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군의 반격계획

 

과달카날 전투를 촉발한 미군의 솔로몬 진공작전 구상은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2년 2월 18일에 미함대총사령관 킹 제독이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에게 보낸 각서에서 최초로 드러난다.

이 각서에서 킹 제독은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에파테 섬에 미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3월 2일에는 에파테 기지를 발판으로 솔로몬 제도로 진출하고 나아가 라바울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킹 제독은 3일 후인 3월 5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이러한 구상을 밝혔다.

 

(미해군총사령관 어네스트 킹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3월 5일 당시 태평양의 정세는 암담했다.

2월 15일에 싱가포르가 함락된 데 이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함락도 시간 문제였으며 필리핀의 미군은 바탄반도에 포위된 채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고 맥아더 장군은 이미 탈출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누구도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어 보였고 워싱턴에서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기하자는 소리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킹 제독은 대통령에게 호주와 뉴질랜드는 미국의 형제국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에 넘겨주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고 대통령도 공감했다. 

킹 제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선 호주와 미국과의 해상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그 과정에서 건설한 미군기지를 발판삼아 솔로몬 제도에 진공한 다음 라바울까지 북상한다는 구상을 밝히고 대통령의 기본적인 동의를 얻어내었다. 

즉 킹 제독은 미군이 향후 1944년 중반까지 남태평양에서 실시할 작전의 청사진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미군의 남태평양 작전은 큰 틀에서 킹 제독의 청사진을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당면 문제는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 사이의  해상수송로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솔로몬 제도 진공 문제는 해상수송로가 안전해진 다음에야 논의할 수 있는 문제였다.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와의 해상수송로. 원본은 여기로)

 

이러한 해상수송로 보호를 위하여 미군은 사모아, 통가타부, 피지, 에파테, 뉴칼레도니아 등에 비행장을 갖춘 기지를 건설하고 방어병력을 배치했다.

특히 뉴칼레도니아와 피지에는 1개 사단이 넘는 병력을 배치하는 등 1942년 4월말까지에는 해상수송로를 보호하기에 충분한 수준의 병력들이 배치되었다.

 

1942년 5월 3일에 일본이 툴라기를 점령하면서 솔로몬 진공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킹은 툴라기가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를 연결하는 해상수송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늦어도 1942년 8월 1일까지는 솔로몬 제도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은 솔로몬 진공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에파테 북쪽의 에스피리투산토에 최대한 빨리 비행장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해군건설대대는 모자라고 공사해야 할 곳은 많았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후방의 보급기지로서 일본군의 라바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뉴칼레도니아의 누메아도 항만시설이 불충분하여 하역작업에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었고 에파테도 3월 25일부터 기지 건설이 시작되어 공사 중인 상태였다.

 

결국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은 5월 28일이 되어서야 기지건설 공사가 진행 중인 에파테에서 해군건설대대원 일부를 빼내어 육군, 해병대 등에서 차출한 수비병력과 함께 에스피리투산토에 상륙시킬 수 있었다.

병력과 장비 및 건설자재를 한꺼번에 수송할 수송선이 모자라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수송선으로는 장비와 건설자재를 수송하고 해군건설대대원 및 육군, 해병대를 합쳐 500 명 쯤 되는 병력들은 어선을 타고 에스피리투산토에 상륙했다.

 

에스피리투산토의 지반은 예상했던 것보다 활주로 건설에 부적당하여 활주로 건설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하여 촌각을 다투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활주로가 완성된 것은 과달카날 상륙작전이 감행된 8월 7일이 되어서였다.

이후 에스피리투산토는 과달카날에서 가장 가까운 전진기지이자 헨더슨 비행장으로 투입되는 연합군 항공기의 중계기지로서 과달카날 전투 기간 내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2년 5월 28일,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일본함대가  중부 태평양에 집결하자 니미츠 제독은 맥아더 장군에게 이틈을 타서 제1해병기습대대를 투입하여 툴라기를 탈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만일 탈취에 성공한다해도 후속하는 일본군의 공격을 막을 전력이 부족하다며 이 작전에 반대했고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도 맥아더 장군의 견해에 동조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6월 4일부터 6일에 걸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이 미해군의 압승으로 끝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맥아더 장군은 6월 8일에 마셜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만약 자신에게 해병대 1개 사단과 수송선단 및 항공모함 2척을 빌려준다면 라바울을 직접 공격하여 탈취하겠다고 제안했다. 

