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달카날 상륙

 

과달카날 상륙부대를 실은 터너 소장의 제62임무부대는 1942년 8월 7일 새벽 3시경에 사보 섬 서쪽에서 둘로 갈라졌다.

과달카날에 상륙할 Xray 부대는 사보 섬 남쪽을 지나 과달카날 북해안을 따라 동진했고, 툴라기 및 가부투-타남보고에 상륙할 Yoke 부대는 사보 섬의 북쪽을 통과했다.

 

(과달카날, 툴라기 및 가부투 상륙작전상황도)

 

8월7일 새벽 5시 45분부터 과달카날 남서쪽 140km 지점에 있던 제61기동부대의 함재기 85대가 이함하여, 6시 경에 과달카날 상공에 도달했다.

이 함재기들 중 44대는 과달카날 해안을 폭격했고 41대는 툴라기 섬과 가부투 섬의 일본군 수상기 기지를 공격하여 정찰용 비행정과 수상전투기를 합쳐 18대를 모두 수상에서 파괴하고 마침 휘발유를 싣고 툴라기에서  과달카날을 향해 가던 일본군의 돛단배 1척을 격침했다.

 

과달카날 상륙은 완전한 기습이었다.

라바울의 제17군사령부가 툴라기의 일본군으로부터 미군 상륙의 보고를 받은 것은 이미 폭격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오전 6시 12분이었다.

 

오전 6시 13분부터 중순양함 3척(퀸시, 빈센스, 아스토리아)과 구축함 4척(헐, 듀이, 엘렛, 윌슨)으로 이루어진 프레드릭 립콜 대령의 과달카날 포격부대가 퀸시의 일제사격을 신호로 일본군의 포대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되던 룽가 곶의 서쪽 해안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지역에는 해안포가 없었으며 제11설영대가 해안에서, 제13설영대가 내륙 쪽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기습적인 함포사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함포사격과 폭격으로 제11설영대는 약 55%, 제13설영대는 약 35%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1분 후인 6시 14분부터는 대공경순양함 1척(산 후앙)과 구축함 2척(몬센, 뷰캐넌)으로 이루어진 노만 스코트 소장의 툴라기 및 가부투 포격부대가 포격을 개시했다.

 

과달카날에 상륙할 엑스레이 부대 소속의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 15척은 2열을 이루어 12노트의 속력으로 상륙예정해안인 레드비치에서 8,200m 정도 떨어진 집결해역으로 향했다.

수송함들은 오전 6시 47분에 집결해역에 도달했고 6시 50분에 엑스레이 수송함대를 지휘하던 레입스나이더 대령은 상륙주정들을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엑스레이 부대와 요크 부대는 합쳐서 8척의 유레카 보트, 308척의 LCP(L) 과 LCP(R), 116척의 LCV,  그리고 48척의 기계화상륙정(LCM)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레카 보트는 길이 9.5m 로 병력 18명을 태울 수 있고, 램프 겸용의 문이 없다.

 

(유레카 보트)

 

LCP(L)(=Landig Craft, Personnel, Large) 는 유레카 보트의 확대판으로 길이는 11m 이고 병력 30명에서 36명을 태울 수 있다.

 

(LCPL)

 

LCP(R)(=Landing Craft, Personnel, Ramped)는 뱃머리에 램프 겸용의 문을 단 것으로 길이 11m 이며 30명에서 36명의 병력을 수송할 수 있다.

 

 

(LCPR)

 

LCV(Landing Craft, Vehicle)은 길이 11m 로 병력 36명이나 보급품 4.5톤 또는 1톤 트럭이나 105mm 곡사포를 운반할 수 있는 상륙주정으로 트럭이나 곡사포 등을 싣고 내리기 위하여 앞문이 LCP(R) 보다 더 크다.

 

(LCV)

 

기계화상륙정(LCM = Landing Craft, Mechanized) 는 중형전차나 155mm 곡사포급 이상의 대형 야포를 실을 수 있는 상륙정으로 길이가 15m 이며 앞의 상륙정들이 나무로 만들어진데 비하여 완전히 강철로 만들어져 있다.

 

(LCM)

 

미해군 상륙정의 대명사격인 LCVP(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는 LCV 의 후계주정으로 개발되었으나, 나중에 LCP(R) 의 기능을 흡수했다.

LCVP 는 LCV 와 비교하여 수송함 내에서 수납공간을 줄이기 위하여 조종석이 적재 공간 내로 들어갔고 방어력의 강화를 위하여 선체의 측면과 램프에 6.5mm 두께의 강철판을 둘렀다.

LCVP 는 1942년 11월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램프가 없는 유레카 보트와 LCPL은 일찍 도태되었고, LCP(R)과 LCV가 LCVP로 통합되면서 1943년부터 미해군의 소형 상륙주정 세력은 LCVP와 LCM으로 단순화되었다.

 

(LCVP의 사진. 적재공간 후방에 따로 운전석이 있던 LCV 와 달리 운전석이 적재공간 내로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의 저항이 없었으므로 과달카날 상륙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상륙한 것은 제5해병연대였다.

1942년 8월 7일 오전 9시 13분, 예정보다 3분 늦게 최초의 상륙주정이 테나루 강의 동쪽에 연한 1,500m 넓이의 레드비치에 상륙했다.

윌리엄 맥스웰 중령의 제1/5대대가 서쪽에, 프레드릭 비에부시 중령의 제3/5대대가 동쪽에 상륙했다.

 

(엑스레이 수송함대의 집결지에서 바라본 과달카날 섬 상륙장면. 해안에 포격으로 인한 연기가 보인다.)

 

제5연대는 상륙하자마자 해안교두보를 내륙으로 500m 까지 확장했다.

이어서 9시 30분부터는 케이츠 대령의 제1연대가 제2/1대대, 제3/1대대, 제1/1대대의 차례로 상륙했다. 

다음은  포병 차례였다.

가벼운 75mm Pack Howitzer들은 쉽게 상륙했으나 무거운 105mm 곡사포들은 견인할 수 있는 2.5톤 트럭이 모자라서 양륙하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과달카날 전투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LVT(Landing Vehicle, Tracked)들이 105mm 곡사포를 견인해야만 했다.

 

(LVT)

 

해안에서 적의 저항이 전혀 없자 오전 11시에 수송함들이 해안에 접근하여 물자양륙을 위하여 주정들이 왕복하는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문제는 상륙해안의 혼잡상황이었다.

해안에서의 양륙을 위하여 조지 로완 대령이 지휘하는 제1공병대대 500 명이 배정되어 있었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보다못한 해군 수병들이 상륙하여 양륙작업을 거들었으나 여전히 모자랐다.

 

주로 인력으로 양륙작업을 감당하려면 수송선 1척 당 최소한 15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했고 수송함이 15척이니 전투부대에서 1,500 명 이상을 차출하여 양륙작업에 투입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과달카날의 일본군 병력을 최소한 5,000 명 이상으로 예상하고 있던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그렇게 많은 전투병을 양륙작업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정오가 되자 상륙해안은 온통 양륙물자들로 가득 찼고 상륙주정들은 보급품을 내려놓을 공간을 찾지 못하여 몇 시간씩 해안을 헤매고 다녔다. 

게다가 오후들어서 일본군이 수송함대에 2차례 공습을 가해 옴에 따라 양륙작업은 더욱 늦어졌다.

이러한 양륙작업의 지연은 사보 섬 해전의 결과 제62임무부대가 양륙작업을 미처 못 마치고 철수함에 따라 해병제1사단이 과달카날 전투 초기에 보급품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생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미군은 이후로 상륙작전시 불도저, 견인용 트랙터, 기중기, 권양기는 물론 야간작업용 조명장치에다가 현장에서 간단하게 설치할 수 있는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까지 갖춘 공병중대인 전문적인 해안양륙반(Shore Party) 을 대대마다 하나씩 배치하게 된다.(관련 내용은 여기로)

 

(과달카날 해안에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는 해병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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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슈스트링 작전( Operation Shoestring)

 

제1호 임무인 과달카날 상륙작전의 정식명칭은 망루작전(Operation Watchtower)이었다.

그러나 물자와 시간이 촉박한 가운데 급하게 추진되는 과달카날 상륙작전 준비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미군병사들은 망루작전에 슈스트링 작전(Operation Shoestring) 이란 별명을 붙였고 오늘날까지 이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Shoestring 이란 단어는 구두끈이란 의미 외에 매우 부족한 자본, 아주 빠듯한 밑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1호 임무는 태평양해역군총사령관(CINCPOA)인 니미츠 대장의 지휘 하에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COMSOPAC)인 곰리 중장이 지휘했다.

 

(제1호 임무 당시 남태평양해역군 조직도)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는 임무는 제62임무부대(TF62) 가 담당했으며 남태평양해역군의 지상발진항공기들로 구성된 제63임무부대(TF63) 가 작전을 지원했다.

