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보 섬 해전(4) - 북부해역의 전투

 

남부부대를 순식간에 제압한 일본제8함대는 북부부대를 공격하러 북진했다.

1942년 8월 9일 새벽 1시 46분에 경순양함 덴류가 12,000m 거리에서 북부부대의 기함 빈센스를 발견했다.

덴류가 빈센스를 확인한 2분 후인 오전 1시 48분에 일본함대의 기함 죠카이는 북부부대를 향하여 4발의 어뢰를 발사했고 50분부터는 탐조등으로 포착한 아스토리아에 8인치 주포로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보 섬 해전 상황도)

 

북부부대는 일직선을 왕복하던 남부부대와 달리 직사각형을 그리면서 초계를 하고 있었는데 오전 1시 40분에 90도로 꺾어서 10노트의 속력으로 북동쪽으로 항진 중이었다. 

중순양함들은 빈센스, 퀸시, 아스토리아의 순서로 550m 간격을 두고 항진하고 있었으며, 빈센스의 전방 좌측에는 구축함 헬름, 우측에는 구축함 윌슨이 빈센스로부터 1,200m 거리를 두고 초계하고 있었다.

 

북부부대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것은 후미의 아스토리아였다.

어쩐 일인지 오전 1시 43분에 패터슨이 발한 경고가 아스토리아의 함교에는 전달되지 않았고 동시에 일본정찰기가 투하한 조명탄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함장 윌리엄 그린먼 대령은 이틀 동안의 격무에 지쳐 함교 부속실에서 복장을 차려입은 채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오전 1시 50분, 갑자기 탐조등 불빛이 비치더니 곧 일본군의 8인치 포탄이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죠카이가 탐조등에 떠오른 아스토리아를 향하여 포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죠카이의 첫 일제사격은 너무 짧았고 두번째 일제사격은 너무 길어서 아스토리아를 넘어갔다.

이때 아스토리아의 포술장 트루스델 소령은 낮에 말썽을 일으킨 전방 사격통제용 레이더의 수리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는 부품을 교체하여 레이더 수리를 막 마쳤을 때 탐조등을 비추면서 죠카이가 일제사격을 가해왔다.

트루스델 소령은 즉시 반격명령을 내렸다.

 

1시 52분 30초에 아스토리아의 8인치 주포 8문이 죠카이를 향하여 포문을 열었고 함교에는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비상벨 소리에 놀라 함교로 뛰쳐나온 함장 그린먼 대령은 잠이 덜 깨어 정신이 없는 가운데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을 우려하여 발사중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트루스델 소령은 함장과 전화로 논쟁하면서 사격을 지속시켰다.

그리하여 아스토리아는 54분에 두번째 일제사격을 가할 수 있었으나 그린먼 대령이 재차 사격중지 명령를 내리자 결국 사격을 중지하고 말았다.

 

4번의 일제사격을 가했으나 좀처럼 명중탄을 내지 못하던 죠카이는 아스토리아가 갑자기 사격을 멈추자 거리를 계산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5번째 일제사격에서 아스토리아의 상부구조물을 명중시켰다.

그제서야 그린먼 대령은 함을 증속시키면서 사격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늦었다.

죠카이는 5,500m 에서 4,800 m 까지 접근하면서 착실하게 명중탄을 기록했다.

아스토리아는 상부구조물이 온통 화염에 뒤덮이고 동력이 끊어져 사격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죠카이에게 총 12회의 일제사격을 가했다. 

이들 중 2시 16분에 유일하게 살아있던 2번 포탑에서 발사한 마지막 12번째 일제사격이 죠카이의 전방 포탑에 명중했다.

 

아스토리아의 전방에 있던 퀸시는 사보 섬 해전에서 가장 심한 포격을 받았다.

1시 43분에 패터슨의 경고를 받는 순간 퀸시의 함교에서는 비상벨을 울림과 동시에 함교 옆의 부속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있던 함장 무어 대령을 즉시 깨웠다.

무어 대령은 당장 함교로 뛰쳐나왔으나 정확한 상황판단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일본중순양함 아오바의 탐조등이 퀸시를 비추고 이어서 아오바가 발사한 8인치 포탄이 해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어 대령도 즉각 탐조등을 향하여 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완전 무방비 상태로 앞뒤를 향해있던 포탑을 좌현으로 돌려서 포격을 시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퀸시가 2번의 일제사격을 마쳤을 때 앞장서던 빈센스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왼쪽으로 회전했는데 그 순간 아오바의 포탄 1발이 사출기에 얹혀있던 수상기에 명중하면서 화재가 발생하여 절호의 표적이 되었다.

 

이제 아오바를 따르던 기누가사도 포격에 가세했고 경순양함들의 뒤를 따르던 후루다카까지 퀸시를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3척의 중순양함이 쏘아대는 십자포화에 휘말린 퀸시는 잠시후 2번 포탑이 명중당하여 폭발이 일어났고 설상가상으로 죠카이가 발사한 어뢰 중 1발이 좌현의 4번 기관실에 명중했다.

