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고립지대 전투(2) - 고립지대 소탕


모리오카 중장이 고립지대를 구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하는 동안 제1필리핀군단은 고립지대 소탕에 죽을 쑤고 있었다. 제1사단장 세군도 장군은 휘하의 예비병력을 총동원했지만 작은 고립지대(Little Pocket )를 정리하는데 실패했다. 우측구역 사령관 브라우어 장군은 큰 고립지대(Big Pocket)를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1일 저녁 현재 큰 고립지대의 북쪽과 북동쪽에는 제11보병연대의 G 및 C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고립지대 남쪽에는 제45보병연대제1대대가 있었고 제51사단의 임시대대가 고립지대 남쪽과 서쪽의 5번오솔길을 지키고 있었다. 


(고립지대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3 P.336)


2월 2일에 실시한 큰 고립지대에 대한 공격에는 전차가 투입되었다. 제192전차대대A중대 소속의 전차 4대로 이루어진 전차소대가 제45보병연대제1대대의 1개 소대와 함께 7번오솔길을 따라 북상했다. 이들이 고립지대 속으로 들어가자 말벌집을 건드려 놓은 듯이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으나 전차소대는 스카우트 소대의 근접호위를 받으면서 착실하게 전진하여 저녁에 고립지대를 뚫고 북쪽으로 나왔다. 이 과정에서 전차 1대가 파괴되었다. 전차와 스카우트소대는 이로써 7번오솔길을 개통시켰으나 그날 밤에 일본군이 이들이 지나온 7번오솔길을 다시 점령했다. 


2월 3일 공격에서도 전차 1대가 파괴되었으나 전과는 미미했다. 이날 윌리볼드 비안치 중위는 용감한 행위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비안치 중위는 다른 소대가 적의 기관총좌 2개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자 자원하여 선두에서 공격에 참가했다. 그는 2발의 총알을 왼팔에 맞았으나 후송을 거부한 채 소총을 버리고 권총을 쏘아대며 적 기관총좌에 접근하여 수류탄으로 기관총좌 하나를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가슴 근육에 총알 2발을 더 맞았다. 이후 전차가 다른 기관총좌를 발견했으나 주포의 사각이 나오지 않아 공격을 못하자 전차에 뛰어올라 대공기관총을 잡고 적의 기관총좌에 쏘아대다가 다시 1발의 총알을 맞고 전차에서 떨어졌다. 그는 즉시 후송되었으며 1달 후 완전히 회복하여 복귀했다.


(윌리볼드 비안치 중위. https://en.wikipedia.org/wiki/Willibald_C._Bianchi)


2월 4일 공격에서는 제192전차대대B중대로부터 전차소대 1개가 추가되었다. 이날 추가로 전차 1대를 잃었으나 여전히 전과는 미미했다.


2월 5일 오전 10시에 제1필리핀군단장 웨인라이트 장군이 제1사단사령부에서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존스 장군, 브라우어 장군, 세군도 장군, 웨인라이트의 참모장인 윌리엄 매이허 대령, 그리고 존스의 참모장인 스튜어트 맥도널드 대령이었다. 여기서 웨인라이트 장군은 고립지대 전투의 지휘권을 브라우어 장군에게서 거두어 존스 장군에게 넘겼다. 존스 장군은 고립지대를 완전히 포위하여 사방에서 압박을 가함으로써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이 부족한 병력을 이리저리 돌려서 공격을 막지 못하도록 만든 다음 단일축선을 따라 집중공격을 가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7일까지 공세를 시작한다는 조건으로 승인했다.


2월 6일 하루동안 존스 장군은 공세를 준비했다. 작은 고립지대 소탕전은 제1보병연대장 베리 대령이 지휘했다. 그에게는 일선에 배치한 병력을 제외한 제1사단의 모든 예비병력이 주어졌다.

큰 고립지대 소탕전은 제45연대제1대대장인 레슬리 라스롭 중령이 지휘했다. 그의 휘하에 주어진 병력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고립지대 서쪽에 제92보병연대제1대대와 전차소대가 배치되었으며 이 부대가 주공이 되어 동쪽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고립지대의 남쪽에는 제51사단의 임시대대, 동쪽에는 제45보병연대제1대대, 북동쪽에는 제11보병연대C중대 그리고 북쪽에는 제11보병연대G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공격예정시간은 2월 7일 오전9시였다. 하지만 동원된 병력 규모로 알 수 있듯이 큰 고립지대 소탕에 심혈을 기울이던 존스 장군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잘한 사항까지 챙겼기 때문에 라스롭 중령은 말만 현장지휘관일 뿐 실제 역할은 존스 장군의 명령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날밤에 모리오카 중장이 큰 고립지대를 구하기 위하여 북쪽으로부터 공세를 가했다. 보고를 받은 브라우어 장군은 존스 장군이 다음날 공세에 사용하려고 모아둔 병력 중에서 제92보병연대A중대와 전차소대를 빼내어 북쪽으로 급파했다. 명백한 월권행위였으나 정확한 판단이었다. 제11보병연대제2대대장 헬머트 뒤스터호프 중령이  공격을 받아 지리멸렬한 자신의 부하들을 추스려 기세등등하게 밀고 내려오던 일본군의 진격을 잠깐 지연시킨 사이 A중대와 전차가 현장에 도착함으로써 북쪽에서 밀고 내려온 일본군이 큰 고립지대와 연결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았다.


