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비행장 건설과 S 보트들

 

미군 공병대는 1943년 5월 29일부터 애투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건설 중이던 홀츠 만의 활주로를 조사한 공병대는 이곳이 비행장 건설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리고 새로운 활주로 부지로 매서커 만 동쪽의 알렉사이 곶을 골랐다.

 

(애투 섬의 동쪽 부분 출처 : http://www.loran-history.info/Attu/Attu_island_2096dpi.jpg 에서 일부 발췌)

 

제50 및 제13전투공병대대 이외에도 제807항공대대 A 중대와 제349일반지원연대의 파견대가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공병대는 호수의 물을 빼고 불도저로 지표면의 툰드라를 걷어낸 다음 모래와 자갈을 채우고 다졌다.

그리하여 공사 시작 후 11일만인 1943년 6월 8일에 최초의 항공기가 활주로에 착륙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애투 섬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셰미야 섬에도 비행장 건설이 이루어졌다.
셰미야 섬은 무인도로서 알류산 열도에서 유일하게 평평하여 미군은 장차 이곳에 B-29 폭격기를 운용할수 있는 대형 비행장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1943년 5월 28일에 18명의 선발대가 상륙하여 일본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틀 후인 30일에 제4보병연대와 제18전투공병연대가 상륙했다.

공병대는 6월 3일부터 활주로 건설을 시작하여 21일에는 쌍발중형폭격기들이 셰미야 섬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애투 섬과 셰미야 섬에 건설된 비행장들의 임무는

 

1. 알류샨 열도를 지키고

2. 일본령인 쿠릴 열도를 공격하며

3. 키스카 섬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는데 3번 임무가 특히 중요했다.

 

키스카 섬 공격 준비는 애투 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으나 애투 섬 탈환전의 불만족스러운 경과와 커다란 인명피해에 놀란 미군 지휘관들은 최소한 2배 이상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키스카 섬을 침공하는데 보다 신중해졌다.

그리하여 침공군은 규모가 커졌고 훈련도 훨씬 강해졌다.

북태평양상륙군은 키스카 섬의 위도와 비슷한 북위 50도 선에서 실질적인 상륙훈련을 실시했다.

 

애투 섬 탈환전이 진행되는 동안 더치하버에 기지를 둔 미군의 구형 잠수함인 S 보트들은 20번이나 전투초계를 나섰으나 성능 부족으로 대부분 일본선박을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1943년 5월에 일본선박을 격침하는데 성공한 것은 어빈 하트맨 소령의 S-41 호가 유일했다.

S-41 호는 1943년 5월 27일에 바라무시로 근해에서 일본의 범선 1척에 어뢰 2발을 발사하여 1발을 명중시켜 격침했으나 정식 기록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5월 31일에는 1,000 톤급의 소형 화물선 세이키마루에 2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명중킴으로써 격침했다.

 

1943년 여름에도 S 보트들은 전투초계를 계속했다.

윌리엄 스티븐슨 소령의 S-30 호는 6월 11일에 바라무시로 근해에서 5,228톤짜리 수송선 진부마루를 격침했고, 7월 2일에는 헨리 먼로 소령의 S-35 호가 캄차카 근해에서 5,430톤짜리 게잡이 어선 반슈마루를 격침했다.

가을에 접어들자 9월 19일에 빈센트 시슬러 소령의 S-28 호가 오호츠크 해에서 상선을 개조한 1,400톤짜리 포함 가츠라마루2호를 격침했다.

 

1943년 10월 8일에 프랜시스 브라운 소령이 지휘하던 S-44 호가 격침되었다.

S-44 호는 존 무어 소령의 지휘 아래에서 1942년 5월 12일에 구난선 쇼에이마루, 6월 21일에 상선을 개조한 포함 게이조마루를 격침한데 이어서 8월 10일에는 사보 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개선하던 일본중순양함 카고를 캐비엥 근해에서 격침한 쟁쟁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카고는 당시까지 미국잠수함이 격침한 가장 큰 일본군함이었다.

 

(미국의 S 급 구형 잠수함 S-44. 수상배수량 : 864톤, 수중 배수량 : 1,144톤, 길이 : 69m, 폭 : 6.3m, 속력 : 수상 14.5노트, 수중 : 11노트, 항속거리 : 10노트로 9000km, 승무원 : 42명, 무장 : 21인치 어뢰발사관 4문, 어뢰 12발, 4인치 갑판포 1문)

 

S-44 호는 1943년 9월 26일에 애투 섬 기지를 떠나 바라무시로 방면으로 전투초계에 나섰다.

10월 7일 밤에 오호츠크 해에서 S-44 호는 레이더로 일본선박을 접촉했는데 브라운 소령은 소형 화물선으로 생각하고 부상한 채로 접근하여 갑판포를 발사했다.

그 순간 적으로부터 포격이 날아왔다.

상대는 소형 상선이 아니라 구축함이었다.

브라운 소령은 급히 잠항을 명령했으나 포탄1발이 함체를 뚫고 들어와 통제실과 후방 축전지를 파괴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브라운 소령은 즉시 퇴함을 명령했고 수병 1명이 어뢰실 해치를 열고 갑판에 올라가 베갯잎으로 만든 백기를 흔들었으나 일본구축함은 사격을 계속하여 S-44 호를 순식간에 격침했다.

S-44 호의 승무원들 중 8명이 가라앉는 잠수함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으나 일본구축함은 어네스트 두바와 윌리엄 윗모어만을 구조하고 나머지는 내버려두고 떠나 버렸다.

생포된 두 사람은 바라무시로에서 심문을 받고 오푸나의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아시오의 구리광산에 끌려가서 종전 때까지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때 전사한 S-44 호의 함장 브라운 소령은 이전에 지휘하던 S-39 호가 오스트레일리아 근해에서 좌초하여 잃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브라운 소령은 미해군에서 유일하게 2척의 함정을 상실한 잠수함장이 되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미해군의 암호해독반으로부터 S-44 호의 격침을 보고받은 태평양함대 잠수함부대장 록우드 제독은 남아있던 S 보트들을 모두 일선에서 철수시켰다.

심각한 축전지 폭발을 일으켰던 S-45 호는 미본토에서 수리 겸 오버홀을 받고 남서태평양 해역군으로 보내졌으며 S-42 호와 S-47 호는 알래스카에서 바로 남서태평양해역군으로 보내졌고 S-46 호는 진주만으로 보내졌다.

이들 S 보트들은 더 이상 전투초계에 나서지 않고 잠수함 승무원의 훈련에 동원되거나 함대의 대잠훈련시 가상 적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게 되었다. 

 

1942년부터 43년에 걸쳐 더치하버를 기지로 활동한 S 보트들은 총 70회의 전투출격을 통하여 5척의 일본선박을 격침했다.

파나마, 마닐라, 그리고 호주에서 출격한 횟수까지 모두 더하면 S 보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총 190회의 전투출격을 통하여 14척의 일본선박을 격침했다.

이런 보잘것 없는 전과를 위하여 2년간 잠수함 승무원을 비롯하여 잠수모함 승무원 및 잠수함 기지 요원, 그리고 기술요원 등 적어도 1,000 명이 넘는 숙달된 인력들이 투입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숙달된 인력들을 좀 더 빨리 낡은 S 보트에서 빼내어 만성적으로 인력난을 겪고 있던 함대형 잠수함부대에 충원했으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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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애투 탈환전(7) - 옥쇄 

 

1943년 5월 28일 저녁이 되자 애투 섬을 지키던 일본군들은 절망적인 처지가 되었다.

총 2,630명에 달하던 병력 중 전투가능한 병력은 800 명 남짓으로 줄어들었으며 무엇보다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이 바닥났다. 

일본군 지휘관인 야마자키 야스오 대좌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남아있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미군에 역습을 가하기로 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미군의 보급품이 쌓여있는 공병고지와 그 부근의 포병대를 장악한 후 탈취한 보급품을 가지고 일본군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버티자고 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아무튼 5월 28일 오후가 되자 일본군들은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전투가 불가능한 부상자들에게 자결을 강요했으며 전투에 참가할 일본군들은 술을 포함하여 남아있던 약간의 식량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29일 새벽이 되자 약 800 명의 일본군들이 안개가 자욱한 치차고프 계곡으로 내려왔다.

대부분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총탄은 거의 없었으며 일부는 단순히 대검을 막대기 끝에 묶은 창을 들고 있었다.

일본군은 미군의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추어 29일 오전 3시 25분에 미군 방어선에 들이닥쳤다.

애투 섬에서 6월이면 오후 11시에 어두워져서 오전 2시면 밝아진다.

 

당시 미군 초소에는 전날 정찰대의 보고에 따라 비상이 걸려 있었으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따라서 일본군이 들이닥친 오전 3시 25분에는 방어선을 지키던 대부분의 병사들이 아침 식사를 위하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방어선에 남아있다가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소수의 미군 병사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식사 중이던 병사들이 총소리와 비명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고 깨달은 순간 일본군들이 안개를 뚫고 괴성을 지르면서 기지에 난입했다.

대부분 비무장 상태였던 미군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도망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 버리자 일본군들은 주변 텐트에 닥치는대로 뛰어들어 텐트 내부에 숨어있던 병사들을 살해하고 물품을 약탈했는데 이 와중에 야전병원 텐트 2곳에도 일본군들이 뛰어들어 부상자들과 군의관 및 의무병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했다.

야전병원의 텐트에는 분명히 적십자 표시가 되어 있었으나 일본군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전병원과 대대본부 2개를 휩쓴 일본군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원래 목표인 공병고지의 보급소를 목표로 진격했다.

보급소 부근에 텐트를 치고 자고 있던 제50전투공병대대의 3개 중대는 아랫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비명 소리에 잠을 깨었다.

일본군에게 쫓겨 온 보병 몇몇이 1,000 명이 넘는 일본군들이 몰려온다고 고함을 질렀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그 순간에 제50전투공병대대장 버질 워멘도프 중령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했다.

워멘도프 중령은 제50전투공병대대에게 보병과 맞먹는 수준의 전투력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그는 애투 섬에 상륙하기 전 포트 오드에서의 훈련기간 중에 전투 훈련, 특히 진지방어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으며 상륙 이후에도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공병고지에 주둔 중이던 제50공병대대의 3개 중대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텐트 주변에 미리 방어선을 설정해 두고 2정의 기관총을 설치한 것을 비롯하여 각 병사의 담당 위치를 미리 정해 두었고 각 담당 위치에는 적어도 1회의 전투를 치르기에 충분한 탄약과 수류탄 등도 미리 갖다 놓았다.

이런 식으로 대비하고 있던 제50전투공병대대원들은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당황하지 않고 철모를 쓰고 총을 든 채 담당 위치로 달려갔다.

 

이윽고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군이 소리를 지르면서 접근했으나 전투공병들은 사격군기를 유지하면서 적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시정이 10m 에 불과한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맹렬한 일제사격이 터졌다.

전투공병들은 일본군의 기세에 위축되지 않고 일제사격을 가하여 일본군의 선두를 쓰러뜨리고 수류탄을 던진 다음 달려드는 일본군과 백병전으로 맞붙었다.

그동안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던 2정의 기관총이 후속하던 일본군을 쓸어버리자 일본군의 기세가 꺾였다.

일본군이 멈칫거리자 전투공병들은 반격하여 야전병원 지역을 회복했으나 안개가 짙어서 추격이 불가능했다.

제50전투공병대대는 일본군의 예봉을 꺾는 과정에서 29명의 전사자와 4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공병대의 방어선에서 발견된 일본군 시체는 약 250구였다.

 

야카자키 대좌는 살아남은 부하들을 규합하여 잠시 후 다시 돌격했지만 이미 충격에서 깨어난 미군 보병이 대비하고 있다가 돌격해오는 일본군을 간단히 물리쳤다.

야마자키 대좌도 군도를 휘두르며 돌격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후로도 일본군은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돌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막혔고 안개가 걷히자 치차고프 계곡으로 밀려났다.

분노한 미군은 달아나는 일본군의 등뒤에 81mm 및 60mm 박격포탄과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의 총탄을 폭포처럼 쏟아부어 치차고프 계곡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살아남았던 일본군이 대부분 이때 사망하거나 자살함으로써 일본군의 마지막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반자이 돌격에서 사망한 일본군의 시체)

 

5월 29일의 광신적인 돌격을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이 났으나 잔적 소탕은 이후로도 며칠간 이어졌다.

일본군은 거의 투항을 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거나 자살해 버렸으며 공병고지에서 끔찍한 꼴을 당한 미군도 구태여 포로로 잡으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투항권고도 하지 않고 바로 사살했다.

 

애투 섬 전투 기간 동안 일본해군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처음에 자신들이 보유한 주력함정들을 대거 동원하여 미함대와 일대 결전을 벌일 생각으로 도쿄만에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켰으나 일단 함대가 집결하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야마자키 대좌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함대 또한 항공모함과 전함을 보유한 강력한 함대임이 분명했으므로 일본함대가 안개 속에서 레이더 기술이 훨씬 앞서있는 미해군의 강력한 함대와 맞붙었을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대신 일본해군은 5월 21일에 어뢰를 장비한 19대의 1식 육상공격기를 투입했다.

그날 제11육군항공군은 안개가 짙었으므로 일본군의 공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애투섬 상공을 비워 두었다.

