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11일 새벽 2시경, 웨이크 섬의 감시병이 남동쪽에서 접근하는 일본함대를 발견하고 즉시 데브루 소령에게 보고했다.
데브루 소령은 당직병에게 사령관 커닝엄 중령에게 보고하라고 명령한 후, 부대대장인 George H. Potter 소령과 함께 일본함대를 보려고 해안으로 나갔다.
적함대 출현의 보고를 받은 커닝엄 중령은 모든 해안포대에게 적함이 사격을 개시하더라도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응사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다.
일본함대의 화력이 해병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장거리 포격전은 해안포대의 위치만 노출시켜 패배를 불러올 뿐이었다.
해병대로서는 일본함대를 최대한 가까이 끌어들인 후 기습적인 근거리 사격으로 피해를 입히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오전 4시, 비행대장 푸트넘 소령은 제211해병전투비행대에 출격준비를 명령했다.
오전 5시 15분에 날개 밑에 45kg 짜리 폭탄 2개씩을 장착한 와일드캣 4대가 이륙했다.
그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일본기의 출현에 대비하는 일을 제일 중요한 임무로 설정하여, 일본함대와 웨이크 섬의 해안포대가 포격전을 벌이는 동안 줄곧 6,000m 상공에서 전투공중초계 임무에 전념했다.

새벽 5시, 피칵 포인트 남쪽 7,000m 지점까지 접근한 유바리는 좌측으로 선회하여 웨이크 섬의 남쪽해안선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서쪽으로 항진하며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11일의 해상교전도)

 

5시 22분, 선두에 선 유바리를 시작으로 일본함대가 포격을 시작했다.
함대 후미에서 뒤따르던 경비함들은 해안선에서 남쪽으로 9,000m 쯤 떨어진 해상에서 상륙용 보트를 해상에 내리기 시작했다.
해상이 거칠어서 보트 중 많은 수가 뒤집히거나 침수되어 침몰했다.

유바리가 발사한 5.5인치(140mm)포의 첫번째 일제사격이 웨이크 섬 남서쪽의 유류저장소에 명중하여 불타는 화염이 어둠을 밝혔다.
하지만 웨이크 섬의 해안포대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유바리가 해안에서 5,000m 떨어진 거리까지 바짝 다가와서 포탄을 퍼부어도 여전히 커닝엄 중령은 반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오전 6시경, 이미 40분 가까이 해안선에 근접하여 포격을 가했는데도 웨이크 섬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가지오까 소장은 지난 3일간의 폭격이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이어서 미해병대의 방어태세가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마비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일본함대는 해안선에 더욱 가깝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병대의 방어태세는 마비된 것이 아니었다.
해안포대의 5인치 포들은 유바리가 포격을 시작하기 전부터 일본함대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다만 지난 3일간의 폭격으로 A 포대와 L 포대의 거리측정기가 망가져서 거리계산에 애를 먹고 있었다.
일본함대의 선두에 선 유바리가 피칵 포인트에 있는 A 해안포대에서 4,000m 거리까지 접근하자 드디어 커닝엄 중령은 사격명령을 내렸다.

오전 6시 15분, A 해안포대의 5인치 포 2문이 포문을 열어 유바리를 향해 23kg짜리 포탄을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유바리는 급히 반전하여 전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거리측정기는 없었으나, 탄착점을 보고 거리를 보정한 A 포대는 지그재그 항법으로 도주하던 유바리에게 점차 탄착점을 옮겨가서 5,000m 거리에서 첫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후 A 포대는 유바리와 교전하면서 총 100 여발을 발사하여 11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였으나, 모두 상부구조물에 명중하여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유바리는 후퇴하면서 A 포대에 반격을 가했는데 방위는 정확했지만 거리측정이 부정확하여 가장 가까이 떨어진 포탄이 포대에서 50m 정도 떨어진 위치에 떨어졌을 뿐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일본 경순양함 유바리. 표준배수량 : 2,890 ton , 길이 : 138.9 m, 폭 : 12 m, 속력 : 35.5 노트, 항속거리 : 14노트로 9,300 km, 승무원 : 328명, 무장 : 140 mm 포 6문, 76.2mm 대공포 1문, 기관총 : 2정, 610mm 어뢰발사관 4개, 기뢰 34개)