2월 7일 오전 7시 30분에 존스 장군은 자신이 모아둔 병력 중 일부가 밤새 일본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전용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쪽으로 가버린 병력을 대신할 저드슨 크로우 소령의 제92보병연대제2대대는 오후 3시에 도착했다. 제2대대의 도착 직후에 시작된 공세는 실패했다. 그러자 존스 장군은 큰 고립지대는 일단 포위만 해놓고 작은 고립지대 소탕이 끝나면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여 소탕하기로 했다.


2월 7일 오전 9시에 베리 대령은 예정대로 작은 고립지대를 공격했으나 전과는 미미했다. 저녁이 되자 베리 대령은 포위망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2월 8일 공세는 포위망을 완벽하게 짜고 실시되었다. 이 공세로 작은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으나 섬멸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전투의 혼란 속에 8일 저녁이 되자 포위망이 다시 흐트러지면서 동쪽이 휑하니 비어 버렸는데 베리 대령은 모르고 있었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동쪽이 비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어둠을 틈타 도망쳤다. 이로써 베리 대령은 작은 고립지대를 없앴으나 대신 작은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을 제1필리핀군단 후방에 풀어놓은 결과가 되었다.


2월 9일 아침이 되자 작은 고립지대를 탈출한 일본군이 윗쪽 고립지대의 서쪽을 지키던 필리핀군 후방에 나타났으나 다행히 혼란은 없었다. 원래 감편된 중대 수준인데다가 열흘 동안 적진 후방에 고립되어 있다가 전날 실시한 베리 대령의 공세로 큰 피해를 입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작은 고립지대의 일본군은 필리핀군 방어선을 배후에서 위협할 전력이 되지 못했으며 그럴 의지도 없었다. 이들은 북쪽의 일본군 전선으로 도망치다가 필리핀군 방어선에 가로막힌 것 뿐이었다. 잠시 후 베리 대령의 추격대가 도착하자 일본군은 개인호 하나도 파지 못한 상태로  다시 포위되었다. 필리핀군이 항복을 권유하자 일본군은 소총사격으로 화답했고 이어진 짧고 격렬한 교전 끝에 전멸했다.


일본제14군은 2월 8일에 바탄공략을 포기하고 봉쇄로 전환했다. 이 결정에 따라 모리오카 중장은 9일 아침에 휘하 병력을 바각 북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보병제20연대의 병력이 아냐산-길라임 지역과 고립지대에서 싸우고 있는데 그대로 철수할 수는 없었다. 모리오카 중장은 제14군에 며칠간의 말미를 요청하여 승인을 받은 후 큰 고립지대 내의 요시오카 대좌에게 북쪽으로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위쪽 고립지대 내의 보병제33연대제2대대에게는 남쪽으로 공세를 가하여 큰 고립지대에 갇힌 일본군의 탈출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위쪽 고립지대로부터의 공격은 실패했다. 존스 장군은 작은 고립지대 전투에서 풀려난 베리 대령의 부대를 모두 윗쪽 고립지대의 남쪽에 몰아 넣었으며 따라서 충분한 병력을 보유한 베리 대령은 윗쪽 고립지대의  일본군이 실시한 공세를 간단히 막아내었다.


2월 9일 하루동안 큰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은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필리핀군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북쪽으로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쪽으로부터는 제92보병연대의 2개 대대가 밀고 들어왔다. 남쪽으로부터는 제51사단의 임시대대가 7번오솔길을 따라 북쪽으로 전진했다. 제11보병연대G중대는 7번오솔길의 북쪽으로부터 남으로 밀고 들어왔다. 제11보병연대C중대와 제45보병연대제1대대는 7번 오솔길 동쪽에서 7번오솔길 상의 일본군을 고착견제하고 남북에서 서로를 향해 전진하는 양 부대의 예비대 역할을 했다.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식량사정이 괜찮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방어선을 뚫고 침투할 때 보급품 운반을 위하여 필리핀 상륙 이후 입수한 말과 노새를 대량으로 끌고 들어왔는데 포위된 상황에서 말과 노새를 도축하여 먹었으며 투올강 덕분에 식수 걱정도 없었다.