1식 육공들은 애투 섬의 그늘에 숨어 레이더를 피하면서 접근하여 구축함 펠프스와 포함 찰스턴을 공격했다.

펠프스는 대공포로 2대의 1식 육공을 격추했으며 일본군이 투하한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이때 초저공비행으로 찰스턴과 펠프스의 상공을 통과하던 1식 육공들이 20mm 기관포탄을 쏟아부어 찰스턴이 17발, 펠프스가 8발을 맞았다.

1식 육공 조종사들은 돌아가서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다른 구축함 1척에 화재를 일으켰다고 보고했으나 당시 공격을 받은 미군 수상전투함은 구축함 펠프스와 포함 찰스턴 뿐이었다.

 

(미츠비시 G4M 1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조종사들의 보고에 고무된 일본군은 다음날 애투 섬의 미군을 폭격하기 위하여 다시 17대의 1식 육공을 보냈다.

이번에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P-38 전투기 5대가 달려들어 1식 육공 5대를 격추하자 나머지 일본기들은 폭탄을 바다에 쏟아버리고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P-38 전투기 2대가 격추되었다.

 

애투 섬 수비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갈팡질팡하던 대본영은 5월 28일에 과달카날처럼 수상함대를 투입하여 애투 섬 수비대를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합함대의 주력이 미군함대를 견제하는 동안 가와세 시로 중장의 제5함대가 치차고프 항에 돌입하여 일본군 생존자들을 싣고 빠져나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미군의 애투 섬 함락 방송이 나오자 대본영은 구출계획을 취소했다.

구출작전의 실패로 애투 섬 수비대가 전멸하자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크게 상심했고 대신 키스카 섬 수비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철수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애투 섬을 상실한 일본은 이제 애투 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한편 애투 섬 수비대의 전멸을 옥이 부서진다는 뜻인 '옥쇄(玉碎)' 라는 단어로 미화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후 이 옥쇄라는 단어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전장에서 수많은 일본군들을 의미없는 개죽음으로 몰아가는 저주받은 단어로 자리잡게 된다.

 

애투 섬에 남아있던 미해군 함정들은 전투의 종막을 앞두고 애투 섬을 떠났다.

5월 24일에 구축함 펠프스는 마지막으로 5인치 포탄 426발을 발사한 후 오전 11시 55분에 구축함 미드와 함께 애닥 섬으로 떠났다.

포함 찰스턴은 5월 25일과 26일에 함포사격을 실시한 후에 애닥 섬으로 떠났다.

찰스턴은 5월 22일과 25일- 26일에 걸친 3일간 6인치 포탄 951발을 발사했다.

 

이로써 예상 외의 격전으로 점철되어 쌍방 간에 큰 인명피해를 남긴 18일 간의 애투 섬 전투가 끝났다.

미군이 확인한 일본군 시체는 2,351구였으며, 포로는 28명이었다.

증원부대까지 포함하여 총 15,000 여명이 상륙한 미군의 피해는 전사 549명, 부상 1,148명, 그리고 비전투 손실 약 2,100 명인데 비전투 손실은 대부분 동상이었다.

 

애투 섬에서 전사한 미군의 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뉴욕 타임즈의 종군기자로 애투 섬 전투를 취재했던 로버트 셰로드는 자신이 애투 섬에서 직접 세어 본 미군의 무덤 숫자만 565기였으며 여기에 비록 소수지만 상륙 과정에서 익사하거나 작전 과정에서 실종된 인원, 그리고 중상을 입고 애투 섬에서 후송된 이후에 사망한 병사들도 분명히 있으므로 애투 섬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숫자는 약 600 명이라고 주장했다. 

549명은 미육군 전사국이 1962년에 공식전사를 편찬하면서 제시한 숫자로서 오늘날까지 인정되고 있는 최종 숫자이다.

 

약 600 명이든 549 명이든 애투 섬에서 발생한 미군 전사자 숫자는 지휘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의 사단급 병력과 5개월 동안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였던 해병제1사단의 전사자 숫자가 774명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불과 2,630 명의 일본군과 3주일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싸운 애투 섬에서 발생한 549명의 전사자가 얼마나 많은 것인지 감이 올 것이다.

 

이제 애투 섬은 다시 미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애투 탈환전은 성공했지만 내용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제7보병사단은 애투 탈환전에서 왕성한 공격정신과 뛰어난 전투기술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애투 섬에서 실망스런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제7사단도 기초가 탄탄하여 일단 실전을 치르면 무섭게 변하는 미군사단의 전통에 따라 불과 9개월 후의 콰잘린 전투에서는 완전히 환골탈태하여 스스로 최고 수준의 상륙부대임을 증명했다.

 

해군은 애투 섬 전투에서 자신들이 생각해 오던 사실, 즉 함포는 참호를 파고 들어앉은 적을 파괴하지 못하며 다만 마비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이 마비도 상당한 효과가 있어서 적의 방어선을 공격하는 병사들은 함포사격이 가능할 때 훨씬 적은 피해를 내면서 빨리 전진했으므로 미해군은 상륙 작전에서 함포 사격의 역할은 적을 마비시키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임무에는 14인치 이상의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전함이 단연 효과적이었다.

또한 전함의 포격은 아군에게 엄청난 사기앙양효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반대로 적에게는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주어 사기를 떨어뜨렸다.

전함의 포격을 받을 때 병사들이 어떤 심리적 타격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에 해병제1사단이 당한  '포격(The Bombartment)' 을 통하여 미군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신형전함들이 고속항모기동부대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지상포격에 투입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구경 함포를 장비한 구형전함의 가치는 엄청났다.

이렇게 애투 섬 전투는 상륙작전에서 구형전함의 유용성을 증명했다.

 

그러나 6개월 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해안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는 상륙작전에서 적을 단순히 마비시키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엄청나게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서 배우게 된다.

따라서 타라와 전투 이후 상륙작전시 미해군의 함포 사격은 적의 마비가 아니라 적의 파괴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해안을 지키는 수비대를 단순히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는 애투 섬에서처럼 10,000m 가 넘는 거리에서 쏘아대는 고폭탄은 비록 전함의 강력한 14인치 주포탄일지라도 포탄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애투 탈환전에서 9개월 후에 벌어진 콰잘린 전투에서 전함 펜실베니아는 애투 섬에서처럼 13,000m 가 아니라 해안에서 불과 800m 앞까지 바짝 다가가서 14인치 고폭탄이 아닌 철갑탄을 쏟아부어 콰잘린의 일본군 방어선을 문자 그대로 요절을 내었다. 

 

호위항공모함으로서는 최초로 애투 섬 전투에서 상륙작전시 항공 지원을 담당했던 나소는 합격점을 받았다.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불리하여 179회에 달하는 모든 출격에 캐터펄트를 사용해야 했지만 이 때문에 항공작전에 지장을 받은 일은 없었다. 

나소는 애투 섬 전투 기간 중에 5대의 함재기를 상실했는데 기상 상태를 고려하면 낮은 손실율이었으며 특히 이착함 과정에서 상실한 함재기는 1대도 없었다.

 

미해군은 애투 섬 탈환전 기간 중의 물자 양륙능력은 형편없었다고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선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미해군은 타라와 전투 이후에야 효율적인 양륙체계를 마련하게 된다.

 

다만 미해군의 급양체계만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수송함들은 애투 섬 탈환전 기간 동안 반드시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에게 전달하라는 단서를 달아서 1,200 명 분의 따뜻한 식사를 보온이 잘 되는 밀폐용기에 담아 하루 2번씩 육군에 제공했다. 

따라서 일선 병사들은 따뜻한 커피 또는 홍차와 함께 고추, 콩, 옥수수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따끈하고 맛있는 쇠고기 스튜를 매일 2번씩 먹을 수 있었는데 방한복의 부족으로 추위에 떨면서 고생하던 일선 병사들에게 얼어봍은 몸을 녹여주는 이 따뜻한 식사는 인기만점이었다.

일선병사에게만 지급되던 이 따뜻한 식사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해안에 물자를 양륙하던 양륙부대로부터 자신들에게도 따뜻한 식사를 지급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고 수송함 해리스가 처음에는 60인분의 따뜻한 식사를 양륙부대에게 하루 2번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곧 300 인분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보급품을 해안에 운반하던 상륙주정들의 승무원들도 따뜻한 식사를 요청해왔다.

이 많은 식사를 도저히 주방에서만 준비할 수가 없었으므로 수송함들은 아예 갑판에 솥을 걸어놓고 대량으로 쇠고기 스튜를 만들어서 밀폐용기에 담아 한끼 식사를 얻으려고 다가오는 주정 승무원들에게 넘겨 주었다.

 

수송함들은 이외에도 담배, 성냥 및 초코바 등을 매일 주정승무원들과 양륙부대에 보급했으며, 별도로 5,000 갑의 담배와 성냥, 그리고 수천개의 초코바를 일선에서 싸우는 육군병사에게 보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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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애투 탈환전(6) - 타개 

 

브라운 소장으로서는 억울하게도 그가 제7사단장 직에서 해임당한 16일 오후부터 미군은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시작했다.

5일 간의 격렬한 함포 사격과 북부상륙부대(제1/17 및 제3/32대대)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리던 X 고지의 일본군들은 15일 밤에 무어 능선으로 후퇴했다. 

이에 따라 북부상륙부대는 16일 아침에 X 고지를 점령하고 스카웃 중대 및 정찰중대로 이루어진 임시 대대와 만났다.

북부상륙부대는 이어서 무어 능선을 공격했다.

 

나소는 안개에도 불구하고 6대의 함재기를 내보내어 제1/17대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무어 능선을 공습했는데 시계불량으로 2대가 추락했다.

오전 10시 48분에 나소는 다시 함재기를 내보내어 공습했는데 이때 함재기 중 1대가 그만 북부상륙부대를 오폭했다.

구축함 애브너 리드도 저녁 6시에 5인치 함포로 138발을 발사하며 북부상륙부대의 전투를 지원했다.

 

제11육군항공대에서도 항공기를 보내왔으나 안개 때문에 폭격이 힘들었다.

P-38 전투기 편대는 나뭇가지에 닿을 정도의 초저공으로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에 공습을 가하여 낙하산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폭격기 3개 편대도 왔으나 목표를 확인할 수가 없어서 폭탄을 투하하지 못했다.

B-24 폭격기 1대는 북부부대의 선두에 보급품을 떨어뜨려 주었다.

북부상륙부대는 16일 저녁까지 무어 능선을 장악하는데 실패했으나 위협을 느낀 일본군들은 16일 밤에 황급히 치차고프 항으로 철수했다.

 

16일 저녁 7시 10분에 전함 펜실베니아, 호위항공모함 나소, 구축함 애브너 리드, 아멘, 프루잇, 에일윈 및 미드는 애투 섬 북방으로 물러났다.

저녁 9시 30분에는 하역을 끝낸 수송함 제일린, 해리스, 그리고 J. 프랭클린 벨이 애닥 섬으로 떠났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17일 오전에 북부상륙부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무어 능선을 점령했다.

미군은 그곳에서 일본군이 급히 후퇴하면서 미처 옮기지 못한 상당량의 식량, 탄약 및 군복 등 보급품을 찾았는데 특히 일본군의 방한복은 병사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반면 일본군은 대량의 보급품을 상실하는 뼈아픈 타격을 입었다.

 

북부상륙부대가 무어 능선으로 진출함에 따라 매서커 만 주변을 지키던 일본군의 배후가 노출되었으므로 매서커 만의 일본군들도 17일 밤에 치차고프 항으로 후퇴했다.

그리하여 18일 아침에 제7정찰중대가 K/3/17 중대와 자민 고개의 서쪽 능선에서 만남으로써 북부상륙부대와 남부상륙부대가 연결되었다.

다음날인 19일에는 전임 사단장 브라운 소장이 요청했던 제1/4대대가 매서커 만에 상륙했다.

 

북부상륙부대와 남부상륙부대의 연결은 애투 섬 탈환전의 전환점으로 이후 미군에서는 아무도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전환점이라는 말이 곧 전투가 끝났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실 일본군은 주력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다만 치차고프 항 주변의 최종방어선으로 물러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열흘 이상 치차고프 항 주변의 일본군 방어선을 둘러싸고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야마자키 대좌는 박격포나 기관총을 중심으로 약간의 소총수들을 배치한 작은 팀을 여러 개 만들어서 방어선에 배치했다. 

이러한 소규모 전투팀은 참호나 자연적인 동굴에 의지하여 진지를 구축했으며 이러한 진지들은 서로 도울 수 있도록 자리잡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화력지원이 원활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미군 병사들은 이러한 기관총좌와 박격포좌들을 근접전으로 제거해야만 했다.

전투는 치열했고 많은 경우 백병전까지 가서야 승부가 났다.

 

K/5/32 중대의 조 마르티네즈 일병은 대대의 공격이 돈좌되자 자신의 BAR 를 들고 단신으로 일본군의 동굴로 뛰어들어 동굴 내의 일본군을 모두 사살했다.

잠시 후 동굴에서 나온 마르티네즈 일병은 탄창을 갈아넣은 후 다른 동굴로 뛰어들어 성공적으로 소탕했으나 이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어 곧 사망했다.

마르티네즈 일병은 상병 진급과 함께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제4연대의 바넷 상병은 5월 22일 전투에서 일본군 동굴 옆으로 접근해 수류탄을 던져 넣고 돌입하는 방식으로 하루 만에 일본군 47명을 사살하여 수훈장을 받았다.