윌크스 섬의 서쪽 끝 Kuku Point 에 위치한 L 해안포대는 A 포대가 한참 교전 중일 때에도 발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웨이크 섬의 남쪽 해안과 거의 평행하게 달리며 유바리의 뒤를 따르던 일본함대는 유바리가 다시 동쪽으로 반전할 때 유바리와 헤어져 웨이크 섬의 서남쪽 해상에서 북상 중이었는데 당시 L 포대의 시야에는 이들 중 경순양함 2척(덴류, 다쓰다)와 구축함 3척(하야테, 오이테, 모치즈키), 두 척의 중형 수송선이 보였다.
이들중 구축함 3척이 경순양함들을 앞질러 비스듬히 우회전하면서 북동 방향으로 웨이크 섬에 바짝 접근하여 포격을 가했는데도 L 포대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부대대장 포터 소령이 L 포대에 전화를 걸어 어서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해안선에서 불과 3,500m 거리까지 접근했던 일본구축함들이 다시 좌회전하여 북서 방향으로 달리자 해안선에 더욱 접근하게 되었다.
이들이 해안선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던지 일본함대를 지켜보러 나와있던 데브루 소령과 포터 소령이 황급히 피신했고, 해안선의 12.7mm 중기관총은 물론 7.62mm 기관총들까지 해안선에 바짝 접근한 일본구축함들을 향하여 사격을 가했다.  
함렬의 선두에 섰던 하야테는 이제 L 포대의 바로 코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순간 L 포대의 5인치 포들이 불을 뿜었다.
비록 이틀 전의 공습으로 거리측정기가 망가졌지만 워낙 근거리여서 L 포대의 포수들은 3번째 일제사격에 명중탄을 기록했다.
함체 중앙부에 명중한 이 포탄은 정확하게 무기고를 직격했다.
하야테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두 동강이 나서, 불과 2분 만에 침몰해 버렸다.
이때 시간이 1941년 12월 11일 오전 6시 52분, 이로써 하야테는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가장 먼저 격침된 일본해군의 수상함’

이란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함장인 다카쓰카 미노루 소령을 위시한 승무원 168명 전원이 사망했다.

 

(가미카제 급 구축함 하야테. 표준배수량 : 1,400 ton, 길이 : 102.6 m, 폭 : 9.1 m, 속력 : 36.9 노트, 항속거리 : 14노트로 6,700 km, 무장 : 120mm 함포 3 문, 25mm 대공기관포 10문, 610mm 어뢰발사관 4개, 기뢰 16개)

 

자신들이 발사한 포탄에 맞은 적의 구축함이 순식간에 굉침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L 포대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고는 여세를 몰아 하야테의 뒤를 따르던 오이테와 모치즈키에게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반면에 하야테의 참상을 보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오이테와 모치즈키는 급히 좌회전하여 연막을 뿌리면서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L 포대에서 날아온 포탄들이 정신없이 도망가는 일본구축함들의 뒷통수를 계속 때렸다.
오이테는 몇 발의 명중탄을 맞아 14명이 부상했으며, 모치즈키도 명중탄을 맞았다.
L 포대는 7시 10분까지 지속된 20분간의 포격전에서 총 60회(120발)의 일제사격을 실시하여 적의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2척에게 피해를 입히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A 포대와 L 포대가 선전하고 있는 동안 필 섬의 B 포대는 경순양함 2척, 구축함 3척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상대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접근하는 일본함대를 향하여 B 포대가 사격을 시작하자 일본함대는 즉각 맹렬하게 반격해 왔다.
맹렬한 포격전의 와중에 2번포의 주퇴복좌기가 일본 함포의 파편에 맞아 망가졌으며, 포대 지휘소와의 통신도 끊겨 버렸다.
하지만 B 포대에서는 2번포의 인원들이 모두 1번포에 달라붙어 포탄을 나르고, 해안포대 중 유일하게 사용가능한 거리측정기에 의지하여 외부에서의 사격통제 없이 자체적으로 사격을 계속했다.
1번포 혼자서 사격을 시작한 지 10번째 되는 포탄이 함렬의 선두에 있던 구축함 야요이의 후갑판에 명중했다.
이 포탄은 후갑판에 화재를 일으켰으며 1명의 사망자와 1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그때 가지오까 소장의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뒤따르던 함정들이 연막을 쳐서 야요이의 모습을 감추면서 남쪽으로 후퇴했다.

기함 유바리 함상에서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가지오까 소장은 이 상태에서의 상륙작전은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3일간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웨이크 섬의 방어태세는 막강했다.
게다가 해상이 거칠어서 상륙용 보트를 해상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뒤집히거나 침수되어 침몰하는 상황이었다.
오전 7시 10분, 가지오까 소장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일본함대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포격전이 전개되는 동안 웨이크 섬 6,000m 상공에서 전투공중초계 중이던 4대의 와일드캣이 일본함대가 후퇴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해상으로 내려와서 폭격을 가했다.
그들 중 엘로드 대위가 투하한 1발의 폭탄이 일본구축함 기사라기의 후갑판에 명중하여 화재를 일으켰다.
기사라기의 승무원들이 화재를 잡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실패하여 불길이 후갑판에 산같이 쌓아두었던 폭뢰에 닿았다.
당시 기사라기는 미국잠수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표준장비량인 18개 이외에도 여분의 폭뢰를 잔뜩 싣고 있었다.  
폭격당한지 15분 후인 오전 7시 31분, 기사라기는 후갑판에서 일어난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침몰하고 말았다.  
함장 오가와 요이치로 소령을 포함하여 승무원 154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로써 기사라기는 하야테의 뒤를 이어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격침된 일본해군의 두번째 수상함이 되었으며,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의 항공공격으로 격침된 일본함정’

의 기나긴 목록에 수상함으로서는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이 목록에는 일본연합함대 타격력의 실체였던 아카기, 카가, 소류 , 히류 등의 항공모함과 연합함대의 상징인 대형전함 야마토와 무사시 등 기라성같은 후배(?)들이 줄줄이 이름을 올리게 된다.

