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테나루 전투(2) - 이치기 지대의 접근

 

미해병제1사단은 상륙 초기부터 교두보의 동쪽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교두보 동쪽의 테테레 마을 부근에는 약 13 x 13km 크기의 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었는데 미군은 이곳에 2번째 비행장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8월 12일에 일단의 공병대원들이 존 자침 소위가 지휘하는 A/1/1 중대 소속 1개 소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비밀리에 이 초원지대를 조사했다.

다음날 자침 소위는 테테레 마을에서 두하메 신부를 만났는데 그는 일단의 일본군들이 동쪽의 타이부 곶과 오스텐 산 사이를 돌아다닌다고 제보했다.

이시모토 병조와 그 부하들이었다.

자침 소위는 교두보로 복귀하면서 미국인인 두하메 신부에게 일본군에게 잡히면 생명을 잃기 십상이니 같이 해병대의 방어선 안으로 들어가자고 설득했으나 두하메 신부는 사양했다.

결국 두하메 신부는 나중에 다른 신부 1명 및 수녀 2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살해되었다. 

 

8월 14일에 해병대 교두보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영령 솔로몬 제도 방어군(BSIDF = British Solomon Islands Defence Force)' 이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원주민 의용군 60명이 사령관 마틴 클레멘스 영국육군대위의 지휘 하에 주둔지인 아올라 만 지역을 떠나 고립된 동맹군인 미해병제1사단을 '지원' 하기 위하여 도착한 것이었다.

전쟁 전에 툴라기와 과달카날 지역에서 경찰로 일했던 원주민들로 구성된 BSIDF 의 병사 중 소총으로 무장한 인원은 20명 정도였고 나머지 40명은 비무장이었다.

비무장의 원주민 40명은 양손 가득 신선한 열대과일을 들고 도착하여 해병대원의 환영을 받았다.

원주민들은 미군이나 일본군보다 정글에 익숙하고 청각과 후각도 예민했기 때문에 정찰병과 안내역으로 해병대의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8월 18일에 클레멘스 대위는 원주민 정찰병의 보고를 토대로 일본군이 해병대의 교두보에서 동쪽으로 35km 정도 떨어진 타이부 곶에 통신장비를 설치했다고 보고했다.

 

그날밤 교두보의 해안을 경비하던 해병대원들은 일본구축함이 앞바다를 항행하는 소리를 들었고 잠시 후에는 배가 지나갈 때 생기는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왔다.

새벽이 가까워왔을 때 돌아가던 일본구축함들이 툴라기와 과달카날에 함포 사격을 가하고 사라졌다.

 

8월 19일 오전 7시, 제1해병연대 제1대대 A 중대장인 찰스 브러시 대위가 A 중대원 중 자침 소위를 비롯한 80명을 이끌고 BSIDF 소속의 원주민 4명의 안내를 받으면서 동쪽으로 정찰을 떠났다.

BSIDF 의 지휘관 클레멘스 대위는 브러시 정찰대와는 별도로 25년간 툴라기에서 경찰로 일하여 영어가 유창하고 8월 10일부터 교두보에 들어와서 해병대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자콥 보자 상사를 정찰목적으로 파견했다.

 

19일 정오를 막 지난 시간에 브러시 정찰대를 안내하던 원주민들이 일단의 일본군을 발견했다. 

시부야 대위가 이끄는 34명의 일본군 정찰대가 제대로 경계도 하지 않은 채 해안도로와 북해안 사이의 평지를 걸어오고 있었다.

브러시 대위는 자침 소위에게 병력의 절반을 이끌고 일본군의 남쪽으로 우회하여 포위공격하라고 명령한 다음 진형을 갖추고 일본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19일 오후 1시 15분에 일본군이 전방 100m 지점에 도달하자 브러시 대위는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동시에 자침 소위의 병력도 남쪽으로부터 일본군을 공격했다.

55분간의 치열한 총격전 끝에 34명의 일본군 중 장교 4명을 포함한 31명이 사살되고 3명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브러시 정찰대에서는 3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의 시체를 조사한 브러시 대위는 이들이 새로 상륙한 병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전사한 일본군의 헬멧에는 해군육전대의 표식인 닻과 국화 대신 일본육군의 표식인 별이 그려져 있었고 깨끗한 군복의 상태는 그들이 최근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본육군의 표식)

 

(해군육전대를 포함한 일본해군의 표식)

 

사살된 일본군들은 모두 깨끗하게 면도를 한 상태였고 잘 먹어서 피둥피둥한 것이 며칠째 하루 두끼로 버티고 있는 해병대보다 영양상태가 좋아 보였다.

일본군 장교들의 시체에서는 육지에서 함정을 호출하는 암호를 비롯한 몇몇 문건이 나왔는데 브러시 대위를 놀라게 한 것은 손으로 그린 여러장의 지도였다.