애투 섬 전투에서는 바넷 상병과 제17연대장 짐머만 대령을 위시하여 13명이 수훈장을 받았다.

 

보병들이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제13전투공병대대장 제임스 그린 중령이 지휘하는 전투공병들은 보급이라는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매서커 만에는 제50전투공병대대의 4개 중대 모두와 제13전투공병대대의 3개 중대가 상륙했고, 북쪽의 홀츠 만에는 제13전투공병대대의 1개 중대가 상륙했다.

전투공병들은 해안의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하여 매서커 만에서 툰드라가 얇은 곳을 찾아 불도저로 벗겨내고 길을 만들었다.

매서커 계곡을 반으로 가르는 산등성이(Hogback) 부근에서 단단한 땅을 찾지 못하자 산등성이 정상에 권양기를 설치하여 불도저를 커다란 나무판자에 싣고 툰드라 위로 끌어당겨 산등성이 정상까지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산등성이의 정상은 툰드라가 얇았으므로 불도저가 약 30cm - 60cm 정도만 벗겨내면 길이 나왔다.

불도저는 산등성이의 정상을 따라서 길을 닦았다.

해안에서 보급품을 실은 트럭들은 산등성이 부근까지 가서 거기서 권양기에 이끌려 산등성이에 도달한 다음 정상의 길을 따라 사라나 고개까지 갔다.

사라나 고개 너머는 트럭 통행이 불가능했으므로 전투공병들이 손수레를 이용하거나 등에 지고 보급품을 날랐다.

 

보급로에는 소규모의 일본군들이 수시로 출몰했으므로 공병들은 그때마다 보급품을 내려놓고 전투를 벌여야 했다.

미군이 치차고프 항 주변의 일본군 최종 방어선에 도달하자 전투공병들은 5월 25일에 사라나 고개의 남동쪽이자 길버트 능선이 시작되는 고지에 보급기지를 만들었다.

일단 전선 가까이 보급기지가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그 주변에 포병대와 각 대대의 본부를 비롯하여 식당 및 야전병원 등이 들어서면서 전선 지휘소를 형성했다.

보급기지가 자리잡은 고지는 공병고지라고 불렸는데, 공병고지는 전투 기간 내내 일본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고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본군이 실시한 반자이 돌격의 목표가 되었다.

 

전투공병들은 공병고지 너머 전선까지 트럭들이 도달할 수 있도록 계속하여 도로를 건설했다.

급경사의 계곡에서 불도저들이 미끄러져 내려가 땅에 처박히는 사고를 여러 번 겪으면서 5월 29일에 드디어 공병고지와 치차고프 계곡을 연결하는 도로가 완성되었다.

 

그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공습을 계속했다.

5월 17일과 18일에는 기상이 나빠서 모든 항공작전이 취소되었고, 19일부터 재개되었다.

19일에 6대의 B-24 폭격기가 치차고프 항을 폭격했고, B-25 쌍발폭격기 편대가 2번에 걸쳐 사라나 만의 일본군 진지에 1,200m - 1,350m 고도에서 폭격을 가하여 136kg 짜리 폭탄 87개를 투하했다.

 

(노스아메리칸 B-25 미첼 쌍발 중형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0일에는 날씨가 나빠 항공작전이 불가능했다.

21일에 18대의 P-38  전투기가 초저공 비행으로 치차고프 항 부근의 일본군 진지에 낙하산 폭탄을 투하했다.

6대의 B-24 폭격기가 애투 섬에 도달했으나 안개가 걷히질 않아 4시간 동안 배회하다가 키스카 섬으로 가서 그곳의 잠수함 기지를 폭격했다. 

 

22일에 어뢰를 장착한 일본군의 1식 육상공격기 19대가 구축함 펠프스와 포함 찰스턴을 공격했는데 해군 함정들은 어뢰를 1발도 맞지 않고 대공포로 반격을 가하여 1대를 격추했다.

이날 제11육군항공대는 안개가 짙어서 일본군이 공격해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애투 섬 상공을 비워 두었다.

 

다음날인 23일에 일본군이 또다시 17대의 1식 육상공격기를 보내어 매서커 만의 미군들을 폭격하려고 시도했다.

이번에는 제임스 와트 중령이 이끄는 이루어진 P-38 전투기 5대가 애투 섬 중앙에서 요격했다.

프레드릭 무어 중위가 3대를 격추하고, 와트 중령과 해리 히긴스 대위가 각 1대씩 총 5대를 격추하자 나머지 일본기들은 폭탄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미군 측에서는 편대장 와트 중령과 존 게디스 대위가 1식 육공의 방어화력에 맞아 격추되었는데 존 게디스 대위는 매서커 만에 비상착수하여 아이다호의 킹피셔 정찰기에 구조되었으나 와트 중령은 전사했다.

 

(록히드 P-38 라이트닝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4일에는 알류샨 열도의 날씨를 살피는 B-24 폭격기가 돌아가는 길에 치차고프 항에 227kg 짜리 폭탄 6발을 떨어뜨렸다.

B-24 폭격기 5대는 1,700m - 1,800m 고도에서 45kg 짜리 폭탄을 떨어뜨리고 일본군 참호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때 폭탄 1발이 미군 전선에 떨어졌으나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B-25 쌍발폭격기 5대는 136kg 짜리 폭탄 40개를 일본군 진지와 대공포좌에 떨어뜨렸고, 전투기들은 24시간 내내 애투 섬 상공을 지켰다.

 

25일도 폭격 양상은 비슷했으며 B-24 폭격기 1개 편대와 쌍발 중형폭격기 2개 편대가 합계 18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26일 또한 B-24폭격기 8대와 쌍발중형폭격기 2개 편대가 폭격을 가하고 P-38 전투기 2개편대가 상공을 엄호했다.

 

(콘솔리데이티드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동안 보병들은 일본군을 계속 압박하여 5월 28일이 되자 일본군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지경으로 몰렸다.

5월 28일 오후에 일본군 방어선을 정찰하던 미군 정찰대가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공터에 일본군 부상자들이 누워 있고 주변에 여러명의 일본군들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 술에 취해 비틀거렸고 일부는 괴성을 지르거나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잠시후 군의관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나더니 부상자들에게 아마도 몰핀으로 보이는 주사를 놓기 시작했고 몰핀을 맞은 부상자들은 한명씩 권총으로 자살하기 시작했다.

쌍안경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군 정찰대가 너무 놀라서 포격을 요청하는 것도 잊고 바라보는 사이 부상자들의 자살이 끝나고 일본군들은 사라져 버렸다.

정찰대는 복귀하여 그들이 목격한 상황을 보고했고 즉시 전선의 초소들에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으나 더 이상의 조치는 없었다.

사실 그날 정찰대가 본 것은 몇시간 후에 닥쳐올 무시무시한 사태를 알리는 전조였으며 결코 초소의 경계를 강화하는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었으나 당시는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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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애투 탈환전(5) - 교착

 

홀츠 만에 상륙한 제1/17대대가 1943년 5월 12일 아침에 눈을 뜨자 안개가 걷혔다.

제1/17대대는 자신들이 목표인 X 고지에서 800m 정도 떨어져 있다는 걸 알았다.

병사들이 전진하자 밤새 X 고지를 차지한 일본군들이 총탄이 쏟아붓기 시작했다.

 

제1/17대대는 화력지원을 요청했는데 미처 해안에 방열하지 못한 105mm 곡사포 및 75mm 곡사포는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포격을 시작했다.

따라서 그 빈자리는 해군이 메꾸었다.

전함 펜실베니아가 제3해안상륙통제반의 요청에 따라 14인치 고폭탄과 5인치 포탄으로 X 고지를 타격했다.

정오 경에는 나소의 함재기들도 날아와서 X 고지에 45kg 짜리 파편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잠시 후에는 제11육군항공대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폭격을 가했다.

육군 항공기들은 12일 하루 동안 대부분 홀츠 만 부근을 공격했다.

227kg 짜리 폭탄과 10kg짜리 낙하산폭탄을 장비한 6대의 P-38 전투기로 이루어진 편대가 4번 날아와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약 30m- 300m 의 저공에서 공습을 감행한 P-38 전투기들은 일본군의 대공포화로 1대를 상실하고, 4대가 피해를 입었다.

 

B-25 쌍발폭격기 6대로 이루어진 편대가 136kg 짜리 폭탄 36발을 홀츠 만의 동쪽 계곡에 건설 중이던 활주로와 주변의 대공포좌에 떨어뜨렸고, 8대의 B-25 폭격기들이 136kg 짜리 폭탄 48발을 X 고지에 투하했다.

B-24 폭격기 6대가 45kg 짜리 폭탄 240발을 애투 섬의 대공포좌에 투하했고, 다른 1대는 X 고지 부근에 고립되어 있던 알래스카 정찰대에 보급품을 투하했다.

 

항공연락장교가 홀츠 만에서 강력한 일본군의 대공포 진지 2곳을 지목했다.

오후 2시에 전함 아이다호가 일본군의 대공포 진지를 향하여 12,800m 거리에서 14인치 고폭탄 48발을 발사했다.

 

양륙 작업이 이루어지던 비치 레드는 하루 종일 일본군으로부터 간헐적인 포격을 받았다.

구축함 펠프스가 일본군 야포를 침묵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5인치 포탄으로 치차고프 항과 홀츠 만을 포격했으며, 전함 아이다호는 오후 3시 37분부터 제1/17대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14인치 고폭탄 200 발을 X 고지에 발사했다

미군은 이렇게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면서 상당량의 포탄과 폭탄을 소모했으나 일본군의 야포 세력을 박멸하는데 실패했으며 일본군의 방어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지도 못했다.

 

일본군의 참호는 포탄이 닿기 힘든 곳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고, 참호의 벽에 한 사람이 웅크리고 들어갈 만한 대피용 구멍을 파놓았다.

포격과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이 구멍에 숨어 있던 일본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결국 제1/17대대는 접근전으로 일본군들을 참호에서 몰아내어야 했다.

백병전을 동반한 치열한 전투 끝에 제1/17대대는 12일 밤까지 X 고지의 일부를 점령했으나 아직도 부근에는 일본군들의 방어선이 건재했다.

결국 제1/17대대는 13일과 14일에 X 고지의 일본군들을 몰아내느라고 이틀 동안 겨우 270m 정도 전진했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남쪽의 매서커 만에서 만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전함 네바다의 함포 사격으로 일본군의 산포 1문을 파괴했으나 이어서 제2/17 및 제3/17대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일본군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12일 아침이 되었을 때 동쪽의 비치 블루에 상륙했던 제2/17대대는 전날의 목표인 매서커  만과 사라나 만을 연결하는 고개에서 약 1,0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제2/17대대가 전진하기 시작하자 정면의 매서커 - 사라나 고개와 동쪽의 길버트 능선으로부터 총탄이 쏟아졌다.

이 와중에 제17연대장 에드워드 얼 대령이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전사했고, 제7사단의 참모장인 웨인 짐머만 대령이 연대장 직을 이어받았다,

상륙한 병력의 대부분이 제17연대 소속인 상황에서 상륙 다음날에 제17연대장을 잃은 것은 크나큰 타격이었다.

제2/17대대는 12일 밤까지 매서커 - 사라나 고개에 바짝 접근했으나 이후 이틀 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에 14일이 되어서야 겨우 고개의 일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매서커 만의 서쪽을 담당한 제3/17대대 또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제3/17대대도 일본군의 총탄을 뚫고 12일 저녁까지 매서커 만과 홀츠 만을 연결하는 자민 고개에 바짝 접근했으나 이후 이틀 동안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14일에야 자민 고개의 끄트머리에 발을 들여놓았다.

5월 14일에 브라운 소장의 요청에 따라 악천후를 무릅쓰고 출격했던 나소의 함재기 중 3대가 돌풍에 휘말려 계곡에 추락했다.

 

그동안 해안에서는 물자 양륙과 증원병력의 상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12일부터 공격수송함 J. 프랭클린 벨이 비치 레드에 보급품을 내려놓기 시작했고, 13일에는 예비대인 제3/32대대를 싣고 애닥 섬에서 대기 중이던 증기선 치리코프가 비치 레드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다.

남쪽의 메서커 만에서는 12일에 수로측량선 하이드로그래퍼가 수심을 측정하여 안전한 수로를 확보하자 수송함들이 해안에 접근하여 보급품들을 하역하고 제2/32대대를 상륙시켰다.

13일에는 애닥 섬에서 도착한 공격수송함 그랜트가 예비대인 제1/32대대를 상륙시켰다.

 

애투 탈환전 기간에 일본잠수함 4척(I-7, I-31, I-34, I-35) 이 애투 섬 부근에 몰려들어 미함대를 위협했다.

5월 12일 오후 6시 25분에 I-31 은 전함 펜실베니아를 노리고 4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구축함 에드워드와 패러것이 달려들어 폭뢰를 떨어뜨렸으나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I-31 은 6월 13일에 키스카 근해에서 구축함 프레지어에게 격침된다.

 

펜실베니아는 5월 15일 오전 11시 40분에도 어뢰공격을 받았다.

I-35 가 어뢰를 발사했으나 아슬아슬하게 함미를 스쳐 지나갔다.

또다시 구축함들이 공격했으나 역시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같은 날 공격수송함 J 프랭클린 벨도 I-34 에게 어뢰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빗나갔다.

