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사보 섬 해전(1)-일본제 8함대의 접근

 

1942년 6월 11일, 일본해군은 중부태평양과 남태평양의 일본군 점령지 외곽 지역을 모두 관장하던 이노우에 제독의 제4함대를 분리하여 라바울에 기지를 두고 남태평양 지역을 전담하는 제8함대를 창설했다.

초대 사령관으로는 미카와 군이치 중장이 임명되어 6월 29일에 기함인 중순양함 죠카이를 타고 라바울에 부임했다.

 

(일본제8함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8월 7일 오전에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보고를 받은 미카와 제독은 즉시 자신이 보유한 제8함대의 주력을 사용하여 과달카날의 미함대를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캐비엥을 떠나 애드미럴티 제도로 향하던 3척의 중순양함들을 포함하여 제8함대의 중순양함 5척을 모두 라바울로 불러모았다.

미카와 제독의 계획을 알게된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미카와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미군의 수송선단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점을 강조했다. 

 

라바울을 향하여 급히 남하하던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남서태평양해역군의 B-17 에게 발견되었으며 이 정보는 8월 7일 밤 11시 19분에 터너 제독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해군기지 부근에서 일본함정들이 활동하는 것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항은 아니었다.

 

중순양함들 중 기함 죠카이는 라바울 항에 입항했고 나머지 4척은 합류지점인 세인트조지 해협으로 향했다.

미카와 제독은 8월 7일 오후 4시 28분에 기함 죠카이에 승선하여 경순양함 덴류, 유바리, 그리고 구축함 유나기를 이끌고 라바울을 출항하여 오후 7시 30분경 세인트조지 해협에서 중순양함 4척과 만났다.

당시 라바울 지역의 구축함들은 주로 수송임무를 맡아서 바빴기 때문에 순양함이 7척이나 포함된 함대에 구축함을 1척밖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이러한 구축함의 부족 현상은 사보 섬 해전을 끝내고 돌아오던 중순양함 카고가 미잠수함에 의하여 격침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중순양함 5척(죠카이, 아오바, 카고, 기누가사, 후루다카), 경순양함 2척(덴류, 유바리), 그리고 구축함 1척으로 이루어진 제8함대는 세인트조지 해협을 남하하여 과달카날을 향했다.

 

(일본해군 중순양함 죠카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때 세인트조지 해협의 입구를 감시하고 있던 미잠수함 S-38 호는 8월 7일 오후 8시에 제8함대를 발견했다.

제8함대의 함정들은 북쪽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S-38 호로부터 너무 가까운 곳을 고속으로 통과하는 바람에 S-38 호는 어뢰공격을 가할 기회를 놓쳤다.

S-38 호의 함장 먼슨 소령은 브리즈번에 구축함 2척과 함종 미상의 대형함 3척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가 남동쪽으로 고속항진 중이라고 보고했고 이 정보는 다음날인 8일 아침에 제62임무부대를 호위하던 크러칠리 영국해군소장에게 도달했다.

라바울의 남동쪽에서 목격된 일본함대가 과달카날 방향인 남동쪽으로 고속항진 중이라는 사실은 크러칠리 제독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으나 일본함대가 목격된 곳은 아직도 과달카날로부터 890km 나 떨어진 곳이었으므로 그는 후속 정보를 기다렸다.  

 

한편 미카와 제독은 라바울을 출항하기 전에 과달카날에 역상륙을 감행할 해군육전대 519명을 2척의 수송선에 실어서 과달카날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원래는 제17군으로부터 1개 대대를 지원받아서 해군육전대와 함께 5척의 수송선으로 역상륙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뉴기니 방면에 집중하고 있던 제17군 사령관 햐쿠다케 하루요시 중장이 병력파견을 거절하는 바람에 엔도 해군대위가 지휘하는 해군육전대만 파견했다.

이들 수송선 2척은 7일 오후 11시에 구축함 3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라바울 항을 출항했는데 다음날인 8일 오전 11시경 미카와 중장으로부터 라바울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카와 중장은 미함대가 항공모함까지 포함한 대규모 함대라는 것을 알자 519명의 병력으로는 타격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세인트조지 해협을 여전히 감시하던 S-38 은 8일 밤늦게 세인트조지 곶에서 서쪽으로 23km 떨어진 해상에서 구축함 1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항진 중인 메이요마루를 발견했다.

S-38 은 900m 전방까지 접근한 다음 잠망경을 사용하지 않고 소나로 거리를 측정한 후 2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는 2발 다 메이요마루에 명중했고 이 불운한 수송선은 침몰하여 해군육전대원과 승무원 등 총 373명의 사망 및 실종자를 기록했다.

S-38은 분노한 일본구축함의 폭뢰 세례를 피하여 탈출에 성공했고 다음날 또다시 폭뢰 공격을 받았으나 역시 도망치는데 성공하여 8월 22일에 브리즈번에 도착했다.

 

(S-38 호. 길이 : 67m, 폭 : 6.3m, 수상배수량 : 868톤, 수중배수량 : 1,079톤, 수상속력 : 14.5노트, 수중 속력 : 11노트, 승무원 : 42명, 무장 : 533mm 어뢰발사관 4문, 어뢰 12발, 4인치 갑판포 1문)

 

부카 섬의 북부를 통과한 제8함대는 8일 오전 6시 25분에 부겐빌 섬 북방 90km 해역에서 5척의 중순양함으로부터 각각 1대씩의 수상정찰기를 발진시켰다.