 

(무츠기 급 구축함 기사라기, 표준배수량 : 1,315 ton, 길이 : 102.7 m, 폭 : 9.2 m, 속력 : 37.3 노트, 항속거리 : 14노트로 6,700 km, 승무원 : 154명, 무장 : 120 mm 함포 4문, 13 mm 대공기관총 2정, 7.7 mm 기관총 2정, 610 mm 어뢰발사관 12개, 기뢰 18개)

그런데 기사라기 침몰의 간접적 원인이 된 미해군의 잠수함은 실제로 존재하긴 했다.
USS Triton 호와 USS Tambor 호가 전쟁이 터지기 직전부터 웨이크 섬 근해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가지오까 함대에 접근하여 어뢰로 공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1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엘로드 대위는 기사라기에 폭탄을 명중시킨 후 이탈하다가 일본함정이 쏜 대공포화에 맞아서 와일드캣의 연료파이프가 끊어졌다.
그는 침착하게 비행기를 달래면서 웨이크 섬까지 돌아오기는 했으나 활주로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해안의 얕은 산호초에 불시착했다.
엘로드 대위는 다행히 무사했으나, 불시착한 와일드캣은 다시는 날 수 없게 되었다.
정비병들은 이 와일드캣을 가져다가  일본기의 폭격을 유인하는 미끼로서 활주로 부근에 놓아두고는 부품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떼어내서 사용했다.
이제 비행가능한 와일드캣은 3대로 줄었다.

엘로드 대위를 제외한 나머지 와일드캣들은 폭탄을 명중시키지는 못하고, 경순양함 덴류의 전방갑판에 기총소사를 가하여 5명을 부상시키고, 어뢰 3발을 못쓰게 망가뜨렸다.
3대의 와일드캣은 이후에도 2번 더 출격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폭탄을 명중시키는 데에는  실패하고 중형 수송선 공고 마루에 실려있던 휘발유 드럼통에 기총소사를 가하여 폭발시켰다.
이 폭발로 공고 마루에서 5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했다.
와일드캣 4대는 이 폭격에서 총 10소티를 출격, 20발의 폭탄을 투하하여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경순양함 1척과 중형 수송선 1척에 피해를 입혔다.

이날의 전투에서 미해병대는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를 자랑하는 일본함대를 맞아 효과적인 해안포의 포격과 와일드캣들의 폭격으로 2척의 구축함을 격침하고, 경순양함 2척, 구축함 3척, 중형 수송선 1척에 피해를 입힘으로서 일본군의 상륙기도를 좌절시켰다.
일본군의 전사자만도 350여명에 달했다.
반면 해병대는 전사자는 없고 4명이 부상당했을 뿐이었다.
웨이크 섬의 제1차 전투는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일본해군이 당한 최초의 패배였다.
또한 이 전투는 태평양전쟁에서 방어군이 오로지 해안포의 포격만으로 공격군의 상륙기도를 저지하는데 성공한 최초이자 최후의 유일한 전투이다.

 

(5"/51 해안포. 무게 : 5톤, 포탄중량 : 23kg, 사정거리 : 15km)

해병대에게 완전히 참패하고 트럭 섬으로 돌아간 가지오까 소장은 항공모함의 지원이 없이는 웨이크 섬 함락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엄청난 인명피해에 놀란 일본해군 수뇌부도 웨이크 섬의 방어력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도주하는 일본함대를 폭격한 와일드캣은 일단 착륙했다가 오전 9시 15분에 2대가 이륙하여 다시 전투공중초계 임무로 돌아갔다.
오전 10시, 그들은 북동쪽으로부터 4,800m 의 고도로 접근하고 있던 17대의 96식육상공격기들을 발견하고, 공격하여 1대를 격추하고 2대에 피해를 입혔다.
일본기들은 필 섬의 D 포대를 목표로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다행히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일본군이 D 포대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D 포대도 굴하지 않고 125발을 발사하는 맹반격을 가했고, E 포대도 100 발을 발사하며 반격에 가담했다.
일본기 1대가 불길을 내뿜으며 초호 내로 추락했고, 나머지 9대의 폭격기들도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일본기들은 이날의 폭격에서 와일드캣과 대공포에 의하여 2대가 격추되고, 11대가 피해를 입어 15명의 전사자를 기록한 반면 전과는 거의 올리지 못했다.

일본기들이 물러간 후 데브루 소령은 위치가 발각된 D 포대의 위치를 옮기도록 명령했다.
오후 5시 45분부터 해병대는 250 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을 받아 D 포대를 필 섬의 중앙부인 원래 위치에서 필 섬의 서쪽 끝으로 옮겼다.
포대를 보호할 모래주머니가 모자라서 시멘트 포대와 빈 탄약상자를 대신 쌓아올렸다.
12일 오전 4시 45분까지 D 포대는 새로운 위치에서의 전투준비를 완료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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