맥아더 장군의 설명은 이러했다.

 

버마 방면의 작전이 종료되어 그쪽 방면에 투입되었던 일본군 사단들이 라바울 방어에 투입되기 전에 라바울을 탈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라바울은 일본육군 1개 사단으로 방어되고 있으므로 호주에 있는  제32 및 제41보병사단과 호주제7사단을 투입하면 충분히 탈취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단들은 상륙작전 훈련을 받지 못했고 수송선도 모자라므로 해군 측에서 해병제1사단을 상륙시켜 해안에 교두보를 만들고 호주에 주둔 중인 3개 사단을 수송할 수 있도록 수송함 12척 및 고속수송함 4척을 제공하여야 한다.

또한 제5항공대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들이 라바울을 폭격할 수 있으나 항속거리가 짧은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을 수 없으므로 해군 측이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기동부대를 파견하여 함재기로 폭격기를 엄호해야 한다.

그리고 작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작전에 참가하는 모든 부대는 단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라바울 상륙은 늦어도 7월 1일까지는 실시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라바울을 탈취하고 일본군을 트럭 섬으로 쫓아내 버릴 수 있다.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

 

마셜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견해를 지지하여 6월 12일에 킹 제독을 만나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킹 제독은 경악했다.

 

태평양에 3척 밖에 없는 항공모함은 해군 최대의 자산으로 매우 귀중한 것이고 해병제1사단은 현재 가용한 유일한 수륙양용부대였다.

킹 제독의 상식으로는 이런 항공모함들과 해병제1사단을 해도도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고 바다 밑에 산호초가 널려 있으며 사방에 일본군의 항공기지가 깔린 좁은 해역에 밀어넣겠다는 소리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동성을 최대의 장점으로 하는 강력한 공세적 무기인 항공모함을 그 위험한 해역에 밀어넣고는 고작 폭격기 호위를 맡기겠다는 맥아더의 구상은 항공모함이란 물건에 대한 맥아더의 인식이 얼마나 조잡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따라서 킹 제독은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라바울 공격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남태평양에서 미군의 반격은 자신이 주장했던 대로 툴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한 이 작전에 투입되는 함정, 항공기, 그리고 병력들이 대부분 해군 소속이니만큼 작전은 반드시 해군인 니미츠 제독과 곰리 제독이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군의 임무는 항공기를 동원하여 정찰을 해주고 해병대가 점령한 지역을 수비할 병력들을 제공하는데 있다고 못박았다. 

 

킹 제독의 발언을 알게 된 맥아더 장군은 해군이 육군부대를 휘하에 넣고 마음대로 지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고 마셜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3주일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킹 제독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마셜 장군이 6월 29일에 킹 제독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하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7월 2일에 정식으로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이  작성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에 따르면 남태평양에서 미군의 반격은 3단계로 나뉘어져 제1호 임무(Task1), 제2호 임무(Task2), 제3호 임무(Task3)의 3단계로 실시하게 되었다.

 

제1호 임무는 산타크루즈 제도, 툴라기 및 주변 섬들을 탈취하는 것으로 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니미츠 제독)이 지휘하게 되었다.

작전 개시일은 1942년 8월 1일이었다.

제2호 임무는 뉴기니 동부 및 북부 솔로몬 지역을 탈취하는 것으로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맥아더 장군)이 지휘하게 되었다.

제3호 임무는 라바울 및 그 주변 지역을 점령하는 것으로 역시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이 지휘하게 되었다.

제2호 임무 및 제3호 임무의 작전개시일은 제1호 임무의 작전 종료일에 맞추어서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툴라기 섬이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작전구역 내에 들어 있었으므로 남서태평양 해역군의 관할 지역을 기존의 동경 160도선에서 159도선으로 서쪽으로 옮겨서 툴라기 지역을 남태평양 해역군 관할로 편입시켰다.

킹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부하인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을 지원해야 하는 맥아더 장군의 어색함을  덜어주기 위하여 제1호 임무가 시작되는 1942년 8월 1일을 기하여 남태평양 해역군을 합동참모본부에서 직접 명령을 받는 위치로 격상시켰다.

따라서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은 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의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남서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이나 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과 동등하게 합동참모본부의 직접 통제를 받는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서류상 관계야 어찌되었든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은 니미츠 제독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인 곰리 제독의 소극적인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니미츠 제독이 과달카날 전투가 한참 진행중이던 1942년 10월 18일에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을 곰리 제독에서 헐지 제독으로 전격적으로 교체해 버린 사건이다.

