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방어준비(2) - 배치

 

일본군의 침공을 받을 당시 중국사령관 크리스토퍼 마이클 몰트비 소장이 지휘하던  홍콩수비대는 의무대 및 세인트 존 야전병원 관계자를 포함하여 13,981명이었다.

영국 및 캐나다인이 8,919명, 인도 및 중국인이 4,402명, 나머지는 의료 관계자였다.

정규군 보병은 5,422명이었으며 약 6,000명은 포병, 공병, 해군 및 홍콩의용방위군단(Hong Kong Volunteer Defence Corps = HKVDC)소속이었다.

 

(중국사령관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 http://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Maltby)

 

홍콩의용방위군단(=이후 줄여서 의용대)은 1854년부터 이어져 온 유서깊은 지역의용방어조직으로 침공을 받을 당시 7개 보병중대, 5개 기관총중대, 5개 포대, 브렌건캐리어를 가진 1개 장갑차소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병력은 약 2,200명이었다.

장비에서 보듯 의용대는 단순히 머리 수만 맞추는 수준이 아니었으며 정규군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의용대의 보병중대는 약 1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중대는 인종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3중대는 기관총중대로서 백인과 중국인의 혼혈인 유라시아 중대, 제4중대는 보병중대로서 중국인 중대, 제5중대는 기관총중대로서 포르투갈인 중대라는 식이었다.

 

홍콩의 인구 구성에 비하여 수비대에서 중국계의 비중은 낮았는데 이는 대다수 중국인들이 홍콩의 중국 귀속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국은 자국 국적을 가진 홍콩의 중국계도 수비대에 뽑으려고 하지 않았다.

중일 전쟁 이후 병력 수요가 늘어나면서 중국인을 뽑으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일본이 침투시킨 중국 또는 대만 간첩이 끼어들까봐 과감하게 뽑지 못했다.

실제로 일본은 홍콩에 많은 간첩을 심었으며 수비대의 군복을 만들어주는 재단사나 수비대가 주로 가는 이발사 중에서도 간첩이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침공 때 공습이나 포격을 정확하게 실시할 수 있었다.

 

일본은 광동성을 점령하자 광동의 조직폭력배 200개 파, 12,000명을 모아 자금을 대고 무장시켜 앞잡이로 써먹었는데 홍콩에도 많은 조직폭력배들이 일본군의 침공시 영국군 후방에서 소요를 일으킨다는 조건으로 일본으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고 있었다.

이러한 제5열을 소탕하는 데에는 중화민국 해군 소장인 진책 제독의 공이 컸다.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 총통은 광동성이 함락되어 홍콩과 육로를 통한 연결이 끊어지자 진책 소장을 연락관으로 홍콩에 파견했다.

다리가 하나 뿐인 진책 소장은 증권회사의 중역으로 위장했는데 홍콩과 국민당 정부와의 연락업무라는 본연의 임무 이외에 홍콩의 제5열을 분쇄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홍콩 경찰의 능력으로 제5열을 찾아내어 잡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당국도 진책 소장을 후원했다.

 

진책 소장은 경찰의 묵인 아래 조직폭력배들을 모아 톰슨 기관총으로 무장시킨 다음 제5열로 의심되는 자들을 습격하여 사살했다.

법을 무시한 살인이었으나 당시로서는 불가피했다.

정보를 입수하고 가치를 판단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진책 소장은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여 평가한 다음 적이 숨거나 달아나기 전에 신속하게 제거하는 방식으로 일본의사주를 받은 홍콩의 제5열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따라서 일본이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홍콩이 침공을 받았을 때 제5열에 의한 소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홍콩의 해안선에는 해안포 29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9.2인치(234mm)포 8문, 6인치(152mm)포 15문(3문은 스톤커터 섬에 배치), 4.7인치(120mm)포 2문, 4인치(102mm)포 4문이었으며 포신이 바다를 향하고 있었지만 구룡 쪽으로도 포격이 가능했다.

또한 해안에 상륙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18파운드(83.8mm) 및 2파운드(40mm) 포 10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야포로는 6인치포, 60파운드(127mm)포, 4.5인치(114mm)포, 그리고 3.7인치(94mm)포를 합쳐 28문이 있었다.

포탄은 부족하여 1문당 평균 300발 가량이었으며 9.2인치 해안포는 1문당 25발에 불과했다.

