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헨더슨 비행장

 

사보 섬 해전의 결과 외부의 지원이 끊어진 채 과달카날 섬에 고립된 미해병제1사단의 유일한 희망은 헨더슨 비행장으로 이름붙인 탈취한 일본군의 비행장을 완성하는 길 뿐이었다.

보급이 끊어진 상태로는 일본군의 공격에 오래 지탱할 수 없었고 보급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헨더슨 비행장을 완성하여 과달카날 근해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

시간이 관건이었다.

헨더슨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충분한 보급을 받는 일본군의 대부대가 상륙하여 공격하면 보급이 끊어진 상태의 해병제1사단은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사보 섬 해전으로 과달카날 부근 해역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일본군은 매일같이 잠수함이나 구축함, 가끔은 순양함을 파견하여 대낮에 해병대의 야포 사정거리 밖에서 교두보를 포격했다.

해병대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고 적의 함정이 너무 접근했다 싶으면 가끔씩 야포로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포대의 위치가 드러날 가능성 때문에 반격시에는 주로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야포를 사용하고 해병대의 75mm Pack Howitzer 나 105mm 곡사포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교두보에 대한 포격과 더불어 일본군은  매일같이 전투기들의 호위도 없이 폭격기들을 보내어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다.

아침에 라바울을 출격한 폭격기는 항상 정오 경에 과달카날 상공에 도달하여 폭격을 가했기 때문에 해병대원들은 정오 경을 도조 타임이라고 불렀다.

그나마 헨더슨 비행장 주변에 배치된 제3해병방어대대의 90mm 대공포들이 일본폭격기들을 7,500m 이상의 고공으로 몰아낼 수 있었고 따라서 폭격은 부정확했다.

 

이시기 일본군의 항공작전 중 해병대를 가장 괴롭힌 것은 야간에 혼자 날아오는 순양함의 수상정찰기들이었다.

이 정찰기들은 소량의 폭탄을 싣고 와서는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불규칙한 간격으로 투하했는데 해병대를 살상하는 것보다는 잠을 못자게 만들려는 속셈이었고 적을 달성했다.

밤새 저공으로 비행하며 불규칙한 간격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 단 1대의 일본수상기 때문에 교두보 내의 해병대원 대부분이 잠을 제대로 못자고 고통을 받았다.

 

1942년 8월 8일에 해병대가 비행장을 점령하자마자 사단의 공병장교인 프랭크 제라시 중령과 항공장교인 케네스 와이어 소령이 일본군의 비행장을 조사했다.

일본군은 800m 길이의 활주로를 양끝에서 만들기 시작하여 중앙의 60m 정도를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제라시 중령과 와이어 소령은 활주로를 400m 정도 연장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800m 짜리 활주로를 완성하는 데에는 이틀, 400m 를 연장하는 데에는 2주일 가량이 걸릴 것이라고 터너 제독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8월 9일 새벽에 벌어진 사보 섬 해전이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활주로 건설에 필요한 건설중장비 중 R-4 불도저 1대를 제외한 모든 건설용 중장비와 자재들은 수송함에 그대로 실린 채 누메아로 돌아가 버렸다.

제1공병대대장 조지 로완 대령은 유일하게 양륙된 1대의 불도저에 운전병 로이 케이트 상병 이외에는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고는 활주로 건설을 제외한 교두보의 거의 모든 토목공사에 이 불도저를 투입했다.

 

제1공병대대는 헨더슨 비행장과 룽가 강을 잇는 도로를 닦고 룽가 강에 다리를 건설했으며 해안을 따라 나있는 도로도 정비하고 강에는 모두 다리를 놓았다.

또한 쿠쿰 지역의 해안을 보급품을 양륙하기 쉽도록 정리했고 이 지역의 일본군 주둔지를 밀어버린 다음 보급품 집적소를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불도저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 불도저는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기 위하여 제방의 양쪽을 깎아내고 해안을 정리하고 일본군의 주둔지를 밀어버려 평평하게 만들었다.

불도저는 또한 일본군 시체를 매장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장비를 견인했으며 헨더슨 비행장이 폭격을 받으면 보수작업에도  투입되었다. 

이 사랑스럽고도 강인했던 불도저는 과달카날 전투 초기에 힘든 시기를 보내던 해병대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고는 10월 말의 어느날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R-4 불도저)

 

해안에 쌓여있던 보급품들과 일본군이 남기고 간 보급품들을 쿠쿰 지역의 새 보급품 저장소에 옮기는데는 4일이 걸렸다.

일부 보급품들은 일본제 트럭을 포함한 트럭으로 실어 날랐고 대부분은 해상수송했다.

LVT들이 보급품들을 상륙주정에 옮기면 상륙주정이 쿠쿰 해안에 양륙시켰다.

쿠쿰 지역에 옮겨진 보급품들은 폭격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작은 규모로 분산시켰다.

 

과달카날 전투의 초기에 해병제1사단이 사용한 주정들은 대부분 제62임무부대가 철수하면서 남겨놓고 간 것들이었다.

