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애투 탈환전(4) - 상륙
애투 섬을 침공하려면 위험한 조류, 해도에 기입되지 않은 암초, 그리고 거의 매일끼는 안개를 극복해야 했다.
알류샨 열도 부근을 항해하는 선원들의 오랜 원칙은 바다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더 이상 섬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었다.
애투 상륙작전이 남태평양의 상륙작전보다 유리한 점이라고는 해안에 작은 모래사장들이 많아서 상륙지점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미군의 주요 상륙 지점은 북쪽의 홀츠 만과 남쪽의 매서커 만이었다.
주력의 상륙에 앞서 홀츠 만 서쪽에 최초의 상륙이 실시되었다.
5일 전에 애투 섬에 도착하여 북쪽 해안을 정찰하던 잠수함 나왈과 노틸러스는 5월 11일 새벽에 제7스카웃 중대 약 200 명을 상륙시켰다.
이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5월 11일 오전 3시 9분부터 5시 10분에 걸쳐 홀츠 만의 상륙지점인 비치 레드에서 서쪽으로 약 6km 정도 떨어진 비치 스칼렛에 상륙했다.
스카웃 중대의 뒤를 이어 고속수송함 케인에 타고있던 제7정찰중대 약 200 명이 상륙했다.
원래 제7정찰중대는 스카웃 중대가 상륙한 직후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안개가 너무 짙어서 도저히 해안에 접근할수가 없었다.
결국 케인은 펜실베니아의 레이더로부터 항로를 지시받아 11일 정오가 되어서야 겨우 제7정찰중대를 상륙시킬 수 있었다.
제7정찰중대가 상륙했을 때 스카웃 중대는 계곡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계곡의 남쪽 끝에 도달한 스카웃 중대는 홀츠 만을 향하여 동쪽으로 난 경사로를 힘겹게 올라갔다.
스카웃 중대가 약 650m 고도에 도달하자 마치 고개처럼 보이는 지형이 나왔는데 그 이후로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정찰 중대와 스카웃 중대로 이루어진 임시 대대를 지휘하던 윌리엄 윌로비 대위는 오후 늦게 낯선 지형으로 들어서는 모험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임시 대대는 참호를 파고 들어 앉았다.
윌로비 대위는 명령이 내리면 홀츠 만 쪽으로 진출하여 홀츠 만에 상륙하는 제1/17대대에 대항하는 일본군의 배후를 칠 임무를 맡고 있었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홀츠 만 바로 서쪽의 비치 레드에는 제17연대 제1대대가 상륙했다.
오전 9시에 해상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함교에서 함수가 안보일 정도였는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공격수송함 J. 프랭클린 벨에 탑승하고 있던 제32연대장 프랭크 컬린 대령은 상륙주정 2척에 타고 비치 레드로 향하는 정찰대에 합류했다.
정식명칭이 제1알래스카 전투정보소대로서 흔히 알래스카 정찰대라고 불리던 이 소규모 부대에는 카누를 다룰 줄 알고 애투 섬 지리에 익숙한 알류트족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주정들은 플라스틱 보트들을 매달고 있었다.
구축함 펠프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항진한 상륙주정이 해안에서 800m 떨어진 해상에 도달하자 알류트족 병사들이 보트로 옮겨타고 노를 저어 아무것도 안보이는 짙은 안개 속을 오로지 나침반과 감각에만 의존하여 뚫고 나가 무사히 상륙했다.
해안에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으므로 상륙주정에서 대기하던 정찰대도 곧 상륙했다.
비치 레드를 확보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1/17대대장 앨버트 하틀 중령은 제7사단장 앨버트 브라운 소장에게 대대 주력의 상륙허가를 요청했는데 공격수송함 제일린을 타고 남쪽의 매서커 만에 떠있던 브라운 소장은 안개가 걷혀 주력이 매서커 만에 상륙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대답했다.
오후가 되어 안개가 걷히면서 매서커 만에서 상륙이 시작되자 브라운 소장은 홀츠 만의 하틀 중령에게도 상륙을 허가했다.