 

정규보병대대로는 영국대대, 인도대대 및 캐나다대대가 2개씩 있었다.

영국대대는 왕립스코트연대 제2대대와 미들섹스연대 제1대대였는데 미들섹스대대는 비커스 기관총 48정을 가진 기관총대대였다.

인도대대는 제14펀잡연대 제2대대(제2/14펀잡대대)와 제7라지푸트연대 제5대대(제5/7라지푸트대대)였다.

캐나다대대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였다.

(비커스 기관총.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en.wikipedia.org/wiki/Vickers_machine_gun)

 

영국대대와 인도대대는 1937년부터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다른 곳으로 뺏기면서 전투력이 저하되었는데 왕립스코트 대대는 많은 병력이 군사재판을 받고 영창에 들어가 기강이 해이하다는 평을 들었다.

야포들을 관장하던 홍콩-싱가포르 왕립포병대(HongKong-Singapore Royal Artillery = HKSRA) 역시 경험이 풍부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뺏겼다.

 

따라서 일본군이 침공했을 때 많은 병사들이 훈련이 부족한 보충병들이었다.

펀잡대대의 경우 전 병력의 40%가 1941년 10월에 도착했는데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이었다.

경험많은 장교가 부족하여 젊은 장교가 높은 직위를 감당해야 했으며 인도의 이슬람 병사로 이루어진 인도대대를 지휘하는 영국장교가 병사들의 언어인 우르두 어를 몰라서 지휘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여 연습을 하지 못했으며 보병과의 합동훈련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보병은 포병이 사용하는 시계문자판식 목표지시(clockface target indication)를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병사들이 말라리아로 고통받고 있었다.

정원이 770명 정도인 왕립스코트연대에서 최소한 180명이 재발하는 말라리아에 걸려 있었다.

 

캐나다군의 도착은 수비대의 병력을 크게 늘렸지만 이들 또한 전투력이 약했다.

이들은 파견되기 전 수년간 주둔군 역할을 하여 전투훈련이 부족했으며 파견되기 전에 결원을 보충받았는데 전체의 12% 에 달하는 보충병들은 훈련소를 갓 나온 풋내기들이었다.

 

장비도 부족했다.

편성표에 따르면 캐나다군 1개 대대는 브렌건캐리어 22대, 1톤 트럭 13대, 3/4톤 트럭 37대 등 총 102대의 차량과 31대의 자전거, 22정의 보이스 대전차총을 보유했다.

그러나 홍콩에 파견된 캐나다군 2개 대대가 보유한 차량은 합쳐 브렌건캐리어 6대, 3/4톤 트럭 12대, 급수차 2대에 불과했고 보이스 대전차총은 1정 뿐이었다.

 

(브렌건캐리어. http://en.wikipedia.org/wiki/Universal_Carrier)

 

캐나다군은 3인치 박격포를 보유했으나 포탄이 없었다.

당시 캐나다 육군 전체에 3인치 박격포탄이 300발 밖에 없었으니 홍콩 파견군에 챙겨줄 포탄이 없을 만도 했다.

영국과 함께 독일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한지 오래된 캐나다의 임전 태세가 엉망이었음을 알 수 있는 사례다. 

뒤늦게 캐나다 군의 차량과 장비를 싣고 오던 돈 호세함은 도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홍콩까지 가지 못하고 마닐라로 대피했다가 그곳에서 일본기의 폭격을 받았다.

 

알프레드 콜린슨 대령이 지휘하는 홍콩의 해군력은 미약했다.

주력은 제1차 대전형 구축함 3척이었는데 1척은 수리 중이었으며 2척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12월 8일 저녁 9시 30분에 싱가포르로 탈출했다.

수리 중이던 구축함 트라시안의 승조원들은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홍콩 남해안의 애버딘에는 제라드 호레이스 간디 소령이 지휘하는 제2어뢰정전대가 8척의 어뢰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자강에서 사용하던 흘수가 낮은 하천포정 4척도 있었는데 1척은 일본이 침공해 왔을 때 수리 중이었다.

수리 중이던 하천포정 모스의 승조원들 또한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외에 무장초계정 12척, 기뢰부설함 2척, 급유함 1척이 있었으며 항공기로는 왈루스 비행정 3대가 있었다.