제63임무부대는 1942년 7월 25일 현재 에파테, 뉴칼레도니아, 피지, 통가타부, 사모아 등지에 B-17 폭격기 33대, B-26 쌍발폭격기 22대, 해병대의 와일드캣 전투기 88대, 육군항공대의 P-39 에어라코브라 전투기 38대, 해병대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34대, 카탈리나 비행정 28대, 지상발진 정찰기 25대, 그 외에 허드슨 18대를 비롯하여 뉴질랜드 공군 소속의 항공기 30대를 포함하여 총 298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61,  제62 및 제63임무부대 조직도. 원본은 여기로)

 

터너 소장의 제62임무부대와 노이즈 소장의 항공모함기동부대가 합쳐져서 플레처 중장이 지휘하는 제61임무부대를 형성했으나 실제로 터너 소장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했고 따라서 제61임무부대의 사령관인 플레처 중장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항공모함 기동부대(제61.1임무그룹)는 정규항공모함 3척(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 와스프), 고속전함 1척(노스캐롤라이나), 중순양함 5척(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스,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대공경순양함 1척(애틀랜타), 구축함 16척, 급유함 5척등 총 3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함재기는 와일드캣 전투기 99대,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103대, 아벤저 뇌격기 41대로 총 243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터너 소장이 지휘하는 제62임무부대는 병력수송함(AP) 및 화물수송함(AK) 19척과 고속수송함(APD)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수송함들을 호위하고 상륙시 함포사격을 가하기 위하여 호주군 중순양함 2척(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호주군 경순양함 1척(호바트), 중순양함 4척(시카고, 빈센즈, 아스토리아, 퀸시), 대공경순양함 1척(산후앙), 구축함 15척, 소해정5척 등 총 5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제61임무부대는 항공모함 기동부대와 제62임무부대를 합쳐 총 82척으로 이루어졌다.

 

제62임무부대는 과달카날에 상륙하는 과달카날 그룹(Xray 그룹)과 툴라기 및 가부투-타남보고 섬에 상륙하는 북부그룹(Yoke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과달카날 그룹은 15척의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북부 그룹은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 4척과 고속수송함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인 제435정찰비행대대가 라바울 부근의 일본군 움직임을 정찰하여 정보를 전달해 주었고 약 20대의 B-17 중폭격기를 운용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던 제19폭격비행전대가 라바울을 폭격하여 과달카날 전투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브리즈번에 기지를 둔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의 잠수함 6척(S-38, S-39, S-41, S-43, S-44, S-46)이 라바울 부근에 전개하여 일본군 함정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이들 중 S-38 호는 8월 8일에 과달카날 역상륙을 위하여 출동했다가 도중에 귀환하던 일본군 수송선 메이요마루를 격침했고 S-44 호는 8월 10일에 사보 섬 해전에서 대승하고 개선하던 일본중순양함 카고를  격침했다. 

태평양함대 소속의 잠수함 그레일링과 드럼은 트럭 환초와 라바울 사이의 해역을 초계하면서 남쪽으로 증강되는 일본군 함정들을 감시했다.

 

(제1호 임무 상륙부대 조직도)

 

위 조직도들은 남태평양해역군의 operation plan 1-42 에 수록된 것들인데, 이 보고서는 최초로 상륙한 미해병대 병력을 18,722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터너 제독의 보고서를 참조한 모리슨 제독의 저작에는 19,105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해병제1사단의 보고서는 19,546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해병대 공간전사는 이 세 가지의 기록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취하지 않고 대략 19,000 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해병 제1사단장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소장은 1942년 6월14일에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에 도착했다.

그가 자신의 임무를 알게 된 것은 6월 26일이었다.

해병제1사단이 8월 1일까지 솔로몬 제도에 상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놀랐다.

그는 해병제1사단이 아직 전투에 투입될만큼 충분히 훈련을 하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1943년 초가 되어야만 실전에 투입될만한 상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뉴질랜드에서 6개월 정도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과달카날에 상륙할 부대는 제1연대와 제5연대였다.

제1사단의 세번째 연대인 제7연대는 1942년 3월 28일부터 사모아를 방어하고 있었으므로 교체할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제7연대 대신 해병제2사단 소속인 제2해병연대가 사단예비대로 작전에 투입되었고 별도로 제1기습대대, 제1낙하산대대, 그리고  제3방어대대가 추가되었다.  

 

1942년 7월 2일, 제5연대를 태운 제1진이 뉴질랜드의 웰링턴 항에 도착하자 부두에서 화물을 내렸다가 다시 싣는 작업이 실시되었다.

병력수송함들과 화물수송함들은 미국을 떠날 때 상업적인 방식에 따라 보급품들을 선적했다.

이 보급품들은 웰링턴 항에서 전투방식으로 다시 선적해야 했다.

 

상업적인 선적방식은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인원과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선적하지만 전투방식은 전혀 다르다.

적이 방어하는 해안에 상륙하는 상황을 상정한 전투방식의 선적에서는 병력과 그들이 최초로 사용할 장비, 차량 및 필수보급품은 반드시 같은 배에 실어야만 한다.

또한 화물선적 순서도 전투의 진행에 따라 필요한 순서대로 가장 긴급한 물품을 가장 윗쪽에 그리고 나중에 필요하게 되는 물품일수록 아랫쪽에 선적하게 된다.

 

웰링턴 항에서의 환적작업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강력한 노조에 소속된 뉴질랜드의 항만노동자들은 게으르고 비효율적이면서 임금은 비쌌기 때문에 각 수송함마다 300 명씩의 해병대원들이 차출되어 8시간마다 3교대로 24시간 내내 화물을 내렸다가 다시 선적하는 고된 작업을 반복했다.

뉴질랜드 특유의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잠시 비를 피하여 보급품을 저장할 창고 용량도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보급품들을 포장했던 골판지들이 흠뻑 젖어서 터져버렸고 보급품들은 안 그래도 혼잡한 부두에 죄다 흩어졌다.

그나마 뉴질랜드 육군이 30대의 유조차와 18대의 대형 트레일러를 급히 지원하고 부두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뉴질랜드 군의 연료저장시설과 탄약고를 제공함에 따라 마지막에 선적할 연료와 소화기용 탄약을 혼잡한 부두에서 일시적으로 치울 수 있었다. 

 

7월 11일에 제1연대를 실은 제2진이 도착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7월 16일이 되자 8월 1일까지 도저히 상륙작전을 실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7월 1일에 샌디에고를 출발한 제2연대는 아직까지 웰링턴에 도착하지도 않고 있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과 곰리 제독의 보고를 받은 킹 제독은 1942년 8월 1일로 예정되었던 상륙작전을 8월 7일로 6일 연기하는데 동의했지만 더 이상의 연기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촉박한 작전일정을 맞추기 위하여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생명을 유지하고 전투를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

 

만 선적하라고 명령했다.

장교들과 병사들의 개인 소지품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탄약은 당초 예정된 20일치의 절반인 10일치로 줄어들었고 식량을 비롯한 다른 보급품들도 원래 예정된 90일치에서 60일치로 줄어들었다. 

사단이 보유한 지프와 1톤 트럭은 거의 다 실었으나 그보다 큰 트럭들의 75% 는 남겨놓고 가야만 했고 155mm 곡사포도 역시 뉴질랜드에 남았다.

 

3주에 걸친 광란적인 환적작업 끝에 1942년 7월 22일에 해병제1사단을 실은 수송선단은 웰링턴 항을 출항했다.

부두는 불어터진 골판지들과 선적하지 못한 보급품이 남겨진 트럭과 섞여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1942년 7월 26일 오후2시 , 진주만을 떠난 플레처 제독의 제61기동부대와 뉴질랜드를 출발한 터너 소장의 제62임무부대는 피지에서 남쪽으로 640km 떨어진 해상에 집결했다.

플레처 제독은 터너 제독과 제62임무부대의 호위함대를 지휘하는 호주해군의 크러칠리 소장, 그리고 반데그리프트 장군을 기함인 새러토가로 불러서 작전희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플레처 제독은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상륙 이후 48시간 이내에 떠날 것이라고 말해서 터너 제독을 놀라게 만들었다.

터너 제독은 보급품의 양륙이 끝날 때까지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머물러 주기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플레처 중장에게 거부당했다.

그러자 그는 누메아에 있던 플레처 제독의 상관인 곰리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항의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프랭크 잭 플레처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61임무부대는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피지 제도의  코로 섬에서 예행연습을 실시했다.

원래는 두번에 걸쳐 실전적인 상륙연습이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코로 섬 부근의 산호초 때문에 실제 상륙이 불가능했다.

실전같은 예행연습이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던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이 예행연습에 금쪽같은 사흘을 투입한 데 비하여 성과는 보잘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어도 수송함에서 상륙주정으로 옮겨타는 연습이나 해안에 대한 함포사격연습이란 면에서는 성과가 있었다.

 

7월 31일 저녁이 되자 제61임무부대는 코로 섬을 떠나 과달카날로 항진했다.

제61임무부대는 혹시 일본군에게 들킬 경우 호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서쪽으로 항진하다가 8월 5일에 뉴헤브리디즈 제도 근해에서 북쪽으로 변침하여 과달카날로 향했다.

8월 5일부터 이 해역의 날씨가 거칠어져서 미함대는 악천후의 덕을 보았다.

 

일본군도 미군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은 감지하고 있었다.

대본영의 통신감청반은 1942년 7월 3일에 37척 규모의 선단이 미서해안을 떠났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8월 1일에는 미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진주만을 출항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에 따라 중부태평양 지역의 일본군에게는 즉시 경계경보가 내려졌으나 남태평양의 라바울에는 8월 4일이 되어서야 통상적인 정보수준으로 통보했다.