잠시 후 아스토리아를 제압한 죠카이까지 가세함으로써 이제 퀸시는 4척의 일본중순양함에게 십자포화를 얻어맞았다.

 

(사보 섬 해전에서 아오바의 탐조등에 떠오른 퀸시의 모습)

 

퀸시는 마지막까지 함포로 반격을 가했다.

퀸시가 발사한 8인치 포탄 중 2발이 2시 5분에 죠카이의 해도실에 명중하여 34명의 전사자와 48명의 부상자를 기록했고 또 1발은 수상기용 크레인에 명중했다.

그러나 퀸시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다.

함장 무어 대령이 전사했으므로 포술장 헤네버거 소령이 퇴함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퀸시는 좌현으로 전복된 다음 함수부터 침몰했다.

이때가 1942년 8월 9일 오전 2시 35분..

이로써 퀸시는 앞으로 수많은 함정과 승무원들의 묘지가 될 아이언바텀사운드의 첫번째 멤버가 되었다.

퀸시에서는 함장 무어 대령을 포함하여 370명이 전사하고 167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보 섬 해전에서 사보 섬 동쪽의 좁은 해역에 중순양함 4척이 침몰하면서 미군은 이곳에 아이언바텀사운드(Ironbottom Sound)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후로도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이 해역에서는 수많은 미국과 일본함정들이 격침되어 말 그대로 해저를 쇳덩어리로 도배했다.

실제로 아이언바텀사운드에서는 해저에 가라앉은 어마어마한 양의 잔해 때문에 나침반이 오작동을 일으킨다고 한다.

 

(아이언바텀사운드에 가라앉은 미국과 일본함정들의 위치)

 

북부부대의 중순양함 중 선두에 섰던 빈센스는 가장 먼저 탐지되었으나 공격은 가장 늦게 받았다.

패터슨의 경보는 듣지 못했으나 일본군 정찰기가 떨어뜨린 조명탄을 본 빈센스의 함교에서는 즉시 부속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함장 립콜 대령을 깨웠다.

립콜 대령이 남부부대 쪽을 바라보자 함포의 불빛이 번쩍이며 포성이 은은하게 들려왔으나 립콜 대령은 남부부대가 대공사격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함의 속력을 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립콜 대령은 속력을 15노트로 올리라고 명령했다.

 

오전 1시 50분, 일본경순양함 유바리, 덴류, 그리고 중순양함 카고의 탐조등이 동시에 빈센스를 비추었다.

남부부대가 탐조등을 비춘다고 생각한 립콜 대령은 즉시 탐조등을 끄라고 방송했다.

그러나 포술장 애덤스 소령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8인치 주포들로 카고의 탐조등을 겨냥했다.

잠시 후 카고가 발사한 8인치 주포의 일제사격이 빈센스 전방 450m 지점에 떨어졌고 립콜 대령은 즉시 반격명령을 내렸다.

 

1시 53분부터 빈센스의 8인치 주포들이  6,400m 거리의 카고를 향하여 일제사격을 시작했다.

빈센스는 2번째 일제사격에서 카고를 넘어서 뒤에 있던 기누가사의 기관실과 창고를 명중시켜 약간의 인명피해를 입혔다.

 

(일본해군의 중순양함 기누가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러나 빈센스의 분전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1시 55분에 죠카이가 발사한 어뢰 중 2발이 좌현의 4번 기관실에 명중했다.

동시에 경순양함 유바리도 빈센스를 향하여 어뢰를 발사했는데 이 어뢰 중 1발이 2시 3분 30초 경에 1번 기관실에 명중하여 그곳의 승무원을 몰살시켰다.

일본군의  포탄과 어뢰에 의하여 함내의 전원과 통신망이 파괴되어 각 포탑은 자체적으로 포격을 계속했으나 곧 차례차례 침묵했고 배는 좌현으로 위험하리만큼 기울었다.

 

일본군이 사라진 후 함장 립콜 대령은 오전 2시 15분에 퇴함명령을 내렸다.

립콜 대령과 당직병인 해병대의 패트릭 상병, 그리고 부관은 함내 곳곳에서 퇴함 순서를 기다리는 부하들을 찾아다니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는데 중간에 침수된 구역을 헤엄쳐 건너가기도 했다.

립콜 대령이 마지막으로 함을 떠난 직후 빈센스는 좌현으로 전복했고 곧 침몰했다.

그때 시간이 오전 2시 50분..

빈센스는 퀸시의 뒤를 이어 아이언바텀사운드의 두번째 멤버가 되었다.

빈센스에서는 332명이 전사하고, 258명이 부상을 당했다.

 

(CA-44 빈센스. 배수량 : 9,400톤, 길이 : 179m, 폭 : 18.9m, 속력 : 32.7노트, 승무원 : 952명, 무장 : 8인치 주포 9문, 5인치 포 8문, 37mm 포 2문, 12.7mm 기관총 8정, 항공기 : 4대)

 

빈센스의 우현에서 앞서가던 구축함 윌슨의 함장 프라이스 소령은 패터슨의 경보와 일본정찰기의 조명탄 투하를 보고서도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1시 50분에 일본함대가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아군 중순양함들을 포격하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한 윌슨은 속력을 30노트로 올리면서 좌회전, 우회전, 이어서 좌회전으로 급기동하면서 5인치 주포 4문으로 주로 죠카이를 포격했다.

