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카날 전투(Guadalcanal Campaign)는 1942년 8월 7일에 미해병제1사단이 과달카날 섬과 그 대안의 툴라기 섬 및 가부투-타남보고 섬에 상륙한 이래 1943년 2월 9일에 살아남은 일본군 패잔병 1만여명이 해상철수할 때까지 6개월간 과달카날 섬과 인근 해역 및 상공에서 벌어진 미일 양국 간의 무력충돌을 말한다.
이 기간 동안 미해병대 및 육군의 4개 사단이 투입되어 헨더슨 비행장을 둘러싸고 일본육군과 처절한 지상전을 벌였다.
또한 과달카날 주변 해역과 상공에서는 약 50회에 걸쳐 미일간의 함정 사이에 또는 함정과 항공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으며 그 중 1942년 8월 9일의 사보 섬 해전, 8월 23일에서 25일에 걸친 동부 솔로몬 해전,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치러진 에스퍼란스 해전, 10월 26일의 산타크루즈 해전,11월 13일에서 15일 사이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 11월 30일의 타사파롱가 해전, 그리고 1943년 1월 29일에서 30일에 걸친 렌넬 섬 해전 등 7번의 주요 교전이 해전의 이름을 얻어 전사에 기록되었다.
이들 중 동부 솔로몬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은 함재기를 사용한 항공모함끼리의 대결인 함대항공전이었으며 마지막의 렌넬 섬 해전은 일본의 지상발진 항공기와 미국의 수상함대와의 대결이었다.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이 실시한 최초의 주요 반격이었다.
이전까지 연합군의 공격은 주로 잠수함을 이용한 소모작전이거나 항공모함을 이용한 히트앤드런 방식의 일시적 공격이었는데 반하여 과달카날 전투는 처음으로 일본군이 방어하고 있는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전투였다.
또한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육군이 최초로 대규모 패배를 당한 전투였다.
일본해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해군에게 참패한 데 이어 일본육군마저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지상군에게 대패하면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을 상실하였으며 이후 수세에 몰려 수비에만 급급하다가 패전을 맞이하게 된다.
1. 과달카날 섬
(솔로몬 제도. 남동쪽의 화살표 지역이 과달카날 섬이며, 북서쪽의 화살표 머리 지역이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라바울이다. 원본은 여기로)
솔로몬 제도는 대략 남위 5도에서 12도, 동경 155도에서 170도 사이에 분포하며, 북서쪽 끝의 부겐빌 섬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2열로 늘어선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열에는 초이셀 섬, 산타이사벨 섬, 말라이타 섬이 있고, 남쪽열에는 뉴조지아 섬, 러셀제도, 과달카날 섬, 산크리스토발 섬이 있으며, 그 외에도 수백개의 작은 섬들이 산재해있다.
북쪽 열과 남쪽 열 사이의 수로를 슬롯이라 부르며,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 특히 일본함정들이 주로 이 슬롯을 이용하여 라바울과 과달카날 사이를 왕복했다.
과달카날 섬은 남부 솔로몬 제도에 속하며 동서로 약 145km, 남북으로 40km 쯤 되는 짚신벌레 모양이다.
(짚신벌레)
(과달카날 섬. 화살표 지역이 헨더슨 비행장이 있는 룽가 평원이고. 북쪽의 화살표 머리는 툴라기 섬이다. 원본은 여기로)
과달카날 섬의 북쪽은 평탄한 지형으로 상륙할만한 해안도 많고, 비행장을 만들만한 평지도 많으나 남쪽 해안은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접안이 거의 불가능하다.
섬의 중앙은 최고높이가 약 2,400m 에 달하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서 북해안으로 여러 개의 강이 흘러들어간다.
이러한 강은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물이 항상 흐르는 일반적인 형태의 강으로 테나루 강, 룽가 강, 발레수나 강 등이 속한다.
또 한 가지는 수량이 많으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만 수량이 적으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호수처럼 고여 있는 강으로서 일루 강, 마타니코 강 등이 여기에 속한다.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우림기후로 연간 강우량이 4,200mm 에 달하고(우리나라의 연간 강우량은 약 1,200 -1,400mm) 평균 기온은 28도 정도이며 습기가 높아서 무더운 날씨이다.
계절은 11월부터 3월까지의 건기와 나머지 기간인 우기로 나뉘는데 건기란 것도 상대적 개념으로 건기에도 상당량의 비가 내린다.