이 정보를 읽어본 일본제25항공전대장 사마다 스미요시 소장은 즉시 툴라기에 주둔 중인 요코야마 항공대에 정찰활동을 강화할 것을 지시했으며 6일에는 재차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내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툴라기의 요코야마 항공대는 정찰활동을 강화했으나 8월 5일부터 날씨가 나빠져서 지장을 겪었다.

특히 상륙 전날인 8월 6일에는 일본군의 제2번 정찰비행정이 미함대 상공까지 도달했으나 스콜이 몰아치는 가운데 구름 밑에 가린 미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운좋게 탐지를 피한 과달카날 침공함대는 1942년 8월 7일 새벽에 과달카날 부근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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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군의 반격계획

 

과달카날 전투를 촉발한 미군의 솔로몬 진공작전 구상은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2년 2월 18일에 미함대총사령관 킹 제독이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에게 보낸 각서에서 최초로 드러난다.

이 각서에서 킹 제독은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에파테 섬에 미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3월 2일에는 에파테 기지를 발판으로 솔로몬 제도로 진출하고 나아가 라바울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킹 제독은 3일 후인 3월 5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이러한 구상을 밝혔다.

 

(미해군총사령관 어네스트 킹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3월 5일 당시 태평양의 정세는 암담했다.

2월 15일에 싱가포르가 함락된 데 이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함락도 시간 문제였으며 필리핀의 미군은 바탄반도에 포위된 채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고 맥아더 장군은 이미 탈출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누구도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어 보였고 워싱턴에서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기하자는 소리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킹 제독은 대통령에게 호주와 뉴질랜드는 미국의 형제국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에 넘겨주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고 대통령도 공감했다. 

킹 제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선 호주와 미국과의 해상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그 과정에서 건설한 미군기지를 발판삼아 솔로몬 제도에 진공한 다음 라바울까지 북상한다는 구상을 밝히고 대통령의 기본적인 동의를 얻어내었다. 

즉 킹 제독은 미군이 향후 1944년 중반까지 남태평양에서 실시할 작전의 청사진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미군의 남태평양 작전은 큰 틀에서 킹 제독의 청사진을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당면 문제는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 사이의  해상수송로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솔로몬 제도 진공 문제는 해상수송로가 안전해진 다음에야 논의할 수 있는 문제였다.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와의 해상수송로. 원본은 여기로)

 

이러한 해상수송로 보호를 위하여 미군은 사모아, 통가타부, 피지, 에파테, 뉴칼레도니아 등에 비행장을 갖춘 기지를 건설하고 방어병력을 배치했다.

특히 뉴칼레도니아와 피지에는 1개 사단이 넘는 병력을 배치하는 등 1942년 4월말까지에는 해상수송로를 보호하기에 충분한 수준의 병력들이 배치되었다.

 

1942년 5월 3일에 일본이 툴라기를 점령하면서 솔로몬 진공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킹은 툴라기가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를 연결하는 해상수송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늦어도 1942년 8월 1일까지는 솔로몬 제도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은 솔로몬 진공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에파테 북쪽의 에스피리투산토에 최대한 빨리 비행장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해군건설대대는 모자라고 공사해야 할 곳은 많았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후방의 보급기지로서 일본군의 라바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뉴칼레도니아의 누메아도 항만시설이 불충분하여 하역작업에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었고 에파테도 3월 25일부터 기지 건설이 시작되어 공사 중인 상태였다.

 

결국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은 5월 28일이 되어서야 기지건설 공사가 진행 중인 에파테에서 해군건설대대원 일부를 빼내어 육군, 해병대 등에서 차출한 수비병력과 함께 에스피리투산토에 상륙시킬 수 있었다.

병력과 장비 및 건설자재를 한꺼번에 수송할 수송선이 모자라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수송선으로는 장비와 건설자재를 수송하고 해군건설대대원 및 육군, 해병대를 합쳐 500 명 쯤 되는 병력들은 어선을 타고 에스피리투산토에 상륙했다.

 

에스피리투산토의 지반은 예상했던 것보다 활주로 건설에 부적당하여 활주로 건설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하여 촌각을 다투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활주로가 완성된 것은 과달카날 상륙작전이 감행된 8월 7일이 되어서였다.

이후 에스피리투산토는 과달카날에서 가장 가까운 전진기지이자 헨더슨 비행장으로 투입되는 연합군 항공기의 중계기지로서 과달카날 전투 기간 내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2년 5월 28일,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일본함대가  중부 태평양에 집결하자 니미츠 제독은 맥아더 장군에게 이틈을 타서 제1해병기습대대를 투입하여 툴라기를 탈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만일 탈취에 성공한다해도 후속하는 일본군의 공격을 막을 전력이 부족하다며 이 작전에 반대했고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도 맥아더 장군의 견해에 동조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6월 4일부터 6일에 걸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이 미해군의 압승으로 끝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맥아더 장군은 6월 8일에 마셜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만약 자신에게 해병대 1개 사단과 수송선단 및 항공모함 2척을 빌려준다면 라바울을 직접 공격하여 탈취하겠다고 제안했다. 

맥아더 장군의 설명은 이러했다.

 

버마 방면의 작전이 종료되어 그쪽 방면에 투입되었던 일본군 사단들이 라바울 방어에 투입되기 전에 라바울을 탈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라바울은 일본육군 1개 사단으로 방어되고 있으므로 호주에 있는  제32 및 제41보병사단과 호주제7사단을 투입하면 충분히 탈취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단들은 상륙작전 훈련을 받지 못했고 수송선도 모자라므로 해군 측에서 해병제1사단을 상륙시켜 해안에 교두보를 만들고 호주에 주둔 중인 3개 사단을 수송할 수 있도록 수송함 12척 및 고속수송함 4척을 제공하여야 한다.

또한 제5항공대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들이 라바울을 폭격할 수 있으나 항속거리가 짧은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을 수 없으므로 해군 측이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기동부대를 파견하여 함재기로 폭격기를 엄호해야 한다.

그리고 작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작전에 참가하는 모든 부대는 단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라바울 상륙은 늦어도 7월 1일까지는 실시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라바울을 탈취하고 일본군을 트럭 섬으로 쫓아내 버릴 수 있다.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

 

마셜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견해를 지지하여 6월 12일에 킹 제독을 만나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킹 제독은 경악했다.

 

태평양에 3척 밖에 없는 항공모함은 해군 최대의 자산으로 매우 귀중한 것이고 해병제1사단은 현재 가용한 유일한 수륙양용부대였다.

킹 제독의 상식으로는 이런 항공모함들과 해병제1사단을 해도도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고 바다 밑에 산호초가 널려 있으며 사방에 일본군의 항공기지가 깔린 좁은 해역에 밀어넣겠다는 소리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동성을 최대의 장점으로 하는 강력한 공세적 무기인 항공모함을 그 위험한 해역에 밀어넣고는 고작 폭격기 호위를 맡기겠다는 맥아더의 구상은 항공모함이란 물건에 대한 맥아더의 인식이 얼마나 조잡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따라서 킹 제독은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라바울 공격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남태평양에서 미군의 반격은 자신이 주장했던 대로 툴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한 이 작전에 투입되는 함정, 항공기, 그리고 병력들이 대부분 해군 소속이니만큼 작전은 반드시 해군인 니미츠 제독과 곰리 제독이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군의 임무는 항공기를 동원하여 정찰을 해주고 해병대가 점령한 지역을 수비할 병력들을 제공하는데 있다고 못박았다. 

 

킹 제독의 발언을 알게 된 맥아더 장군은 해군이 육군부대를 휘하에 넣고 마음대로 지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고 마셜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3주일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킹 제독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마셜 장군이 6월 29일에 킹 제독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하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7월 2일에 정식으로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이  작성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에 따르면 남태평양에서 미군의 반격은 3단계로 나뉘어져 제1호 임무(Task1), 제2호 임무(Task2), 제3호 임무(Task3)의 3단계로 실시하게 되었다.

 

제1호 임무는 산타크루즈 제도, 툴라기 및 주변 섬들을 탈취하는 것으로 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니미츠 제독)이 지휘하게 되었다.

작전 개시일은 1942년 8월 1일이었다.

제2호 임무는 뉴기니 동부 및 북부 솔로몬 지역을 탈취하는 것으로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맥아더 장군)이 지휘하게 되었다.

제3호 임무는 라바울 및 그 주변 지역을 점령하는 것으로 역시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이 지휘하게 되었다.

제2호 임무 및 제3호 임무의 작전개시일은 제1호 임무의 작전 종료일에 맞추어서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툴라기 섬이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작전구역 내에 들어 있었으므로 남서태평양 해역군의 관할 지역을 기존의 동경 160도선에서 159도선으로 서쪽으로 옮겨서 툴라기 지역을 남태평양 해역군 관할로 편입시켰다.

킹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부하인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을 지원해야 하는 맥아더 장군의 어색함을  덜어주기 위하여 제1호 임무가 시작되는 1942년 8월 1일을 기하여 남태평양 해역군을 합동참모본부에서 직접 명령을 받는 위치로 격상시켰다.

