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끼나와는 규슈 남부에서 대만 쪽으로 뻗어있는 류큐 열도의 주도로서 규슈에서 650km, 대만에서 610km, 그리고 상하이에서 830km 떨어진 태평양 상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섬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모양으로 전체 길이가 96km, 폭은 가장 넓은 곳이 26km 정도로 면적은 1,230 제곱킬로미터 정도이다.
농업이 주요 산업인 오끼나와는 변변한 산업도 없고 일본에게는 그리 귀중한 섬은 아니었으나 만일 미군에게 이 섬이 넘어갈 경우 문제는 심각했다.
미군이 이곳에 B-29기지를 건설할 경우 10톤의 폭탄을 가득 싣고도 충분히 규슈를 폭격할 수 있었다.
도꾜에서 2,000km 이상 떨어진 마리애나 기지의 B-29들이 도꾜를 폭격할 때 초기에는 3톤의 폭탄밖에 싣지 못했고, 르메이 소장이 제21폭격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에 고고도에 올라가지 않고, 방어 기총을 다 제거하고, 승무원도 3명을 줄인 이후에야 폭탄적재량을 6톤으로 늘릴 수 있었다.

따라서 마리애나 기지와 비교하면 같은 숫자의 B-29라도 오끼나와에 기지를 둔 B-29들은 그 위력이 훨씬 강화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오끼나와는 대군을 수용할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규슈 상륙을 위한 진공군의 발진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오끼나와의 이러한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일본은 1944년 4월 1일에 제32군을 오끼나와로 파견하여 방어준비를 시작했고, 그 해 8월에 우시지마 미쯔루 중장이 제32군 사령관이 되면서 방어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1945년 3월 말까지 제32군 휘하의 제24사단과 제62사단, 제44독립혼성여단, 제27전차연대 등 총 67,000 여명의 육군이 오끼나와에 집결했다.
여기에 해군부대 9,000 명을 더하여 정규군의 숫자는 76,000 여명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오끼나와 주민들로 이루어진 방위대가 있었는데 이들의 병력은 약 20,000 명 정도였고, 그 외에도 4,000 명 정도의 섬 주민이 행정이나 보급 등 일본군의 지원업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제32군의 총병력은 약 100,000 명을 헤아렸다.

제32군은 장비도 상당히 충실한 편에 속했는데 그 이유는 필리핀 방면으로의 해상교통이 두절됨에 따라서 많은 장비가 오끼나와에 돌려졌기 때문으로 그 덕분에 제32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싸운 일본군 부대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제32군은 해군 소속의 해안포 53문 이외에도 150mm 야포 52문, 150mm 직사포 12문, 70mm 및 75mm 야포 170문 등 70mm 이상 구경의 포를 287문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320mm 대형 박격포 24문, 81mm 박격포 96문과 흔히 Knee-Mortar라고 불리던 50mm 유탄발사기 1,100 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75mm 대공포 72문, 20mm 대공포 54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32군의 포병대는 장비만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훈련도 면에서도 당시 일본군 중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제32군은 대전차 무기로서 47mm 대전차포 52문, 37mm 대전차포 27문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차는 57mm 주포를 장착한 중형전차 14대와 경전차 13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더하여 333정의 중기관총과 1,208정의 경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포탄이나 기관총탄 또한 충분한 양이 비축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오끼나와 방어작전을 천호 작전이라고 불렀다.

우시지마 중장은 이오지마에서와 마찬가지로 해안방어를 포기하고 섬의 남쪽에 있는 오끼나와 제2의 도시인 슈리를 중심으로 수많은 토치카를 건설하고 강력한 포병화력을 집중시킨 견고한 방어선을 형성하여 최대한 시간을 끄는 지연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천호 작전에는 제32군이 주축이 된 오끼나와의 지상작전 이외에도 기꾸스이 작전이라고 부르는 육해군 공동의 가미까제 특공작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규슈와 남서제도를 관장하는 제5항공함대 사령관인 우가끼 마또메 중장의 지휘 하에 실시될 이 작전은 일본 남부와 대만 등지에서 가미까제 특공기들이 출격하여 오끼나와 앞바다의 미군선단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총 10회의 기꾸스이 작전이 계획되어 있었으며 작전 기간을 통하여 규슈와 시코쿠에서만 4,500 대의 가미까제 특공기를 출격시킬 예정이었다.
기꾸스이 작전의 개시일은 1945년 4월 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일본군이 이렇듯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던 오끼나와를 점령하려는 미군의 전력 또한 태평양 전쟁 사상 최대의 병력이었다.
오끼나와 상륙작전(빙산작전)을 현장에서 총지휘하는 인물은 제5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대장이었다.