오후 4시 15분부터 B/1/17 중대를 선두로 비치 레드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저녁까지 제1/17대대 1,100 명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을 마쳤다.
(홀츠 만에 상륙하고 있는 미군의 모습)
제1/17대대는 오후 6시 경에 최초로 일본군과 접촉했다.
정찰대가 골초프곶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서 일본군 관측소를 발견하여 제거했다.
관측소에 있던 일본군 4명 중 2명은 사살되었고 2명은 달아났다.
잠시 후 정찰대는 일본군이 쏘아대는 75mm 대공포의 사격을 받고 전진이 느려졌다.
제1/17대대의 주력은 정찰대를 뒤따라 천천히 남하했다.
그날의 목표는 비치 레드에서 남쪽으로 3.2km 떨어진 240m 높이의 X고지였는데, 오후 10시 30분이 되자 짙은 안개와 밤의 어둠때문에 지형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제1/17대대는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로 참호를 팠다.
제1/17대대의 정찰대는 주력과 떨어져 전방에 고립된 채로 밤을 지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X고지에 있다고 착각했다.
미군의 주력은 남쪽 매서커 만에 상륙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상륙을 앞두고 구형전함들이 상륙예정해안에 포격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안개로 인하여 상륙준비포격은 취소되었다.
상륙함대는 오전 8시 15분에 매서커 만에 들어와서 곧 상륙주정을 내리고 병사들을 옮겨실었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지 않아 록웰 소장은 상륙을 오후로 연기했다.
다행히 기온이 섭씨 9도 정도로 많이 춥지는 않고 파도도 잔잔해서 상륙주정에서 대기하는 병사들이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오후들어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예보가 들어오자 록웰 소장은 오후 1시 55분에 상륙명령을 내렸다.
구축함 프루잇의 선도를 따라 오후 3시 30분부터 상륙이 시작되었고 오후 4시 20분에 제2/17 대대가 비치 블루에, 제3/17대대가 비치 옐로우에 상륙했다.
제2/17 및 제3/17대대는 오후 8시까지 2,000명이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여 매서커 해안에 폭 1.6km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매서커 만에 상륙한 미군의 모습)
매서커 만에 상륙한 미군은 오후 6시 경에 최초로 일본군과 교전했다.
비치 블루에 상륙한 제2/17대대는 메서커 계곡을 둘로 나누는 산등성이(Hogback)의 오른쪽으로 돌아 해안에서 2,300m 쯤 들어갔을 때 동쪽의 길버트 능선으로부터 소총 및 기관총 사격을 받고 일단 멈추었다.
약 45분 후 제2/17대대는 진격을 재개했으나 다시 기관총 사격과 함께 75mm 포탄까지 날아오기 시작하자 결국 진격을 멈추었다.
제2/17대대는 11일 오후 9시에 해안으로부터 2,700m 들어간 지점에서 참호를 파고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비치 레드에 상륙한 제3/17대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산등성이의 왼쪽을 돌아 전진하던 제3/17대대는 오후 8시 30분에 서쪽의 헨더슨 능선과 정면에서 쏘아대는 사격을 받고 전진을 멈추었다.
해안에 상륙해 있던 155mm 롱톰 평사포들이 제3/17대대의 요청에 따라 포격을 퍼붓자 일본군은 사격을 멈추었으나 미군의 포격이 멈추고 제3/17대대가 전진을 재개하자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결국 제3/17대대는 제2/17대대보다 약간 더 내륙으로 들어간 지점에 참호를 팠다.
일본군은 매서커 만 계곡을 둘러싼 길버트 능선 및 헨더슨 능선과 메커서 계곡과 홀츠 만을 연결하는 자민 고개에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5월 11일 저녁 9시 30분이 되자 비치 스칼렛에 400명, 비치 레드에 1,100 명 그리고 매서커 만에 2,000 명 등 총 3,500 명의 미군이 애투 섬에 상륙해 있었다.
안개 때문에 폭격과 포격은 최소한으로 실시되었다.
