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키스카 탈출(2) - 해상철수 

 

애투 섬이 함락되었을 때 키스카 수비대는 육군인 북해수비대와 해군인 제51근거지대를 주축으로 하여 약 6,000 명 규모였으며, 북해수비대 사령관 미네기 도이치로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키스카 수비대는 잠수함을 사용하여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했으며 1943년 5월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820명이 철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3척의 잠수함을 상실하고 다른 3척이 풍랑이나 좌초 등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잠수함을 사용한 철수는 중단되었다.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어차피 잠수함만으로 키스카 수비대를 모두 철수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잠수함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에 이미 과달카날처럼 경순양함과 구축함을 사용하여 단번에 키스카 수비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키스카 섬에 직접 돌입할 제1수뢰전대 사령관으로 기무라 마사토미 소장을 임명해 주도록 대본영에 요청했다.

그리하여 남태평양에서 근무하던 기무라 소장은 오모리 센타로 소장의 뒤를 이어 제1수뢰전대 사령관이 되었다.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가와세 중장은 이어서 구원함대를 호위할 구축함을 구하러 나섰다.

키스카 섬에 돌입할 함대는 모두 제5함대 소속인 경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이었는데 여기에 약 5,200 명인 키스카 수비대를 모두 수용하려면 경순양함 1척당 약 1,200 명, 그리고 구축함 1척당 약 470명을 수용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구축함의 경우 완전무장한 병력을 약 150 명까지 수송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 구축함은 예비어뢰를 포기해야만 했다.

따라서 몸만 빠져나온다고 해도 구축함에 470명을 실으려면 사실상 항해에 필수적인 인원과 장비 및 보급품들을 제외하고는 탄약을 포함하여 함내를 모두 비워야만 했다.

이럴 경우 무장 조작을 담당할 승무원도 승함할 필요가 없으므로 더 많은 병력을 태울 수 있었다.

대신 전투능력은 전무하여 사실상 비무장의 고속 수송함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호위할 구축함이 반드시 필요했다.

 

가와세 중장이 도쿄에 가서 키스카 철수에 투입할 구축함 6척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자 대본영은 6척이 그들이 가진 구축함 예비의 전부라면서 난색을 표했다.

당시 일본의 구축함 보유 상황을 보면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일본은 111척의 구축함을 가지고 태평양전쟁에 뛰어들어 1943년 6월 말까지 19개월 동안 34척을 잃고 15척을 새로 건조함으로써 6월 말 현재 92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축함 92척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이 모두를 당장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조를 마친 구축함은 취역한 다음 해상에 나가 최소한 1-2개월 이상 걸리는 시험항해를 마쳐야 비로소 작전에 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작전 중에 적의 공격이나 기타 이유로 피해를 입으면 몇 달이고 건선거에 들어앉아 수리를 해야만 한다.

피해를 입지 않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건선거에 들어가 오버홀을 받아야 하며 아니면 새로운 무장이나 장비 등을 장착하거나 구형 무기 및 장비들과 교체하기 위하여 건선거에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주로 피해를 입고 건선거에 들어간 김에 오버홀과 새로운 무기나 장비의 장착 및 교체를 한꺼번에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럴 경우 건선거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진다.

 

이런 이유로 구축함같은 전투함은 물론 어느 정도 복잡성과 크기를 가진 거의 모든 무기체계가 보유량 전부를 즉시 작전에 투입할 수는 없다.

전체 보유량에서 이런 식으로 당장 사용할 수 없는 숫자를 빼고 즉시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비율을 가동률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함정이나 항공기의 가동률은 보급 및 정비 체계가 제대로 작동해도 70% 를 넘기면 양호한 편이었고, 80% 가 넘으면 뛰어난 편이었으며, 90% 를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 대규모 전투를 치러서 피해를 입은 함정이 늘어나거나 예비부품의 보급이나 수리 체계에 혼란이나 지연이 일어나면 가동률이 60% 이하, 심지어는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따라서 1943년 6월 말 현재 일본해군이 작전에 투입 중이거나 즉시 투입할 수 있는 구축함은 아마 70척을 넘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대본영의 예비가 6척이라는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위를 위한 구축함 6척이 꼭 필요했던 가와세 중장은 제5함대의 중순양함 2척(마야, 나치)을 남태평양으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6척의 구축함 모두를 빌려오는데 성공했다.