그는 제58기동부대와 영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인 제57기동부대, 그리고 통합원정군(제51기동부대, 켈리 터너 중장)을 이끌고 있었다.

통합원정군에는 구형전함 중심의 포격부대(제54기동부대, 데요 소장)와 호위항공모함 중심의 상륙지원부대(제52기동부대, 블랜디 소장)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58척의 수송선과 184척의 LST 및 89척의 LSM이 상륙부대를 태우고 있었다.
상륙부대는 버크너 중장이 지휘하는 제10군이었는데 예하에는 육군제24군단(하지 소장)과 해병제3상륙군단(가이거 해병소장)이 있었다.
제24군단은 육군제7사단(아놀드 소장)과 제96사단(브래들리 소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해병제3상륙군단은 제1해병사단(벨 해병소장)과 제6해병사단(셰퍼드 해병소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0군에는 이 밖에도 3개의 사단이 더 있었는데 오끼나와 상륙에 앞서 주변의 게라마 열도에 상륙할 임무를 가진 제77보병사단(브루스 소장)과 예비대인 제27사단(그리너 소장)과 제2해병사단(왓슨 해병소장)이었다.
이 중에서 2개의 예비사단을 제외한 5개 사단은 모두 전차대와 포병대 등이 증강된 사단으로 이 5개 사단의 병력만으로도 116,000 명에 달했다.         
7개 사단과 각종 직할부대를 포함한 제10군의 총 병력은 183,000 여명이었으며 이들을 위한 보급품은 750,000 톤에 달했다.

통합원정군 중에서 포격부대는 구형전함 10척(텍사스, 메릴랜드, 아칸소, 콜로라도, 테네시, 네바다, 아이다호, 웨스트버지니아, 뉴멕시코, 뉴욕), 중순양함 8척(투스칼루사, 미니애폴리스, 샌프란시스코, 위치타, 펜사콜라, 포틀랜드, 인디애나폴리스, 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4척(모빌, 버밍햄, 센트루이스, 빌록시), 구축함 24척 및 호위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륙지원부대는 호위항공모함 25척(시플리베이, 메이킨아일랜드, 팬쇼베이, 룽가포인트, 나토마베이, 사보아일랜드, 스티머베이, 안지오, 샴록베이, 마르쿠스아일랜드, 사지노베이, 사전트베이, 페트로프베이, 르디어드베이, 웨이크아일랜드, 툴라기, 마카사르스트레이트, 스와니, 체난고, 생가몬, 산티, 시트코베이, 브레톤, 홀랜디어, 화이트플레인즈), 구축함 16척 및 호위구축함 2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위항공모함 중에서 시트코베이와 브레톤은 해병제31비행단, 홀랜디어와 화이트플레인즈는 해병제33비행단의 항공기를 싣고 있어서 합계 콜세어 192대와 헬캣 30대를 운반하고 있었다.

제57기동부대는 버나드 롤링스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로서 항공모함 4척(인도미터블, 빅토리어스, 인디퍼티거블, 일러스트리어스), 전함 2척(King George V, Howe), 경순양함 7척(Gambia, Uganda, Swiftsure, Black Prince, Euryalus, Argonaut, Quebec ), 구축함 15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경순양함 중 우간다와 퀘벡은 캐나다 해군 소속이고, 갬비어는 뉴질랜드 해군 소속이었다.
오끼나와 작전 기간 동안 제57기동부대는 대만과 오끼나와 사이에 있는 사끼지마 제도와 대만의 비행장들을 공격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대만에서 출격한 250 대의 가미까제 특공기들은 제57기동부대를 상대하느라고 오끼나와에는 거의 도달하지 못했다.