 

14일까지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15일에 전함 펜실베니아 함상에서 미군 고위 지휘관들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제7사단장 브라운 소장은 작전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지형, 기후 및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 탓으로 돌리면서 이미 투입된 제32연대에 더하여 셰미야 섬에 상륙할 예정이던 제4보병연대와 제18공병연대의 투입을 요청했다.

북태평양 상륙군 사령관 록웰 해군소장은 처음에 브라운 소장의 증원 요청을 거부했으나 몇 시간 동안의 토론을 거쳐 브라운 소장의 건의를 수용하여 북태평양군 사령관 킨케이드 소장에게 보고했다.

 

한편 애닥 섬에 있던 킨케이드 소장과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브라운 소장의 지휘 능력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제7사단장 브라운 소장이 펜실베니아 함상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메서커 만에 설치된 사단 사령부로 돌아와 보니

 

"제대로 성공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증원 타령만 한다."

 

는 드윗 중장의 준엄한 질책이 담긴 전문이 도착해 있었다.

드윗 중장의 이 전문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실제로 15일 오후에 드윗 중장은 앨버트 브라운 소장을 제7보병사단장 직위에서 해임하겠다는 킨케이드 제독의 제안에 동의하고, 후임으로 애닥 섬 사령관이던 유진 랜드럼 소장을 추천했다.

랜드럼 소장은 16일 오후에 애투 섬에 도착하여 16일 오후 5시부에 제7보병사단의 지휘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새로 제7보병사단을 지휘하게 된 랜드럼 소장은 해군의 화력지원을 대부분 잃게 되었다.

전임 사단장 브라운 소장의 계획에 따르면 전투는 3일 만에 끝날 예정이었고, 이에 따라 해군은 첫 3일간 대량의 포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 결과 14일이 되자 펜실베니아의 14인치 고폭탄이 모두 떨어졌다.

제1/17대대와 동행하던 해안사격통제반은 대신 14인치 철갑탄을 발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일본함대와의 교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던 록웰 소장은 지원 포격에 철갑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상태였다.

펜실베니아는 대신 5인치 부포로 화력지원을 계속했고, 구축함 펠프스가 해안에 바짝 접근하여 화력지원을 했는데 오후 8시 43분에 해안까지의 거리를 측정해 본 결과 펠프스는 해안에서 불과 450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다음날인 15일이 되자 전함 네바다와 아이다호의 14인치 고폭탄도 바닥났다.

게다가 일본잠수함의 위협이 계속되자 록웰 소장은 5월 17일에 대부분의 해군 함정들을 철수시켰다.

랜드럼 소장에게 남겨진 해군 함정이라고는 화력지원용으로 구축함 3척(펠프스, 에일윈, 미드)과 포함 찰스턴,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운용하는 수상기모함 카스코, 그리고 수송함과 그 호위 함정들 뿐이었다.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미군이 애투 섬에 상륙하자 미군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중순양함을 이끌고 해상에 나와 수상기모함 기미카와마루와 만났다.

기미카와마루는 애투 섬에 수상비행기들을 날려보내려 했으나 안개가 짙어서 포기했다.

그동안 애투 섬 수비대는 미군함대가 항공모함과 전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타전해 왔다.

가와세 중장은 중순양함 중심의 제5함대로 항공모함과 전함을 보유한 미국함대와 맞붙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임을 깨닫고 애투 섬 서방 640km 해상에서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5월 13일에 어뢰를 장비한 1식 육상공격기 20대가 바라무시로에서 출격했으나 안개가 짙어서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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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애투 탈환전(4) - 상륙 

 

애투 섬을 침공하려면 위험한 조류, 해도에 기입되지 않은 암초, 그리고 거의 매일끼는 안개를 극복해야 했다.

알류샨 열도 부근을 항해하는 선원들의 오랜 원칙은 바다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더 이상 섬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었다.

애투 상륙작전이 남태평양의 상륙작전보다 유리한 점이라고는 해안에 작은 모래사장들이 많아서 상륙지점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미군의 주요 상륙 지점은 북쪽의 홀츠 만과 남쪽의 매서커 만이었다.

주력의 상륙에 앞서 홀츠 만 서쪽에 최초의 상륙이 실시되었다.

5일 전에 애투 섬에 도착하여 북쪽 해안을 정찰하던 잠수함 나왈과 노틸러스는 5월 11일 새벽에 제7스카웃 중대 약 200 명을 상륙시켰다.

이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5월 11일 오전 3시 9분부터 5시 10분에 걸쳐 홀츠 만의 상륙지점인 비치 레드에서 서쪽으로 약 6km 정도 떨어진 비치 스칼렛에 상륙했다.

스카웃 중대의 뒤를 이어 고속수송함 케인에 타고있던 제7정찰중대 약 200 명이 상륙했다.

원래 제7정찰중대는 스카웃 중대가 상륙한 직후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안개가 너무 짙어서 도저히 해안에 접근할수가 없었다.

결국 케인은 펜실베니아의 레이더로부터 항로를 지시받아 11일 정오가 되어서야 겨우 제7정찰중대를 상륙시킬 수 있었다.

 

제7정찰중대가 상륙했을 때 스카웃 중대는 계곡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계곡의 남쪽 끝에 도달한 스카웃 중대는 홀츠 만을 향하여 동쪽으로 난 경사로를 힘겹게 올라갔다.

스카웃 중대가 약 650m 고도에 도달하자 마치 고개처럼 보이는 지형이 나왔는데 그 이후로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정찰 중대와 스카웃 중대로 이루어진 임시 대대를 지휘하던 윌리엄 윌로비 대위는 오후 늦게 낯선 지형으로 들어서는 모험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임시 대대는 참호를 파고 들어 앉았다.

윌로비 대위는 명령이 내리면 홀츠 만 쪽으로 진출하여 홀츠 만에 상륙하는 제1/17대대에 대항하는 일본군의 배후를 칠 임무를 맡고 있었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홀츠 만 바로 서쪽의 비치 레드에는 제17연대 제1대대가 상륙했다.

오전 9시에 해상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함교에서 함수가 안보일 정도였는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공격수송함 J. 프랭클린 벨에 탑승하고 있던 제32연대장 프랭크 컬린 대령은 상륙주정 2척에 타고 비치 레드로 향하는 정찰대에 합류했다.

정식명칭이 제1알래스카 전투정보소대로서 흔히 알래스카 정찰대라고 불리던 이 소규모 부대에는 카누를 다룰 줄 알고 애투 섬 지리에 익숙한 알류트족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주정들은 플라스틱 보트들을 매달고 있었다.

구축함 펠프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항진한 상륙주정이 해안에서 800m 떨어진 해상에 도달하자 알류트족 병사들이 보트로 옮겨타고 노를 저어 아무것도 안보이는 짙은 안개 속을 오로지 나침반과 감각에만 의존하여 뚫고 나가 무사히 상륙했다.

해안에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으므로 상륙주정에서 대기하던 정찰대도 곧 상륙했다.

 

비치 레드를 확보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1/17대대장 앨버트 하틀 중령은 제7사단장 앨버트 브라운 소장에게 대대 주력의 상륙허가를 요청했는데 공격수송함 제일린을 타고 남쪽의 매서커 만에 떠있던 브라운 소장은 안개가 걷혀 주력이 매서커 만에 상륙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대답했다.

오후가 되어 안개가 걷히면서 매서커 만에서 상륙이 시작되자 브라운 소장은 홀츠 만의 하틀 중령에게도 상륙을 허가했다.

오후 4시 15분부터 B/1/17 중대를 선두로 비치 레드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저녁까지 제1/17대대 1,100 명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을 마쳤다.

 

(홀츠 만에 상륙하고 있는 미군의 모습)

 

제1/17대대는 오후 6시 경에 최초로 일본군과 접촉했다.

정찰대가 골초프곶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서 일본군 관측소를 발견하여 제거했다.

관측소에 있던 일본군 4명 중 2명은 사살되었고 2명은 달아났다.

잠시 후 정찰대는 일본군이 쏘아대는 75mm 대공포의 사격을 받고 전진이 느려졌다.

 

제1/17대대의 주력은 정찰대를 뒤따라 천천히 남하했다.

그날의 목표는 비치 레드에서 남쪽으로 3.2km 떨어진 240m 높이의 X고지였는데, 오후 10시 30분이 되자 짙은 안개와 밤의 어둠때문에 지형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제1/17대대는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로 참호를 팠다.

제1/17대대의 정찰대는 주력과 떨어져 전방에 고립된 채로 밤을 지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X고지에 있다고 착각했다.

 

미군의 주력은 남쪽 매서커 만에 상륙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상륙을 앞두고 구형전함들이 상륙예정해안에 포격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안개로 인하여 상륙준비포격은 취소되었다.

상륙함대는 오전 8시 15분에 매서커 만에 들어와서 곧 상륙주정을 내리고 병사들을 옮겨실었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지 않아 록웰 소장은 상륙을 오후로 연기했다.

다행히 기온이 섭씨 9도 정도로 많이 춥지는 않고 파도도 잔잔해서 상륙주정에서 대기하는 병사들이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오후들어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예보가 들어오자 록웰 소장은 오후 1시 55분에 상륙명령을 내렸다.

구축함 프루잇의 선도를 따라 오후 3시 30분부터 상륙이 시작되었고 오후 4시 20분에 제2/17 대대가 비치 블루에, 제3/17대대가 비치 옐로우에 상륙했다.

제2/17 및 제3/17대대는 오후 8시까지 2,000명이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여 매서커 해안에 폭 1.6km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매서커 만에 상륙한 미군의 모습)

 

매서커 만에 상륙한 미군은 오후 6시 경에 최초로 일본군과 교전했다.

비치 블루에 상륙한 제2/17대대는 메서커 계곡을 둘로 나누는 산등성이(Hogback)의 오른쪽으로 돌아 해안에서 2,300m 쯤 들어갔을 때 동쪽의 길버트 능선으로부터 소총 및 기관총 사격을 받고 일단 멈추었다.

약 45분 후 제2/17대대는 진격을 재개했으나 다시 기관총 사격과 함께 75mm 포탄까지 날아오기 시작하자 결국 진격을 멈추었다.

제2/17대대는 11일 오후 9시에 해안으로부터 2,700m 들어간 지점에서 참호를 파고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비치 레드에 상륙한 제3/17대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산등성이의 왼쪽을 돌아 전진하던 제3/17대대는 오후 8시 30분에 서쪽의 헨더슨 능선과 정면에서 쏘아대는 사격을 받고 전진을 멈추었다.

해안에 상륙해 있던 155mm 롱톰 평사포들이 제3/17대대의 요청에 따라 포격을 퍼붓자 일본군은 사격을 멈추었으나 미군의 포격이 멈추고 제3/17대대가 전진을 재개하자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결국 제3/17대대는 제2/17대대보다 약간 더 내륙으로 들어간 지점에 참호를 팠다. 

일본군은 매서커 만 계곡을 둘러싼 길버트 능선 및 헨더슨 능선과 메커서 계곡과 홀츠 만을 연결하는 자민 고개에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5월 11일 저녁 9시 30분이 되자 비치 스칼렛에 400명, 비치 레드에 1,100 명 그리고 매서커 만에 2,000 명 등 총 3,500 명의 미군이 애투 섬에 상륙해 있었다.

 

안개 때문에 폭격과 포격은 최소한으로 실시되었다.

11일 오전 2시에 나소의 함재기들이 치차고프 항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한 후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뿌렸고 오전 10시부터는 구형전함 펜실베니아와 아이다호가 레이더 조준으로 치차고프 항에 1시간 동안 포격을 가했다.

 

매서커 만에 상륙한 주력의 양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분견대들이 매서커 계곡 양쪽에 파견되었다.

제7정찰중대의 1개 소대는 메서커 만에서 남서쪽으로 6km 떨어진 알렉사이 곶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나아가 관측소를 설치했다.

이 정찰소대는 이후 2일간 본대와 연결되지 않은 채로 매서커 만과 니콜라스 호수 사이의 지역을 감시했다.

 

F/2/17 중대의 1개 소대는 길버트 능선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대장 찰스 폴슨 중위는 경기관총 1개반과 60mm 박격포 1개 분대를 배속받은 후 상륙 당일에 매서커 만 동쪽의 급경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12일 아침에 길버트 능선의 정상에 도달한 폴슨 소대는 능선을 따라 북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길버트 방어선을 측면에서 위협하는 폴슨 소대에게 계속 병력을 보내어 공격을 가해왔다.

이틀간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치르면서 길버트 능선을 따라 전진한 폴슨 소대는 14일에 해안에서 약 2,700m 떨어진 지점에서 본대와 합류했다.

 

매서커 만의 서쪽으로도 분견대가 파견되었다.

F/2/32 중대는 메서커 만 좌익의 안전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11일에 비치 옐로우에 상륙하여 즉시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날 밤에 템낙 만에 도달한 F 중대는 일본군 관측소를 발견하고 일본군이 미처 눈치채기 전에 기습하여 제거했다.

12일부터 F 중대는 헨더슨 능선의 일본군들을 배후에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4일까지 능선 정상에 오르는 길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결국 14일에 F 중대는 매서커 만으로 돌아왔다.

 

애투 섬의 일본군은 미군의 상륙에 놀라지 않았다.

