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네덜란드 해군

진주만 기습 당시 동인도제도를 지키던 네덜란드 해군은 경순양함 3척(자바, 드루이터, 트롬프), 구축함 7척(반네스, 에버트센, 코테네어, 윗더위드, 반겐트, 피에타인, 방커트), 잠수함 16척, 그리고 소수의 기뢰부설함 및 소해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양함의 수준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트롬프는 2,500톤짜리 지휘구축함의 설계에서 경순양함으로 확대된 경우로 표준배수량 3,800톤이 채 되지 않아 너무 작았다. 따라서 무장도 약한 편이었으며 특히 방어력이 약했다.
자바의 설계는 1916년에 건조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예산 및 정치적 의지의 부족으로 건조가 늦어져 마침내 1925년에 취역했을 때는 이미 구식이 되어 있었다. 자바는 150mm 주포 10문을 포방패가 달린 10개의 단장 포가에 달아 배치했는데 4문은 함체의 앞뒤에, 6문은 중앙에 배치했다. 그런데 중앙에 배치한 6문은 함체의 중심선이 아니라 좌우로 3개씩 나누어 배치했기 때문에 현측 일제사격 시에는 최대 7문만 사격이 가능했다. 자바가 취역할 당시 순양함의 주포는 노출된 단장 포가가 아니라 연장 또는 3연장의 폐쇄식 포탑에 달아 함체의 중심선을 따라 배치하는 것이 대세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네덜란드 경순양함 자바.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Java_(1921)

 

잠수함의 수준은 높았다. 네덜란드는 20세기 초반부터 동시기 열강의 잠수함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잠수함을 건조해 왔으며 잠항 중에 디젤엔진을 구동시켜 충전을 가능케 하는 슈노켈도 네덜란드가 발명한 것이다. 그들은 해양환경이 다른 본토와 동인도제도용 잠수함을 따로 개발하여 소형인 본토용은 O급으로 뒤에 아라비아 숫자를 붙이고 좀 더 큰 동인도제도용은 K급으로 뒤에 로마숫자를 붙였다. 이런 식의 이중개발은 아무래도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본토와 동인도제도의 서로 다른 해양환경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잠수함 개발이 가능해지자 1939년에 취역한 O-19급부터 하나로 통합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동인도제도에 전개한 네덜란드 잠수함 부대는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성능이 뛰어난 잠수함을 보유했으며 승조원들도 잘 훈련되어 있었다.

장거리 비행정 중심의 해군항공대 또한 일류였다. 승무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으며 수색이나 정찰 뿐 아니라 공격 임무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또한 수상함정이나 잠수함과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해군의 작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네덜란드 해군이 사용하던 항구는 3개로서 모두 동인도 제도의 정치, 상업, 산업적 중심지인 자바에 있었다.
자바 북동쪽에 있는 수라바야는 네덜란드 해군의 모항으로 비행장, 수상기 기지, 잠수함 기지, 부유선거 2개, 해병대 막사 등 지원 시설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수라바야는 진주만, 싱가포르는 물론 카비테보다도 시설이 열악했으나 동인도제도에서는 가장 훌륭한 군항이었다.
자바 북서쪽에 있는 탄종 프리옥은 수도인 바타비아(오늘날 자카르타)의 외항이었다. 바타비아 시가지에서 13km 떨어진 탄종 프리옥은 동인도제도 최대의 상업항이었으나 해군 시설은 수상기 기지 하나밖에 없었다. 바타비아의 북쪽과 남쪽에는 비행장이 하나씩 있었다.
자바 남해안에 자리잡은 칠라찹은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남해안에서 유일한 항구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가 신경을 써서 개발했으며 전쟁이 발발하자 8,000톤짜리 부유선거와 수리함 바렌츠를 파견하여 제한적인 수리 능력을 갖추었다. 칠라찹의 가장 큰 단점은 인접한 비행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1940년 5월에 네덜란드 본토가 함락되자 동인도제도의 군사력 증강은 중단되었다. 함정의 증원은 고사하고 예비부품의 공급이 끊기는 바람에 일부 함정을 부품공급처로 사용해야만 했다.  항공기의 증원도 불가능해져 미국으로부터 사야 했는데 미국 또한 스스로 무장하는데 바빴다. 따라서 미군이 퇴역시키려고 하는 마틴 B-10 폭격기나 브류스터 버팔로 전투기같은 구형기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력 충원이 막힌 것이었다. 승조원이 부족하여 몇몇 함정은 필수 인원만으로 운용되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격침되자 헬프리히 제독은 살아남은 승조원들을 동인도제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영국 승조원들을 순양함 수마트라, 잠수함 2척, 그리고 어뢰정 몇척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나 양측의 입장이 달라 무산되었다. 자바해 해전에 참가한 네덜란드 함정 중 승조원 정수를 채운 함정은 칠라찹에서 좌초하여 폐기된 구축함 반겐트의 승조원을 보충받은 구축함 윗더위드 뿐이었다. 승조원의 훈련도는 구축함 에버트센을 제외하고는 양호한 편이었다. 에버트센은 개전 1주일 전인 1941년 12월 1일에 취역하여 훈련할 시간이 부족했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하고 코타바루에 상륙하면서도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으나 네덜란드군은 일본의 의도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고 즉시 적대행위를 시작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1941년 12월 8일에 휘하의 네덜란드 함정들에게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는 통신을 보냈다.