당시 중순양함 마야는 가와세 중장의 기함이었으므로 기함을 뺏긴 제5함대 사령부는 바라무시로 섬의 냉동창고에 딸린 사무실로 옮겨야만 했다.

이것은 당시 가와세 중장이 키스카 철수작전에 얼마만큼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키스카 섬의 해상철수는 안개를 활용하여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구원함대와 키스카 수비대 사이의 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이었으나 감청의 위험 때문에 무선통신은 최대한 억제해야 했다.

그리하여 조율을 위하여 북해수비대의 후지 가츠미 참모와 제51근거지대의 야스나미 마사도시 참모가 잠수함으로 바라무시로에 도착했으며 제5함대에서는 I-7 호에 도노다 참모를 태워 키스카 섬으로 보냈다.

 

1943년 7월 7일 오전 7시 30분에 기무라 제독의 기함인 경순양함 아부쿠마를 선두로 경순양함 2척(아부쿠마,기소), 구축함 6척, 그리고 호위를 위한 구축함 6척, 급유함 니폰마루와 호위함 쿠나시리로 이루어진 구원함대가 바라무시로를 떠났다.

앞으로 1주일 간 안개가 끼겠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케호 작전으로 일컬어지는 키스카 섬 해상철수작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키스카 섬 돌입예정일은 7월 11일이었다.

 

그런데 7월 10일 오전에 마지막 해상급유를 마치고 나자 해상의 안개가 걷혔다.

구원함대는 돌입날짜를 13일로 연기하고 기다렸으나 안개는 다시 낄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를 더 기다린  제1수뢰전대 사령관 기무라 소장은 7월 15일 아침에 기함 아부쿠마 함상에서 회의를 열었다.

참모들 대부분이 돌입하자고 주장했으나 기무라 소장은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5일 오전 8시 20분에 구원함대는 키스카 섬에 구원작전을 중단한다는 암호 전문을 보내고 바라무시로로 돌아갔다.

 

키스카 섬에서는 미리 정해진대로 구원함대가 바라무시로를 출항한 지 5일째 되는 7월 11일부터 매일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2시간 동안 모든 병사가 키스카 항에 집결하여 2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다시 돌아가는 일을 14일까지 반복했다.

15일 아침에 구원작전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병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1차 철수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이제 케호 작전의 기회는 딱 1번 남았다.

더 이상 철수작전을 실시하기에는 일본해군의 연료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8월이 되면 안개가 끼는 날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에 어떻게든 7월 내로 철수작전을 성공시켜야만 했다.

다시 짙은 안개가 낄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자 구원함대는 1943년 7월 22일에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다.

두번째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키스카 섬에 돌입할 함정은 지난번과 같았으며 이번에는 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중장이 직접 경순양함 다마를 타고 제1수뢰전대와 동행했다.

키스카 돌입예정일은 26일이었다.

 

25일에 안개 속에서 호위를 담당하던 구축함 와카바와 하츠시모가 충돌했다.

와카바는 바라무시로로 돌아가야 했으며, 속력이 떨어진 하츠시모는 급유함 니폰마루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25일 오후부터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26일 새벽이 되자 완전히 걷혔다.

돌입예정일인 26일은 물론 27일과 28일까지 계속 맑은 날이 지속되자 28일 오후에 가와세 중장은 기함 다마 함상에서 참모들과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가와세 중장은 다마 함장 진 시게노리 대좌, 그리고 하시모토 시게후사 통신참모의 의견을 받아들여 작전 속행을 결의했다.

