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BDA사령부

남방작전에서 일본군의 최종 목표는 석유가 풍부하게 산출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셀레베스(오늘날의 술라웨시)라는 4개의 큰섬을 포함하여 13,0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담당한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의 제16군이 최종 목표인 자바에 상륙한 날짜는 1942년 3월 1일이었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공격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침공.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British-Dutch-Australian_Command#Formation)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수마트라를 점령한 것은 공수부대인 정진제2연대와 제38사단의 주력이었다. 정진제2연대가 중요한 유전지대로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가장 큰 정유소가 있던 팔렘방을 점령했고 이어서 보병제229연대를 기간으로 한 제38사단 주력이 상륙하여 남부 수마트라를 확보했다.

보르네오 북서쪽의 영령 보르네오는 1941년 12월 말에  말레이를 담당한 제25군 소속의 가와구치 지대가 상륙하여 점령했다.
동부 보르네오는 다바오와 홀로 제도를 점령한 사카구치 시즈오 소장의 사카구치 지대(제56혼성여단)가 담당했다. 사카구치 지대는 1942년 1월 12일에 보르네오 북동쪽의 타라칸에 상륙하여 점령한데 이어 보르네오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동부의 발릭파판과 남부의 반저르마신을 점령했다.

보르네오 동쪽에 있는 셀레베스는 해군이 담당하여 제5전대사령관 다카기 다케오 제독이 지휘하는 동방공략부대가 점령했다. 셀레베스 북쪽의 마나도 점령에는 해군의 공수부대인 요코스카제1특별육전대가 참가하여 해안에 상륙한 사세보연합특별육전대와 함께 마나도를 점령했다. 셀레베스 남서부의 켄다리와 남부의 마카사르는 사세보연합특별육전대가 상륙하여 점령했다.

일본군은 또한 자바 동쪽의 발리섬에 대만보병제1연대제3대대장 가네무라 마타베이 소좌가 지휘하는 가네무라 지대를 투입하여 점령했고 더 동쪽에 있는 암본과 티모르섬에는 제38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보병제228연대 기간의 동방지대를 투입하여 점령했다. 티모르섬 남동쪽의 쿠팡 점령에는 해군의 또다른 공수부대인 요코스카제3특별육전대도 참가했다.

일본의 남하에 대응하여 연합군은 ABDA사령부(ABDACOM)를 창설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하자 1941년 12월 22일부터 1942년 1월 14일에 걸쳐 워싱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을 필두로 한 미국과 영국의 군사전문가들이 일련의 회담을 가졌는데 이를 아카디아 회담(Arcadia Conference)이라고 부른다.

아카디아 회담은 미국의 참전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주요 회담인 동시에 서방연합국의 군사행동에 관한 가장 중요한 회담이었다. 여기에서 결정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제연합이 만들어졌다. 1942년 1월 1일에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주요 4대국을 포함한 26개국이 모여 국제연합을 창설함으로써 서방연합국과 소련과의 동맹이 공식화되었다. 또한 국제연합에 소속된 국가는 추축국과 개별적으로 평화회담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로써 인도를 위협함으로써 영국을 굴복시켜 전쟁에서 쫓아내고 홀로 남은 미국의 전쟁지속의지를 상실케하여 종전하려던 일본의 속셈은 원천봉쇄되었다.

2. 연합참모본부가 만들어졌다. 미국과 영국의 참모총장들로 이루어진 연합참모본부의 창설로 미군과 영국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긴밀한 합동작전을 펼 수 있게 되었다.

3. 독일우선원칙을 재확인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싸우고 있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의 병력을 통합지휘하는 ABDA사령부의 창설 또한 아카디아 회담의 결과 중 하나였다.  창설 과정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1941년 12월 25일에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영국측에 창설을 제안했고 27일에 영국 측이 동의했다. 1942년 1월 1일에는 관계 4개국 정부의 동의를 얻어 정식으로 창설 명령이  나갔으며 인도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ABDA최고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이 자바에 상륙하여 렘방에 사령부를 차린 것이 1월 10일,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것은 15일이었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chibald_Wavell,_1st_Earl_Wavell)

ABDA사령부는 휘하에 육해공군의 작전을 담당하는 3개의 작전사령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창설 당시 ABDA사령부 및 작전사령부의 주요 인물(9대 고위직)은 다음과 같다.

