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일본군의 후퇴


대본영 계획에 따르면 루손 점령은 1942년 1월 말까지 마무리되어야 했다. 그러나 1월 26일부터 실시한 바탄공세가 실패하면서 2월 초에 일본제14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직면한 현실은 암담했다. 제65혼성여단과 보병제9연대가 동쪽에서 실시한 공세는 값비싼 희생만 치르고 막혔다. 보병제20연대의 1개 대대는 엉뚱한 곳에 상륙하여 전멸했고 다른 대대는 아냐산-실라임 지역에서 전멸 위기에 빠져 있었으며 연대의 나머지 병력은 적 방어선 후방에 고립되어 있었다. 고립된 병력을 구하려는 보병제9, 보병제33, 보병제122연대의 공격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파국이 찾아올 것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사실 대본영은 2월 8일까지 제4사단과 제21사단 일부를 제14군에 증원하기로 내정한 상태였다. 일의 발단은 1월 22일에 천황이 참모총장에게 바탄반도의 전황을 묻자 참모총장이 제14군을 증원할 필요성이 있다고 답변한 것이었다. 이후 대본영은  바탄반도 공략이 늦어질 경우 미국이 선전에 활용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바상륙에 투입될 예정이던 제21사단의 일부와 중국에 주둔 중이던 대본영 직속 예비대인 제4사단을 필리핀에 증원하여 바탄반도를 소탕하기로 결정했다. 제4사단의 필리핀 도착이 완료되는 시점은 1942년 3월 말로 정했다.


남방군은 필리핀 증원에 반대했다. 그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남방작전의 최종 목표인 자바였는데 남방군은 자바상륙을 준비하면서 수송선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었다. 바탄반도야 어차피 남방작전이 성공하면 드넓은 일본 영역 한가운데에 고립된 지점이 될 것이니 언제든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남방군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자바상륙을 눈앞에 둔 이 중차대한 시기에 급할것 하나없는 바탄반도 공략을 위하여 자바전투에 투입될 제21사단의 일부를 빼돌리는 것도 모자라 가뜩이나 부족한 수송선을 동원하여 제4사단을 중국에서 필리핀으로 옮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에 사용할 수송선이 있다면 자바상륙에 한척이라도 더 배정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42년 2월 8일에 비록 제16군 소속이었지만 필리핀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의지할 수 있었던 강력한 예비대였던 제48사단이 링가옌만을 떠났다.

이날 제14군은 바탄반도를 공략할 것이냐 봉쇄할 것이냐를 두고 산페르난도에서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제14군참모장 마에다 마사미 중장과 제1과 고급참모 나카야마 모토오 대좌는 한달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격돌했다. 나카야마 참모는 공격을 속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공격실패는 병단장들에게 과도한 권한을 준 것이 실패의 원인이므로 차후 공세는 군이 직접 지도해야 하며 서쪽보다는 동쪽 사맛산 지역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에다 참모장은 현재 제14군의 전력으로는 공격을 성공시키기 어려우니 바탄공략을 중단하고 일단 봉쇄한 다음 증원군이 도착하면 전력을 재건한 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14군의 전력이 공격을 지속하기 힘들만큼 약화되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뚜렷했으므로 참모들은 대부분 마에다 참모장의 의견에 동조했다.


8일 오후 6시에 혼마 중장이 마에다 참모장의 안을 채택했으며 회의는 비사야, 민다나오 공략 등에 대해 조금 더 논의한 후 끝났다. 이제 제14군이 할 일은 병사들을 쉬게하면서 군을 재편하는 동시에 봉쇄망을 단단히 조이면서 증원군인 제4사단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3월 말에 제4사단이 도착하면 다시 공격을 가할 것이었다. 8일 저녁에 혼마 중장은 일선의 일본군에게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65여단장 나라 아키라 중장은 티아위르강과 탈리사이강 북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6사단장 모리오카 스스무 중장은 바각 및 고고강 북쪽의 고지대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라 중장은 철수하는데 문제가 없었으나 모리오카 중장은 그렇지 않았다. 모리오카 중장은 보병제20연대의 1개 대대가 아냐산-실라임 지역에서 싸우고 있고 연대의 나머지 병력이 고립지대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철수할 수는 없다면서 며칠 간의 유예를 요청했다. 혼마 중장은 모리오카 중장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나라 중장에게 제2군단 정면에 대규모 공세를 가하는 흉내를 냄으로써 제16사단에 가해지는 압력을 덜어주라고 명령했다.


2월 13일에 제65여단은 제2군단 정면에서 마치 대규모 공세를 가하는 듯이 요란을 떨었다. 준비포격과 항공대의 공습에 이어 대부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군세를 크게 보이기 위하여 제14군이 보유한 모든 트럭을 끌고 나왔다. 그러나 실제로 미-필리핀군의 야포 사정거리 내로 들어온 것은 1개 대대에 미달하는 병력이었으며 과감하게 공격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멀찍이서 총격을 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혼마 장군은 이런 견제공격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했으나 미-필리핀군은 위력정찰로 생각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월 22일에 제16사단의 철수가 마무리되자 제65여단도 철수명령을 받았다. 제65여단은 이전보다 더 북쪽인 발랑가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써 1달에 걸친 바탄공략전은 실패로 끝나고 제14군은 증원을 기다리면서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이제 혼마 장군은 봉쇄망을 조이는데 신경을 썼다. 마닐라 이남의 루손을 책임지고 있던 보병제33연대장 스즈키 타츠노스케 대좌는 제3대대와 수색제16연대(1개 중대 감편)을 이끌고 마닐라 만의 남안으로 가서 필리핀 사람들이 바탄이나 코레히도르에 식량을 보내주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또한 105mm 캐넌포 4문과 155mm 캐넌포 2문을 동원하여 매일 코레히도르를 비롯하여 마닐라만 입구의 요새화된 섬들을 포격했다.