따라서 주정 승무원들 사이에 명확한 지휘체계가 없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임시방편으로 주정들을 지휘할 지휘체계를 만들었으나 그리 효율적으로 운용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주정 승무원에게 정비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구와 예비부품이 전무했고 연료가 부족하여 많은 주정들이 사용불능상태에 빠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문제들은 호전되기는 했으나 해병제1사단이 철수할 때까지 주정문제는 만족스러운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

 

사실 해병제1사단의 수송능력은 주정과 트럭 및 LVT 에 사용할 연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과달카날 섬에는 1942년 8월 15일부터 부분적으로 보급이 재개되었으나 가장 시급한 식량과 탄약, 그리고 항공유를 비롯하여 헨더슨 비행장의 작전을 지원하는 항공관련 보급품 때문에 차량이나 주정용 연료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고민 끝에 해병대는 해군의 수송함들을 상대로 '공식적인 등쳐먹기(Official Scrounging)' 라고 부르는 구걸에 나섰다.

과달카날에 보급함대가 도착하면 빈 드럼통을 가득 싣은 해병대의 차량상륙정이 다가가서는 휘발유나 경유를 한 드럼씩만 나누어 달라고 수송함의 승무원들을 붙잡고 읍소했다.

처음에는 이 방법이 잘 통하지 않았다.

물자를 양륙하느라 수송함과 해안을 바삐 오가던 상륙주정들은 연료를 구걸하러 다니는 이 차량상륙정들을 무시했고 일부 수송함의 함장들은 이 대형 기생충(?)이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마치 공습을 피할 때처럼 급히 이동하고는 했다.

그러나 곧 과달카날의 해병대가 오죽 답답하면 저런 짓까지 하겠냐는 동정론이 누메아의 해군 장병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과달카날로 오는 수송함의 함장들은 수송함에 싣는 상륙주정의 연료탱크와 수송함의 주정용 연료탱크를 일부러 가득 채워왔다. 

그리하여 주정이 양륙작업을 하는 동안 수송함의 주정용 연료를 해병대에게 나누어 주었고 양륙작업을 끝낸 주정들은 수송함에 싣기 전에 남은 연료를 해병대에게 완전히 넘겨준 다음에 수용했다.

이러한 해군 수송함장들의 따뜻한 배려와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해병대의 '공식적인 등쳐먹기'는 성공했고 이 편법 덕분에 본격적인 연료보급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해병대의 연료부족사태를 완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제1해병공병대대는 헨더슨 비행장 건설에 있어서 일본군이 남기고 간 장비와 자재를 적극 활용했다.

일본제 삽으로 땅을 파서 일본제 휘발유로 움직이는 일본제 트럭에 실어 활주로로 운반한 다음 일본제 손수레로 낮은 곳을 메꾸고 일본제 롤러로 다졌다. 

해병대는 일본군이 남긴 쌀로 만든 음식을 먹고 일본군이 만든 변소를 사용했으며 일본제 사이렌이 공습경보를 울리면 일본군이 파놓은 참호에 뛰어들었다.

 

과달카날에서 해병제1사단이 헨더슨 비행장 공사에 매달려 있는 동안 누메아의 곰리 제독은 제63임무부대를 지휘하는 맥케인 제독에게 헨더슨 비행장의 항공작전을 지원할 인원과 장비 및 보급품을 수송하라고 명령했다.

맥케인 제독은 1척당 약 40톤을 운반할 수 있는 고속수송함 4척(콜호운, 리틀, 그레고리, 맥킨)에 항공유 400 드럼, 윤활유 32드럼, 45kg 에서 225kg 에 이르는 각종 폭탄 282발, 기관총탄, 공구 및 예비부품들을 실어서 조지 포크 해군소위가 인솔하는 123명의 항공담당 해군건설대원들과 함께 과달카날에 파견했다.

이 고속수송함들에는 또한 헨더슨 비행장 최초의 항공작전 장교인 찰스 헤이즈 해병소령도 타고 있었다.

에스피리투산토를 출항한 4척의 고속수송함들은 일본기의 공습을 피하여 8월 15일 저녁에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밤새 양륙작업을 마치고 날이 밝기 전에 재빨리  철수했다.

곧 일본해군이 주로 애용하게 되는 도쿄특급의 미국판이었다.

8월 20일에는 고속수송함 3척(콜호운, 리틀, 그레고리)이 해병대의 4일치 식량에 해당하는 120톤의 전투식량을 양륙했다.

 

2번의 수송성공에 고무된 미해군은 좀 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누메아에는 미해군이 중국정부로부터 구입한 라카토이라는 소형 수송선이 있었다.

누메아의 해군공창에서 원래 양쯔강에서 쓰던 소형 화물선인 라카토이에 대공기관총을 설치하고 조타실 주위를 콘크리트로 보강했다.

개장을 마친 라카토이는 400톤의 전투식량과 탄약을 적재하고 과달카날로 출발했다.

그러나 기관총과 콘크리트는 배의 무게중심을 높였고 과달카날에 접근하면서 무게중심을 낮추어주던 연료탱크의 중유가 줄어들자 라카토이는 1942년 8월 24일에 과달카날 근해에서 전복되고 말았다. 