ABDA사령부(ABDACOM)
최고 사령관 -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영국육군)
부사령관 - 조지 브렛 중장(미육군항공대)
참모장 - 헨리 파우널 중장(영국공군)

육군작전사령부(ABDARM)
사령관 - 하인 텔 푸어텐 중장(네덜란드령동인도제도육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 이안 플레이페어 소장(영국육군)

해군작전사령부(ABDAFLOAT)
사령관 - 토머스 하트 대장(미해군)
참모장 - 아서 팔리서 소장(영국해군)

공군작전사령부(ABDAIR)
사령관 - 리처드 피어스 중장(영국공군)
부사령관 - 루이스 브레러튼 소장(미육군항공대)

작전사령부는 예하에 지역 및 국가별로 지역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1942년 1월 15일 현재 ABDAFLOAT의 세력은 다음과 같다.

(토머스 하트 제독.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C._Hart)

 

미해군(하트 대장)
중순양함 1척(휴스턴), 경순양함 2척(보이스, 마블헤드), 구축함 12척(휘플, 알덴, 존 D. 에드워즈, 엣솔, 벌머, 바커, 패럿, 스튜어트, 포프, 피어리, 필즈베리, 존 D. 포드), 잠수함 25척

영국해군(제프리 레이턴 대장)
중순양함 1척(엑서터), 경순양함 2척(호바트, 퍼스), 구축함 3척(엘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

네덜란드 해군(콘라드 헬프리히 중장)
경순양함 3척(자바, 드루이터, 트롬프), 구축함 7척(반네스, 에버트센, 코테네어, 윗더위드, 반겐트, 피에타인, 방커트), 잠수함 16척

(콘라드 헬프리히 제독. https://en.wikipedia.org/wiki/Conrad_Helfrich)

 

설립 취지와는 달리 ABDA사령부는 제대로 된 합동작전을 실시할 수 없었다. 참가국들은 일본에 대항한다는 명분에서만 일치할 뿐 세부로 들어가면 국가별로 생각이 달랐다. 영국은 싱가포르 방어를 우선으로 생각했으나 미국 사령관들은 필리핀 지원에 관심이 많았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자국 방어가 우선이었으며 이는 호주도 마찬가지였다.

자국 방어를 우선으로 하는 호주 정부의 입장은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 특히 해군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함대총사령관 킹 제독은 ABDAFLOAT의 모항 역할을 하고 있던 자바의 수라바야 대신 호주의 다윈을 보급항으로 선택했다. 이로써 아시아함대의 지원함 세력이 다윈으로 철수함으로써 수라바야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ABDAFLOAT에 대한 보급이 지장을 받았지만 대신 자바해해전의 참패와 이어진 일본해군의 소탕전으로 ABDAFLOAT가 소멸할 때에도 지원함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아시아함대의 주력이었던 잠수함 세력도 수라바야가 아닌 호주로 철수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말레이반도-자바-소순다열도로 이루어진 말레이 방벽(Malay Barrier)의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꿰뚫어보면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완전히 발을 뺄 수는 없었던 킹 제독은 이런 식으로 미해군의 손해를 아시아함대의 수상전투함에 국한시켰다.