비록 손으로 그렸지만 대단히 정확한 이 지도에는 해병대의 외곽 방어 상태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해병대 방어선의 약점이 낱낱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시모토 병조와 그 부하들이 오스텐 산에서 교두보를 관찰하면서 그린 지도였다.

 

한편 브러시 대위보다 더 전방에서 단신으로 일본군을 정찰하던 보자 상사는 베란드 강 부근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보자 상사가 성조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일본군들이 그를 잡아서 이치기 대좌에게 끌고 갔다.

이시모토 병조가 전쟁 전에 툴라기에서 경찰로 일하던 보자를 알아보았다.

일본군은 해병대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으라면서 총검으로 보자의 손목을 찌르는 등 고문을 가했다.

보자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이치기 대좌는 공격을 위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보자를 살해하라고 명령했으나 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마음이 급해서 결박당한 채 누워있는 보자의 목을 총검으로 한차례 찌른 다음 급히 부대를 따라갔다.

천만다행으로 이 총검은 보자의 후두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가서 보자는 목숨을 건졌다.

 

중상을 입은 보자 상사는 혼자서 결박을 풀고 기어서 해병대 교두보로 돌아와 클레멘스 대위에게 이치기 지대가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보자의 상태를 보고 놀란 클레멘스 대위가 즉시 후송하려 했으나 보자는 거부하고 이치기 지대의 규모와 무기 등 막대한 전술적 가치를 지닌 귀중한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한 이후에야 정신을 잃고 야전병원으로 실려갔다.

애당초 보자는 출혈이 심하여 살아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뿐 아니라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어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정찰병으로서 미군을 위하여 일했다.

 

당시 보자 상사의 행동은 정예 병사들도 하기 힘든 용감하고 훌륭한 행동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12월 31일에 보자의 용기를 기려 은성훈장을 주었으며 5일 후인 1943년 1월 4일에는 영국정부에서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영예인 죠지 메달을 수여했다.

보자는 1979년 11월 12일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자콥 보자는 1984년 3월 15일에 사망했는데 그의 장례식에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조전을 보내왔고 미해병대는 리스톤 웨익필드 대령을 파견하여 진주만의 전함 애리조나 기념관에 게양되었던 성조기를 보자의 미망인에게 기증했다. 

지금도 호니아라의 솔로몬 제도 공화국 경찰청사 앞에는 자콥 보자의 동상이 서 있고 그를 모델로 하는 우표가 발행된다.

 

해병대는 교두보 방어를 위하여 5개 대대 중 4개 대대를 주로 해안방어에 투입하고 제1/1대대를 예비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제1/1대대를 동쪽으로 진격시켜 이치기 지대와 전투를 벌여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치기 지대가 미끼가 아닐까 의심했다.

만일 이치기 지대를 찾아 사단의 유일한 예비대인 제1/1대대를 동쪽으로 진출시킨 사이에 일본군 주력이 해안에 역상륙하면 예비대없이는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게다가 교두보 서쪽을 방어하는 제5연대의 1개 대대는 19일에 교두보 서쪽의 마타니카우 마을과 코컴보나 마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일시 점령했다가 19일 저녁에야 교두보 내로 막 철수한 상태였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유일한 예비대를 교두보 밖으로 파견하는 모험을 하기보다 제2/1대대가 방어선을 펴고 있는 일루 강 하구에서 이치기 지대를 막아내기로 결정했다.

 

일루 강 하구를 방어하고 있던 제2/1대대장 에드윈 폴록 중령은 방어선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폴록 중령이 받은 명령에는 75mm 곡사포에 의한 화력지원 이외에 제2/1대대에 대한 병력지원은 없다고 되어 있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이치기 지대가 해병대 병력을 동쪽으로 끌어내어 일본군 주력의 역상륙을 용이하게 만들려는 미끼일 수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증원불가 방침은 당연한 조치였다. 

 

폴록 중령은 즉시 일루 강 하구에 방어선을 펴고 있던 E 중대 및 F 중대에게 방어선을 강화하라고 명령하고 화기중대인 H 중대를 전방으로 진출시켰다.

그리하여 H 중대의 7.62mm 수랭식 기관총을 보유한 기관총 소대들이 보병중대 사이에 자리잡았고 6문의 37mm 대전차포도 보병에 치명적인 산탄을 준비하고 방어선 바로 뒤쪽에서 대기했다.

81mm 박격포들도 중대의 60mm 박격포들과 함께 화력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었으며 후방에서는 75mm 곡사포가 20일 저녁까지 일루 강 하구를 겨냥하여 시험사격을 실시, 사격제원을 확보했다.

일루 강으로부터 3km 동쪽으로 떨어진 지점에는 일련의 청음초를 설치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감시했고, 보병중대의 방어선 앞쪽에는 철조망을 쳤다.

그러나 철조망이 모자라서 방어선 전체를 완전히 둘러치지는 못했다.

이렇듯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제2/1대대는 숨을 죽이고 이치기 지대의 공격을 기다렸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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