1945년 3월 14일, 제58기동부대는 오끼나와 상륙작전을 앞두고 일본의 항공전력을 꺾기 위한 임무를 띄고 울리시를 출항했다.
미처 제독이 지휘하는 제58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11척(호넷, 베닝턴, 와스프, 벙커힐, 에섹스, 핸콕, 엔터프라이즈, 인트레피드, 요크타운, 프랭클린), 경항공모함 6척(샌야신토, 벨로우드, 바탄, 캐봇, 랭글리, 인디펜던스), 고속전함 8척(노스캐롤라이나, 워싱턴, 사우스다코타, 인디애나, 메사추세츠, 뉴저지, 미주리, 위스컨신), 대형순양함 2척(알래스카, 괌), 중순양함 2척(볼티모어, 피츠버그), 경순양함 13척(빅스버그, 빈센스, 산후앙, 마이애미, 산타페, 아스토리아, 플린트, 샌디에고, 오클랜드, 파사데나, 윌크스베리, 스프링필드), 구축함 7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3월 16일에 해상에서 최종 급유를 마친 제58기동부대는 18일에 규슈와 시코쿠의 중요 비행장 45개에 대하여 공습을 실시했다.
이날의 공습으로 제58기동부대는 102대의 일본기를 격추하고 275대의 일본기를 지상에서 파괴하였으며 수송선 1척, 유조선 1척, 소형함정 4척을 격침했다.
일본군도 가미까제 특공기로 반격을 가하여 정규항공모함 인트레피드와 요크타운이 함체 바로 부근에서 폭발한 특공기로 인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었으나 작전에는 지장이 없었다.

3월 19일에는 전함 야마또, 히우가, 하루나, 항공모함 아마기, 류호, 가쓰라기, 호쇼 등 그때까지 살아남은 일본연합함대의 주력함정들이 정박해 있던 구레 군항을 폭격하여 대형전함 야마또와 정규항공모함 아마기를 비롯하여 17척의 함정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1척도 격침하지 못했다.

일본군도 제58기동부대에 대하여 과감한 반격을 시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3월 19일 오전 7시 10분, 정규항공모함 프랭클린은 비행갑판과 격납고 갑판에 무장과 연료를 만재한 함재기들이 꽉 들어찬 상태에서 1대의 일본기가 투하한 2발의 250kg 폭탄을 얻어 맞았다.
즉시 엄청난 유폭과 함께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프랭클린은 우수한 손상관리 시스템과 손상관리요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겨우 침몰은 면했으나 724명이 전사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태평양 전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일본기의 폭격을 받아 기울어진 프랭클린.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69348303 )


정규항공모함 와스프도 가미까제 특공기에 의하여 화재가 발생, 101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곧 화재를 진압하고 작전을 계속했다.
와스프는 이후 3주일동안 더 작전을 계속한 후 4월 13일에 수리를 위하여 미본토로 향했다.

 

엔터프라이즈는 3대의 특공기를 무사히 피했으나 호위함이 쏜 5인치 대공포 2발이 함교 앞쪽의 40mm 대공포좌에 떨어지면서 포좌에 쌓여있던 40mm 포탄에 유폭되어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7명이 전사했고, 엔터프라이즈는 20분만에 화재를 진압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울리시로 물러가서 10일간 수리를 해야만 했다.
엔터프라이즈가 오끼나와 앞바다에 돌아온 것은 4월 5일의 일이었다.  
 

강력한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하루 만에 3척의 정규항공모함이 전열에서 탈락하게 되자 미처 제독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제58기동부대는 4월 1일로 예정된 오끼나와 상륙을 앞두고 가미까제 특공기를 발진시킬 가능성이 높은 규슈와 시코쿠의 비행장 45개를 제압할 임무를 띄고 있었다.
단 한번의 압도적인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할 수 없는 지상 비행장의 특성상 지속적인 제압이 중요했다.