따라서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은 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의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남서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이나 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과 동등하게 합동참모본부의 직접 통제를 받는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서류상 관계야 어찌되었든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은 니미츠 제독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인 곰리 제독의 소극적인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니미츠 제독이 과달카날 전투가 한참 진행중이던 1942년 10월 18일에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을 곰리 제독에서 헐지 제독으로 전격적으로 교체해 버린 사건이다.

물론 이 과정에는 킹 제독의 재가가 필요했지만 곰리 제독의 해임과 후임자인 헐지 제독의 인선은 전적으로 니미츠 제독의 의지였고 킹 제독은 추인했을 뿐이었다.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 실질적으로 니미츠 제독의 지휘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2호 임무가 시작된 이후였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자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사관학교 선배이자 뛰어난 지휘관인 헐지 제독에게 남태평양 해역군의 작전을 전적으로 맡기고 자신은 중부 태평양 공세준비에 전념했다.

이후 1943년 11월부터 타라와 전투를 시작으로 중부 태평양 진격이 본격화되자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 해역군의 작전을 지도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상태로 중부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남태평양 해역군은 1944년 6월 15일에 잠정적으로 관할하고 있던 동경 159도선의 서쪽에 있는 북부 솔로몬 지역이 남서태평양 해역군 관할로 다시 넘어가면서 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의 직속 지휘 아래로 돌아오게 된다.

 

니미츠 제독과 킹 제독은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에 따라 제1호 임무의 실행방안을 협의하기 위하여 1942년 7월 3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회담을 열었다.

회담 기간 중인 7월 5일(과달카날 현지시간으로 7월 6일) 남태평양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영국인 해안감시대원인 마틴 클레멘스가 과달카날 북해안에 일본군이 상륙했다고 보고해 온 것이었다.

 

툴라기에서 근무하던 영국 공무원이었던 클레멘스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현지에서 영국 육군 대위로 임관했는데 일본군의 툴라기 침공을 앞두고 코프라 운반선 발루스를 타고 과달카날의 아올라에 상륙하여 해안감시대원이 되었다.

그는 철수하는 호주군에게서 소총 18정과 탄약 2,500 발을 넘겨받아 원주민 60명으로 이루어진 정찰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무전기로 일본군의 움직임을 보고하는 동시에 과달카날의 원주민에게 연합군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일본군에 협조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원주민 정찰대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마틴 클레멘스 대위)

 

클레멘스의 보고를 받은 호주군은 즉시 워싱턴에 알리는 동시에 정찰기를 발진시켰다.

호주군의 정보가 도착했을 때 진주만의 통신감청반도 일본군의 통신을 해석하여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태평양함대의 정보장교들은 통신감청을 통해 과달카날에 상륙한 일본군의 대다수가 건설 노무자로 추정되는 비무장 병력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일본군의 목적이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의도라고 판단했다.

나중에 미군은 해안감시대원의 안전을 보장하고 일본군 암호를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공식발표에서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정찰기가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는 일본군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둘러 대었다.

 

그런데 일본군의 과달카날 상륙을 알게 된 맥아더 장군과 곰리 제독의 반응은 킹 제독 및 니미츠 제독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킹 제독은 일본군의 진출을 당장 저지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으며 한시바삐 상륙작전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상륙순서를 바꾸어서 가장 먼저 상륙하려던 산타크루즈 제도 상륙을 뒤로 미루고 우선 툴라기 지역에 상륙해야 하며 주요 목표도 툴라기 섬이 아니라 일본군이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는 과달카날 섬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니미츠 제독도 이 견해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과달카날 상륙 직후 호주로 날아가서 맥아더 장군과 회담했던 곰리 제독은 7월 9일에 일본군의 과달카날 상륙으로 제1호 임무의 위험성이 너무 커졌으니 앞으로 충분한 병력이 갖추어질 때까지 제1호 임무를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을 맥아더 장군과 공동으로 발표했다.

 

킹 제독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마셜 장군에게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에 상륙한 이상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과달카날 섬에 상륙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여 동의를 얻었다.

작전 실시에 따르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과달카날 섬을 조기에 점령함으로써 얻게 되는 전략적 잇점을 꿰뚫어 본 이 결정은 킹 제독이 태평양전쟁 기간을 통하여 내린 숱한 결정 중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의 하나였다.

 

다음날인 7월 10일, 맥아더 장군은 8월 1일로 예정된 제1호 임무의 연기는 불가하니 작전을 지원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을 받았다.

같은 날,  곰리 제독도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그가 사용가능한 병력, 함선 및 항공기의 내역과 함께 1942년 8월 1일을 기하여 툴라기, 과달카날, 그리고 산타크루즈 제도에 상륙하라는 정식 명령을 받았다.

작전명은 망루작전(Operation Watchtow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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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군의 진출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하여 영령 말레이와 필리핀,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예정보다 훨씬 빠른 1942년 3월 초까지 석권한 일본군은 차기 전략방향을 두고 일본육군과 해군의 견해가 갈라졌다.

 

진주만 기습의 성공과 뒤이은 잇단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자신감에 넘치던 일본해군은 미함대가 태평양을 건너 쳐들어올 때 점진적으로 세력을 약화시킨 다음 전함을 중심으로 하는 주력함대를 투입하여 단 한번의 결정적인 해전을 통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기존의 점감요격작전을 폐기했다.

대신 그들은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미함대를 포착한 다음 각개격파하고자 하였으며 예정에 없던 호주 침공까지 주장했다. 

 

반면 일본육군은 태평양 지역에서 더 이상 진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버마 방면에 전력을 집중하여 가능하면 인도까지 진출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중국을 완전히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낸 다음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는 지구전을 주장했다.

특히 호주 침공 문제는 가용 사단 수의 부족과 함께 보급문제 때문에 절대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육군도 호주가 태평양 방면에서 연합군 반격의 전초기지가 되리라는 점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주를 고립시켜 무력화시킬 필요성은 인정했다.

따라서 대본영의 육군부와 해군부는 호주와 미국의 연락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뉴기니 남부의 포트모레스비를 점령하는 MO 작전과 솔로몬 제도 및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거쳐 피지와 사모아를 점령하는 FS 작전에 동의했다.

 

그런데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의 생각은 대본영과 달랐다.

태평양에서 일본해군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미국항공모함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는 FS 작전 이전에 미드웨이와 알류샨으로 진출하면서 그 과정에서 요격하러 나오는 미국 항공모함들을 격멸하기 위하여 연합함대 함정 대부분이 참가하는 대규모 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본영에서는 육군부와 해군부가 공히 미드웨이 작전을 반대했으나 진주만 기습의 성공으로 권위가 한껏 높아진 야마모토 제독의 의견을 쉽사리 꺾지 못하여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차기전략방향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1942년 4월 18일, 미국 항공모함 호넷에서 이함한 B-25 쌍발폭격기들이 벌건 대낮에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를 폭격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했다.(관련 내용은 여기로)

둘리틀 폭격이라고 불리는 이 기습적인 도교 공습은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미국 항공모함의 위험성을 크게 부각시키면서 결국 야마모토 제독의 미드웨이 공격작전인 MI 작전이 채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대본영은 1942년 4월 말에 MO 작전(5월 7일), MI 작전(6월 7일), FS 작전(7월 7일)을 1달 간격으로 차례로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MO 작전은 산호해 해전으로 인하여 실패했고 MI 작전은 일본해군이 미드웨이 해전 에서 참패함으로써 전국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 FS 작전은 실시해보지도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포트모레스비 공략작전인 MO 작전의 일환으로 툴라기를 점령했다.

1942년 5월 1일, 뉴조지아 남방해상에 진출한 고토 아리토모 제독이 지휘하는 엄호부대의 경항모 쇼호로부터 출격한 함재기들이 가부투 섬을 공습하여 주기 중이던 호주공군의 카탈리나 비행정 3대를 파괴하고 주변 시설을 폭격했다.

일본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툴라기 지역의 연합군 병력은 소형 코프라 운반선 2척을 타고 툴라기를 탈출했다.

이 2척 중 AIF(Australian Imperial force) 소속의 호주군 22명과 툴라기의 백인들 및 중국인들을 태운 28톤짜리 코프라 운반선 발루스는 간간히 가해지는 일본기들의 공습을 피해가면서 과달카날의 아올라를 거쳐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에파테에 도착했고 최종적으로 호주의 시드니로 철수했다.

한편 포트모레스비를 떠나 툴라기로 파견되어 가던 호주공군의 카탈리나 비행정 1척이 비행 도중에 시마 기요히데 소장이 이끄는 툴라기 침공부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툴라기 침공부대는 수송선 아즈마산마루, 구잠정을 개조한 수송선 도시마루 3호 및 다마마루 8호, 역시 소해정을 개조한 수송선인 하고로모마루 및 다마마루로 이루어져 구축함 2척(기쿠즈키, 유즈키)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기뢰부설함 오키노시마, 고에이마루, 그리고 소해정 제1호와 제2호도 동행하고 있었다.

아즈마산마루를 비롯한 수송선에는 구레제3해군육전대의 1개 중대와 설영대, 요코야마 항공대 소속 항공요원들과 수상기 기지 건설을 위한 자재 등이 실려 있었다.

