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에필로그
홍콩을 점령한 일본은 군정을 실시했는데 중국본토와 구별해 직접 통치했다.
최초의 홍콩총독은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었고 1942년 1월 19일에 이소가이 렌스케 장군이 홍콩총독으로 임명되어 1944년 12월 24일까지 재임했으며 마지막 총독은 다나카 히사가즈 장군이었다.
이소가이 총독은 홍콩에서 일본군의 군표를 유통시켰는데 이것이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홍콩전투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병사들은 1942년 9월부터 일본으로 이송되어 강제 노동에 처해졌다.
1942년 9월 1일에 약 700 명의 포로가 처음으로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9월 25일에는 1,834명의 포로가 778명의 일본군과 함께 리스본마루에 실려 일본으로 향했다.
리스본마루는 10월 1일에 상해 부근 해상에서 미국잠수함 그루퍼가 쏜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이 사고로 828명의 포로가 사망했는데 선창에 갇혀있던 포로들이 몰래 만든 칼로 빗장을 열고 탈출함으로써 몰살을 면했다.
리스본마루에 타고 있던 일본군들은 가라앉는 뱃전에 버티고 서서 탈출하는 포로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일본배에게 구조되어 상해에 상륙했다가 10월 7일에 신세이마루와 워싱턴마루에 실려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포로들은 고베와 오사카에 나눠 수용된 다음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종전시까지 기아와 질병으로 290명이 사망하여 리스본마루에 탔던 1,834명의 포로들 중 716 명만이 살아남았다.
(리스본마루. http://en.wikipedia.org/wiki/Lisbon_Maru)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1943년에 열린 카이로 회담의 결정에 의하여 홍콩의 일본군은 장개석 총통에게 항복하게 되어 있었으나 국민당군은 당장 홍콩에 들어갈 입장이 되지 않았다.
반면 영국은 중국군이 홍콩을 점령하고 주권을 주장하기 전에 함대를 파견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했다.
장개석 총통은 영국함대가 중국군보다 먼저 홍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항공모함 5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6척 등 총 55척으로 이루어진 영국함대는 제11항모전단사령관 세실 하코트 소장의 지휘 아래 1945년 8월 27일에 필리핀 수빅만을 떠나 29일 오후 3시에 홍콩 앞바다에 도착했다.
홍콩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위한 외교적인 최종 조율이 진행되는 동안 소해정들이 빅토리아 항을 소해하고 영국해병대는 주변의 작은 섬에 상륙하여 자살보트들을 찾아내어 파괴했다.
그동안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이함한 아벤저 뇌격기가 계덕 비행장에 착륙하여 일본 측의 연락장교를 태우고 돌아왔다.
다음날인 8월 30일 오후에 영국함대는 소해정을 선두로 잉어문 해협을 통하여 빅토리아 항에 진입했다.
영국함대가 접근하자 자살보트 3대가 뛰쳐나왔으나 전투초계기들의 기총소사를 받고 격침되었다.
곧 영국해병대가 상륙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심수보의 포로수용소를 해방시켰다.
홍콩주둔 일본군의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 16일에 있었다.
국민당에서 대표가 파견되어 조인식을 주재했으나 이미 영국군이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는 홍콩에서 그의 역할은 얼굴마담일 뿐이었다.
이리하여 영국은 홍콩을 다시 차지했으며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주권이 넘어갈 때까지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남았다.
홍콩을 점령한 제38사단은 1942년 1월 4일에 제16군에 편입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전투에 참가했으며 10월에는 과달카날 전투에 투입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성문보를 점령했던 와카바야시 중위도 1943년 1월 14일에 과달카날에서 전사했다.
과달카날에서 철수한 후 보병 제229연대는 뉴조지아 섬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제38사단은 라바울을 방어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제38사단이 떠난 후 홍콩에 주둔한 일본군은 독립보병 제67, 제68 및 제69연대였다.
일본의 홍콩총독들은 모두 전후에 전쟁범죄로 단죄를 받았다.
초대 총독인 사카이 중장은 사형선고를 받고 1946년에 총살당했다.
2대 총독인 이소가이 장군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67년에 석방되었다.
마지막 총독인 다나카 장군은 중국에서의 전쟁범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947년에 처형되었다.
제38사단장 사노 타다요시 중장은 사단을 이끌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과달카날에서 싸웠으며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에 센다이에서 병사했다.
제38사단의 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과달카날에서 싸웠으며 독립혼성 제40여단장으로 뉴아일랜드 섬을 수비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전쟁범죄로 1946년 5월에 라바울의 호주군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10월에 무죄를 인정받고 석방되었으며 1965년에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홍콩전투 당시 제2견지함대사령관이었던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중장도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84세에 제2차 세계대전사를 출간하기도 한 니이미 제독은 106세까지 장수를 누리고 1993년에 사망했다.
니이미 중장의 기함이었던 경순양함 이스즈는 솔로몬 제도와 레이테만에서 싸웠으며 1945년 4월 7일에 자바해에서 미국잠수함에게 격침되었다.
(일본해군의 경순양함 이스즈.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Isuzu)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은 전쟁 기간 동안 홍콩, 상해, 대만을 거쳐 심양의 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았다.
영국에 돌아온 몰트비 소장은 1946년에 퇴역했고 90세를 일기로 1980년에 사망했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석방 후 캐나다로 이민가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뱅쿠버에서 살던 월리스 준장은 101세를 일기로 1996년에 사망했다.
캐나다 왕립소총대대장 윌리엄 홈 중령은 종전 이후 캐나다군에 돌아가 준장으로 퇴역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사이먼 화이트 중령은 석방되어 영국에 돌아왔으나 곧 암으로 사망했다.
진책 소장은 중국으로 돌아간 후 국민당에서 일했고 종전 이후 광주 시장을 맡기도 했으나 1949년에 자택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 참고문헌 및 웹사이트
<대동아전사-제6권 태평양전쟁> 오바다 아츠시로 지음, 유준수 옮김, 한양문화사, 1974년
<대동아전쟁비사-제5권 중국편> 한국출판사, 1971년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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