일본잠수함 1척이 상륙 2일 전에 미군함대의 일부를 발견하고 보고했으며 연합함대 사령관 고가 제독은 이 정보를 즉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전달했다.

상륙 전날에는 애투 섬의 일본군 통신부대가 애투 섬 북방 해상에서 항진 중이던 미군 함정 간의 통신을 엿들었다.

상륙 당일인 11일 오전 2시에는 미군 함재기가 치차고프 항 상공에 나타나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하고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뿌렸으며 오전 10시에는 미군 전함들이 치차고프 항에 포격을 가해왔다.

오후 3시에는 홀츠 만에서 상륙주정이 목격되었고 5시에는 남쪽 매서커 만에 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야마자키 대좌는 자신이 가진 2,630명의 병력과 75mm 산포 4문, 75mm 대공포 12문, 20mm대공기관포 10문으로 모든 지점을 방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전력을 매서커 만과 홀츠 만을 연결하는 자민 고개 부근에 집중시켰다.

 

한편 일본해군 수뇌부는 애투 섬 침공을 계기로 미해군과 결전을 시도했다.

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애투 섬으로 수상기를 전달하러 가던 기미키와마루와 만나 미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3척을 이끌고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다.

 

야마모토 제독의 전사 이후에 연합함대 사령관이 된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중순양함 묘코와 하구로를 제5함대에 증원한 후 5월 16일에 전함 3척(무사시, 공고, 하루나), 개장 항공모함 1척(히요), 중순양함 2척(도네, 치쿠마) 그리고 구축함 5척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트럭을 출발하여 5월 21일에 도쿄 만에 도착했다.

도쿄 만에는 이미 정규항공모함 2척(쇼가쿠, 즈이가쿠), 경항공모함 1척(즈이호), 중순양함 3척(스즈야, 구마노, 모가미), 경순양함 2척(아가노, 오요도), 구축함 11척이 급유함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으나 일본해군의 대응은 애투 섬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대신 일본해군의 강력한 함정들이 대거 빠져나감으로써 솔로몬 해역에서 터너 제독이 6월 말에 실시한 렌도바 상륙은 약한 저항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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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애투 탈환전(3) - 접근  

 

애투 섬에 상륙할 제7보병사단의 병력들은 1943년 4월 21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승선을 시작했다.

진짜 목적지를 숨기기 위하여 몇몇 기만조치가 취해졌다.

제7사단의 군의관들은 열대질병에 대하여 강의를 들었으며 작전에 참가하는 장교들이 북대서양의 항로나 아르헨티나의 상황에 대하여 연구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준비과정에서 미군은 한가지 실수를 했다.

애투 섬 전투가 별다른 어려움없이 3일이면 끝날 것이라고 낙관한 제7보병사단장 앨버트 브라운 소장이 방한의류 및 등산장비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등한히 한 것이었다.

애투 섬 공격부대는 1943년 5월 1일에 콜드베이에 입항했는데 이날 콜드베이에는 얼어붙는 듯한 추위가 찾아와서 방한의류가 없는 상륙부대의 고생을 예고하는 듯 했으나 이제 와서 대량의 방한의류를 확보할 시간은 없었다. 

 

콜드베이에서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을 비롯한 고위 지휘관들은 한데 모여 가장 최근에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작전계획을 점검하고 수정했다.

 

그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 섬을 공습하고 있었다.

1943년 4월 첫주에는 시속 180km 가 넘는 강풍이 일주일 내내 몰아치는 바람에 알류샨 열도에서 비행기들이 뜰 수가 없었다.

4월 8일에 폭풍우가 그치고 맑은 날이 이어지자 제11육군항공대는 일본군의 키스카 점령 이래 가장 치열한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애투 상륙 기도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애투 섬은 거의 공습하지 않았다.

제11육군항공대는 4월에 226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키스카에 1,145회 출격했는데 애투 섬에는 30회만 출격했다.

키스카 섬에서 가까운 앰치트카의 비행기들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 하루에 최대 8번까지 출격했다.

 

4월 8일부터 21일까지 2주일 동안 키스카 섬은 매일 최소한 60 소티 이상의 공습을 받았다.

제11육군항공대는 4월 15일에 112 소티를 출격하여 12시간 동안 92톤의 폭탄을 키스카에 떨어뜨렸다. 

키스카 섬의 일본항공력이 전멸했기 때문에 앰치트카에 진출한 P-38 및 P-40 전투기들도 모두 폭탄을 달고 키스카를 폭격했다.

 

앰치트카의 전투기들이 사용한 폭탄은 다양했다.

기본적으로 P-38 전투기는 227kg 짜리 폭탄 2발, P-40 전투기는 227kg 짜리폭탄 1발과 9kg 짜리 파편폭탄 또는 소이탄 6발을 달고 출격했으나 가끔씩 450kg 짜리나 136kg 짜리 폭탄도 사용했다.

안전을 위하여 저공 폭격에 집착하지는 않았으나 구름이 낮게 끼어있는 날은 기습적으로 저공 폭격을 실시하여 막사나 레이더 등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폭탄을 떨어뜨린 전투기들은 막사, 대공포, 그리고 건설 중이던 활주로 등을 기총소사했다.

4월 8일 - 21일 사이에 앰치트카에서는 키스카 섬을 목표로 전투기들이 685회 출격하여 216톤의 폭탄을 떨어뜨렸고, 쌍발 폭격기 및 중폭격기들이 288회 출격하여 506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 과정에서 제11육군항공대의 P-40 전투기 1대와 B-24 폭격기 1대가 일본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고 이외에도 전투기 9대를 비전투 손실로 잃었다. 

 

4월 말이 되자 제11육군항공대는 점차 애투 섬에 대한 폭격을 늘리기 시작했다.

앰치트카의 P-38 전투기들이 애투 섬을 폭격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항속거리가 짧은 P-40 전투기는 계속 키스카 섬을 폭격했다.

애투 섬 상륙을 앞둔 10일 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애투 섬에 95톤, 키스카 섬에 155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동안 해군제4초계비행단의 벤츄라 정찰기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애투 섬 서쪽을 초계하면서 일본함정의 접근을 감시했고 맥모리스 소장과 기펜 소장의 순양함 부대가 애투 서쪽 해상을 순찰했다.

4월 10일에 일본구축함 2척이 애투 섬 보급을 시도하다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부터 폭격을 받았다.

폭탄은 빗나갔으나 일본구축함들은 애투 섬 돌입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PV-1 벤츄라 정찰기. 자세한내용은 여기로)

 

4월 말이 되자 일본제5함대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미국의 목표가 애투 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안개가 짙어지는 5월 말에 애투 섬의 방어를 강화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미군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1943년 5월 4월 아침에 록웰 소장의 공격부대가 악천후 때문에 예정보다 24시간 늦게 콜드베이를 출항했는데 파도가 높아서 전함의 주포에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앙각을 최대한 높여야 했다.

29척으로 이루어진 공격부대는 알류샨 열도의 남쪽을 따라 항해하다가 세괌 섬과 아묵타 섬 사이의 아묵타 해협을 통하여 베링 해로 들어간 다음 키스카 섬을 북쪽으로 통과하여 애투 섬 북방 185km 지점에 도달했다.

상륙 예정일인 5월 7일에 정찰기들이 애투 섬을 정찰했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상륙이 불가능했으므로 록웰 소장은 상륙을 9일로 이틀 늦추었다.

 

(알류샨 열도. 출처 :  http://www.ibiblio.org/hyperwar/AAF/IV/maps/AAF-IV-17.jpg 에서 일부 발췌)

 

해상에서 대기하는 동안 일본함대의 출현에 대비하여 구형전함 3척을 중심으로 한 지원전단이 서쪽으로 나아가 초계선을 펼쳤으나 일본함정과 접촉하지 못했다.

당시 애투 섬 서쪽 해상에서는 가벼운 호위를 받는 일본의 수송기모함 기미카와마루가 수상정찰기 몇 대를 애투로 날려보내기 위하여 접근했는데 초계선의 남쪽을 통과했기 때문에 미군 전함에 포착되는 불운은 피했다.

 

8일이 되자 파도가 너무 높아서 전함의 40mm 대공포좌까지 파도가 그대로 들이쳤다.

록웰 소장은 상륙일을 11일로 다시 이틀간 늦추고 해상급유를 실시했다.

9일부터는 안개가 끼기 시작하여 10일에 초계를 마친 전함들이 상륙함대와 합류할 때쯤에는 레이더를 사용하여 서로의 위치를 확인해야만 했다.

 

마침내 공격부대는 남하 준비를 시작했는데 안개는 점점 더 짙어졌다.

남하를 위하여 진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구형의 SC 레이더를 장비한 구축함형 소해함 시카드는 레이더를 믿지 못하고 앞선 함정의 항적을 따라 갔는데 이윽고 갑판에서 해면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어지자 스톱워치를 사용하여 위치를 추정하면서 항해했다.

그러다가 결국 시카드는 구축함 맥도너휴를 들이받고 말았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으나 2척 다 항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시카드는 상륙주정의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었고 맥도너휴는 사격통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 2척의 부재는 보기보다 큰 손실이었다.

 

예정보다 3시간 늦게 공격부대는 안개를 헤치고 애투 섬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상륙예정시간은 1943년 5월 11일 오전 10시 4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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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애투 탈환전(2) - 준비  

 

애투 섬을 지키던 일본군은 야마자키 야스오 대좌가 지휘하는 제303독립보병대대가 주력이었으며 1942년 가을과 겨울을 거치면서 점차 증강되어 미군의 애투 섬 상륙 당시에는 약 2,630 명규모였다. 

전투 병력의 핵심은 1개 보병대대, 75mm 대공포와 20mm 기관포를 보유한 3개 대공포대, 그리고 75mm 산포를 보유한 1개 산포중대였으며, 주요 화기는 75mm 산포 4문, 75mm 대공포 12문, 그리고 20mm 기관포 10문이었다.

그리고 공병 1개 대대가 있었는데 이들의 임무는 홀츠 만의 동쪽 계곡에 비행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선박공병 1개 소대, 무선 1개반과 의무병들을 포함하여 육군은 약 2,500 명이었다.

해군은 에모도 소좌가 지휘하는 통신, 연락, 항공요원이 약 100명이었다.

이외에 민간인으로 야전 우편국을 운용하던 삿포로 체신분국의 사토 사무관 이하 26명과 해군보도반원 1명, 그리고 아사히 신문의 카메라맨이 있었다.

 

(애투 섬의 동쪽 부분 출처 : http://www.loran-history.info/Attu/Attu_island_2096dpi.jpg 에서 일부 발췌)

 

야마자키 대좌의 지휘소는 홀츠 만과 사라나 만 사이의 작은 만인 치차고프 항에 있었으며 일본군의 주력은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 부근에 집중되어 있었다.

각각 75mm 대공포 4문으로 이루어진 대공포대 3개 중 하나는 홀츠 만의 서쪽 계곡을 감제했고, 다른 하나는 동쪽 계곡을 감제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치차고프 방어선의 일부였다. 

홀츠 만과 매서커 계곡을 연결하는 고개는 75mm 산포중대가 감제하고 있었으며 그 중의 1개 소대는 매서커 계곡 자체도 감제하고 있었다.

메서커 계곡과 사라나 만을 굽어보는 길버트 능선에는 기관총좌와 박격포좌가 만들어져 있었고 매서커 계곡의 서쪽에 있는 헨더슨 능선에도 일본군의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미군은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 주위가 일본군 방어선의 중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찰기들이 템낙 만, 사라나 만, 그리고 매서커 계곡 입구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감지했으나 능선에 잘 위장해 둔 진지들은 찾아낼 수 없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은 처음에 애투 섬의 일본군 수비대를 3개 소총중대, 약 500 명으로 추산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숫자에 대한 평가는 점점 높아져서 4월 초가 되자 1,600명 - 1,800명 선이 되었다.

 

이에 따라 포병 1개 대대의 지원을 받는 1개 연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상륙부대의 규모도 커졌다.

애투 상륙부대는 1개 야포대대를 배속받은 제17연대전투단, 1개 야포포대를 배속받은 제2/32대대, 제7사단의 스카웃 중대와 정찰중대, 제78 해안포연대(대공), 그리고 제13 및 제50전투공병대대였다.

제32연대전투단의 나머지 병력들은 요청이 있으면 24시간 내로 투입될 수 있도록 수송함에 실린 채 애닥 섬에서 대기했다.

예비대를 포함하여 애투 상륙부대는 약 11,000 명이었다.

 

애투 섬 상륙작전을 총괄적으로 지휘하는 사람은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이었다.

킨케이드 소장은 애투 상륙부대와 예비대 이외에도 제11육군항공대, 보급 및 지원을 담당한 해군 함정들, 그리고 애투 섬 탈환 후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 사이에 있는 셰미야 섬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건설할 제4보병연대와 제18공병연대를 직접 통제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북태평양 상륙군 사령관 프랜시스 록웰 소장이 호위항공모함과 구형전함을 비롯한 전투함, 수송함, 소해함들과 상륙부대를 통제했으며 일단 상륙이 이루어지면 제7보병사단장 앨버트 브라운 소장이 상륙부대를 통제하도록 되어 있었다.

 

미해군은 애투 상륙작전에서 미래의 핵심전력인 구형전함과 호위항공모함을 최초로 투입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전함들은 해전의 주역 자리를 항공모함에게 빼앗기면서 그 위상이 추락했다.