혼마 장군은 남쪽으로부터 소수의 선박이 기습적으로 바탄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루손섬 바탕가스주 바로 남쪽에 있는 민도로섬을 점령하기로 했다. 2월 26일에 보병제33연대제3대대와 야포병제22연대의 1개 포대로 이루어진 스즈키지대가 해군함정의 호위를 받으면서 올롱가포를 떠났다. 스즈키지대는 27일 아침에 민도로섬의 북동쪽에 상륙하여 주변의 마을과 비행장을 점령했다. 민도로섬 남쪽에는 약 50명이 지키는 비행장이 있었는데 그곳은 공격하지 않았다. 이 남쪽 비행장은 3월 15일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점령했다.


개전 이래 1942년 2월 말까지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이룬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아래는 제14군이 2월 20일까지 노획한 전리품으로 이것만 보아도 제14군이 미-필리핀군을 상대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14군의 전리품.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9.html)


그러나 댓가 또한 컸다. 제14군은 1942년 1월 6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약 2,700명의 전사 및 실종자와 4,000명이 넘는 부상자를 기록했다. 더하여 10,000 - 12,000명이 말라리아, 이질, 각기병, 그리고 열대성 풍토병에 걸렸다. 예하 부대인 제16사단과 제65여단을 살펴보면 당시 제14군의 비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제16사단이 가진 3개의 보병연대 중 보병제20연대는 사실상 사라졌다. 보병제9연대는 바탄반도의 동서방면에서 모두 싸우면서 약 7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가장 피해가 적은 보병제33연대도 윗쪽 고립지대 전투에서 12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1942년 2월 24일 현재 바탄반도에 있는 제16사단의 병력 중 전투가능한 보병의 숫자는 712명에 지나지 않았다.


제65혼성여단도 마찬가지였다. 2개 대대로 이루어진 보병연대 3개를 가진 제65여단의 병력은 1월 9일 현재 6,651명에 달했지만 연속적인 전투를 치르면서 소모되었다. 1942년 1월 9일부터 24일 사이에 제65여단은 1,471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1월 25일부터 2월 15일 사이에도 손실은 계속되어 이 기간동안 제16사단에 배속된 제122연대는 약 3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보병제141연대는 80명의 전사자와 253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보병제142연대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가벼웠다. 상륙 이래 2월 15일까지 제65여단 및 배속부대가 입은 피해는 전사 1,142명, 부상 3,110명에 달한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대부분 지친데다가 질병을 앓고 있어서 전투력이 떨어졌다.


제14군의 정보주임이었던 나카지마 요시오 중좌는 1942년 3월 1일 현재 제14군에서 전투가능한 병력이 약 3,000명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제14군은 군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전력이 떨어져 있었다. 훗날 전범재판에서 혼마 중장은 만일 그때 맥아더 장군이 대규모 역습을 감행했다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마닐라까지 진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군과는 대조적으로 오리온-바각방어선에서 승리한 미-필리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낙관주의가 판을 쳤다. 혼마 장군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맥아더가 머물던 마닐라 호텔의 객실에서 자결했으며 싱가포르 공략을 지휘했던 야마시타 장군이 후임으로 부임했다는 헛소문을 맥아더 사령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장병이 믿을 정도였다.


승리의 2월에 병사들의 사기는 개전 이래 가장 높았으며 일선 장교는 그 효과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찰에 나선 병사들은 이전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행동했으며 주전투진지였던 아부케이선까지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부하들의 높은 사기에 고양된 일선 장교 사이에서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하자는 주장이 크게 일어났다. 많은 일선장교들이 이 기회에 반격을 가하여 최소한 주전투진지였던 아부케이선까지 진출하기를 원했으며 일부는 바탄반도의 입구에 해당하는 라약선까지 밀어붙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선장교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이러한 총반격에 대한 열의는 계급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고위사령부로 올라갈수록 약해졌으며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총반격이 불가하다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본군이 필리핀 근해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움켜쥐고 있는 한 맥아더의 군대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총반격이 성공하여 아부케이를 넘어 라약, 심지어 마닐라까지 진격한다고 해도 일본이 본격적으로 추가 병력을 투입하면 외부로부터의 보급이나 증원을 기대할 수 없는 미-필리핀군은 다시 바탄반도로 돌아와야만 할 것이었다.


총반격은 일본의 마닐라만 사용을 최대한 오래 거부한다는 필리핀수비대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었다. 미-필리핀군이 바탄반도의 고정된 방어선을 지키는 한 식량, 휘발유, 탄약을 비롯한 모든 보급품을 적게 소비하면서 일본의 마닐라만 사용을 거부한다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반면 총반격은 실패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한다고 해도 수많은 문제점을 낳을 것이었다. 지켜야 할 보급선은 길게 늘어지고 병사가 떠나버린 해안은 적의 상륙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안그래도 쪼들리는 보급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었다.


총반격은 당시 미-필리핀군의 높은 사기와 일본제14군의 약화된 전력을 감안할 때 전술적으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전략적 견지에서는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총반격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병사들이 해야할 일은 자신이 눌러앉은 방어선을 강화해서 반드시 오고야 말 일본군의 다음 공격을 막아낼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1942년 2월 말이 되자 미-필리핀군과 일본군은 모두 자신의 방어선에 눌러 앉았다. 양측 방어선 사이의 공간은 정찰대만이 오가는 무인지대로 남았다. 일본군이 공격을 재개할 때까지 바탄반도의 전투는 휴지기로 들어갔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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