2월 10일이 되자 제92보병연대가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을 투올강으로부터 밀어내었다. 이제 일본군은 마실 물이 없어서 나무의 수액을 마셔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2월 11일이 되자 고립지대에 대한 공격이 동쪽, 서쪽, 그리고 남쪽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 스카우트대대는 동쪽에서 공세를 가하여 7번오솔길을 완전히 장악했다. 서쪽에서 공격한 제92보병연대와 남쪽에서 공격한 제51사단 임시대대도 약진하여 이제 총을 잘못 쏘면 건너편의 아군이 맞을 지경이 되었다. 다만 살아남은 일본군이 북쪽으로 몰리면서 북쪽에서 공격하던 제11보병연대의 C중대와 G중대는 강한 저항을 받아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요시오카 대좌는 더 이상 꾸물거리다가는 전멸할 것임을 깨닫고 북쪽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북쪽의 C중대와 G중대 사이에는 도저히 통과가 불가능해 보이는 울창한 정글이 있었는데 요시오카 대좌는 이 정글을 통하여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이날 미-필리핀군의 지휘관이 바뀌었다. 전투를 지휘하던 존스 장군이 급성 이질로 후송되자 참모장 맥도널드 대령이 임시로 지휘를 맡았으며 웨인라이트 장군은 다음날인 12일에 브라우어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2월 12일이 되자 큰 고립지대 전투가 사실상 끝났다. 일본군이 차지했던 지역에 들어간 필리핀군은 살아있는 말과 노새 몇 마리를 발견했으나 포로는 없었다. 필리핀군이 확인한 일본군 시체는 약 300구였고 추가로 일본군이 매장된 무덤 약 150기도 확인했다. 또한 대량의 장비, 무기 및 탄약을 노획했다. 필리핀군은 큰 고립지대 안의 일본군을 전멸시켰다고 믿었으나 착각이었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11일 밤에 도저히 통과가 불가능해 보이는 울창한 정글을 통하여 큰 고립지대를 탈출했다. 이후 일본군은 깊은 정글만을 골라 힘겹게 북상한 끝에 4일 만인 15일 정오에 보병제9연대의 방어선에 도달함으로써 사지를 벗어났다. 필리핀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갔을 때 1,000명에 달했던 병력은 요시오카 대좌를 포함하여 378명으로 줄어들었으며 대부분 환자나 부상자였다. 생존자 중 100명 정도가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중상자였다고 한다.


이로써 요시오카 대좌의 보병제20연대는 전투부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연대가 남부루손에 상륙했을 때는 2,881명이었으며 바탄전투에 투입되었을 때는 2,690명이었다. 마우반선에서의 피해는 가벼웠다. 하지만 1월 23일부터 시작된 상륙작전은 치명적이었다. 첫번째로 상륙한 제2대대는 롱고스카와얀곶과 퀴나완곶에서 전멸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투입된 제1대대는 아냐산-실라임 지역에서 사실상 전멸했다. 마지막으로 제3대대를 포함한 나머지 병력들은 고립지대 전투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1942년 2월 15일 현재 보병제20연대의 병력은 파견나간 인원을 포함하여 약 65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절반 이상이 환자나 부상자였다.


큰 고립지대가 정리되자 브라우어 장군은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돌출부인 윗쪽 고립지대로 관심을 돌렸다. 12일 현재 윗쪽 고립지대의 서쪽은 제3보병연대의 3개 중대, 제1보병연대의 1개 중대, 그리고 처음 공격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제11보병연대F중대의 잔존병이 지키고 있었다. 동쪽은 26일 저녁에 브라우어 장군이 존스 장군에게서 빼내온 제92보병연대A중대와 지리멸렬한 제12보병연대의 잔존병인 5개 소대가 지키고 있었다. 남쪽은 제2경찰연대제2대대가 지켰다.


2월 13일부터 브라우어 장군은 큰 고립지대 전투에서 풀려난 부대를 투입하여 윗쪽 고립지대를 공격했다. 제45보병연대제1대대는 남쪽에서, 제51사단 임시대대와 제92보병연대는 서쪽에서, 그리고 제11보병연대와 경찰대대는 동쪽에서 공격했다.

2월 14일 저녁이 되자 윗쪽 고립지대의 크기는 320m x 180m로 줄어들었다.


윗쪽 고립지대 전투에도 제192전차대대의 전차들이 참가했다. 관목이나 덩굴이 시야를 가리는 정글에서 제11보병연대제2대대 소속의 이고로트족 병사들이 전차병에게 도움을 주었다. 바탄반도의 원주민인 이들 병사들은 전차 위에 올라타고 정글도를 휘둘러 무성한 가지를 쳐냄으로써 전차병의 시야를 틔워 주었다. 전차 위에 올라타서 저격에 노출된 그들은 자신을 노리는 일본군을 발견하면 권총을 쥔 오른손으로 사격을 가하면서 왼손에 든 지팡이로 전차병에게 일본군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2월 15일 오후가 되자 저항이 약해졌다. 윗쪽 고립지대의 일본군은 큰 고립지대에 갇힌 요시오카연대의 탈출을 돕기 위하여 버티고 있었는데 15일 오후에 요시오카연대가 보병제9연대의 방어선에 도달함으로써 탈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나자 힘껏 싸울 이유가 없어졌으며 안전하게 철수할 기회만 노리게 되었다. 15일 저녁이 되자 윗쪽 고립지대의 크기는 160m x 90m 로 줄어들었다.


2월 16일이 되자 윗쪽 고립지대는 90m x 70m로 줄어들었으며 17일이 되자 드디어 필리핀군은 1월 26일의 방어선을 복구했다. 이로써 고립지대 전투가 끝났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