 사정이 이러니 ABDACOM 최고사령관인 웨이벌 대장의 권한도 제한적이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ABDA 사령부 관할 내에 있는 다른 나라의 육군 병력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물론 그런 권한이 있었다고 해도 움직일 병력도 없었다. 일본군과 교전중이던 필리핀의 미군이나 곧 침공을 받을 네덜란드 육군을 말레이로 이동시켜 퍼시발의 영국군을 증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제해권을 뺏긴 상태에서는 그런 대규모 이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공군같은 경우는 육군보다는 이동이 쉬웠으나 모든 구역의 항공기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 구역의 항공기를 빼내어 다른 구역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해군력이 전력의 특성상 통합운용하기 용이했으나 역시 실패했는데 이또한 나라마다 생각이 달라서였다. 영국은 가용한 모든 함정을 총동원하여 싱가포르로 가는 선단 호송에 투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ABDAFLOAT 사령관 하트 대장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말레이 방벽을 지키려면 강력한 수상함대를 동원하여 침공군을 실은 일본선단을 요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호주는 자국해안 방어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는데 네덜란드 해군사령관 헬프리히 중장은 자국 해안을 지키려면 남하하는 침공선단을 요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하트 대장과 생각이 같았다.

하지만 하트 제독은 요격을 위하여 네덜란드 해군을 동원할 수 없었는데 이는 ABDAFLOAT사령관이 되지 못하여 화가 난 네덜란드 해군사령관 헬프리히 제독이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헬프리히 제독은 자바의 스마랑 출신이었으나 경력을 대부분 네덜란드 본토에서 쌓았다. 또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육군은 본토 육군과 별개의 조직이었으나 해군은 본토 해군과 같은 조직이었다. 따라서 헬프리히 중장은 식민지 육군의 장군인 텔 푸어텐 중장보다 왕립 해군의 제독인 자신의 지위가 더 높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는 계급이 같다면 해군장교를 육군장교보다 높게 인정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헬프리히 제독은 단순한 해군사령관이 아니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정부의 해상을 겸하고 있었는데 정부 각료인 해상의 입장에서 보면 ABDARM사령관인 텔 푸어텐 장군은 자신보다 격이 낮았다. 따라서 헬프리히 제독은 자신보다 격이 낮은 텔 푸어텐 장군과 동격인 하트 제독에게 자신이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헬프리히 제독의 설득에 넘어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정부는 빌헬미나 여왕의 네덜란드 망명정부, 영국정부, 그리고 미국정부에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ABDA사령부의 9대 고위직에 네덜란드 군인이 1명 뿐이니 ABDAFLOAT 에 1명을 더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군에서 유일하게 9대 고위직에 속한 텔 푸어텐 중장의 직위는 4대 핵심직위(최고 사령관 및 3명의 작전사령관) 중 하나였으며 핵심 직위는 미국도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한자리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애당초 9대 고위직 중 하나인 ABDAFLOAT 참모장 직위에 헬프리히 제독의 참모장인 요한 반 스타베렌 대령이 내정되었을 때 자신의 참모장으로 꼭 필요하다며 임명을 거부한 것은 헬프리히 제독 자신이었다.

ABDAFLOAT사령관이 되고자 했던 헬프리히 제독의 야심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적어도 1942년 1월의 시점에서는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정당하지도 않았다. 일단 미해군의 아시아함대는 ABDAFLOAT 내에서 네덜란드 해군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시아함대 총사령관 하트 제독은 미해군에 3개 밖에 없는 함대의 총사령관 중 1명으로 태평양 및 대서양함대 총사령관과 동격이었다. 따라서 미해군 입장에서는 니미츠 제독과 같은 급의 최고위 사령관이자 미해군대장인 하트 제독을 네덜란드 해군중장인 헬프리히 제독의 부하로 만들 수는 없었다. 헬프리히 제독이 ABDAFLOAT사령관이 되려면 하트 제독은 계급이 낮은 부하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떠나야만 했는데 그런 조치는 미국이 ABDA사령부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질 것이었다.

하지만 헬프리히 제독의 불만은 현지에서 공감을 얻었으며 하트 제독은 2월 12일에 ABDAFLOAT 사령관직을 헬프리히 중장에게 넘길 때까지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네덜란드 해군의 전과가 아시아함대를 압도했던 것이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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