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테나루 전투(3) - 이치기 지대의 전멸

 

베린다 강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이치기 대좌는 브러시 대위의 공격을 받고 겨우 살아돌아온 정찰대원들로부터 시부야 정찰대가 전멸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이치기 대좌는 이제 해병대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았으니 방어선을 굳히기 전에 공격을 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일루 강을 향하여 출발했다.

 

8월 20일 오후 10시 30분경 일루 강 동쪽 3km 지점에 설치된 청음초의 해병대원들은 동쪽으로부터 접근해 오는 이치기 지대를 발견하고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하여 일루 강 방어선의 해병대원들에게 일본군의 출현을 알린 다음 재빠르게 후퇴하여 일루 강 하구의 모래사장을 통하여 교두보 내로 철수했다.

21일 새벽이 되자 이치기 지대의 선두가 일루 강 동쪽 제방에 도달하여 일루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 제방에 방어선을 펴고 있던 제2/1대대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이치기 대좌는 일루 강 하구에 모래사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모래사장을 통하여 주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주공으로 선정된 약 200 명은 전원 착검하고 최대한 빨리 모래사장을 건너는 것을 목표로 하여 도중에 사격하느라고 멈추지 말고 바로 해병대의 방어선까지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2년 8월 21일 오전 3시 10분, 일본군이 쏘아올린 붉은 빛 조명탄을 신호로 일본군의 제1차 돌격이 실시되었다.

이에 질세라 미군 측에서도 즉시 조명탄을 쏘아올려 모래사장을 비추었다.

조명탄 불빛 아래 일본군 장교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돌격명령을 내리자 착검한 200 명의 일본군들은 총알 1발도 쏘지 않은 채 무서운 속력으로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곧 제2/1대대의 모든 화기가 이들을 맞았다.

소총과 BAR 는 정면에서 총알을 쏟아내었고, 화기중대인 H 중대에서 파견된 7.62mm 기관총들은 주로 일본군의 좌측에서 치명적인 측사를 가했다.

제1해병연대의 화기대대인 제1화기대대의 37mm 대전차포들이 산탄을 발사하여 한꺼번에 일본군들을 쓸어버렸다.

중간에 철조망에 걸려서 조금이라도 멈칫거리면 바로 기관총탄이 날아들어 벌집을 만들었다.

 

해병대의 방어선에는 미처 철조망이 처져 있지 않은 곳이 있어서 일본군의 일부가 이틈을 통해 제2/1대대의 방어선에 도달하여 개인호 몇 곳을 차지했다.

그러나, 주변의 해병대원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일루 강 방어선 일부가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2/1대대장 폴록 중령은 망설이지 않고 즉각 대대의 예비대인 G 중대를 투입했다.

그동안 방어선에서는 해병대원들이 일본군이 차지한 개인호 부근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곧이어 G 중대가 도착하여 개인호를 차지한 일본군들을 몰아내었다.

일본군들은 대부분 개인호 안에서 죽음을 당했고, 일부는 부상을 당한 채 다시 강 건너로 달아났다.

 

첫 돌격이 이렇듯 비참한 실패로 끝났으나 이치기 대좌는 포기하지 않고 제2차 돌격을 준비했다.

제2차 돌격은 모래사장을 바로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해안쪽으로 우회하여 제2/1대대의 해안 쪽 방어선을 공격하기로 했다.

제1차 돌격 때 제2/1대대의 방어선 전체를 포격했던 일본군의 보병포 2문과 척탄통들, 그리고 모든 기관총들은 모래사장에 바로 인접한 방어선만 집중 공격했다.

 

21일 오전 5시에 2번째 돌격이 실시되었다.

참가인원은 300 명으로 더 많았으나, 전과는 제1차 돌격 때보다 훨씬 떨어졌다.

모래사장을 우회하여 바닷물을 헤치고 돌격하려니 속력이 떨어졌고 환한 조명탄 아래에서 해병대원들은 침착하게 사격연습을 하듯 느릿느릿 접근하는 일본군들을 하나하나 저격했고, 37mm 대전차포들은 산탄을 발사하여 한꺼번에 쓸어 버렸다.