일본군은 1942년 5월 3일 오전 8시에 툴라기에 도착하여 무혈상륙했고 그날 저녁에는  라바울을 출발한 97식비행정 3대가 가부투 섬에 도착했다.

 

(가와니시 H6K 97식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군의 툴라기 상륙 당시 툴라기 남방 800km 지점에 있던 플레처 제독 휘하의 제17기동부대는 툴라기 공습을 위하여 즉시 북상했다.

5월 4일 오전 8시 30분부터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떠난 미군 함재기들이 3차례에 걸쳐 툴라기에 정박 중이던 일본함정들을 공격했다.

공습 결과 구축함 기쿠즈키, 기뢰부설함 오키노시마, 소해정을 개조한 수송선인 다마마루, 그리고 소해정 2척이 격침되었다.   

5월 8일에는 8대의 B-17 플라잉포트레스가 툴라기를 폭격했으나 치명타를 입히지는 못했다.

 

이후 일본군은 툴라기 기지를 수상기 기지로서 착실히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초가 되자 툴라기에는 97식 비행정 9대와 제로기를 수상기로 개조한 2식 수상전투기 9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방어병력의 주력은 제84경비대 300 명이었으며 이외에도 요코야마 항공대 소속 342명과 설영대원 144명 등 총 786명이었다.

 

(나카지마 A6M2N 2식 수상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한편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해군 제25항공전대장 야마다 사다요시 소장은 남부 솔로몬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남부 솔로몬 지역에 건설된 비행장은 포트모레스비 공격시 측면 엄호를 제공할수 있을 뿐 아니라 향후 뉴헤브리디스 제도와 뉴칼레도니아 공격시 강력한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도에서 1942년 5월 25일에 제25항공전대와 제8근거지대의 기술자들이 남부 솔로몬 지역에 대한 항공정찰을 실시하여 과달카날 섬 북해안의 룽가 강 동쪽 평원을 비행장 건설의 적지로 선택했다.

1942년 7월 6일 오후 2시 10분, 제11설영대와 제13설영대를 실은 아즈마산마루, 히로도쿠마루,호쿠리쿠마루, 아즈마마루가 과달카날 북해안에 도착하여 11일까지 인원과 물자를 양륙했다.

 

몬젠 가나에 해군대좌가 지휘하는 제11설영대는 보병 230명과 건설노무자 1,3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오카무라 노리나가 소좌의 제13설영대는 보병 50명과 건설노무자 1,300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설영대는 8월 15일로 예정된 건설기한을 맞추기 위하여 매일 오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작업을 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7일에 미해병대가 상륙했을 때 일본군 비행장에는 병사용 막사, 무전시설, 전투기용 방호벽 등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길이 800m의 활주로는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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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투(Guadalcanal Campaign)는 1942년 8월 7일에 미해병제1사단이 과달카날 섬과 그 대안의 툴라기 섬 및 가부투-타남보고 섬에 상륙한 이래 1943년 2월 9일에 살아남은 일본군 패잔병 1만여명이 해상철수할 때까지 6개월간 과달카날 섬과 인근 해역 및 상공에서 벌어진 미일 양국 간의 무력충돌을 말한다.

이 기간 동안 미해병대 및 육군의 4개 사단이 투입되어 헨더슨 비행장을 둘러싸고 일본육군과 처절한 지상전을 벌였다.

또한 과달카날 주변 해역과 상공에서는 약 50회에 걸쳐 미일간의 함정 사이에 또는 함정과 항공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으며 그 중 1942년 8월 9일의 사보 섬 해전, 8월 23일에서 25일에 걸친 동부 솔로몬 해전,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치러진 에스퍼란스 해전, 10월 26일의 산타크루즈 해전,11월 13일에서 15일 사이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 11월 30일의 타사파롱가 해전, 그리고 1943년 1월 29일에서 30일에 걸친 렌넬 섬 해전 등 7번의 주요 교전이 해전의 이름을 얻어 전사에 기록되었다.

이들 중 동부 솔로몬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은 함재기를 사용한 항공모함끼리의 대결인 함대항공전이었으며 마지막의 렌넬 섬 해전은 일본의 지상발진 항공기와 미국의 수상함대와의 대결이었다.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이 실시한 최초의 주요 반격이었다.

이전까지 연합군의 공격은 주로 잠수함을 이용한 소모작전이거나 항공모함을 이용한 히트앤드런 방식의 일시적 공격이었는데 반하여 과달카날 전투는 처음으로 일본군이 방어하고 있는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전투였다. 

또한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육군이 최초로 대규모 패배를 당한 전투였다.

일본해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해군에게 참패한 데 이어 일본육군마저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지상군에게 대패하면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을 상실하였으며 이후 수세에 몰려 수비에만 급급하다가 패전을 맞이하게 된다.

 

1. 과달카날 섬

 

(솔로몬 제도. 남동쪽의 화살표 지역이 과달카날 섬이며, 북서쪽의 화살표 머리 지역이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라바울이다. 원본은 여기로)

 

솔로몬 제도는 대략 남위 5도에서 12도, 동경 155도에서 170도 사이에 분포하며, 북서쪽 끝의 부겐빌 섬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2열로 늘어선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열에는 초이셀 섬, 산타이사벨 섬, 말라이타 섬이 있고, 남쪽열에는 뉴조지아 섬, 러셀제도, 과달카날 섬, 산크리스토발 섬이 있으며, 그 외에도 수백개의 작은 섬들이 산재해있다.

북쪽 열과 남쪽 열 사이의 수로를 슬롯이라 부르며,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 특히 일본함정들이 주로 이 슬롯을 이용하여 라바울과 과달카날 사이를 왕복했다.

 

과달카날 섬은 남부 솔로몬 제도에 속하며 동서로 약 145km, 남북으로 40km 쯤 되는 짚신벌레 모양이다.

 

(짚신벌레)

 

(과달카날 섬. 화살표 지역이 헨더슨 비행장이 있는 룽가 평원이고. 북쪽의 화살표 머리는 툴라기 섬이다. 원본은 여기로)

 

과달카날 섬의 북쪽은 평탄한 지형으로 상륙할만한 해안도 많고, 비행장을 만들만한 평지도 많으나 남쪽 해안은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접안이 거의 불가능하다.

섬의 중앙은 최고높이가 약 2,400m 에 달하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서 북해안으로 여러 개의 강이 흘러들어간다.

 

이러한 강은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물이 항상 흐르는 일반적인 형태의 강으로 테나루 강, 룽가 강, 발레수나 강 등이 속한다.

또 한 가지는 수량이 많으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만 수량이 적으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호수처럼 고여 있는 강으로서 일루 강, 마타니코 강 등이 여기에 속한다.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우림기후로 연간 강우량이 4,200mm 에 달하고(우리나라의 연간 강우량은 약 1,200 -1,400mm) 평균 기온은 28도 정도이며 습기가 높아서 무더운 날씨이다.

계절은 11월부터 3월까지의 건기와 나머지 기간인 우기로 나뉘는데 건기란 것도 상대적 개념으로 건기에도 상당량의 비가 내린다.

따라서 쿠나이라고 부르는 키가 큰 풀이 자라는 평원을 가진 북해안 일부를 제외한 섬의 대부분은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과달카날 섬은 1568년에 스페인의 탐험가 멘다나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과달카날이라는 이름도 멘다나가 지은 것이다.

이후 과달카날은 200 년 가까이 잊혀졌다가 1767년에 프랑스 탐험가 부갱빌에 의하여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19세기 말에 독일이 동북부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 및 부갠빌 섬을 차지하자 영국도 동남부 뉴기니와 부갠빌 섬 이남의 솔로몬 제도를 차지했다.

영국은 1893년 10월 6일에 솔로몬 제도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했고, 1897년에는 솔로몬 제도 제일의 양항을 가진 과달카날 섬 대안의 툴라기에 행정청을 설치했다. 

한편 제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이 차지했던 뉴기니 동북부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 그리고 부갠빌 섬은 호주가 신탁통치했다.

 

1939년에 솔로몬 제도의 중심지인 툴라기에는 작은 호텔 하나, 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 몇개, 그리고, 영국인 공무원들을 위한 방갈로 몇채 등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과달카날 섬에는 북해안을 따라 몇군데 야자농원이 있었고 야자나무로 만든 3개의 작은 교회가 있었다.

 

농장주들은 주로 호주인들로서 원주민들을 인부로 고용하여 농장을 경영했다.

야자농원의 주요 산물은 야자를 말려서 수송 및 저장에 편리하게 만든 코프라로서 이 코프라를 찌거나 압착하여 야자유를 추출한다.

야자농원에서 산출된 코프라는 주로 영국계 회사인 레버브라더스 사 또는 시드니에 본사를 둔 번스필릅 사가 매입했다.

과달카날 섬 북해안의 아올라 지역에는 번스필릅 사의 출장소가 있었으며 레버브라더스 사의 출장소는 툴라기 섬 인근의 가부투 섬에 있었다.

호주인 농장주들과 원주민 인부들과의 사이는 원만한 편은 아니어서 원주민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감독관을 살해하고 농장에 불을 지른 다음 정글 속으로 도망가 버리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1942년 5월에 툴라기를 점령했을 때 원주민 관리에 신경을 썼더라면 원주민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백인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자유와 풍요를 가져다 주겠다는 선전과는 달리 백인들보다 심하게 원주민을 차별했다.