그나마 속력이 빠른 신형전함들은 항공모함의 호위함으로서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에도 여러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속력이 느린 구형전함들에게는 그런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항공모함의 호위에 구형전함을 활용하라는 킹 제독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구형전함들은 항상 예비로 후방에서 대기하면서 제2선 전력 취급을 받아왔다.

애투 섬 상륙작전에 참가한  펜실베니아, 아이다호, 그리고 네바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정박하면서 수병들이 하도 시내를 돌아다녀

 

"마켓 가 특공대"

("Market Street Commando")

 

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펜실베니아는 진주만 기습 이후 대대적인 개장을 받아 함교를 현대화했으며 8문의 5인치 양용포와 40문의 40mm 보포스 대공포를 새로 장착하여 면모를 일신했지만 퇴물 취급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애투 섬 상륙작전 이후 구형전함들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애투 섬 상륙작전에서 미해군은 구형전함들의 활약에 만족했고 이후 구형전함들은 태평양해역군의 상륙작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핵심 전력으로서 여기저기서 서로 모셔가려는 귀하신 몸이 되었다.

실제로 나중에 맥아더 장군 아래에서 제7함대 사령관이 되는 킨케이드 제독은 레이테 해전이 끝난 후 태평양함대로부터 빌려온 구형전함을 돌려주지 않고 니미츠 제독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끝까지 매달린 끝에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구형전함 4척을 얻어간 적도 있었다.

 

호위항공모함 또한 애투 섬 상륙작전을 계기로 상륙작전의 총아로 거듭났다.

원래 호위항공모함은 수송선단을 호위하거나 항공기 수송이 주요 임무로서 상륙작전같은 본격적인 전투임무를 상정하고 건조한 함종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해군은 코만도르스키 해전의 경험으로부터 애투 섬 상륙작전에서 제11육군항공대가 제대로 항공지원을 해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애투 섬 상륙작전에 항공모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력이 분산된 일본제1기동부대를 격파한 이래 태평양함대는 정규 항공모함들은 모두 뭉쳐 운용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애투 섬 상륙작전에서는 대신 호위항공모함 나소를 투입했다.

미해군이 구형 전함과 마찬가지로 상륙작전에서 호위항공모함의 효용성에 만족함에 따라 호위항공모함 또한 수송선단을 호위하거나 항공기를 수송하는 화려하지 않은 임무만 맡다가 갑자기 상륙작전의 핵심 전력으로서 전사의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호위항공모함의 인기 또한 대단하여 타라와 전투가 끝난 후 해병대는 호위항공모함 여러 척을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하여 해군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후 태평양 함대에서는 대규모 상륙작전 시 정규항모들과 고속전함들은 고속항모기동부대를 형성하여 수송함대보다 수백 km 이상 앞서 나가면서 적의 비행장을 제압하고 상륙을 방해하려는 적의 주력함대를 쳐부수는 역할을 맡았다.

반면 구형전함과 호위항모들은 상륙 지점까지 수송함대를 호위하며 일단 상륙이 이루어지면 지원포격과 근접항공지원 및 교두보 상공 초계를 담당했다.

이렇게 상륙작전 시 고속항모기동부대와 구형전함 및 호위항공모함의 임무분담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 계기가 바로 애투 섬 상륙작전이었다. 

 

애투 섬에 상륙하는 뭍게(Landcrab)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은 다음과 같다.

 

공격부대(제51임무부대) : 프랜시스 록웰 소장

 

지원전단(제51.1임무전단) : 구형전함 3척(네바다, 펜실베니아, 아이다호), 호위항공모함 1척(나소), 수상기모함 1척(윌리엄슨), 구축함 8척

함재기: 와일드캣 29대(3대는 정찰용)

 

수송전단(제51.2임무전단) : 공격수송함 4척(해리스, 제일린, 헤이우드, J. 프랭클린 벨), 고속수송함 1척(케인), 증기선 1척(페리다), 구축함 4척, 기뢰부설함 2척

 

소해전단(제51.3임무전단) : 소해함 4척(페리, 엘리엇, 챈들러, 롱)

 

상륙부대 : 제17연대전투단, 제2/32대대, 제78해안포연대(대공), 제13 및 제50전투공병대대, 제7사단 스카웃 중대와 정찰중대

 

제16임무부대 :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

 

지상발진 항공기 부대(제16.1임무그룹)

 

공습부대(제16.1.1임무유닛) : B-24 폭격기 28대, B-25 쌍발 폭격기 30대, P-38 전투기 25대, P-40 전투기 73대(28대는 캐나다공군)

공중수색부대(제16.1.2임무유닛): 벤츄라 정찰기 24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30대, 수상기모함 5척(카스코, 길리스, 틸, 아보셋, 헐버트)

 

알래스카 지구 방어 및 지원전단(제16.2임무그룹) : 구축함 1척, 포함 1척, 코르벳(캐나다해군) 2척, 전차상륙함 4척, 전차상륙정 8척, 소해함 4척, 기뢰부설함 1척,  예인선 1척, 대잠망설치함 2척, 연안경비정, 초계정 및 항만소해정 약간척

 

어뢰정 전단(제16.3임무그룹) : 어뢰정 11척

 

잠수함 전단(제16.5임무그룹) : 함대형잠수함 2척(나왈, 노틸러스), S 보트 11척

 

남부방어전단(제16.6임무그룹) : 경순양함 4척(롤리, 디트로이트, 리치먼드, 산타페), 구축함 5척

 

북부방어전단(제16.7임무그룹) : 중순양함 3척(위치타, 샌프란시스코, 루이스빌), 구축함 4척

 

애투 증원 부대(제16.8임무그룹) : 제2/32대대를 제외한 제32연대전투단. 공격수송함 1척(그랜트), 증기선 7척

 

급유 및 지원전단(제16.9임무그룹) : 급유함 6척, 구축함 모함 2척

 

셰마 점령부대(제16.10임무그룹) : 제4보병연대, 제18공병연대, 공격수송함 1척, 화물수송함 1척, 증기선 1척, 소형연안수송선 2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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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애투 탈환전(1) - 애투 섬 

 

알류샨 열도의 끝에 있는 애투 섬은 동서로 약 64km, 남북으로 최대 약 32km 정도의 크기이다.

바다에서 상륙하면 좁은 해안에 이어 바로 600m - 900m 높이의 산봉우리로 연결되며, 그 사이를 작은 개울들이 흐르고 있다.

바위투성이의 지형은 전반적으로 험하고 황량하며 계곡 바닥은 흑토 위에 이끼류가 자라는 툰드라로 깔려 있다.

거의 일년 내내 단단하게 얼어있는 알래스카나 캐나다의 툰드라와는 달리 이곳의 툰드라는 많은 기간 동안 사람이 겨우 걸어다닐 정도로 물렁거리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알래스카나 캐나다 내륙보다 추위는 덜하지만 대신 한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는 날이 많다.

 

애투 섬의 동쪽 끝은 3개의 반도가 뻗어나와서 4개의 만을 이루고 있다.

북쪽 반도는 홀츠 만과 사라나 만을 분리하고, 치리코프 곶까지 뻗은 중간 반도는 사라나 만과 매서커 만을 구분하며, 남쪽 반도는 매서커 만과 템낙 만을 분리한다.

 

(애투 섬의 동쪽 부분 출처 : http://www.loran-history.info/Attu/Attu_island_2096dpi.jpg 에서 일부 발췌)

 

북쪽의 홀츠 만에서부터 남쪽의 템낙 만에 이르기까지 해안에서는 양쪽에 수직의 벽을 가진 계곡들이 대략 서쪽으로 뻗다가 산악 지대에 부딪혀 사라진다.

해안에서 폭이 약 1.6km 정도인 메서커 계곡은 곧 두개로 갈라지는데 동부 메서커 계곡을 따라가면 동쪽의 사라나 만에서 이어지는 시덴스 계곡으로 넘어갈 수 있고, 더 올라가면 약 180m 높이의 고갯길에서 홀츠 계곡의 동쪽 분지와 연결된다.

 

미군은 원래 애투 섬보다 키스카 섬을 먼저 침공할 예정이었다.

키스카 섬은 애투 섬보다 가까울 뿐 아니라 더 좋은 항구와 비행장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키스카 섬의 방어가 애투 섬보다 훨씬 엄중하다는 사실이었는데 여기에 더하여 미군이 키스카 섬의 방어력은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고 반대로 애투 섬의 방어력은 과소평가하면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운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미군이 키스카 섬 침공계획을 본격적으로 짜기 시작한 것은 1942년 12월부터였다.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키스카 상륙을 위하여 1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25,000 명의 병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키스카 수비대의 병력을 10,000 명으로 추산하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키스카 침공에 최소한 보병사단 2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보병사단 2개를 동원하기가 만만찮다는 점이었다.

 

니미츠 제독이 병력을 어디서 빼올 것인지 궁리하는 동안에도 작전준비는 착착 이루어졌다.

1943년 1월에는 프랜시스 록웰 소장이 북태평양상륙군 사령관(Commander Amphibious Force North Pacific)으로 임명되어 킨케이드 제독 지휘 하에 상륙작전을 총괄하게 되었다.

키스카 상륙부대는 앨버트 브라운 소장의 제7사단으로 결정되었으며 여기에 제184보병연대와 1개 대공포 연대가 추가되었다.

이들 상륙부대는 2월 초부터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포트오드에 모여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의 지휘 하에 상륙훈련을 받았다.

 

그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를 폭격했으나 1월에는 날씨가 나빠서 폭탄을 10.5 톤 밖에 투하하지 못했다.

하지만 2월이 되자 앰치트카 상륙과 날씨의 호전에 힘입어 폭탄 투하량이 크게 늘어났다.

2월에 제11육군항공대는 9일에 걸쳐 24번 공습을 가하여 약 150톤을 투하했고 3월에도 비슷한 양을 투하했다.

 

1943년 2월이 되어 상륙부대가 본격적인 상륙훈련에 돌입했을 때 키스카 상륙에 사용할 병력과 수송함을 시일 내로 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니미츠 제독이 원한 2개 보병사단은 커녕 드윗 중장이 요구했던 25,000 명의 상륙부대를 실을 수송함도 시기에 맞추어 준비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2월 18일에 애투 섬을 포격했던 맥모리스 제독의 함대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보고하자 키스카 섬보다 방어가 약한 애투 섬에 먼저 상륙하자는 의견이 급속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1943년 3월 초에 북태평양군 사령관 킨케이드 소장이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에게 키스카 섬 대신 방어가 약한 애투 섬에 먼저 상륙하자고 제의했다.

킨케이드 제독은 사진 정찰 결과 애투 섬의 방어병력은 3개 소총중대, 약 500 명으로 추산되며 이정도 규모의 수비대는 1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대대만 상륙시키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알래스카 방어사령관 버크너 소장도 이 견해를 지지했다.

이정도의 병력을 수송하는 데에는 공격수송함(APA) 4척과 화물수송함(AKA) 2척이면 충분했다.

일단 애투 섬을 점령하고 거기에 비행장을 건설하면 동쪽의 키스카 섬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었다.

드윗 중장의 지지를 얻은 킨케이드 제독은 3월 3일에 애투 상륙안을 니미츠 제독에게 제출했다.

 

1943년 3월 10일에 킹 제독이 니미츠 제독에게 키스카 상륙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라고 권고하자 니미츠 제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애투 상륙안을 들이밀었다.

이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킹 제독은 마셜 장군에게 동의를 얻어내었다.

3월 21일에 합동참모본부는 향후 태평양 전구에서 애투 섬 상륙을 최우선으로 하기로 결정했고 다음날

 

"가능한 한 빨리"

("as soon as practicable")

 

애투 섬에 상륙하라는 합동참모본부의 정식 명령이 니미츠 제독에게 떨어졌다.

 

1943년 3월 22일을 기하여 북태평양군의 상륙목표가 키스카 섬에서 애투 섬으로 바뀌었으나 이러한 목표의 변경이 상륙작전 준비에 큰 어려움이나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샌디에이고에 있는 록웰 제독의 사령부에서는 변경된 목표에 맞추어 애투 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제7사단 사령부와 함께 전술 수준의 자세한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계획 수립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애투 섬의 지형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애투 섬은 19세기 중엽부터 미국 영토였지만 미군은 애투 섬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시 사용가능한 지도는 1934년에 그린 지도로서 이 지도는 해안에서 900m 떨어진 해상에서 관찰하고 그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십년간 미해군은 조난 사고 방지를 위하여 애투 섬에서 4km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미해군은 애투 섬 부근의 수로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일본군이 애투 섬을 점령한 후 제11육군항공대의 항공기들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왔지만 구름이 끼어 있는 날이 많아서 빠진 부분이 많았다.

애투 섬 상륙은 키스카 섬 상륙을 예상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일종의 기습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기 위하여 애투 섬에 너무 빈번하게 항공기를 보낼 수도 없었다.

미군은 남쪽의 템낙 만과 북쪽의 홀츠 만을 포함하는 애투 섬 서쪽의 지형 모형을 만들었으나 중요한 이동로나 헨더슨 능선 및 홀츠 만 서쪽은 거의 표시할 수 없었다.