그런데, 45개나 되는 비행장을 지속적으로 제압 하에 둔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요하는 일로서 제58기동부대가 전력을 기울여서 그 일에만 매달려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오끼나와 상륙이 시작되어 제58기동부대가 선단 보호의 임무까지 맡게 되면 비행장 제압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마리애나에 기지를 둔 제21폭격사령부(XXI Bomber Command)에 제58기동부대를 대신하여 규슈 지역의 비행장들을 폭격해주도록 요청했다.
마리애나에 기지를 두고 B-29를 사용하여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담당하고 있던 제21폭격사령부는 태평양 해역에서 작전 중인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니미츠 제독의 지휘를 받지 않는 부대로서 통합참모본부의 직속통제 하에 있는 부대였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에게는 유사시 이 부대에 지원을 요청할 권한이 있었다.
니미츠 제독은 이제까지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이 권한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 도시에 대한 소이탄 폭격에 한참 재미를 들인 제21폭격사령관인 르메이 소장은 전략폭격기인 B-29를 엉뚱하게 비행장 폭격에 사용하려는 니미츠 제독의 방침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어쨌든 정당한 권리행사였으니만큼 니미츠 제독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사실 2주 전인 3월 7일에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괌 섬의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 태평양함대와 제21폭격사령부 간에 회의가 열렸었다.

이 자리에서 니미츠 제독은 유사시에 제21폭격사령부에게 해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B-29를 출격시키도록 요청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다만 이때 르메이 장군은 만일 B-29가 해군을 도와 출격하더라도 그 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비행기용 엔진공장 같은 전략목표이며 비행장 폭격은 가급적이면 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주장하여 니미츠 제독의 동의를 받았다.
르메이 장군은 이로써 전략무기인 자신의 B-29 들이 비행장 폭격 같은 쩨쩨한 일을 해야할 가능성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56230596 )

 

니미츠 제독 또한 내심 막강한 제58기동부대가 건재한 이상 마리애나의 B-29가 해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출동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58기동부대가 예상 외로 강력한 일본군의 반격을 받자 니미츠 제독의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제21폭격사령부는 즉시 태평양함대 사령부와 협의하여 규슈 지역의 비행장 중에서 입지조건이나 비행장의 규모 등을 종합하여 가미까제 특공기를 발진시키기에 가장 유리한 비행장 17개를 골라서 무력화시키기로 했다.

 

한편 제58기동부대는 3월 19일 이후로 비행장 공격은 중단하고, 22일까지 해상급유를 받으면서 요격에만 전념하여 공격해오는 일본기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3월 18일부터 22일까지 일본기 528대를 격추하거나 지상에서 파괴하여 일본기들의 세력을 한풀 꺾는데 성공한 제58기동부대는 3월 23일부터는 오끼나와에 대한 폭격에 전념했다.

3월 26일, 제77사단의 게라마 열도 상륙에 발맞추어 가미까제 특공기의 출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마리애나 기지를 출발한 151대의 B-29가 규슈의 비행장들을 폭격한 것을 시작으로 28일에 137대의 B-29가 규슈의 또다른 비행장들을 폭격했다.
B-29의 폭격은 3월 31일에도 반복되었다.
기꾸스이 작전 발동에 임박해서 행해진 이러한 B-29의 가공할 폭격으로 중요한 비행장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자 우가끼 중장은 할 수 없이 기꾸스이 작전 개시일을 4월1일에서 6일로 연기했다.   

3월 26일, 제77사단이 오끼나와 서쪽 24km 지점에 위치한 게라마 열도에 상륙했다.
제77사단은 이곳에서 350척의 자살공격용 주정을 노획했다.
길이 5.4m, 폭 1.8m에 85마력의 출력을 가진 6기통 자동차용 엔진을 장착한 일종의 모터 보트인 이 자살공격용 주정은 120kg짜리 폭탄 2발을 싣고 20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일본군의 자살공격용 주정 신요.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1190184 )


3월 31일에는 게라마 열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게이세이 섬에 24문의 155mm 직사포를 장비한 제420포병대가 상륙하여 다음날 실시될 오끼나와 상륙작전을 엄호할 태세를 갖추었다.