그들은 원주민을 데려다가 하루 종일 중노동을 시키고는 임금으로 쓸모없는 군표를 지급했다.

그리하여 8,000 - 10,000명으로 추정되는 과달카날 섬의 원주민들은 일본군에게 등을 돌리고 연합군에게 협조했다.

 

호주 정부는 1919년부터 자국의 해안을 감시하기 위한 해안감시원을 운용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유럽의 정세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호주 정부는 이 해안감시원 제도를 솔로몬 제도까지 확장했고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주 해군이 이 해안감시원 제도를 관장하게 되었다.

주로 농장주이거나 현지 공무원이었던 해안감시원들은 호주해군의 계급을 부여받고 자신들이 생활하던 익숙한 지형에서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일본군 항공기, 선박, 그리고 지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무전기로 보고했다.

호주군이 툴라기에서 철수할 당시인 1942년 5월에는 솔로몬 제도 전체의 해안감시원 수가 10명 미만이었으나 이후 호주군 및 미군의 관심과 후원에 힘입어 차츰 늘어났다. 

나중에 투입된 해안감시원들은 기존의 농장주나 현지 공무원에 더하여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호주군이나 미군 병사들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해안감시원들은 연합군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미군은 해안감시원들의 보고 덕분으로 일본기들이 도달하기 약 50분 전에 경보를 받을 수 있었고 전투기들이 미리 발진하여 유리한 고도를 차지하고 있다가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또한 해안감시원들은 과달카날 상륙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격추된 연합군 조종사 및 항공승무원 120 명을 구조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호주공군은 가부투 섬에 카탈리나 비행정 3대를 배치하고 보병 22명을 파견했다.

툴라기에는 장교 3명, 하사관  2명, 그리고 112명의 원주민 경찰로 이루어진 솔로몬 방위대가 있었다.

일본군이 침공해 왔을 때 툴라기와 과달카날 지역의 연합군 병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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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키스카 탈환 

 

일본군이 키스카를 탈출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미해군은 상륙을 앞두고 키스카 섬에 일련의 포격을 가했다.

1943년 7월 30일, 구축함 패러것과 헐이 일본군 주둔지에 200 발의 5인치 포탄을 쏟아 부었다.

8월 2일에는 구형전함 2척(아이다호, 테네시), 중순양함 2척(솔트레이크시티, 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3척(리치먼드, 디트로이트, 랠리),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키스카 섬에 14인치 고폭탄 120발, 8인치 고폭탄 250발, 6인치 고폭탄 605발 그리고 5인치 포탄 1,337발, 합계 185톤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후로도 상륙일인 8월 15일까지 구축함 6척(애브너리드, 에일윈, 패러것, 헐, 모내헌, 펠프스)가 교대로 매일 키스카 섬을 포격하여 합계 994발의 5인치 포탄을 쏟아부었다.

12일에는 다시 중순양함 2척(솔트레이크시티, 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3척(리치먼드, 디트로이트, 랠리), 구축함 5척이 키스카 섬을 포격했다.

오전 7시12분부터 33분까지 21분간 지속된 포격에서 미함대는 8인치 포탄 85발, 6인치 포탄 450발, 그리고 5인치 포탄 1,072발 등 총 60톤의 포탄을 퍼부었다.  

 

제11육군항공대도 공습을 실시했다.

8월 2일에 날씨가 맑아지자 제11육군항공대는 B-24 폭격기 8대, B-25 쌍발폭격기 9대, P-38전투기 8대를 투입하여 해군의 포격과 발맞추어 키스카 섬을 폭격했다.

8월 4일에는 134회 출격하여 152톤의 폭탄을 키스카 섬에 쏟아부었다.

 

8월 5일과 6일은 그때까지의 폭격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지느라 폭격을 중단했으며, 이후 날씨가 나빠져서 4일간 폭격을 중단했다.

 

8월 10일부터 날씨가 좋아지자 제11육군항공대는 폭격을 재개하여 상륙일인 15일까지 모두 355톤의 폭탄을 키스카 섬에 투하했다.

 

쿠릴 열도 폭격도 실시되었다.

8월 11일에 B-24 폭격기 9대가 쿠릴 열도로 날아가서 가타오카 해군기지와 가시와바라 육군기지를 폭격했다.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치열한 대공포화와 함께 약 40대의 제로기, 2식 수상전투기 및 하야부사 전투기들이 요격하여 B-24 폭격기 9대 중 2대가 격추되고 3대가 피해를 입었다.

일본전투기들은 5대가 격추되었다.

 

그동안 미군이 키스카 섬에서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8월 6일에 열린 제11육군항공대의 폭격평가회에서 키스카 항을 찍은 사진 몇장이 주목을 끌었다.

8월 2일과 4일의 폭격과정 중에 촬영된 이 사진에서는 키스카 항 주위에 일본군 트럭들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모여 있었다.

이전에 일본군 트럭은 섬의 곳곳에 주의깊게 분산되어 잘 은폐되어 있어서 공중촬영으로는 그 존재를 알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8월 2일에 찍은 사진에는 트럭들이 모두 키스카 항 주위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모여 있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틀 뒤의 찍은 사진에도 똑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점이었다.

 

수상한 점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미군의 통신부대는 7월 28일 이후로 키스카 섬의 통신소에서 발신하는 무선통신을 전혀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해안에 바짝 다가가서 매일같이 포격을 가한 구축함들은 전혀 반격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적의 기지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제11육군항공대의 조종사들도 8월 들어서 키스카 섬의 일본군 대공포화가 거의 무시할만큼 약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은 이러한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하여 본격적인 상륙 이전에 소규모의 정찰대를 상륙시키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육군항공대의 조종사들은 일본군의 대공포화가 약해졌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며 심지어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기총소사했다는 전투기 조종사의 보고까지 있었다.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은 육군조종사들의 보고를 믿을 수 없다면서 정찰대 파견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결국 킨케이드 중장은 정찰대 파견을 포기했다.

무엇보다 어설프게 정찰대를 상륙시켰다가 일본군에게 생포되기라도 하면 8월 15일로 예정된 상륙작전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키스카 섬 상륙부대는 애투 섬의 경우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찰스 콜렛 소장이 지휘하는 지상부대의 규모는 제7보병사단을 중심으로 5,300 명의 캐나다 제13보병여단을 포함하여 34,426명에 달했다.

지상부대는 툰드라 지형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승함하기 직전까지 애닥 섬에서 전투훈련을 강도높게 실시하고 있었다.

 

록웰 소장이 95척에 달하는 키스카 침공함대를 지휘했다.

수송함대는 공격수송함(APA) 4척, 병력수송함(AP) 10척, 화물수송함(AKA 및 AK) 4척, 고속수송함(APD) 1척, 전차상륙함(LST) 14척, 보병상륙정(LCI) 9척, 전차상륙정(LCT) 19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형전함 3척,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9척이 수송함대의 호위 및 화력지원을 담당했고, 이외에 경량기뢰부설함 2척, 고속소해함 3척, 예인선 3척, 수로측량함 1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주요 지휘관들 이외에도 제4군 사령관이자 서부방어사령관인 존 드윗 중장, 존 맥클로이 전쟁성 차관, 그리고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 등이 옵저버로 참관할 예정이었다.

 

(애닥 섬에 집결해 있는 키스카 침공함대)

 

키스카 침공함대는 금요일인 1943년 8월 13일에 애닥 섬을 출항하여 15일 새벽에 키스카 섬에 도달했다.

소해함이 수로를 청소하자 구형전함, 순양함 및 구축함들이 일본군 기지를 포격했다.

일본군을 기만하기 위하여 다음날 키스카 섬의 북쪽 서해안에 상륙예정인 캐나다 제13 보병여단을 실은 수송함 5척이 커트루드 협만 바깥쪽에 정박했고 이어서 오전 7시 30분부터 거트루드 협만 내로 위장한 어뢰정 5척이 진입했다.

이 어뢰정들은 판자로 씌워 위장했는데 이 판자에는 실제 크기로 정교하게 병사들을 그려넣어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병력이 가득 타고 있는 상륙주정처럼 보였다.

 

주력인 제7보병사단은 키스카 섬 중부의 서해안에 상륙했다.

최초 상륙은 오전 8시 21분이었으며 오전 8시 40분까지 3,000 여명의 병력이 상륙하여 깊이 4,000m 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10시까지는 7,200 여명이 장비 및 보급품들과 함께 상륙해 있었다.

다음날에는 키스카 섬 북부의 서해안에 캐나다 제13보병여단을 중심으로 한 7,000 여명의 병력이 상륙했다.

 

(키스카 탈환전. 원본은 여기로)

 

미군과 캐나다군은 8월 17일에 키스카 항에 있는 일본군 기지 부근에서 합류했다.

상륙부대는 이어서 일본군 기지 내로 쳐들어 갔는데 자욱한 안개 속에서 아군끼리 수많은 오인 사격이 발생하여 21명의 사망자와 3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날 밤에 해상에서도 커다란 피해가 있었다.