 

정확한 지형을 몰랐으므로 미군은 애투 섬 상륙작전시 주공과 조공의 상륙 위치 및 상륙 순서에 따라 A, B, C, D. E 라고 이름붙인 다섯 가지 안을 준비하여 현장 지휘관이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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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코만도르스키 해전(2)

 

나치가 포탑의 전력 고갈 때문에 일시적으로 전투에서 이탈하자 이제 전투의 초점은 솔트레이크시티와 마야 사이의 포격전으로 옮겨졌다.

두 중순양함은 서로 상대방의 포탄을 피하기 위하여 지그재그 항행을 하면서 포격전을 벌였고 오전 9시 7분에 마야가 8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오후 9시 10분 마야의 8인치 포탄이 솔트레이크시티의 우현에 있던 정찰기에 명중하면서 2명이 사망하고 불이 났다.

승무원들이 불타는 정찰기를 바다에 던지고 불을 껐다.

 

잠시 후 포탑의 전력을 회복한 나치가 포격에 가담하자 솔트레이크시티는 다시 나치와 포탄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9시 20분에 나치와 솔트레이크시티는 약 22,000m 거리에서 동시에 서로를 맞추었다.

 

그 직후 미군 구축함의 5인치 포탄 1발이 럭키샷을 기록했다.

이 5인치 포탄은 나치의 1번 포탑 조준창으로 들어가서 포탑 내에서 폭발하면서 포탑 내의 인원을 몰살시켰고 나치는 1번 포탑에서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면서 해상에 정지했다.

 

(일본군의 8인치 연장포탑. 2번이 조준창이다. 출처 : Naval Weapons of WW2, P.185)

 

나치가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면서 해상에 멈추는 것을 본 맥모리스 제독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수송선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9시 26분에 북쪽으로 변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9시 30분부터 나치는 1번 포탑을 제외한 나머지 포탑으로 사격을 개시하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마야 및 2척의 구축함과 함께 미함대를 맹렬하게 뒤쫓기 시작했다.

호소가야 제독은 가장 큰 위협인 솔트레이크시티에 공격을 집중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 상황도. 출처 : Aleutians, Gilberts and Marshalls, P27)

 

북상하면서 뒤쫓아오는 나치 및 마야와 교전하던 솔트레이크시티는 갑자기 우현 전방 17,000m 거리에서 경순양함 다마를 발견했다.

다마가 뇌격을 가하기 위하여 접근 중이라고 판단한 솔트레이크시티의 함장 로저스 대령은 목표를 다마로 바꾸어 맹렬한 일제포격을 가했다.

미함대와 일본수송선 사이를 가로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던 다마는 솔트레이크시티로부터 갑작스런 집중사격을 받고 깜짝 놀라서 180도로 되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마는 잠시 후 다시 180도로 변침하여 전장에 돌아왔지만 솔트레이크시티의 기세에 눌려 나치와 마야의 뒤만 따라다니면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기습적인 일제사격으로 우전방에서 얼쩡거리던 다마를 쫓아낸 솔트레이크시티는 다시 뒤쫓아오는 나치 및 마야와 교전했는데 속력에서 우세한 나치와 마야는 오전 10시 경에 18,000m 이내로 접근했다.

나치와 마야가 솔트레이크시트를 협차하는데 성공한 오전 10시 2분에 갑자기 솔트레이크시티의 키가 작동을 멈추었다.

원래부터 시원찮았던 솔트레이크시티의 조향 장치가 몇발의 명중탄으로 충격을 받자 말썽을 일으킨 것이었다.

승무원들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예비 디젤엔진을 재빨리 연결했지만 그래도 솔트레이크시티의 키는 좌우로 10도 정도 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북쪽에 있던 일본군의 경순양함 아부쿠마는 오전 10시 7분에 미함대에 대하여 2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거리가 멀어 빗나갔다.

 

이윽고 나치와 마야는 거리를 좁히면서 솔트레이크시티에게 무시무시한 포탄의 비를 퍼부었다.

오전 10시경부터 약 10분 동안 솔트레이크시티의 사방 50m 이내에 약 200 발의 포탄이 떨어졌는데 기적적으로 명중탄은 오전 10시 10분에 고낙각으로 떨어진 8인치 철갑탄 1발 뿐이었다.

이 포탄은 솔트레이크시티의 주장갑판을 뚫고 들어와서는 폭발하지 않고 수선하의 함체를 뚫고 다시 빠져나갔다.

 

포탄이 빠져나간 자리로 침수가 시작되자 함장 로저스 대령은 솔트레이크시티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키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데 이제 침수까지 시작되었으니 나치와 마야에게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로저스 대령의 구조요청을 접한 맥모리스 소장은 수송선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맥모리스 제독의 명령에 따라 미함대는 침로를 240도로 바꾸어서 남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으며 구축함 베일리와 코글란은 오전 10시 18분부터 솔트레이크시티를 감추기 위하여 연막을 쳤다.

 

일본함대는 계속 접근하면서 연막 사이로 흘낏흘낏 솔트레이크시티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포격을 가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속력에서 우세한 일본함대와의 거리가 계속 줄어들자 맥모리스 소장은 오전 11시에 남쪽으로 변침했다.

이제 함대의 선두는 리치먼드였고 약 2,700m 뒤에 솔트레이크시티가 뒤따르고 있었으며 구축함 4척은 솔트레이크 주위에서 연막을 피워 솔트레이크시티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솔트레이크시티가 남쪽으로 변침하면서 잠깐 모습이 드러나자 다시 나치와 마야가 포격을 시작했고 11시 3분에 솔트레이크시티는 4번째이자 마지막 명중탄을 맞았다.

이 포탄 또한 폭발하지 않고 후방 자이로컴퍼스실과 후방 보일러실을 관통하여 함체 밖으로 빠져 나갔고 그 결과 후방 보일러실이 침수되었다.

후방 보일러실의 승무원들이 1.2m 깊이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침수와 싸우는 동안에도 증기는 계속 공급되어 솔트레이크시티는 전속력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문제는 침수된 물을 퍼내기 위하여 3번 기관의 냉각오일 순환용 모터를 배수펌프에 전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냉각오일의 순환이 멈추면 기관은 약 20분 밖에 가동하지 못한다.

 

일본함대는 다시 뇌격을 실시했다.

마야가 11시 5분에 4발, 나치가 7분에 8발, 아부쿠마가 15분에 2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거리가 멀고 각도가 나빠서 1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오전 11시 25분, 침수 때문에 약 5도 좌현으로 기울어진 채로 전속력으로 달아나던 솔트레이크시티의 3번 기관이 멈추면서 속력이 20노트로 떨어졌다.

침수와 싸우느라 냉각오일을 순환시키던 3번 기관의 모터를 배수펌프에 전용한 결과였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속력이 떨어지자 일본함대는 급격히 거리를 좁혀와서 11시 35분 경에는 일본함대의 선두가 불과 2,700m 거리까지 접근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급히 3번 기관의 냉각모터를 냉각 오일 순환에 복귀시켰고 11시 38분부터 솔트레이크시티는 다시 최고 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11시 48분에 뒤쫓던 나치에게 포탄 1발을 명중시켰다. 

일본구축함 와카바가 1시 49분에 6발, 하츠시모가 54분에 5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오전 11시 50분, 솔트레이크시티에 최악의 위기가 닥쳐왔다.

솔트레이크시티의 기울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좌현 밸러스트 탱크의 바닷물을 우현 밸러스트 탱크로 옮기려던 승무원이 실수로 좌현 밸러스트 탱크를 연료파이프와 연결해버린 것이었다.

대량의 바닷물이 연료에 섞여서 보일러에 공급되자 각 보일러들의 불이 금방 꺼졌고 11시 54분에 솔트레이크시티는 해상에 멈추었다.

이때 나치와 마야는 솔트레이크시티의 오른쪽 후방 17,000m 거리에 있었고 왼쪽 후방에서는 아부쿠마와 구축함2척이 접근하고 있었으며 구축함들은 곧 어뢰의 유효사정 이내로 들어올 것이었다.

해상에 멈추어버린 솔트레이크시티가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때 맥모리스 제독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맥모리스 제독은 솔트레이크시티와 합류하기 위하여 기함 리치먼드를 되돌리면서 구축함 베일리, 코글란, 모내헌에게 일본함대를 뇌격하라고 명령했다.

구축함 데일은 리치먼드와 함께 솔트레이크시티 주변에 머물면서 연막을 피워 솔트레이크시티가 해상에 멈추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연막 안으로 뛰어드는 일본함정들을 공격하며 여차하면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을 구조할 준비를 했다.

 

데일을 제외한 미함대의 구축함 3척은 베일리를 선두로 연막을 뚫고 뛰쳐나가 5인치 함포를 난사하면서 전속력으로 일본함대에게 돌진했다.

갑자기 연막에서 뛰쳐나와 함포를 난사하면서 전속력으로 돌진해오는 3척의 구축함을 발견한 나치와 마야는 깜짝 놀라서 모든 화력을 선두의 베일리에게 집중시켰다.

일본군의 포탄 1발이 베일리의 주방에 명중하여 5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나 베일리와 2척의 구축함들은 포격을 가하면서 계속 돌진하다가 12시 3분에 베일리가 5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베일리가 어뢰를 발사하는 순간 나치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이어서 일본함대가 줄줄이 서쪽으로 변침하기 시작했다.

일본함대가 전투를 포기한 것이었다.

후방에서의 어뢰공격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맥모리스 소장은 베일리를 뒤따르던 코글란과 모내헌의 어뢰공격을 중단시켰다.

곧이어 12시 4분에 일본함대는 포격을 중단했다.

 

호소가야 중장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던 전투를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린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호소가야 중장은 솔트레이크시티가 해상에 멈춘 사실을 몰랐다. 

당시 해상은 미함대가 피운 연막이 자욱하여 시계가 제한되었다.

일본군에서 솔트레이크시티의 상태를 알고 있던 것은 나치에서 발진한 수상정찰기 뿐이었는데 하필이면 무전기가 고장나서 이 사실을 보고할 수 없었다.

 

둘째로는 공습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키스카 섬에서 지척인 앰치트카에 미군이 진출한 상황에서 호소가야 중장은 언제든지 미군 항공기가 공습을 가해올 수 있다고 믿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솔트레이크시티는 푸른 물감을 포함한 철갑탄을 사용했는데 철갑탄을 다 쏘고나자 물감을 포함하지 않은 고폭탄을 발사했다.

호소가야 제독은 물감이 없는 고폭탄의 낙하를 보고 미군 항공기들이 구름 위에서 떨어뜨리는 폭탄이라고 착각했다.

 

세번째로는 함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호소가야 중장이 이끌고 있던 제5함대는 북태평양군과 마찬가지로 일본해군 내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처지였다.

따라서 코만도르스키 해전에 참가한 함정들이 사실상 그가 가진 전부였으며 만일 여기서 함정들을 상실하거나 건선거에 들어가야 할만큼 큰 피해를 입으면 보충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데 나치는 이미 몇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은 상태였고 재수없게도 구축함의 5인치 포탄으로 인하여 1번 포탑 내부가 아수라장이 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막에서 뛰쳐나와 맹렬히 달려드는 미군 구축함들을 보자 그는 전의를 상실했다.

계속 전투를 진행하다가 재수없이 나치나 마야가 큰 피해라도 입어 속력이라도 뚝 떨어지는 날이면 미군항공기의 밥이 되기 딱 좋으며 만일 살아남아도 일본본토에 있는 건선거에 들어가버리면 보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미군 구축함들이 필사적으로 반격을 가하는 동안 솔트레이크시티는 재빨리 기관이 멈춘 이유를 깨닫고 연료에서 바닷물을 제거한 다음 보일러를 재가동시키고 있었다.

11시 58분에 전방 기관이 재가동되면서 속력을 15노트까지 회복했고 12시 9분에는 후방 기관까지 가동되면서 속력이 23노트까지 올랐으며 잠시 후 30노트 이상의 최고 속도를 회복했다.

이로써 솔트레이크시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났다.

 

12시 12분에 리치먼드가 포격을 중단하면서 코만도르스키 해전이 끝났다.

 

참가 함정의 규모와 소모된 탄약에 비하면 인명피해는 양측 모두 가벼운 편이었다.

미함대는 베일리에서 5명, 솔트레이크시티에서 2명, 합계 7명의 전사자와 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일본함대는 14명의 전사자와 2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는데 부상자 1명을 제외한 피해는 모두 나치에서 발생했다.

 

미함대는 솔트레이크시티가 8인치 포탄 832발, 리치먼드가 6인치 포탄 271발을 발사했으며 순양함들의 부포와 구축함들이 발사한 5인치 및 3인치 포탄은 합계 2,314발이었다.

구축함 모내헌은 일본정찰기를 향하여 40mm 포탄 48발을 발사했으며 베일리가 어뢰 5발을 발사했다.

 

일본함대는 나치가 707발, 마야가 904발 등 1,611발의 8인치 포탄을 발사했고 아부쿠마가 95발의 140mm 포탄을 발사했으며 다마가 발사한 140mm 포탄의 수는 불명이다.

130mm 포탄의 발사 수는 나치가 276발, 마야가 9발, 하츠시모가 6발이며, 와카바도 발사했는데 정확한 포탄 숫자는 불명이다.