로버트 클레멘트 자일스 대령이 지휘하는 47명의 해병대가 해군공창과 태고 조선소의 건선거를 지켰는데 이들은 정박한 함정 타마를 숙소로 사용했다.

해군 병력은 중국계 300명을 포함하여 약 1,300명이었다.

 

(슈퍼마린 왈루스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Supermarine_Walrus)

 

공군은 구룡반도의 카이탁 비행장에 전개한 빌데비스트 3대와 의용대의 연습기 5대가 전부로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커스 빌데비스트 뇌격기. http://en.wikipedia.org/wiki/Vickers_Vildebeest)

 

1941년 11월이 되면서 일본군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몰트비 소장은 정보장교에게 평가를 요구했다.

11월 29일에 정보장교는 몰트비 소장에게 광동성에 주둔 중인 일본제23군이 3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이루어져 포병 1개 연대의 지원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한 제23군이 홍콩상륙에 필요한 주정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나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당시 제23군은 4개 사단과 1개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포병의 규모는 1개 연대보다 훨씬 컸다.

 

일본군의 전력에 대한 정보 평가는 엉터리였다.

정보 평가에 따르면 일본군은 야전을 싫어하며 진부한 방식과 계획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군의 기관총은 숫자도 적고 영국군 기관총에 비하여 낙후되어 있었다.

비록 일본군이 중국에서는 잘 싸웠으나 그건 저항이 약해서였다.

일본의 항공력은 유럽보다 열등했고 폭격실력은 형편없었으며 야간비행은 불가능했다.

 

홍콩에 배치된 캐나다군은 영국군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대적하고 있는 일본군은 숫자가 5,000 명에 불과하고 경무장이며 포병 지원도 없다고 적었다.

또한 일본 항공기는 낙후되고 조종사들이 근시라서 급강하폭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홍콩의 군인이나 민간인들이 적어도 홍콩 섬은 난공불락이라고 믿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일부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입을 놀려 사기를 떨어뜨리느니 입을 다물었다.

 

몰트비 소장은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야간에는 항구가 폐쇄되었으며 홍콩으로 오던 배들은 싱가포르로 갔다.

방어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홍콩을 떠나라고 권고하는 공지가 나붙었다.

당국은 주요 지점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고 해안감시대를 조직했다.

 

12월 2일에는 캐나다 군과 의용대를 제외한 병력이 방어지역에 배치되었으며 잉어문 해협은 방책을 쳐서 봉쇄했다.

 

(방책. http://hnsa.org/doc/netsandbooms/index.htm#pg73)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의 의도를 잘못 짚고 있었다.

12월 4일에 그는 중국 남부의 일본군이 홍콩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로부터 48시간 이내에 일본기들이 3번이나 홍콩 영공을 침범했는데 대응태세를 떠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침공 전날인 12월 7일, 심천강 북쪽에 일본군 2만명이 집결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 정보는 정확했으나 몰트비 소장은 여전히 중국 남부의 일본군은 병력이 부족하며 홍콩을 침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낙관적인 전망과는 별도로 몰트비 소장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12월 5일에 의용대는 최종적으로 방어진지로 들어갔으며 홍콩 섬의 대공포대는 6일 밤부터 비상대기태세에 들어갔다.

구룡반도에 배치된 포병대는 7일 오전 7시까지 방열을 마쳤으며 의용대 1개 중대가 카이탁 비행장에 파견되어 일본군의 강행착륙에 대비했다.

7일 오후 5시까지 캐나다군이 방어진지에 포진을 마쳤다.

 

빅토리아 항에 있던 상선들 중 26척이 7일 오후 5시까지 싱가포르로 떠났고 이후 12시간 동안 8척이 뒤따랐다.

홍콩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50km 떨어진 갭 락 등대는 7일 밤부터 소등했으며 해군은 홍콩 부근 해상을 기뢰원과 방책으로 둘러쌌다.

 

(홍콩 주변 기뢰 및 방책 설치 상황. http://indicatorloops.com/hongkong.htm)

 

빅토리아 시티의 상황은 7일에도 평소와 같았다.

구룡과 홍콩 섬 사이를 연락선이 부지런히 다녔으며 신문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 천황에게 평화를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는 사실을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7일 저녁이 되자 극장에서 수비대 병력은 근무지로 귀대하라는 공지가 나왔으나 민간인들은 바로 몇 시간 후 공격이 개시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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