8월 18일 오전 1시 34분에 구축함 애브너리드가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에 접촉했다.

기뢰의 폭발로 5번 포탑 후방의 함체가 떨어져 나가 물 속에 가라앉았다.

더욱 나쁜 것은 연막탄 보관탱크가 터지면서 연막이 새어나와 수많은 승무원들이 질식사한 것이었다.

살아남은 승무원들의 응급처치로 겨우 침몰을 모면한 애브너리드는 동료 구축함 뱅크로프트에게 이끌려 애닥 섬으로 향했다.

애닥 섬에서 긴급수리를 받은 애브너리드는 본격적인 수리를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 브레머튼의 퓨젯사운드 조선소까지 가야만 했다.

애브너리드에서는 7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47명이 부상을 입었다.

 

(함체 후방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 퓨젯사운드 조선소에 도착한 DD-526 애브너리드)

 

키스카 섬에서는 텅 빈 일본군 기지를 장악한 미군과 캐나다군의 정찰대가 며칠 동안 키스카 섬을 샅샅이 훑었으나 일본군은 단 1명도 없었다.

1943년 8월 22일 오전 11시 50분,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은 키스카 섬의 탈환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리하여 35,000 명에 달하는 미국-캐나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버려둔 개 4마리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면서 키스카 섬을 탈환했다.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 상륙 이후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 10만 장을 뿌렸으나 불행하게도 이 개들은 글을 읽지 못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1942년 6월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상륙한 이래 1년 2개월 만에 알류샨 열도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애투 섬 수비대는 전멸했으며 키스카 섬 수비대는 귀중한 무기와 장비 및 보급품들을 모두 놓아두고 몸만 빠져나왔다.

일본해군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둘러싼 전투에서 구축함 3척, 잠수함 6척, 수송선 9척을 상실했다.

 

그러나 일본은 알류샨 열도에서 결코 손해본 장사를 한 것이 아니었다.

1942년 6월 초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한 이래 일본군은 1만명 미만의 병력과 약간의 함정 및 항공기를 투입하여 미국 함대와 제11육군항공대 그리고 많은 병력들을 전략적으로 별로 가치가 없는 북태평양에 1년 이상 붙잡아 두는데 성공했는데 키스카 섬 탈환 당시에는 그렇게 붙잡혀 있던 미군 병력이 10만명을 넘었다.

만일 남태평양군 사령관 헐지 제독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 탈환에 동원된 병력과 함정들의 일부만이라도 지원받았다면 뉴조지아 섬 점령을 빨리 마무리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 함정들과 병력들의 일부라도 당시 미군 보급선의 끝에 매달린 채 일본군과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던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지역군에 돌려졌다면 후온 반도 전투를 좀 더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다시 미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미국 국민들은 이제 본토의 일부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합동참모본부에서는 힘들게 탈환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본전을 뽑기 위하여 1943년 9월 7일에 바라무시로 공략을 토의했으나 직접 부대를 이끌었던 지휘관들의 의견을 들어본 뒤 18일에 포기했다.

무엇보다 1943년 11월에 길버트 제도 공략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바라무시로 공략에 필요한 병력을 빼낼 곳이 없었다.

또한 바라무시로 공략은 향후 홋카이도 침공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었는데 홋카이도 침공은 영국이 절대 반대하고 있었다.

만일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한다면 바라무시로 공략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으나 1943년 9월의 시점에서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은 다시는 알류샨 열도를 넘볼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실제로 대본영은 키스카 탈출이 성공한 직후인 1943년 8월 4일에 북방방면군을 폐지했으며 제5함대와 제12항공함대를 북동방면 함대로 통폐합하고 사령관에 도즈카 중장을 임명했다.

가와세 중장이 지휘하는 북동방면 함대의 수상함 세력은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수송선 7척과 약간의 소형 함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는 쿠릴 열도의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이었다.

 

1943년 11월의 충격 작전을 앞두고 알류샨 열도의 미군은 전반적으로 축소되었으며 지휘관들도 이동했다.

9월 11일에 데븐포트 존슨 소장이 버틀러 소장의 뒤를 이어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이 되었다.

제11육군항공대는 세력이 삭감되었고 임무도 가끔씩 쿠릴 열도에 견제 공격을 하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은 1943년 10월 11일에 맥아더 해군이라고 불리던 남태평양지역군의 제7함대 사령관으로 옮겼고 플레처 중장이 뒤를 이었다.

이 방면에서 특기할만한 해군의 활동이라면 1944년 2월 2일에 와일더 베이커 소장이 지휘하는 경순양함 2척(리치먼드, 랠리)과 구축함 7척이 쿠릴 열도를 포격한 사건 정도였다.

 

이후 종전시까지 알류샨 열도에서는 전쟁사가의 관심을 끌만한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인 활동은 주로 미군의 간헐적인 쿠릴 열도 공습과 드물게 감행되는 일본군의 애투, 키스카 및 애닥 섬에 대한 소규모 보복공습 정도였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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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제국은 실패하였는가?> 박철현 옮김, 주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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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웹사이트

 

http://www.google.co.kr

http://www.wikipedia.org/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 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naljava69 (쿵디담 님의 블로그)

http://www.navsour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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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키스카 탈출(2) - 해상철수 

 

애투 섬이 함락되었을 때 키스카 수비대는 육군인 북해수비대와 해군인 제51근거지대를 주축으로 하여 약 6,000 명 규모였으며, 북해수비대 사령관 미네기 도이치로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키스카 수비대는 잠수함을 사용하여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했으며 1943년 5월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820명이 철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3척의 잠수함을 상실하고 다른 3척이 풍랑이나 좌초 등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잠수함을 사용한 철수는 중단되었다.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어차피 잠수함만으로 키스카 수비대를 모두 철수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잠수함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에 이미 과달카날처럼 경순양함과 구축함을 사용하여 단번에 키스카 수비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키스카 섬에 직접 돌입할 제1수뢰전대 사령관으로 기무라 마사토미 소장을 임명해 주도록 대본영에 요청했다.

그리하여 남태평양에서 근무하던 기무라 소장은 오모리 센타로 소장의 뒤를 이어 제1수뢰전대 사령관이 되었다.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가와세 중장은 이어서 구원함대를 호위할 구축함을 구하러 나섰다.

키스카 섬에 돌입할 함대는 모두 제5함대 소속인 경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이었는데 여기에 약 5,200 명인 키스카 수비대를 모두 수용하려면 경순양함 1척당 약 1,200 명, 그리고 구축함 1척당 약 470명을 수용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구축함의 경우 완전무장한 병력을 약 150 명까지 수송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 구축함은 예비어뢰를 포기해야만 했다.

따라서 몸만 빠져나온다고 해도 구축함에 470명을 실으려면 사실상 항해에 필수적인 인원과 장비 및 보급품들을 제외하고는 탄약을 포함하여 함내를 모두 비워야만 했다.

이럴 경우 무장 조작을 담당할 승무원도 승함할 필요가 없으므로 더 많은 병력을 태울 수 있었다.

대신 전투능력은 전무하여 사실상 비무장의 고속 수송함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호위할 구축함이 반드시 필요했다.

 

가와세 중장이 도쿄에 가서 키스카 철수에 투입할 구축함 6척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자 대본영은 6척이 그들이 가진 구축함 예비의 전부라면서 난색을 표했다.

당시 일본의 구축함 보유 상황을 보면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일본은 111척의 구축함을 가지고 태평양전쟁에 뛰어들어 1943년 6월 말까지 19개월 동안 34척을 잃고 15척을 새로 건조함으로써 6월 말 현재 92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축함 92척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이 모두를 당장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조를 마친 구축함은 취역한 다음 해상에 나가 최소한 1-2개월 이상 걸리는 시험항해를 마쳐야 비로소 작전에 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작전 중에 적의 공격이나 기타 이유로 피해를 입으면 몇 달이고 건선거에 들어앉아 수리를 해야만 한다.

피해를 입지 않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건선거에 들어가 오버홀을 받아야 하며 아니면 새로운 무장이나 장비 등을 장착하거나 구형 무기 및 장비들과 교체하기 위하여 건선거에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주로 피해를 입고 건선거에 들어간 김에 오버홀과 새로운 무기나 장비의 장착 및 교체를 한꺼번에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럴 경우 건선거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진다.

 

이런 이유로 구축함같은 전투함은 물론 어느 정도 복잡성과 크기를 가진 거의 모든 무기체계가 보유량 전부를 즉시 작전에 투입할 수는 없다.

전체 보유량에서 이런 식으로 당장 사용할 수 없는 숫자를 빼고 즉시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비율을 가동률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함정이나 항공기의 가동률은 보급 및 정비 체계가 제대로 작동해도 70% 를 넘기면 양호한 편이었고, 80% 가 넘으면 뛰어난 편이었으며, 90% 를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 대규모 전투를 치러서 피해를 입은 함정이 늘어나거나 예비부품의 보급이나 수리 체계에 혼란이나 지연이 일어나면 가동률이 60% 이하, 심지어는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따라서 1943년 6월 말 현재 일본해군이 작전에 투입 중이거나 즉시 투입할 수 있는 구축함은 아마 70척을 넘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대본영의 예비가 6척이라는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위를 위한 구축함 6척이 꼭 필요했던 가와세 중장은 제5함대의 중순양함 2척(마야, 나치)을 남태평양으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6척의 구축함 모두를 빌려오는데 성공했다.