전원 자원자로 이루어진 라카토이의 승무원들 중 1명이 실종되었고 나머지 승무원들은 구명정 및 구명보트를 타고 솔로몬 해역을 2주일간이나 떠돌다가 구출되었다.

 

1942년 8월 12일, 헨더슨 비행장에 최초의 미군기가 착륙했다.

미해군의 샘슨 중위가 조종하는 1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맥케인 제독의 부관을 태우고 활주로에 시험적으로 착륙했다가 부상당한 해병대원 2명을 태우고 다시 이륙하여 에스피리투산토로 돌아갔다.

맥케인 제독의 부관은 활주로의 상태가 단발의 전투기, 급강하폭격기 및 뇌격기들은 이착륙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으나 활주로 바로 앞의 나무들 때문에 카탈리나 비행정은 급격한 각도로 착륙해야 했고 활주로 중앙이 완전히 다져지지 않아서 심하게 덜컹거렸다.

 

(1942년 8월 12일에 헨더슨 비행장에 최초로 착륙한 미군기인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의 착륙 장면)

 

공병대원들은 즉시 활주로 전방의 나무들을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폭약으로 날려버리고 활주로의 중간 부분을 다시 다져서 8월 18일에 드디어 활주로를 완성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날 정오 경에 헨더슨 비행장 공사가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의 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으로 공병대원 1명이 사망하고 9명이 다쳤으며 활주로에 17개의 폭탄이 명중했다.

일본기가 물러가자 해병대원들이 복구를 시작하여 19일 아침에는 다시 사용가능상태로 만들었다.

8월 20일 오후에 드디어 해병대의 전투기와 급강하폭격기들이 도착했다.

 

미군 최초의 호위항모인 롱아일랜드가 에파테를 출항하여 과달카날 동남방 320km 지점까지 접근하여 리처드 맹그럼 중령의 제232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VMSB-232)와 존 스미스 소령의 제223해병전투비행대대(VMF-223)를 이함시켰다.

롱아일랜드를 이함한 돈틀레스 19대와 와일드캣 전투기 12대는 곧 헨더슨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이로써 도조 타임도 끝났고 일본군 함정이 대낮에 교두보를 포격하는 짓도 끝났다.

 

(미해군 최초의 호위항공모함인 CVE-1 롱 아일랜드.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틀 후인 8월 22일에는 육군항공대 제67전투비행대대 소속인 P-400 전투기 5대가 도착했고 24일에는 동부솔로몬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인 해군 소속의 돈트레스 11대가 헨더슨 비행장에 합류하여 이후 3달간 함께 작전했다.

27일에는 제67전투비행대대의 나머지인 9대의 P-400 전투기가 마저 도착했다.

이제 헨더슨 비행장을 기지로 하는 칵터스 항공대가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P-400 전투기는 P-39 에어라코브라 전투기의 수출형이다.

P-39 전투기는 강력한 37mm 기관포를 가진 전투기였으나 고도 3,600m 이상에서는 사실상 공중전이 불가능하여 실전에서는 공중전보다 지상군 지원이나 일본함선 공격에 더 많이 활약했다.

 

(헨더슨 비행장에 주기 중인 미육군항공대 제67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400 전투기들)

 

헨더슨 비행장의 활주로가 연장됨에 따라 9월 초부터는 제25해병항공전대 소속의 C-47 쌍발수송기들이 매일 에스피리투산토 및 에파테와 헨더슨 비행장을 왕복했다.

C-47 한 대가 매일 1.4톤의 보급품을 싣고 왔다가 들것에 눕혀진 부상자 16명을 싣고 떠났다.

 

해병제1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비행장 공사를 진행하는 한편으로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방어태세를 정비했다.

 

(해병제1사단의 교두보 방어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일본군의 역상륙이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일루 강 서안에서 쿠쿰지역에 이르기까지 8,800m 길이의 해안선을 강력하게 방어했다.

교두보 내에는 룽가 강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쿠쿰 지역에서 룽가 강 서안에 이르는 서쪽지역은 제5연대가, 룽가 강에서 일루 강의 서안에 이르는 동쪽 지역은 제1연대가 담당했다.

길이가 8,200m 정도인 비행장 남쪽의 전선은 기복이 심한 정글지역이었는데 이곳은 포병, 공병, 그리고 수륙양용트랙터대대의 병력들이 지키는 초소가 군데군데 세워졌고 그 사이를 정찰대가 돌아다니면서 경계했다.

따라서 포병, 공병, 수륙양용트랙터대대의 병력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자신들에게 할당된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야만 했다.

 

일선병력은 강력하게 유지되지는 않았고 대부분의 병력은 교두보 중앙에서 기동 예비대의 형태로 대기했으며 포병연대인 제11연대도 교두보 부근의 어느 곳이든지 바로 포격할 수 있는 위치에 방열해놓고 있었다.

해안선 바로 뒷쪽에는 하프트랙에 75mm 대전차포를 탑재한 대전차 자주포가 대기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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