첫번째 전과는 12월 12일에 있었다. 안톤 부세메이커 중령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잠수함 O-16은 12일 밤에 파타니 앞바다의 일본군 정박지에 침투했다. 수심이 9m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O-16은 부상한 상태에서 정박한 일본군의 병력수송함 4척에게 두번에 걸쳐 6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그 결과 8,666톤 짜리 토산마루, 9,306톤짜리 킨카마루, 8,812톤짜리 아소산마루 등 3척의 병력수송선이 침몰하고 9,788톤 짜리 병력수송선 아야토산마루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수심이 얕았으므로 일본군은 나중에 침몰한 선박을 모두 건져 수리한 후 다시 사용했다. 따라서 일본측은 이 3척을 격침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O-16은 큰 전과를 세우고 개선하다가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에 걸려 침몰하는 바람에 42명의 승조원 중 1명만이 살아남았다. 또다른 네덜란드 잠수함 K-ⅩⅦ도 기뢰에 접촉하여 36명인 승조원 전원과 함께 침몰했다.
17일 오후에는 타라칸을 이수한 네덜란드해군항공대 소속 도르니에 Do-24 비행정 3대가 영령 보르네오의 미리를 침공한 일본선단을 공습했는데 이중 1대가 구축함 시노노메에게 200kg 짜리 폭탄 2발을 명중시켜 격침했다.

 

(일본구축함 시노노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destroyer_Shinonome_(1927

일본군은 미리에 이어 쿠칭에 상륙했다. 네덜란드해군항공대의 X-35 비행정이 일본선단을 발견하고 잠수함 K-ⅩⅣ에게 연락했다. 카렐 그뢴벨트 소령이 지휘하는  K-ⅩⅣ는 23일 오후 8시 40분부터 산투봉 강어귀에 정박한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카토리마루(9,848톤)와 히에마루(4,943톤)를 격침하고 호카이마루(8,416톤)와 니치란마루(6,503톤)에 피해를 입혔다.  이 공격은 가장 성공적인 해군항공대와 해군의 합동작전 사례이다.

(네덜란드 잠수함 K-ⅩⅣ. 배수량 865톤(수상) 1,045톤(수중), 길이 74m, 폭 6.5m, 흘수 3.9m, 속력 17노트(수상) 9노트(수중), 항속거리 12노트로 19,000km(수상) 8.5노트로 48km(수중), 잠항심도 80m, 승조원 38명, 무장 21인치 어뢰발사관 전방 4문, 후방 2문, 외부발사관 2문, 어뢰 14발.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K_XIV)

24일 오후 4시에는 루이스 자만 소령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잠수함 K-ⅩⅥ 이 쿠칭에서 북쪽으로 65km 떨어진 해상에서 병력을 상륙시키고 돌아가던 일본선단을 공격했다. K-ⅩⅥ 은 일본구축함 사기리에 어뢰 2발을 명중시켜 격침했으며 사기리의 승조원 241명 중 121명이 목숨을 잃었다. 승리를 거두고 수라바야로 돌아가던 K-ⅩⅥ 은 다음날인 25일에 일본잠수함 I-66 의 어뢰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으며 승조원 36명은 모두 사망했다.

26일에는 보르네오 사마린다 비행장에서 이륙한 네덜란드 공군의 구형 글렌 마틴 B-10폭격기들이 사라왁 앞바다에서 제6호 소해정과 2,827톤 짜리 석탄운반선 제2운요마루를 격침했다.

네덜란드 해군이 맹활약하면서 헬프리히 제독은 미국언론으로부터 '하루한척 헬프리히'(Ship-A-Day Helfrich)라는 별명을 얻는 등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따라서 ABDA사령부가 창설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자신이 ABDAFLOAT 사령관이 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하트 제독에게 사령관 자리를 빼앗겼다. 그는 크게 분노하여 하트 제독이 물러날 때까지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