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테나루 전투(1) - 이치기 지대의 상륙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일루 강 하구이지만 당시 해병대의 지도에 일루 강이 테나루 강이라고 잘못 기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테나루 전투라는 명칭이 붙었다.)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보고를 받은 일본대본영은 상륙한 미군의 규모와 그 목적에 대하여 육군부와 해군부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우왕좌왕했다.

 

처음에는 육군부와 해군부 공히 상륙한 미군의 규모는 2,000 명 정도이며 그 목적은 과달카날에 건설 중인 일본해군의 비행장을 파괴하고 철수하는 일종의 견제작전으로 생각했으나 8월 10일에 해군부는 입장을 바꾸었다.

연합함대는 과달카날 상륙에 투입된 미군수송선을 40척으로보고 있었는데 이는 단순한 견제작전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결국 8월 10일에 대본영 해군정보부는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군이 15,000명의 병력을 가진 해병1개 사단이며 목적은 과달카날을 점령하여 확보하는데 있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과달카날을 탈환할 지상군 병력을 제공해야 하는 육군부는 해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향후 서아시아와 중경공략작전에 중점을 두고 싶어하던 육군작전부장 다나카 중장은 과달카날 상륙 직후 트럭으로 진출하겠다고 결정한 연합함대의 저의를 의심했다.

그는 야마모토 제독이 미드웨이에서 격멸하지 못한 미함대와 함대결전을 치르고 싶어서 과달카날 상륙을 이용한다고 보았으므로 해군정보부가 제시한 1개 사단이라는 숫자도 그러한 이유로 과장한 것으로 생각했다.

육군부가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군이 1개 사단 규모라는 해군부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피의 능선 전투 이후였다.

 

육군부는 원래 과달카날에서 작전한다는 어떠한 구체적인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남태평양 지역에서 육군의 당면 목표는 뉴기니 남부의 항구이자 비행장인 포트모레스비였다.

해상으로부터 포트모레스비를 탈취하려는 계획이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으로 무산된 이후 육지로부터의 공격을  통하여 포트모레스비를 점령하기 위하여 뉴기니 북해안에 대군을 상륙시켜 오웬스탠리 산맥을 넘어가는 작전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 과달카날에 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육군부 내에서 그 섬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라바울에 위치한 현지 사령부인 제17군 사령관 햐쿠다케 하루요시 중장조차도 미해병대가 상륙한 이후에야 해군이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였다.

 

대본영 육군부는 이러한 상황판단에 근거하여 1942년 8월 10일에 제17군 사령부에 제7사단 제28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부대를 과달카날에 상륙시켜 미군을 물리치고 과달카날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약 2,300 명의  병력을 보유한 이 공격부대는 제28연대장 이치기 기요나오 대좌의 이름을 따서 이치기 지대로 명명되었다.

이에 해군부는 적의 전력이 약 1개 사단에 해당하므로 최소한 2-3개 사단 이상을 상륙시켜 동시에 대규모 공세를 펼쳐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부의 병력증강요구에 시달리던 육군부는 며칠 후 약 4,000 명의 병력을 가진 가와구치 소장의 제35여단을 추가로 과달카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더 이상의 요구는 단호히 거절했다.

 

사실 육군부 입장에서 더 이상의 차출은 무리였다. 

가와구치 지대라고 이름붙여진 제35여단만 해도 원래 포트모레스비 공격의 조공 격인 밀른 만 전투에 증원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과달카날로 돌려지면서 밀른 만 전투에서 호주군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과달카날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려면 포트모레스비 점령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상당기간 연기해야만 했는데 그러려면 과달카날에 1개 사단의 미군이 있다는 합당한 근거가 필요했다.

그러나 해군부는 과달카날에 미군 1개 사단이 있다는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괌에 주둔하고 있다가 미드웨이 해전 당시 상륙부대로 선정되었던 제28연대는 일본함대의 참패로 미드웨이 상륙이 무산되자 다시 괌에 돌아가 있었다.

제28연대는 8월 12일에 2척의 수송선(보스턴마루, 다이후쿠마루)에 실려 트럭환초에 도착했다.

트럭환초에서 과달카날 섬까지는 안전을 위하여 구축함으로 수송하기로 했다.

 

8월 11일에 갑자기 제8함대로부터 수송명령을 받은 다나카 라이조 해군소장은 불안을 느꼈다. 

예행연습은 물론 작전계획을 세우기에도 빠듯한 일정으로 공중지원도 없이 미군 1개 사단이 지킨다는 낯선 해안에 상륙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해군에서도 손꼽히는 유능한 제독 중 한 사람인 다나카 소장은 주어진 짧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단순하면서도 견조한 상륙계획을 세웠다.