이들 5대의 정찰기 중 4대가 정오 경에 돌아왔다.

중순양함 죠카이와 아오바를 떠난 정찰기 2대는 과달카날과 툴라기 부근에 전함 1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9척, 수송선 18척이 있다고 보고했고 카고를 떠난 정찰기는 산타이사벨 섬 남쪽해상에서 항공모함 와스프의 함재기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제8함대는 부겐빌 섬 북방해상에서 정찰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밀른 만에서 출격한 호주공군의 허드슨 정찰기에게 오전 10시 26분과 11시 1분에 발견되었다.

정오가 지나서 정찰기를 수용한 제8함대는 24노트의 속력으로 슬롯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사보 섬 해전에서 일본제8함대의 접근상황도)

 

8일 오후 4시 28분에 쵸이셀 섬 남방해역을 통과하던 제8함대는 죠카이와 아오바에서 다시 2대의 정찰기를 사출했다.

이 정찰기들은 미함대의 상황은 오전과 동일하다고 보고한 다음 쇼틀랜드로 날아갔다.

오후 4시 40분, 미카와 제독은 휘하 함장들에게 간단한 내용의 전투계획을 하달했다.

즉 야간에 사보 섬 남쪽으로부터 진입하여 과달카날 해역의 연합군 함정을 먼저 어뢰와 함포로 공격한 다음 툴라기 방면으로 북상하여 이곳의 연합군 함정들도 역시 어뢰와 함포로 공격한 후 사보 섬 북부를 통하여 퇴각한다는 것이었다.

미카와 제독의 전투계획에서 미군 수송함에 대한 별도의 언급은 없었다.

 

일본제8함대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동안 연합군의 감시체계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면서 일본함대의 접근을 놓치고 있었다.

사실 8일 오전 10시 26분과 11시 1분에 호주군의 허드슨 폭격기들이 일본함대를 발견한 정찰성공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사건이었다.

그러나 호주군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정찰결과를 즉시 보고하기 위하여 무선침묵을 깨는 대신 지정된 구역을 마저 정찰하기 위하여 오후 시간 대부분을 소비한 후 밀른 만에 돌아와서 커피 한잔 마시고 느긋하게 정찰내용을 보고했다.

더군다나 함종을 오인하여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수상기모함 2척으로 보고했다.

이 보고는 브리즈번의 맥아더 사령부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복잡한 전달체계를 거친 후에 결국 8시간 이상 경과한 오후 6시 45분에야 터너 제독에게 도달했고 11시 1분의 정찰결과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오후 10시 30분경에야 터너 제독 책상에 올라왔다.

 

더구나 정찰기의 조종사가 함종을 오인한 것이 터너 제독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8월 7일과 8일 낮동안 잇달아 일본군의 공습을 받았던 터너 제독은 정찰보고에 나타난 수상기 모함이란 함종을 보자 반사적으로 일본군이 수상기에 의한 공습을 기도한다고 생각했다.  

터너 제독은 일본함대가 사보 섬에서 불과 250km 떨어진 산타이사벨 섬의 레카타 만으로 향한다고 짐작했다.

그는 일본군이 수상기 운용에 적합한 레카타 만에서 아마도 다음날인 9일에 수상기를 이용한 공습을 가할 예정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수상함으로 야간공격을 감행할 생각이라면 수상기모함을 대동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정찰보고의 지연과 상관없이 일본함대를 발견할 기회는 있었다.

정찰계획에 따르면 남서태평양해역군은 라바울 부근과 동경 158도까지를 정찰하고 남태평양해역군은 트럭 섬과 과달카날 사이의 북방해상을 정찰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슬롯 해역에 대한 정찰은 제61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이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8월 7일과 8일에 일본군의 공습을 경험한 플레처 제독은 한시라도 빨리 철수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8일 오후에 정찰기를 띄우지 않았다.

플레처 제독의 소극적 태도를 알고 있던 터너 제독은 미리 7일 저녁에 제63임무부대 사령관 맥케인 제독에게 슬롯 해역의 정찰을 의뢰했다.

 

맥케인 제독은 터너 제독의 정찰요청을 수락했다.

그는 8일 아침에 누메아에서 슬롯 해역으로 2대의 B-17 을 발진시키는 한편 말라이타 섬에 정박한 수상기 모함을 기지로 삼아 트럭 섬과 과달카날 사이를 정찰 중이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에게 슬롯 해역 정찰도 추가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시간 간격을 두고 차례로 누메아에서 발진한 2대의 B-17 폭격기들은 90km 차이로 일본제8함대와 접촉하는데 실패했고 말라이타 섬에서 출격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슬롯 해역의 기상이 나빠서 정찰을 포기하고 귀환했다.

8일 저녁에 자신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이 슬롯 해역을 정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맥케인 제독은 즉시  터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전문을 보냈으나 불안정한 통신망 때문에 맥케인 제독의 전문은 8일 자정이 가까워서야 터너 제독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과달카날 작전을 둘러싼 통신망의 불안정성 또한 상륙작전을 촉박한 시간표에 따라 밀어붙이다 보니 나타난 부작용 중 하나였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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