일본군의 염원을 알아들었는지 그날 저녁부터 다시 짙은 안개가 해상을 감싸기 시작했다.

기무라 소장의 제1수뢰전대는 호위하는 구축함들과 함께 키스카로 직행했고 다마는 키스카 남쪽 130km 지점에서 제1수뢰전대와 헤어져 대기했다.

 

제1수뢰전대 사령관 기무라 소장은 최종 돌입 단계에서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미함대의 초계선을 피하기 위하여 기무라 제독은 안전한 동쪽 항로 대신 수로 연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키스카 섬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북쪽으로부터 키스카 항에 돌입하기로 결심했다. 

제1수뢰전대는 이전에 서쪽 항로를 이용한 적이 있는 짐수함 I-7 호가 남긴 단편적인 수로 정보에 의지하여 해도에 기입되지도 않은 수많은 암초가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수로를 안개 속에서 20노트라는 무모할만큼 고속으로 항진했다.

기무라 제독의 도박은 성공하여 29일 정오 경에 제1수뢰전대는 무사히 키스카 항으로 들어섰다.

 

(키스카 섬. 원본은 여기로)

 
그동안 키스카 섬의 병사들은 26일부터 다시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키스카 항에 나와서 구원함대를 기다리는 일과를 시작했다.

 

 

 

 

 

 

이미 한번 실망을 맛본 병사들은 다시 실망을 맛보지 않기 위하여 가급적 기대하지 않으려는 심리와 혹시나 하는 심리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하루하루 간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29일 오전 9시, 키스카 섬의 통신소에 놀라운 무전이 들어왔다.

예정보다 4시간 빠른 정오에 구원함대가 도착한다는 암호통신이 들어왔던 것이다.

식사 중이던 일본군들은 즉시 식사를 마친 후 중요서류를 소각하고 서둘러 키스카 항으로 집결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병력들은 키스카 항에서 10km 이상 떨어져 있었으나 모두들 서둘러서 1명도 빠지지 않고 정오까지 키스카 항에 집결하는데 성공했다.

과연 예고한대로 정오가 되자 제1수뢰전대의 기함 아부쿠마를 선두로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구원함대가 키스카 항으로 들어왔고 호위를 맡은 구축함 4척은 키스카 항 바깥에서 미해군의 접근을 감시했다.

설마했던 구원함대가 실제로 나타나자 많은 병사들이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고 아예 주저앉아서 펑펑 우는 병사들도 있었다. 

북해수비대 사령관 미네기 소장도 경순양함 아부쿠마에 승함한 직후 기무라 제독에게 뭔가 감사의 말을  건네려 했으나 감정이 북받쳐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구원함대가 해안 가까이 닻을 내리자 곧이어 주정들이 병사들을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좁은 함내에 최대한 많은 병사들을 실어야 했으므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지품 이외에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소총마저 전부 버리고 승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시간이 관건이었으므로 함정들의 뱃전에는 빨리 기어오를 수 있도록 수많은 줄사다리가 드리워져 있었고,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승함했다.

병사들이 모두 승함하면 주정은 다시 해안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을 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주정 승무원들이 승함했다.

그리하여 구원함대가 닻을 내린 지 불과 55분 만에 키스카 섬 수비대 5,183 명 전원이 승함을 완료했다.

제1수뢰전대는 재빨리 닻을 올리고 키스카 항을 빠져나가 호위하던 구축함들과 만난 다음 키스카 섬 남쪽으로 내려가 가와세 중장의 기함 다마와 만났다.

1943년 7월 31일, 구원함대는 단 1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키스카 섬 수비대 전원을 구출하여 바라무시로에 도착했다. 

 

일본군의 케호 작전이 성공하는 데에는 큰 행운이 따랐다.

사실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23일에 애투 섬 남방 320km 해상을 항진 중이던 구원함대를 레이더로 포착했다.