그 동안 75mm 곡사포 12문을 보유한 제3/11포병대대와 81mm 및 60mm 박격포들은 화력지원을 위하여 일루 강 동쪽에 집결한 일본군들을 사정없이 두드렸기 때문에 돌격하는 일본군 병력들은 약속된 화력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결국 제2차 돌격은 방어선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21일 동이 트자 제2/1대대장 폴록 중령은 상황을 평가했다.

비록 접전 지역에서 병력은 열세였지만 제2/1대대는 절대적인 지형적 잇점을 누리고 있었으며 충분한 화력지원을 받고 있었다.

폴록 중령은 사단본부에 추가병력 지원없이도 방어선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사단작전참모 제럴드 토마스 중령은 반데그리프트 사단장에게 사단예비대인 크리스웰 중령의 제1/1대대를 즉각 투입하여 일본군을 포위섬멸하자고 주장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이 이 주장을 받아들임에 따라 제1/1대대는 21일 오전 7부터 일루 강 상류에 만들어 둔 다리를 건너 이치기 지대의 배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선두의 C 중대는 가장 멀리 전진하여 테나루 마을을 점령함으로써 해안을 통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동안 A 중대와 B 중대가 일본군을 배후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며, 화기중대인 D 중대는 일루 강 동쪽 제방을 따라 전진하면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테나루 전투 상황도)

 

21일 오전 9시가 되자 제1/1대대의 각 중대는 전투개시선을 통과했다.

테나루 마을에 접근한 C 중대는 마을을 방어하고 있는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을 발견했다.

C 중대는 곧 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제1/1대대의 나머지 중대들은 이치기 지대의 뒷쪽으로부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갔다.

포위될 위험성에 처한 일본군들은 필사적으로 탈출로를 찾았다.

일부 병력은 무모하게도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치다가 해병대의 조준사격에 좋은 표적이 되어 모두 사망했다.

이치기 지대의 살아남은 병력들은 아직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은 해안지역을 통하여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했다.

 

테나루 마을을 공격하던 C 중대는 즉시 서진하여 일본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긴급명령을 받고 테나루 공격을 포기하고 서진하여 오후 2시에 이치기 지대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미 100 명 가까운 일본군이 포위망의 틈을 통해서 탈출에 성공한 후였다.

 

이제 포위망 속에 갇힌 일본군에게는 절망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과 동쪽에서는 제1/1대대가 시시각각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고, 서쪽으로 밀려나갔다가는 여지없이 일루 강 대안에 포진한 제2/1대대가 쏘아대는 총알과 박격포탄 세례를 받았다.

하늘에서는 전날 도착한 와일드캣들이 저공비행하면서 일본군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하고, 해병대가 기다리는 죽음의 덫 속으로 일본군들을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치기 지대는 일본육군에서도 상당한 정예부대였으므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휘체계를 유지하면서 처절하게 저항을 계속했다.

 

포위된 일본군들이 예상 밖으로 격렬하게 저항하자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해가 지기 전에 전투를 끝내기 위하여 오후 3시에 경전차 5대로 이루어진 1개 소대를 모래사장을 통하여 투입했다.

일본군들은 대전차 지뢰를 사용하여 5대 중 2대를 파괴했다.

승무원은 다행히 모두 구출되었으나, 일본군의 저항에 놀란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전차를 보호하기 위하여 제2/1대대를 급히 투입했다.

나머지 3대의 스튜어트 경전차들은 제2/1대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제1/1대대와 맞서고 있는 일본군의 배후를 강타했다.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 드디어 일본군의 전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차는 달아나는 일본군의 등 뒤에 기관총을 난사하고, 37mm 주포로 산탄을 발사하면서 가차없이 추격했고, 전차의 캐터필러는 쓰러진 자들을 산 자건 죽은 자건 죽어가는 자건 가리지 않고 모두 깔아뭉개면서 전진했다.

전투의 마지막 부분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던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경전차의 캐터필러가 꼭 고기 으깨는 기계처럼 되었다고 회고했다.

오후 7시가 되자 마침내 포위망 속의 일본군이 전멸하면서 처절한 전투가 끝났다.