그러나 미군 중순양함 사냥에 정신이 팔려있던 죠카이는 윌슨을 무시했고 윌슨의 5인치 포는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빈센스의 좌현에서 앞서나가던 구축함 헬름도 마찬가지였다.

함장 캐럴 소령은 패터슨의 경보와 일본정찰기의 조명탄 투하를 보았고 이어서 남부부대가 교전하는 포성을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1시 50분에 일본함대가 북부부대의 중순양함들을 탐조등으로 비추자 그때서야 속력을 30노트로 올리면서 5인치 주포로 일본함정들을 공격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오전 2시에 우현쪽으로 멀어져가는 일본함대의 경순양함들과 후루다카를 발견한 헬름은 뒤늦게 쫓아가면서  5인치 포로 사격을 가했으나 정작 일본순양함들은 헬름이 쫓아오는지도 몰랐다.

 

북부해역의 전방에서 경계 임무를 맡았던 구축함 랠프탤벗의 함장 캘러헌 소령은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굉장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승부는 알 수 없었다.

오전 2시 15분에 철수하던 일본경순양함 유바리가  탐조등으로 랠프탤벗을 발견하자 유바리, 덴류, 후루다카가 7회의 일제사격을 가하여 1발을 명중시켰다.

캘러헌 소령은 미군함대가 오발했다고 생각하고 대응사격을 하지 않은 채 사격을 멈추라고 방송했다.

뜻밖의 반응에 놀란 일본함정들은 랠프탤벗이 아군인 유나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사격을 멈추었다.

그러나 3km 전방까지 다가와서 탐조등으로 랠프탤벗의 모습을 확인한 유바리가 다시 사격을 시작하자 곧 덴류와 후루다카도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랠프탤벗도 4발의 어뢰를 발사하고 5인치 함포로 반격하면서 전속력으로 도망갔으나 유바리의 2번째 일제사격에서 140mm 포탄 4발이 해도실, 사관실, 어뢰발사관, 후방 포탑에 명중하면서 11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랠프탤벗이 발사한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랠프탤벗은 함체가 20도나 우현으로 기울면서 위기에 처했으나 그때 마침 세찬 스콜에 진입하자 일본순양함들은 랠프탤벗을 포기하고 떠나 버렸다.

 

사보 섬 남쪽에서 후방경계 임무를 맡았던 일본구축함 유나기는 오전 1시 52분에 갑자기 나타난 미국중순양함 시카고에게서 함포사격을 받았다.

유나기는 즉시 도망치면서 120mm 주포로 반격했으나 서로 명중탄은 내지 못했다.

잠시 후 오전 2시에 천천히 서쪽을 향하는 구축함 자비스를 발견한 유나기는 다시 함포사격을 가했으나 역시 명중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북상하여 유바리, 덴류, 후루다카를 뒤따라갔다.

 

사보 섬 해전이 벌어지는 동안 미군 수송함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야간 양륙작업 중이던 수송함들은 일본정찰기의 조명탄이 바로 자기들 상공에서 터지자 즉시 하역작업을 중지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등화관제를 실시한 다음 불안한 마음으로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과달카날 북해안에 정박한 수송함 맥콜리에 타고 있던 터너 제독의 시야에는 세찬 스콜 속에서 사보섬 방면에서 번쩍이는 불빛만 보이고 요란한 포성만 들려올 뿐 정확한 상황을 알 수가 없었고 따라서 수송함들에게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이런 사정은 터너 제독보다 교전현장에서 더 멀리 떨어진 크러칠리 제독이나 동부부대의 스코트 제독도 마찬가지였다.

 

북부부대를 제압한 순간 일본제8함대의 진형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기함 죠카이는 이제 기누가사의 뒤에 처져서 후미에 있었고 경순양함 2척과 후루다카는 따로 행동하고 있었다.

미카와 제독은 제8함대가 다시 진형을 갖추러면 3시간 정도가 걸릴 것으로 보았다.

그 말은 다시 진형을 갖추어 미군의 수송선단을 공격하려면 아침이 된다는 의미였다.

미카와 제독은 미국항공모함들이 아직 과달카날 근해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침까지 과달카날 근해에서 얼쩡거리다가는 십중팔구 미함재기의 공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카와 제독과 제8함대의 참모들은 더 이상의 행운을 시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죠카이의 함장 하야가와 미치오 대좌가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에 따라 수송선단을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이 정도면 할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미카와 제독과 참모들의 의견을 바꾸지는 못했다.

 

1942년 8월 9일 오전 2시 20분, 미카와 제독은 휘하 함정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일본제8함대는 30노트의 고속으로 과달카날 해역을 떠나 슬롯을 따라 북상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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