안전을 위하여 상륙시간은 달이 밝은 1942년 8월 18일 야간, 상륙장소는 헨더슨 비행장에서 동쪽으로 35km 떨어진 타이부 곶으로 결정했다. 

과달카날 섬에 숨어있던 이시모토 병조와 그 부하들은 타이부 곶에 미리 나와서 무선과 손전등을 이용하여 구축함의 접안을 유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병조란 일본해군의 부사관이다.

이시모토 병조는 일본해군의 첩보부대 소속 부사관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몇년 전부터 솔로몬 군도에서 코프라를 거래하던 영국계 레버브라더스 사의 목수로 위장하여 툴라기에서 정보를 수집하다가 일본군의 툴라기 상륙 당시에는 안내 역할을 맡았다.

이후 미해병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하자 이시모토 병조는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교두보 남쪽의 오스텐 산에 은거하면서 해병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보고하는 한편 해병대 방어선의 약점을 상세하게 묘사한 지도를 여러 장 그렸다.

 

이치기 지대의 수송에 사용가능한 구축함이 6척(하마카제, 가게로, 하기카제, 다니가제, 우라가제, 아라시) 뿐이었으므로 이치기 지대 전원을 동시에 수송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치기 대좌는 병력이 약 2,300 명인 제28연대를 2개로 나누어서 제1진을 자신이 직접 이끌기로 했다.

제1진은 연대본부 163명, 대대본부 23명, 4개 중대에서 차출된 보병 420명, 기관총 중대 110명, 92식 보병포 2문을 보유한 소대 50명, 공병중대 150명, 합계 916명으로 이루어져 각자 총탄 150발, 식량 7일치를 휴대했다.

이치기 지대의 제2진은 2척의 수송선을 타고 4일 후인 8월 22일 밤에 상륙할 예정이었고 제124보병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의 가와구치 지대는 28일 밤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일본육군의 92식보병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치기 지대의 제1진을 태운 구축함 6척은 8월 16일 오전에 트럭 섬을 출발하여 8월 18일 밤에  이시모토 병조의 협조를 받아 아무런 사고없이 타이부 곶에 상륙했다.

이치기 지대를 내려준 구축함 6척은 돌아가는 길에 과달카날과 툴라기의 해병대 진지에 함포사격을 가했으나 별 피해는 입히지 못했다.

 

이치기 대좌가 13일 오후 3시에 제17군에서 받은 명령은 이러했다.

 

1. 솔로몬 방면에 상륙한 적의 병력은 불명이지만 상륙 후의 활동은 활발하다고 할 수 없다. 오늘 13일이 되도록 과달카날의 비행장을 이용하지 않고 있음은 확실하다.

2. 군은 적 점거가 끝나지 않은 것을 기회로 해군과 협동하여 신속히 솔로몬 방면의 적을 격멸하여 요충지를 탈환할 것.

3. 이치기 지대는 해군과 협동하여 우선 신속히 과달카날 비행장을 탈환할 것. 어쩔 수 없는 상황에는 과달카날 섬의 일부를 점령하여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릴 것. 이를 위해 선견대(약 900명)을 편성하여 우선 구축함 6척에 분할승함 후 곧바로 과달카날을 향해 전진할 것.

 

이 명령을 보면 당시 제17군 사령부가 과달카날을 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즉 뉴기니에 신경쓰기도 바빠 죽겠는데 갑자기 자기에게 떨어진 과달카날이라는 성가신 숙제를 어떻게든 빨리 처리해 버리려는 조급성과 함께 과달카날에 주둔한 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경향을 알 수 있다.

이치기 대좌 또한 자신감에 넘쳐서 트럭 섬에서 승선하기 직전에 제17군 참모 마츠모토 대좌에게

 

"툴라기 섬도 우리가 탈환해도 되나?"

 

라고 물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치기 대좌는 후속부대를 기다리지도 않고 916명의 제1진 병력만으로 해병대를 격멸하고 비행장을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상륙하자마자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8월 19일 새벽에 베란데 강을 건넌 이치기 대좌는 해병대가 방어선을 펴고 있는 일루 강 하구를 정찰하기 위하여 시부야 대위가 이끄는 34명의 정찰대를 서쪽으로 파견했다.

시부야 정찰대도 이치기 대좌와 마찬가지로 자신감에 넘쳐서 제대로 경계도 하지 않은 채 서쪽으로 정찰을 나섰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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