따라서 쿠나이라고 부르는 키가 큰 풀이 자라는 평원을 가진 북해안 일부를 제외한 섬의 대부분은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과달카날 섬은 1568년에 스페인의 탐험가 멘다나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과달카날이라는 이름도 멘다나가 지은 것이다.
이후 과달카날은 200 년 가까이 잊혀졌다가 1767년에 프랑스 탐험가 부갱빌에 의하여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19세기 말에 독일이 동북부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 및 부갠빌 섬을 차지하자 영국도 동남부 뉴기니와 부갠빌 섬 이남의 솔로몬 제도를 차지했다.
영국은 1893년 10월 6일에 솔로몬 제도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했고, 1897년에는 솔로몬 제도 제일의 양항을 가진 과달카날 섬 대안의 툴라기에 행정청을 설치했다.
한편 제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이 차지했던 뉴기니 동북부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 그리고 부갠빌 섬은 호주가 신탁통치했다.
1939년에 솔로몬 제도의 중심지인 툴라기에는 작은 호텔 하나, 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 몇개, 그리고, 영국인 공무원들을 위한 방갈로 몇채 등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과달카날 섬에는 북해안을 따라 몇군데 야자농원이 있었고 야자나무로 만든 3개의 작은 교회가 있었다.
농장주들은 주로 호주인들로서 원주민들을 인부로 고용하여 농장을 경영했다.
야자농원의 주요 산물은 야자를 말려서 수송 및 저장에 편리하게 만든 코프라로서 이 코프라를 찌거나 압착하여 야자유를 추출한다.
야자농원에서 산출된 코프라는 주로 영국계 회사인 레버브라더스 사 또는 시드니에 본사를 둔 번스필릅 사가 매입했다.
과달카날 섬 북해안의 아올라 지역에는 번스필릅 사의 출장소가 있었으며 레버브라더스 사의 출장소는 툴라기 섬 인근의 가부투 섬에 있었다.
호주인 농장주들과 원주민 인부들과의 사이는 원만한 편은 아니어서 원주민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감독관을 살해하고 농장에 불을 지른 다음 정글 속으로 도망가 버리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1942년 5월에 툴라기를 점령했을 때 원주민 관리에 신경을 썼더라면 원주민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백인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자유와 풍요를 가져다 주겠다는 선전과는 달리 백인들보다 심하게 원주민을 차별했다.
그들은 원주민을 데려다가 하루 종일 중노동을 시키고는 임금으로 쓸모없는 군표를 지급했다.
그리하여 8,000 - 10,000명으로 추정되는 과달카날 섬의 원주민들은 일본군에게 등을 돌리고 연합군에게 협조했다.
호주 정부는 1919년부터 자국의 해안을 감시하기 위한 해안감시원을 운용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유럽의 정세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호주 정부는 이 해안감시원 제도를 솔로몬 제도까지 확장했고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주 해군이 이 해안감시원 제도를 관장하게 되었다.
주로 농장주이거나 현지 공무원이었던 해안감시원들은 호주해군의 계급을 부여받고 자신들이 생활하던 익숙한 지형에서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일본군 항공기, 선박, 그리고 지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무전기로 보고했다.
호주군이 툴라기에서 철수할 당시인 1942년 5월에는 솔로몬 제도 전체의 해안감시원 수가 10명 미만이었으나 이후 호주군 및 미군의 관심과 후원에 힘입어 차츰 늘어났다.
나중에 투입된 해안감시원들은 기존의 농장주나 현지 공무원에 더하여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호주군이나 미군 병사들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해안감시원들은 연합군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미군은 해안감시원들의 보고 덕분으로 일본기들이 도달하기 약 50분 전에 경보를 받을 수 있었고 전투기들이 미리 발진하여 유리한 고도를 차지하고 있다가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또한 해안감시원들은 과달카날 상륙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격추된 연합군 조종사 및 항공승무원 120 명을 구조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호주공군은 가부투 섬에 카탈리나 비행정 3대를 배치하고 보병 22명을 파견했다.
툴라기에는 장교 3명, 하사관 2명, 그리고 112명의 원주민 경찰로 이루어진 솔로몬 방위대가 있었다.
일본군이 침공해 왔을 때 툴라기와 과달카날 지역의 연합군 병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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