물론 이 과정에는 킹 제독의 재가가 필요했지만 곰리 제독의 해임과 후임자인 헐지 제독의 인선은 전적으로 니미츠 제독의 의지였고 킹 제독은 추인했을 뿐이었다.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 실질적으로 니미츠 제독의 지휘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2호 임무가 시작된 이후였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자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사관학교 선배이자 뛰어난 지휘관인 헐지 제독에게 남태평양 해역군의 작전을 전적으로 맡기고 자신은 중부 태평양 공세준비에 전념했다.

이후 1943년 11월부터 타라와 전투를 시작으로 중부 태평양 진격이 본격화되자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 해역군의 작전을 지도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상태로 중부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남태평양 해역군은 1944년 6월 15일에 잠정적으로 관할하고 있던 동경 159도선의 서쪽에 있는 북부 솔로몬 지역이 남서태평양 해역군 관할로 다시 넘어가면서 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의 직속 지휘 아래로 돌아오게 된다.

 

니미츠 제독과 킹 제독은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에 따라 제1호 임무의 실행방안을 협의하기 위하여 1942년 7월 3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회담을 열었다.

회담 기간 중인 7월 5일(과달카날 현지시간으로 7월 6일) 남태평양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영국인 해안감시대원인 마틴 클레멘스가 과달카날 북해안에 일본군이 상륙했다고 보고해 온 것이었다.

 

툴라기에서 근무하던 영국 공무원이었던 클레멘스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현지에서 영국 육군 대위로 임관했는데 일본군의 툴라기 침공을 앞두고 코프라 운반선 발루스를 타고 과달카날의 아올라에 상륙하여 해안감시대원이 되었다.

그는 철수하는 호주군에게서 소총 18정과 탄약 2,500 발을 넘겨받아 원주민 60명으로 이루어진 정찰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무전기로 일본군의 움직임을 보고하는 동시에 과달카날의 원주민에게 연합군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일본군에 협조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원주민 정찰대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마틴 클레멘스 대위)

 

클레멘스의 보고를 받은 호주군은 즉시 워싱턴에 알리는 동시에 정찰기를 발진시켰다.

호주군의 정보가 도착했을 때 진주만의 통신감청반도 일본군의 통신을 해석하여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태평양함대의 정보장교들은 통신감청을 통해 과달카날에 상륙한 일본군의 대다수가 건설 노무자로 추정되는 비무장 병력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일본군의 목적이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의도라고 판단했다.

나중에 미군은 해안감시대원의 안전을 보장하고 일본군 암호를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공식발표에서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정찰기가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는 일본군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둘러 대었다.

 

그런데 일본군의 과달카날 상륙을 알게 된 맥아더 장군과 곰리 제독의 반응은 킹 제독 및 니미츠 제독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킹 제독은 일본군의 진출을 당장 저지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으며 한시바삐 상륙작전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상륙순서를 바꾸어서 가장 먼저 상륙하려던 산타크루즈 제도 상륙을 뒤로 미루고 우선 툴라기 지역에 상륙해야 하며 주요 목표도 툴라기 섬이 아니라 일본군이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는 과달카날 섬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니미츠 제독도 이 견해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과달카날 상륙 직후 호주로 날아가서 맥아더 장군과 회담했던 곰리 제독은 7월 9일에 일본군의 과달카날 상륙으로 제1호 임무의 위험성이 너무 커졌으니 앞으로 충분한 병력이 갖추어질 때까지 제1호 임무를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을 맥아더 장군과 공동으로 발표했다.

 

킹 제독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마셜 장군에게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에 상륙한 이상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과달카날 섬에 상륙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여 동의를 얻었다.

작전 실시에 따르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과달카날 섬을 조기에 점령함으로써 얻게 되는 전략적 잇점을 꿰뚫어 본 이 결정은 킹 제독이 태평양전쟁 기간을 통하여 내린 숱한 결정 중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의 하나였다.

 

다음날인 7월 10일, 맥아더 장군은 8월 1일로 예정된 제1호 임무의 연기는 불가하니 작전을 지원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을 받았다.

같은 날,  곰리 제독도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그가 사용가능한 병력, 함선 및 항공기의 내역과 함께 1942년 8월 1일을 기하여 툴라기, 과달카날, 그리고 산타크루즈 제도에 상륙하라는 정식 명령을 받았다.

작전명은 망루작전(Operation Watchtower)였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