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구조

 

전투가 끝난 후에도 일본기 몇 대는 상공에 남아 있었다.

늦게 이륙하여 연료가 남아있던 미호로 항공대와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던 가노야 항공대의 일본기 몇 대가 남아 구조 작업을 지켜봤다.

 

그 중 1대가 리펄스가 가라앉은 해역에 저공으로 날아왔다.

퇴함하여 칼리뗏목에 타고 있던 생존자들이 공포에 질려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일본기 승무원들은 리펄스가 가라앉은 해역에 거수경례를 하고는 날아가 버렸다.

 

일본기들은 퇴함한 생존자를 공격하거나 구조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심지어 구조작업 중이던 영국구축함이 간간이 대공사격을 가해도 피하기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일본기 승무원이 보여준 이런 신사적인 모습은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에서 보여준 일본군의 통상적인 모습과는 달랐다.

긍지 높은 정예병사인 일본기 승무원은 자신의 압승으로 끝난 전투에서 무력한 패자를 해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가노야 항공대 제3분대장 이키 대위는 전투해역에 돌아와 바다에 화환을 던졌다.

적이지만 용감하게 싸웠던 영국해군 전사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인지, 전날 격추되어 전사한 일본기 승무원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 의도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리지만 어쨌든 이례적인 행동인 것은 틀림없다.

 

일본정찰기 조종사 호아시 소위는 쿠안탄 비행장을 폭격하고 오후 1시경 전투 해역에 돌아와 해상의 상황을 사이공에 보고했다.

리펄스는 침몰했고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침몰 중이며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호아시 소위를 제외한 일본기들은 오후 1시 10분까지 현장을 떠나 사이공으로 돌아갔다.

10분 후에 호아시 소위도 황급히 현장을 떠나야 했다.

호주군의 버팔로 전투기가 도착했던 것이다.

 

(브류스터 F2A 버펄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Brewster_F2A_Buffalo)

 

호주제453전투비행대대장 팀 비거스 대위는 오후 12시 20분에 싱가포르 셈바왕 기지에서 이륙했다.

항공사령부로부터 전화로 출격 명령을 받은 지 1분 만에 이륙했기 때문에 브리핑 받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받은 명령은 쿠안탄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90km 떨어진 해상으로 가서 일본기의 공격을 받고 있는 영국함정을 도우라는 구두 명령이 전부였다.

5분 만에 버팔로 11대가 이륙했으나 1대는 이륙 직후 엔진 고장으로 돌아가고 10대가 이륙 1시간 만인 오후 1시 20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팀 비거스 대위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리펄스는 이미 가라앉은 후였고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전복된 상태였으며 4분 후에 완전히 가라앉았다.

 

버팔로 조종사 1명이 현장 상공에서 호아시 소위 탑승기를 발견했으나 호아시 소위 또한 동시에 버팔로를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마침 부근에 있던 구름 속으로 뛰어든 호아시 소위는 쫓아오던 버팔로를 따돌리고 무사히 돌아갔다.

버팔로들은 편대별로 고도를 달리해가며 주변을 뒤졌으나 일본기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제453전투비행대대는 구조작업 중인 영국구축함의 상공을 1시간 가량 지키다가 연료가 떨어지자 셈바왕 기지로 돌아갔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침몰로 구축함 엘렉트라의 함장 메이 중령이 Z 부대의 선임 장교가 되었다.

1941년 12월 10일 오후 1시 18분, 엘렉트라는 말레이 해전이 시작된 이래 9번째이자 세계를 놀라게 한 마지막 전문을 발신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 침몰>

(H.M.S. PRINCE OF WALES SUNK.)

 

이 전문은 3분 후인 1시 21분에 싱가포르 총사령부(G.H.Q. Singapore)에 도착했다.

 

일본기가 사라진 후 영국구축함은 구조에 전념했다.

날씨는 따뜻하고 바다는 잔잔하며 일본기도 없었으므로 구조에 유리했다.

구축함들은 양현에 스크램블 넷(scramble net)을 늘어뜨려 생존자가 타고 올라오게 했으며 멀리 떨어져 있는 생존자에게는 밧줄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밧줄은 중유로 뒤덮인 바다에서는 미끌거려서 잡기가 어려웠다.

 

(스크램블 넷. http://coenshse.com/equipment/equipment0201.php)

 

구축함에 구조된 생존자 중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햇볕이 작열하는 구축함의 강철갑판에 수용되었다.

생존자들은 갑판에 도착하면 대부분 바닷물이나 중유를 토해내었고 그러면 승조원들이 럼주와 담배를 가져다 주었다.

정신을 차린 생존자 중 일부는 자신의 직별을 살려 구조작업을 도왔다.

가령 대공포 사수가 구축함의 대공포를 담당하여 기존 사수가 구조작업에 동참할 수 있었다.

 

비극도 있었다.

심한 화상 환자를 비롯한 중상자는 구축함의 선실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시설이 미비하여 군의관은 모르핀을 주는 이외에 달리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부상자 중 일부는 구조된 이후에 구축함에서 사망했다.

 

리펄스가 침몰한 지 90분쯤 지난 오후 2시가 되자 리펄스 생존자의 구조는 일단락되었다.

엘렉트라의 함장 메이 중령은 호주구축함 뱀파이어에게 한번 더 리펄스의 생존자를 찾아보라고 명령한 후 몇 km 떨어진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침몰 지점으로 갔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생존자를 구하던 익스프레스는 이미 수용한계에 달했는데 아직 바다에는 생존자 약 300명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익스프레스는 나머지 생존자의 구조는 엘렉트라에 맡기고 싱가포르로 철수했다.

1시간 후에는 리펄스 생존자 수색을 마친 뱀파이어도 메이 중령의 명령에 따라 싱가포르로 철수했다.

 

3척의 구축함은 2,100명 정도를 구했는데 중상자 몇 명은 싱가포르까지 오는 도중 사망하여 싱가포르에 도착한 생존자 수는 2,081명이다.

가장 많이 구조한 것은 익스프레스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생존자 약 1,000명을 구했고, 엘렉트라는 리펄스의 승조원 571명을 포함하여 약 900명을 구했다.

유일하게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크기가 작은 호주구축함 뱀파이어로서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을 포함한 리펄스 승조원 222명과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승조원 2명, 그리고 민간인 종군기자인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오다우드 갤러허를 구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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