 작전(Operation Shoestring) 이란 별명을 붙였고 오늘날까지 이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Shoestring 이란 단어는 구두끈이란 의미 외에 매우 부족한 자본, 아주 빠듯한 밑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1호 임무는 태평양해역군총사령관(CINCPOA)인 니미츠 대장의 지휘 하에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COMSOPAC)인 곰리 중장이 지휘했다.
(제1호 임무 당시 남태평양해역군 조직도)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는 임무는 제62임무부대(TF62) 가 담당했으며 남태평양해역군의 지상발진항공기들로 구성된 제63임무부대(TF63) 가 작전을 지원했다.
제63임무부대는 1942년 7월 25일 현재 에파테, 뉴칼레도니아, 피지, 통가타부, 사모아 등지에 B-17 폭격기 33대, B-26 쌍발폭격기 22대, 해병대의 와일드캣 전투기 88대, 육군항공대의 P-39 에어라코브라 전투기 38대, 해병대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34대, 카탈리나 비행정 28대, 지상발진 정찰기 25대, 그 외에 허드슨 18대를 비롯하여 뉴질랜드 공군 소속의 항공기 30대를 포함하여 총 298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61, 제62 및 제63임무부대 조직도. 원본은 여기로)
터너 소장의 제62임무부대와 노이즈 소장의 항공모함기동부대가 합쳐져서 플레처 중장이 지휘하는 제61임무부대를 형성했으나 실제로 터너 소장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했고 따라서 제61임무부대의 사령관인 플레처 중장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항공모함 기동부대(제61.1임무그룹)는 정규항공모함 3척(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 와스프), 고속전함 1척(노스캐롤라이나), 중순양함 5척(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스,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대공경순양함 1척(애틀랜타), 구축함 16척, 급유함 5척등 총 3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함재기는 와일드캣 전투기 99대,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103대, 아벤저 뇌격기 41대로 총 243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터너 소장이 지휘하는 제62임무부대는 병력수송함(AP) 및 화물수송함(AK) 19척과 고속수송함(APD)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수송함들을 호위하고 상륙시 함포사격을 가하기 위하여 호주군 중순양함 2척(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호주군 경순양함 1척(호바트), 중순양함 4척(시카고, 빈센즈, 아스토리아, 퀸시), 대공경순양함 1척(산후앙), 구축함 15척, 소해정5척 등 총 5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제61임무부대는 항공모함 기동부대와 제62임무부대를 합쳐 총 82척으로 이루어졌다.
제62임무부대는 과달카날에 상륙하는 과달카날 그룹(Xray 그룹)과 툴라기 및 가부투-타남보고 섬에 상륙하는 북부그룹(Yoke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과달카날 그룹은 15척의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북부 그룹은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 4척과 고속수송함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인 제435정찰비행대대가 라바울 부근의 일본군 움직임을 정찰하여 정보를 전달해 주었고 약 20대의 B-17 중폭격기를 운용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던 제19폭격비행전대가 라바울을 폭격하여 과달카날 전투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브리즈번에 기지를 둔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의 잠수함 6척(S-38, S-39, S-41, S-43, S-44, S-46)이 라바울 부근에 전개하여 일본군 함정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이들 중 S-38 호는 8월 8일에 과달카날 역상륙을 위하여 출동했다가 도중에 귀환하던 일본군 수송선 메이요마루를 격침했고 S-44 호는 8월 10일에 사보 섬 해전에서 대승하고 개선하던 일본중순양함 카고를 격침했다.
태평양함대 소속의 잠수함 그레일링과 드럼은 트럭 환초와 라바울 사이의 해역을 초계하면서 남쪽으로 증강되는 일본군 함정들을 감시했다.
(제1호 임무 상륙부대 조직도)
위 조직도들은 남태평양해역군의 operation plan 1-42 에 수록된 것들인데, 이 보고서는 최초로 상륙한 미해병대 병력을 18,722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터너 제독의 보고서를 참조한 모리슨 제독의 저작에는 19,105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해병제1사단의 보고서는 19,546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해병대 공간전사는 이 세 가지의 기록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취하지 않고 대략 19,000 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해병 제1사단장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소장은 1942년 6월14일에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에 도착했다.
그가 자신의 임무를 알게 된 것은 6월 26일이었다.
해병제1사단이 8월 1일까지 솔로몬 제도에 상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놀랐다.
그는 해병제1사단이 아직 전투에 투입될만큼 충분히 훈련을 하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1943년 초가 되어야만 실전에 투입될만한 상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뉴질랜드에서 6개월 정도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과달카날에 상륙할 부대는 제1연대와 제5연대였다.
제1사단의 세번째 연대인 제7연대는 1942년 3월 28일부터 사모아를 방어하고 있었으므로 교체할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제7연대 대신 해병제2사단 소속인 제2해병연대가 사단예비대로 작전에 투입되었고 별도로 제1기습대대, 제1낙하산대대, 그리고 제3방어대대가 추가되었다.
1942년 7월 2일, 제5연대를 태운 제1진이 뉴질랜드의 웰링턴 항에 도착하자 부두에서 화물을 내렸다가 다시 싣는 작업이 실시되었다.
병력수송함들과 화물수송함들은 미국을 떠날 때 상업적인 방식에 따라 보급품들을 선적했다.
이 보급품들은 웰링턴 항에서 전투방식으로 다시 선적해야 했다.
상업적인 선적방식은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인원과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선적하지만 전투방식은 전혀 다르다.