산소어뢰는 나치가 16발, 마야가 8발, 아부쿠마와 다마가 각각 4발씩, 와카바가 6발, 하츠시모가 5발로 합계 43발이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이 끝났을 때 솔트레이크시티의 후방 기관실은 섭씨 -2도의 바닷물이 1.5m 깊이로 들어차 있었으므로 더치하버로 돌아오는 도중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은 섭씨 0도의 추운 날씨에 차가운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 보수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자 함장 로저스 대령은 추위를 견디면서 일해야만 하는 승무원들을 위하여 더치하버에 도착할 때까지 식사 때마다

 

"의학적 목적으로"

 

알코홀을 1잔씩 제공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여 전 승무원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포탄에 주방을 직격당한 베일리의 승무원들은 더치하버에 도착할 때까지 차가운 햄과 크래커, 그리고 사과쥬스로 연명해야만 했다.

 

제11육군항공대는 코만도르스키 해전 당시 개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맥모리스 제독으로부터 접촉보고가 들어왔을 당시 애닥 섬의 모든 폭격기들은 키스카 섬 폭격을 위하여 주로 사람 상대로 효과적인 소형 고폭탄들을 장비하고 있었으므로 철갑탄으로 교체가 필요했다.

또한 육군항공대는 중폭격기 뿐만 아니라 쌍발폭격기도 함께 내보내어 폭격효과를 높이고 싶어했고 킨케이드 제독도 동의했는데 그러려면 쌍발폭격기에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고폭탄들을 철갑탄으로 바꾸고 쌍발폭격기에 증가연료탱크를 부착하는데 4시간이 걸렸다. 

이 작업이 끝나자 2시간 동안 눈보라가 몰아쳐 시계가 0으로 떨어졌다.

6시간 만에 겨우 이륙한 폭격기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앰치트카 섬에서도 폭격 시도가 있었다.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2대가 오전 8시 44분에 아사카마루와 사키토마루를 발견했는데 곧 접촉을 잃어버렸다가 오후 2시 10분에 다시 발견했다.

발견장소는 앰치트카에서 720km  떨어진 곳이라 B-25 쌍발폭격기에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하느라 출격이 늦어졌다.

가까스로 B-25 쌍발폭격기 3대가 출격했으나 일본수송선들을 찾지 못했다. 

이후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 위리엄 버틀러 소장은 6대의 B-25  쌍발폭격기에 항상 증가연료탱크와 철갑탄을 장비해 두어 언제든지 적의 함선이 나타나면 출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양 함대는 서로에게 치명타를 먹이는데 실패했으나 맥모리스 제독은 호소가야 제독의 애투 섬 증원시도를 좌절시켰다.

일본제5함대와 동행했던 아사카마루와 사키토마루는 물론 먼저 출발했던 저속의 산코마루도 애투 섬에 도달하지 못하고 바라무시로로 돌아갔으며 이후 일본해군은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보급을 주로 잠수함에 의지했다.

따라서 어느 기준으로 보아도 코만도르스키 해전은 미해군의 승리였다.

 

일본 언론은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했지만 이어진 조치를 보면 일본 자신도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코만도르스키 해전 직후인 1943년 3월 28일에 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제독을 해임하여 예편시키고 후임에 가와세 시로 중장을 임명했다.

나치가 수리를 위하여 사세보로 가서 1달간 건선거에 들어앉아 있어야 했으므로 가와세 중장의 기함은 중순양함 마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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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코만도르스키 해전(1) 

 

1943년 3월 26일에 벌어진 코만도르스키 해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여러나라의 해군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생각했던 미래의 해전모습과 비슷했다.

두함대는 대낮에 3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서로 13km - 19km 의 간격을 두고 포격전을 벌였으며 항공세력이나 잠수함은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교전에 참가한 함대의 규모가 작았으며 서로 치명타를 가하는데 실패했다는 것 정도였다.

 

리치먼드에 승좌한 찰스 맥모리스 소장의 미국함대는 중순양함 1척(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1척(리치먼드), 구축함 4척(베일리, 코글란, 데일, 모내헌)으로 이루어져 애투 섬 동쪽 해상을 초계하고 있었다.

 

미함대의 핵심 함정은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였다.

솔트레이크시티는 1942년 10월 11일-12일에 걸쳐 벌어진 에스퍼란스 해전에서 8인치 포탄 2발을 얻어맞고 진주만의 건선거에서 5개월 동안 수리와 개장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 중 절반 가량이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들로 교체되었으므로 코만도르스키 해전 당시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 중 절반 가량은 실전경험이 없었다.

1943년 3월 초에 건선거를 나선 솔트레이크시티는 3월 11일에 북태평양군에 배속될 때까지 1주일 밖에 훈련할 시간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함장 버트램 로저스 대령은 함포사격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북태평양군에 편입된 직후 솔트레이크시티의 조타기능에 문제가 발견되었다.

유압계통에 문제가 생겨 만일 큰 충격이 가해지면 키에 동력을 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당시 솔트레이크시티는 수리를 위하여 건선거에 들어갈 처지가 아니었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은 할 수 없이 주정용 소형디젤엔진 하나를 얻어서 예비로 준비해 두었다.

이 조타기능의 문제가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골칫거리로 등장하게 된다.

 

(CA-25 솔트레이크시티.  배수량 : 11,000톤, 길이 : 178m, 폭 : 19.9m, 출력 : 107,000마력, 속력 : 32.7노트, 승무원 : 1,200명, 무장 : 8인치 포 10문, 5인치 양용포 4문, 수상기 4대, 캐터펄트 2대)

 

미함대와 대결한 일본제5함대는 나치에 승좌한 호소가야 보시로 제독의 지휘 하에 중순양함 2척(나치, 마야), 경순양함 2척(다마, 아부쿠마), 그리고 구축함 4척(와카바, 하츠시모, 이가즈치, 이나즈마)으로 이루어져 미함대보다 훨씬 강력했다.

일본제5함대는 애투 섬 증원병력을 싣고 있던 7,000 톤 급의 고속수송선 아사카마루와 사키토마루를 호위하고 있었다.

 

일출 1시간 전인 3월 26일 오전 7시 30분에 미함대는 애투 섬에서 동쪽으로 290km, 코만도르스키 제도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함대는 동쪽으로 달리다가 북쪽으로 변침했는데 선두인 코글란부터 리치먼드, 베일리, 데일은 차례대로 변침했지만 5번째인 솔트레이크시티가 늦게 변침하는 바람에 솔트레이크시티와 모내헌은 본대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12km 정도 뒤처졌다.

이렇게 미함대는 2개의 함렬로 나뉜 채 15노트 속력으로 북쪽으로 항진했다.

이날의 구름 고도는 약 750m 이고 시정은 10km 이상에 달하여 알류샨 해역에서는 좋은 날씨였다.

 

(코만도르스키 해전 상황도. 출처 : Aleutians, Gilberts and Marshalls, P28)

 

1943년 3월 26일 오전 7시 52분, 미함대의 수병들이 막 아침식사를 끝냈을 무렵 함대의 레이더가 북쪽 13km - 19km 에 걸쳐 단종진으로 항해하는 적함대를 발견했다.

리치먼드의 레이더 담당 장교는 화면에 나타난 적함대의 구성을 경순양함1척, 수송선 2척, 구축함 2척으로 정확하게 추정했다.

맥모리스 제독은 즉시 전투배치명령을 내리고 두개의 함렬을 하나로 합쳤다.

이 과정에서 함정의 순서가 약간 바뀌어서 선두는 베일리가 되었고, 이어서 코글란, 리치먼드, 솔트레이크시티, 데일, 모내헌의 순서로 단종진을 형성했다.

 

오전 8시가 넘어가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미함대의 레이더에 중순양함으로 의심되는 대형함정 2척을 포함한 5척의 함영이 더 나타나서 적함대의 숫자는 10척이 되었다.

그러나 맥모리스 제독은 물러나지 않고 정면대결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호소가야 제독의 일본제5함대는 미함대가 자신들을 발견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미함대를 발견했다.

사키토마루의 견시가 오전 7시 52분에 남쪽에서 다가오는 미함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당시 일본함대는 미리 출발했던 저속의 수송선 산코마루 및 호위를 맡은 구축함 1척과 만나기 위하여 북쪽으로 항진하던 중이었는데 기함 나치를 선두로 마야, 다마, 와카바, 하츠시모, 아부쿠마, 이가즈치, 아사카마루, 사키토마루, 그리고 이나즈미의 순으로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함대의 진형은 사령관이 전투에 앞장선다는 일본해군의 전통에 충실한 진형이었지만 실전에서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우선 함포의 사정거리가 긴 중순양함들이 앞장섬으로서 특히 포격전의 초기에 뒤따르던 경순양함과 구축함들의 화력을 적절하게 활용하기 어려웠고 또한 구축함들이 뒤쪽에 처져 있어서 전투 초반에 과감하게 앞으로 뛰쳐나가면서 무서운 산소어뢰를 발사하는 전법을 구사하기가 불편했다.

 

포격전을 중시하는 미해군의 경우 단종진을 구성할 때에는 주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구축함들을 선두에 내세우고 그 뒤로 경순양함, 중순양함의 순서로 뒤따라감으로서 포격전이 벌어졌을 때 초기에 함대의 모든 화력을 동시에 투사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그런 면에서 볼때 미함대의 배치도 포격전에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일본함대보다는 훨씬 나았다.

 

일본함대는 미함대를 발견하자 즉시 우현으로 크게 변침하여 남동쪽으로 침로를 바꾸었고 수송선 2척은 그대로 북상했다.

 

맥모리스 제독은 자신의 목표가 일본수송선들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처음에는 그대로 북상하여 수송선들을 공격한 후 고속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호소가야 제독이 수송선들을 북쪽으로 빼돌리고 남하했으므로 이런 계획은 실현가능성이 없어졌다.

맥모리스 제독은 물러서지 않고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미함대는 수상정찰기를 발진시키려 했으나 급유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함대의 나치는 1대의 수상정찰기를 발진시켰으나 이 정찰기는 미함대의 강력한 대공사격에 겁을 집어먹고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데다가 통신 상태도 불량하여 일본함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제공격은 일본함대가 실시했다.

오전 8시 40분, 선두의 나치가 18,000m 거리에서 리치먼드를 겨냥하여 8인치 주포로 사격을 시작했다.

나치는 2번째 일제사격에서 리치먼드에 대한 협차에 성공했다.

 

(CL-9 리치먼드.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러나 그때 리치먼드 뒤에서 나타난 솔트레이크시티를 발견한 호소가야 제독은 자신이 8인이 포를 가진 적의 중순양함 대신 6인치 포를 가진 적의 경순양함을 먼저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일본함대는 목표를 솔트레이크시티로 바꾸었고 나치는 8시 46분에 어뢰 8발을 발사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모두 빗나갔다.

 

호소가야 제독은 동시에 휘하의 수뢰전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8시 47분에 아부쿠마가, 48분에 다마가 우현으로 90도 꺾어서 미함대에 접근했는데 이때 일본구축함들은 공격적으로 뇌격을 가하지 않았다.

구축함 4척 중 와카바와 하츠시모는 아부쿠마를 따라 함렬을 뛰쳐나왔으나 이가즈치와 이나즈미는 다마의 뒤를 따르지 않고 그냥 마야와 나치의 뒤를 따라다녔다.

와카바와 하츠시모 또한 함렬에서 뛰쳐나온 이후 아부쿠마의 뒤를 따라다닐 뿐 적극적으로 미함대에 접근하여 뇌격을 가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구축함들이 미함대에게 접근하여 뇌격을 가하지 않은 이유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이것으로 일본함대는 전투 초기에 근거리에 접근한 구축함이 무서운 산소어뢰를 뿌린다는 유력한 카드 하나를 사장시켰다는 점이다.

 

우세한 일본함대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부담을 느낀 맥모리스 제독은 오전 8시 45분에 좌측으로 크게 변침하여 일본함대와의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그러자 일본함대도 오른쪽으로 변침하여 미함대를 추격했다.

 

그동안 솔트레이크시티는 일본중순양함들과 포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치와 마야가 포격의 목표를 리치먼드에서 솔트레이크시티로 바꾸는 동안 포격의 주도권은 솔트레이크시티가 쥐게 되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일본함대보다 2분 늦은 8시 42분에 18,000m 거리에서 나치를 목표로 포격을 시작했다.

2번째 일제사격에서 나치에 대한 근거리 협차에 성공한 솔트레이크시티는 3번째 일제사격에서 2발, 4번째 일제사격에서 1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8시 50분에 나치를 강타한 2발의 명중탄 중 1발은 함교의 통신을 끊어버렸고 다른 1발은 함교 부근의 우현에 떨어져 몇 명의 사망자와 10명 이상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2분 후 3번째 명중탄이 어뢰발사관에 명중하여 추가 피해를 입혔으며 지근탄이 바로 옆에 떨어져 함교를 바닷물로 흠뻑 적셨다.

교전 거리가 약 15,000m 에 달하고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 중 절반 가량이 첫 출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썩 괜찮은 명중율이었다.

 

이때 갑자기 나치가 포격을 중지했으므로 솔트레이크시티는 나치가 치명타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목표를 마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사실 나치가 포격을 중단한 이유는 조작실수로서 누군가 축전지에 충분한 전기가 충전되기 전에 발전기의 터빈을 돌리던 증기를 너무 일찍 메인터빈으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었다.

축전지에 충전되었던 전기가 바닥나자 나치의 주포들이 최대 앙각에서 멈추어버렸다.

나치가 원인을 찾아내어 다시 포격을 시작할 때까지 거의 30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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