킨케이드 제독은 보고를 받자 즉시 기펜 제독의 지휘 하에 구형전함 아이다호와 미시시피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함대를 파견하고 키스카 섬을 봉쇄하고 있던 구축함 애일윈과 모내헌도 담당 위치를 떠나 기펜 함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신 구축함 패러것과 헐이 키스카 섬 봉쇄임무에 투입되었다.

 

1943년 7월 25일 저녁에 기펜 함대는 키스카 섬에서 남서쪽으로 130km 떨어진 해역을 항진 중이었다.

알류샨 열도에서는 드물게 맑은 날씨였다. 

자정이 막 지난 1943년 7월 26일 오전 0시 7분, 구형전함 미시시피의 레이더가 북쪽으로 24km 떨어진 해역에서 함영을 발견했고 이어서 구형전함 아이다호와 중순양함 위치타 및 포틀랜드도 잇달아 같은 함영을 발견했다.

기펜 제독은 즉시 북쪽으로 변침한 다음 거리가 13km 까지 줄어들자 포격 명령을 내렸다.

26일 새벽 0시 13분부터 구형전함과 중순양함들의 주포가 레이더에 의존하여 불을 뿜기 시작했고 구축함들은 전방으로 나아가서 어뢰를 발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적에게서는 전혀 반격이 없었다.

0시 44분에 적의 함영이 홀연히 레이더에서 사라질 때까지 31분 동안 기펜 함대는 14인치 포탄 518발과 8인치 포탄 487발을 포함하여 수많은 포탄과 어뢰를 발사했다.

기펜 제독은 레이더에서 적의 함영이 사라지자 포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수상정찰기를 사출했다.

정찰기의 조종사는 놀랍게도 해면에 아무 것도 없다고 보고해왔다.

적함은 물론 적함의 잔해나 부유물 심지어는 죽은 고래도 없었으며 오로지 차갑게 넘실거리는 끝없는 북태평양의 바다 뿐이었다.

 

사실 포격전 당시부터 적의 함대가 레이더 허상일 것이라는 의심이 있었다.

그렇게 치열한 포격을 퍼붓는데도 적의 함대에서는 어떠한 반격도 없었고 무엇보다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와 구축함들의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체가 무엇이든 기펜 함대가 교전한 상대는 일본함대는 아니었다.

당시 일본함대는 키스카 섬에서 80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미해군은 당시 구형전함과 중순양함들이 포착한 함영의 정체를 멀리 떨어진 앰치트카나 다른 섬의 모습이 밀도가 다른 공기의 경계층이나 해면에 반사되어 비친 일종의 신기루 현상이라고 추측했다.

이 정체불명의 함영이 대형함으로서 레이더 안테나의 위치가 높은 구형전함과 중순양함들의 레이더에만 나타나고, 상대적으로 안테나의 위치가 낮은 구축함들의 레이더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킨케이드 제독은 다음날인 27일에 기펜 함대에게 해상급유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기펜함대는 28일 오전 9시부터 키스카 섬에서 남동쪽으로 170km 떨어진 해상에서 급유함 페코스로부터 해상급유를 받았는데 기무라 제독의 구원함대는 미함대가 해상 급유를 받고 봉쇄 위치에 다시 전개하기 이전에 키스카 섬으로 들어가 병사들을 싣고 빠져나갔다.

구축함 에일윈과 모내헌을 대신하여 키스카 섬을 봉쇄하던 구축함 2척 중 기무라 함대의 접근 코스인 키스카 섬 남쪽을 담당하던 구축함 패러것도 그때 마침 연료가 떨어져서 기펜 함대와 함께 해상급유를 받고 있었다.

키스카 섬 북쪽을 담당했던 구축함 헐은 담당 해역을 초계 중이었으나 짙은 안개 속에서 키스카 섬 해안에 바짝 붙어서 항진하던 기무라 함대를 레이더로 포착하는데 실패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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