11일 오전 2시에 나소의 함재기들이 치차고프 항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한 후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뿌렸고 오전 10시부터는 구형전함 펜실베니아와 아이다호가 레이더 조준으로 치차고프 항에 1시간 동안 포격을 가했다.
매서커 만에 상륙한 주력의 양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분견대들이 매서커 계곡 양쪽에 파견되었다.
제7정찰중대의 1개 소대는 메서커 만에서 남서쪽으로 6km 떨어진 알렉사이 곶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나아가 관측소를 설치했다.
이 정찰소대는 이후 2일간 본대와 연결되지 않은 채로 매서커 만과 니콜라스 호수 사이의 지역을 감시했다.
F/2/17 중대의 1개 소대는 길버트 능선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대장 찰스 폴슨 중위는 경기관총 1개반과 60mm 박격포 1개 분대를 배속받은 후 상륙 당일에 매서커 만 동쪽의 급경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12일 아침에 길버트 능선의 정상에 도달한 폴슨 소대는 능선을 따라 북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길버트 방어선을 측면에서 위협하는 폴슨 소대에게 계속 병력을 보내어 공격을 가해왔다.
이틀간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치르면서 길버트 능선을 따라 전진한 폴슨 소대는 14일에 해안에서 약 2,700m 떨어진 지점에서 본대와 합류했다.
매서커 만의 서쪽으로도 분견대가 파견되었다.
F/2/32 중대는 메서커 만 좌익의 안전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11일에 비치 옐로우에 상륙하여 즉시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날 밤에 템낙 만에 도달한 F 중대는 일본군 관측소를 발견하고 일본군이 미처 눈치채기 전에 기습하여 제거했다.
12일부터 F 중대는 헨더슨 능선의 일본군들을 배후에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4일까지 능선 정상에 오르는 길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결국 14일에 F 중대는 매서커 만으로 돌아왔다.
애투 섬의 일본군은 미군의 상륙에 놀라지 않았다.
일본잠수함 1척이 상륙 2일 전에 미군함대의 일부를 발견하고 보고했으며 연합함대 사령관 고가 제독은 이 정보를 즉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전달했다.
상륙 전날에는 애투 섬의 일본군 통신부대가 애투 섬 북방 해상에서 항진 중이던 미군 함정 간의 통신을 엿들었다.
상륙 당일인 11일 오전 2시에는 미군 함재기가 치차고프 항 상공에 나타나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하고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뿌렸으며 오전 10시에는 미군 전함들이 치차고프 항에 포격을 가해왔다.
오후 3시에는 홀츠 만에서 상륙주정이 목격되었고 5시에는 남쪽 매서커 만에 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야마자키 대좌는 자신이 가진 2,630명의 병력과 75mm 산포 4문, 75mm 대공포 12문, 20mm대공기관포 10문으로 모든 지점을 방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전력을 매서커 만과 홀츠 만을 연결하는 자민 고개 부근에 집중시켰다.
한편 일본해군 수뇌부는 애투 섬 침공을 계기로 미해군과 결전을 시도했다.
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애투 섬으로 수상기를 전달하러 가던 기미키와마루와 만나 미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3척을 이끌고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다.
야마모토 제독의 전사 이후에 연합함대 사령관이 된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중순양함 묘코와 하구로를 제5함대에 증원한 후 5월 16일에 전함 3척(무사시, 공고, 하루나), 개장 항공모함 1척(히요), 중순양함 2척(도네, 치쿠마) 그리고 구축함 5척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트럭을 출발하여 5월 21일에 도쿄 만에 도착했다.
도쿄 만에는 이미 정규항공모함 2척(쇼가쿠, 즈이가쿠), 경항공모함 1척(즈이호), 중순양함 3척(스즈야, 구마노, 모가미), 경순양함 2척(아가노, 오요도), 구축함 11척이 급유함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으나 일본해군의 대응은 애투 섬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대신 일본해군의 강력한 함정들이 대거 빠져나감으로써 솔로몬 해역에서 터너 제독이 6월 말에 실시한 렌도바 상륙은 약한 저항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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