오끼나와 상륙작전을 앞둔 사전포격은 3월 25일부터 실시되고 있었다.
데요 소장이 지휘하는 10척의 구형전함을 중심으로 한 포격부대는 3월25일부터 4월1일까지 1주일 동안 6인치 이상의 대구경탄 13,000 발을 포함하여 총 5,162 톤의 포탄을 오끼나와에 쏟아부었다.
제58기동부대와 블랜디 소장의 상륙지원부대는 4월1일까지 오끼나와에 총 3,905 소티의 폭격을 실시했는데 주목표는 오끼나와의 비행장이었고, 두번째 목표는 자살용 주정들, 세번째 목표는 해안의 방어시설이었다.

오끼나와 상륙일인 4월 1일에는 오전 5시 30분부터 포격부대 소속의 구형전함 10척, 순양함 9척, 구축함 23척, 포정, 로켓포정 및 박격포정 177 척이 상륙 예정 지역인 하구시 해안에 대하여 5인치 이상의 포탄 44,825발, 로켓탄 33,000 발, 박격포탄 22,500 발을 퍼부었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의 상륙 준비 포격 중 최대 규모였다.
7시45분부터는 제58기동부대와 호위항공모함을 떠난 함재기들이 네이팜탄을 이용하여 하구시 해안을 맹폭했다.
제1파로 상륙하게 되어있는 LVT 들이 해안에 다가서자 LCI(G), LCI(R) 및 LCI(M=Mortar) 등이 해안에 바짝 다가서서 40mm 포탄, 4.5인치 로켓탄 및 4.2인치 박격포탄을 하구시 해안의 사방 9m x 9m 넓이마다 평균 25발씩 쏟아부었다.
전날 게이세이 섬에 상륙했던 24문의 155mm 평사포도 포격에 가세했다.

오전 8시 30분에 최초의 LVT 가 하구시 해안에 도착했고, 이어서 후속 제파가 속속 해안에 도착하여 1시간 이내에 다수의 셔먼 전차를 비롯하여 16,000 여명의 병력이 상륙했다.
예상과 달리 일본군에게서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상륙군은 곧 전진하기 시작하여 오전 10시 30분에는 가데나 비행장을, 11시 30분에는 욘탄 비행장을 점령했다.
그날 자정까지 4개 사단 60,000 여명의 병력이 무사히 상륙을 마쳤다.
이후 4월 5일에 제96사단이 최초로 본격적인 일본군의 방어선에 도달할 때까지 일본군의 저항은 미약했다.     

한편 제21폭격사령관인 르메이 소장은 3월 말의 반복적인 폭격에 의하여 일본군의 비행장들을 거의 못쓰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나 곧 일본군들이 이들 비행장의 활주로를 빠른 속도로 복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지속적인 공격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비행장들을 폭격했으나 이윽고 아무리 철저하게 폭격을 해도 일본군들은 활주로를 대충이라도 복구한 다음 소수의 항공기들을 이륙시키는데 이것을 완전히 근절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미까제 특공기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비행장 공격보다는 일본의 비행기 엔진 공장을 폭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르메이 소장은 4월 1일에 오끼나와 상륙이 실시되자 니미츠 제독을 찾아가 이제 자신의 B-29 들을 비행장 폭격 임무에서 빼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규모 가미까제 공격이 4월 6일이나 7일쯤에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있던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예측은 정확했다.
우가끼 마또메 중장이 원래 4월 1일로 예정되었던 제1차 기꾸스이 작전을 4월 6일과 7일 양일간에 걸쳐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는 합계 800 대 이상의 일본기들이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애초 계획에는 없었던 해상부대도 참가하기로 결정되었다.
즉 대형전함 야마또와 경순양함 야하기 및 8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제1유격부대가 해상특공부대로 참가한 것이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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