적이 방어하는 해안에 상륙하는 상황을 상정한 전투방식의 선적에서는 병력과 그들이 최초로 사용할 장비, 차량 및 필수보급품은 반드시 같은 배에 실어야만 한다.
또한 화물선적 순서도 전투의 진행에 따라 필요한 순서대로 가장 긴급한 물품을 가장 윗쪽에 그리고 나중에 필요하게 되는 물품일수록 아랫쪽에 선적하게 된다.
웰링턴 항에서의 환적작업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강력한 노조에 소속된 뉴질랜드의 항만노동자들은 게으르고 비효율적이면서 임금은 비쌌기 때문에 각 수송함마다 300 명씩의 해병대원들이 차출되어 8시간마다 3교대로 24시간 내내 화물을 내렸다가 다시 선적하는 고된 작업을 반복했다.
뉴질랜드 특유의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잠시 비를 피하여 보급품을 저장할 창고 용량도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보급품들을 포장했던 골판지들이 흠뻑 젖어서 터져버렸고 보급품들은 안 그래도 혼잡한 부두에 죄다 흩어졌다.
그나마 뉴질랜드 육군이 30대의 유조차와 18대의 대형 트레일러를 급히 지원하고 부두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뉴질랜드 군의 연료저장시설과 탄약고를 제공함에 따라 마지막에 선적할 연료와 소화기용 탄약을 혼잡한 부두에서 일시적으로 치울 수 있었다.
7월 11일에 제1연대를 실은 제2진이 도착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7월 16일이 되자 8월 1일까지 도저히 상륙작전을 실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7월 1일에 샌디에고를 출발한 제2연대는 아직까지 웰링턴에 도착하지도 않고 있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과 곰리 제독의 보고를 받은 킹 제독은 1942년 8월 1일로 예정되었던 상륙작전을 8월 7일로 6일 연기하는데 동의했지만 더 이상의 연기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촉박한 작전일정을 맞추기 위하여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생명을 유지하고 전투를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
만 선적하라고 명령했다.
장교들과 병사들의 개인 소지품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탄약은 당초 예정된 20일치의 절반인 10일치로 줄어들었고 식량을 비롯한 다른 보급품들도 원래 예정된 90일치에서 60일치로 줄어들었다.
사단이 보유한 지프와 1톤 트럭은 거의 다 실었으나 그보다 큰 트럭들의 75% 는 남겨놓고 가야만 했고 155mm 곡사포도 역시 뉴질랜드에 남았다.
3주에 걸친 광란적인 환적작업 끝에 1942년 7월 22일에 해병제1사단을 실은 수송선단은 웰링턴 항을 출항했다.
부두는 불어터진 골판지들과 선적하지 못한 보급품이 남겨진 트럭과 섞여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1942년 7월 26일 오후2시 , 진주만을 떠난 플레처 제독의 제61기동부대와 뉴질랜드를 출발한 터너 소장의 제62임무부대는 피지에서 남쪽으로 640km 떨어진 해상에 집결했다.
플레처 제독은 터너 제독과 제62임무부대의 호위함대를 지휘하는 호주해군의 크러칠리 소장, 그리고 반데그리프트 장군을 기함인 새러토가로 불러서 작전희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플레처 제독은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상륙 이후 48시간 이내에 떠날 것이라고 말해서 터너 제독을 놀라게 만들었다.
터너 제독은 보급품의 양륙이 끝날 때까지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머물러 주기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플레처 중장에게 거부당했다.
그러자 그는 누메아에 있던 플레처 제독의 상관인 곰리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항의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프랭크 잭 플레처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61임무부대는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피지 제도의 코로 섬에서 예행연습을 실시했다.
원래는 두번에 걸쳐 실전적인 상륙연습이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코로 섬 부근의 산호초 때문에 실제 상륙이 불가능했다.
실전같은 예행연습이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던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이 예행연습에 금쪽같은 사흘을 투입한 데 비하여 성과는 보잘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어도 수송함에서 상륙주정으로 옮겨타는 연습이나 해안에 대한 함포사격연습이란 면에서는 성과가 있었다.
7월 31일 저녁이 되자 제61임무부대는 코로 섬을 떠나 과달카날로 항진했다.
제61임무부대는 혹시 일본군에게 들킬 경우 호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서쪽으로 항진하다가 8월 5일에 뉴헤브리디즈 제도 근해에서 북쪽으로 변침하여 과달카날로 향했다.
8월 5일부터 이 해역의 날씨가 거칠어져서 미함대는 악천후의 덕을 보았다.
일본군도 미군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은 감지하고 있었다.
대본영의 통신감청반은 1942년 7월 3일에 37척 규모의 선단이 미서해안을 떠났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8월 1일에는 미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진주만을 출항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에 따라 중부태평양 지역의 일본군에게는 즉시 경계경보가 내려졌으나 남태평양의 라바울에는 8월 4일이 되어서야 통상적인 정보수준으로 통보했다.
이 정보를 읽어본 일본제25항공전대장 사마다 스미요시 소장은 즉시 툴라기에 주둔 중인 요코야마 항공대에 정찰활동을 강화할 것을 지시했으며 6일에는 재차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내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툴라기의 요코야마 항공대는 정찰활동을 강화했으나 8월 5일부터 날씨가 나빠져서 지장을 겪었다.
특히 상륙 전날인 8월 6일에는 일본군의 제2번 정찰비행정이 미함대 상공까지 도달했으나 스콜이 몰아치는 가운데 구름 밑에 가린 미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운좋게 탐지를 피한 과달카날 침공함대는 1942년 8월 7일 새벽에 과달카날 부근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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