 

테나루 전투에 참가했던 이치기 지대의 병력들 중 부상자 30 여명을 포함하여 탈출에 성공한 126명은 그날 밤에 타이부 곶에 집결했다.

테나루 전투에서 이치기 지대의 피해는 엄청났다.

포위망에 남겨진 일본군 중 부상자 12명을 포함한 15명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는데 이치기 대좌도 이때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타이부 곶에 상륙한 병력 916명에서 탈출한 병력 126명과 포로 15명, 그리고 브러시 정찰대에게 사살당한 하야시 정찰대의 31명을 빼면 테나루 전투의 전사자는 744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미해병대의 기록은 약 800명이며 일본측의 기록은 약 770 명인데 일본측 기록에는 하야시 정찰대의 전사자도 포함되어 있다.

 

미해병대의 전사자는 34명, 부상자는 75명이었다.

제2/1대대가 25명의 전사자와 44명의 부상자를 기록했고, 제1/1대대가 7명의 전사자와 13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사단 직속의 화기대대에서 2명의 전사자와 14명의 부상자, 제1해병연대의 화기중대에서 1명의 부상자, 그리고, 본부요원및 지원요원 중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테나루 전투 이후 일루 강 하구의 모래사장에 널브러진 일본군 시체들)

 

테나루 전투가 끝난 후에 해병대는 소총 700 정, 중기관총 10정, 경기관총 20정, 척탄통 20문, 권총 20정, 군도와 수류탄들, 70mm 보병포 2문, 대량의 폭약, 그리고 12정의 화염방사기를 노획했다.

일본군은 이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노획한 일본군의 화염방사기를 시험해보고 있는 해병대원)

 

미군이 집계한 일본군 전사자 수가 대략적인 이유는 악어들이 많은 일본군 시체를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시체 썩는 냄새를 맡은 악어들은 테나루 전투 다음날부터 일루강 하구에 몰려들어 매일같이 강가에 쓰러진 일본군 시체를 포식했다.

아무 생각없이 일루강을 헤엄쳐 건너기도 했던 해병대원들은 몰려든 악어들을 보고 기겁했고 곧 일루강에 악어샛강(Alligator Creek) 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밤마다 악어들이 일루강 동쪽 제방의 개인호에 뛰어들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해병대가 서둘러 일본군 시체를 매장해버린 뒤에야 악어들은 원래 서식지로 돌아갔다.

 

해병제1사단 장병들은 처절한 전투의 전장이었던 일루강 하구의 모래사장에 '지옥의 곶' 이란 뜻을 가진 헬즈포인트(Hell's Point) 라는 별명을 붙였다.

따라서 이치기 지대와의 전투도 과달카날 전투기간 동안에 제1해병사단의 장병들은 '헬즈포인트 전투' 로 불렀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후 미해병대는 이 전투의 이름을 당시 잘못 표시된 지도의 명칭을 따서 '테나루 전투(Battle of Tenaru)' 로 명명했다.

 

지도가 잘못된 걸 해병대가 언제 알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종전 이후에는 테나루 전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당시 지도가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해병대의 공식전사에서는 이 전투의 이름이 '일루 전투(Battle of Ilu)' 로 바뀔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병대는 1949년에 편찬한 종전 이후 최초의 미해병대 공간전사인 존 짐머만 소령의 'The Guadalcanal Campaign' 에서 테나루 전투라는 기존의 잘못된 용어를 공식화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미해군 전사를 편찬한 모리슨 제독도 뜻밖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미해병대는 1965년부터 1972년 사이에 편찬한 'History of Marine Corps Operations in World War II' 시리즈에서도 테나루 전투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1995년에 종전 50주년을 기념하여 편찬한 'Marines in World War 2 Commemorative Series' 에서는 테나루 전투 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고 별도의 공식적인 용어없이 제1해병연대와 이치기 지대와의 전투를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는 1942년 8월 21일에 과달카날 섬의 일루 강 하구에서 제1해병연대와 일본육군 이치기 지대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무력충돌을 일컫는 미해병대의 공식 명칭은 여전히 '테나루 전투(Battle of Tenaru)'이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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