당시 중순양함 마야는 가와세 중장의 기함이었으므로 기함을 뺏긴 제5함대 사령부는 바라무시로 섬의 냉동창고에 딸린 사무실로 옮겨야만 했다.

이것은 당시 가와세 중장이 키스카 철수작전에 얼마만큼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키스카 섬의 해상철수는 안개를 활용하여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구원함대와 키스카 수비대 사이의 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이었으나 감청의 위험 때문에 무선통신은 최대한 억제해야 했다.

그리하여 조율을 위하여 북해수비대의 후지 가츠미 참모와 제51근거지대의 야스나미 마사도시 참모가 잠수함으로 바라무시로에 도착했으며 제5함대에서는 I-7 호에 도노다 참모를 태워 키스카 섬으로 보냈다.

 

1943년 7월 7일 오전 7시 30분에 기무라 제독의 기함인 경순양함 아부쿠마를 선두로 경순양함 2척(아부쿠마,기소), 구축함 6척, 그리고 호위를 위한 구축함 6척, 급유함 니폰마루와 호위함 쿠나시리로 이루어진 구원함대가 바라무시로를 떠났다.

앞으로 1주일 간 안개가 끼겠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케호 작전으로 일컬어지는 키스카 섬 해상철수작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키스카 섬 돌입예정일은 7월 11일이었다.

 

그런데 7월 10일 오전에 마지막 해상급유를 마치고 나자 해상의 안개가 걷혔다.

구원함대는 돌입날짜를 13일로 연기하고 기다렸으나 안개는 다시 낄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를 더 기다린  제1수뢰전대 사령관 기무라 소장은 7월 15일 아침에 기함 아부쿠마 함상에서 회의를 열었다.

참모들 대부분이 돌입하자고 주장했으나 기무라 소장은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5일 오전 8시 20분에 구원함대는 키스카 섬에 구원작전을 중단한다는 암호 전문을 보내고 바라무시로로 돌아갔다.

 

키스카 섬에서는 미리 정해진대로 구원함대가 바라무시로를 출항한 지 5일째 되는 7월 11일부터 매일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2시간 동안 모든 병사가 키스카 항에 집결하여 2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다시 돌아가는 일을 14일까지 반복했다.

15일 아침에 구원작전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병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1차 철수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이제 케호 작전의 기회는 딱 1번 남았다.

더 이상 철수작전을 실시하기에는 일본해군의 연료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8월이 되면 안개가 끼는 날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에 어떻게든 7월 내로 철수작전을 성공시켜야만 했다.

다시 짙은 안개가 낄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자 구원함대는 1943년 7월 22일에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다.

두번째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키스카 섬에 돌입할 함정은 지난번과 같았으며 이번에는 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중장이 직접 경순양함 다마를 타고 제1수뢰전대와 동행했다.

키스카 돌입예정일은 26일이었다.

 

25일에 안개 속에서 호위를 담당하던 구축함 와카바와 하츠시모가 충돌했다.

와카바는 바라무시로로 돌아가야 했으며, 속력이 떨어진 하츠시모는 급유함 니폰마루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25일 오후부터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26일 새벽이 되자 완전히 걷혔다.

돌입예정일인 26일은 물론 27일과 28일까지 계속 맑은 날이 지속되자 28일 오후에 가와세 중장은 기함 다마 함상에서 참모들과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가와세 중장은 다마 함장 진 시게노리 대좌, 그리고 하시모토 시게후사 통신참모의 의견을 받아들여 작전 속행을 결의했다.

일본군의 염원을 알아들었는지 그날 저녁부터 다시 짙은 안개가 해상을 감싸기 시작했다.

기무라 소장의 제1수뢰전대는 호위하는 구축함들과 함께 키스카로 직행했고 다마는 키스카 남쪽 130km 지점에서 제1수뢰전대와 헤어져 대기했다.

 

제1수뢰전대 사령관 기무라 소장은 최종 돌입 단계에서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미함대의 초계선을 피하기 위하여 기무라 제독은 안전한 동쪽 항로 대신 수로 연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키스카 섬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북쪽으로부터 키스카 항에 돌입하기로 결심했다. 

제1수뢰전대는 이전에 서쪽 항로를 이용한 적이 있는 짐수함 I-7 호가 남긴 단편적인 수로 정보에 의지하여 해도에 기입되지도 않은 수많은 암초가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수로를 안개 속에서 20노트라는 무모할만큼 고속으로 항진했다.

기무라 제독의 도박은 성공하여 29일 정오 경에 제1수뢰전대는 무사히 키스카 항으로 들어섰다.

 

(키스카 섬. 원본은 여기로)

 
그동안 키스카 섬의 병사들은 26일부터 다시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키스카 항에 나와서 구원함대를 기다리는 일과를 시작했다.

 

 

 

 

 

 

이미 한번 실망을 맛본 병사들은 다시 실망을 맛보지 않기 위하여 가급적 기대하지 않으려는 심리와 혹시나 하는 심리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하루하루 간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29일 오전 9시, 키스카 섬의 통신소에 놀라운 무전이 들어왔다.

예정보다 4시간 빠른 정오에 구원함대가 도착한다는 암호통신이 들어왔던 것이다.

식사 중이던 일본군들은 즉시 식사를 마친 후 중요서류를 소각하고 서둘러 키스카 항으로 집결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병력들은 키스카 항에서 10km 이상 떨어져 있었으나 모두들 서둘러서 1명도 빠지지 않고 정오까지 키스카 항에 집결하는데 성공했다.

과연 예고한대로 정오가 되자 제1수뢰전대의 기함 아부쿠마를 선두로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구원함대가 키스카 항으로 들어왔고 호위를 맡은 구축함 4척은 키스카 항 바깥에서 미해군의 접근을 감시했다.

설마했던 구원함대가 실제로 나타나자 많은 병사들이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고 아예 주저앉아서 펑펑 우는 병사들도 있었다. 

북해수비대 사령관 미네기 소장도 경순양함 아부쿠마에 승함한 직후 기무라 제독에게 뭔가 감사의 말을  건네려 했으나 감정이 북받쳐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구원함대가 해안 가까이 닻을 내리자 곧이어 주정들이 병사들을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좁은 함내에 최대한 많은 병사들을 실어야 했으므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지품 이외에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소총마저 전부 버리고 승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시간이 관건이었으므로 함정들의 뱃전에는 빨리 기어오를 수 있도록 수많은 줄사다리가 드리워져 있었고,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승함했다.

병사들이 모두 승함하면 주정은 다시 해안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을 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주정 승무원들이 승함했다.

그리하여 구원함대가 닻을 내린 지 불과 55분 만에 키스카 섬 수비대 5,183 명 전원이 승함을 완료했다.

제1수뢰전대는 재빨리 닻을 올리고 키스카 항을 빠져나가 호위하던 구축함들과 만난 다음 키스카 섬 남쪽으로 내려가 가와세 중장의 기함 다마와 만났다.

1943년 7월 31일, 구원함대는 단 1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키스카 섬 수비대 전원을 구출하여 바라무시로에 도착했다. 

 

일본군의 케호 작전이 성공하는 데에는 큰 행운이 따랐다.

사실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23일에 애투 섬 남방 320km 해상을 항진 중이던 구원함대를 레이더로 포착했다.

킨케이드 제독은 보고를 받자 즉시 기펜 제독의 지휘 하에 구형전함 아이다호와 미시시피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함대를 파견하고 키스카 섬을 봉쇄하고 있던 구축함 애일윈과 모내헌도 담당 위치를 떠나 기펜 함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신 구축함 패러것과 헐이 키스카 섬 봉쇄임무에 투입되었다.

 

1943년 7월 25일 저녁에 기펜 함대는 키스카 섬에서 남서쪽으로 130km 떨어진 해역을 항진 중이었다.

알류샨 열도에서는 드물게 맑은 날씨였다. 

자정이 막 지난 1943년 7월 26일 오전 0시 7분, 구형전함 미시시피의 레이더가 북쪽으로 24km 떨어진 해역에서 함영을 발견했고 이어서 구형전함 아이다호와 중순양함 위치타 및 포틀랜드도 잇달아 같은 함영을 발견했다.

기펜 제독은 즉시 북쪽으로 변침한 다음 거리가 13km 까지 줄어들자 포격 명령을 내렸다.

26일 새벽 0시 13분부터 구형전함과 중순양함들의 주포가 레이더에 의존하여 불을 뿜기 시작했고 구축함들은 전방으로 나아가서 어뢰를 발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적에게서는 전혀 반격이 없었다.

0시 44분에 적의 함영이 홀연히 레이더에서 사라질 때까지 31분 동안 기펜 함대는 14인치 포탄 518발과 8인치 포탄 487발을 포함하여 수많은 포탄과 어뢰를 발사했다.

기펜 제독은 레이더에서 적의 함영이 사라지자 포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수상정찰기를 사출했다.

정찰기의 조종사는 놀랍게도 해면에 아무 것도 없다고 보고해왔다.

적함은 물론 적함의 잔해나 부유물 심지어는 죽은 고래도 없었으며 오로지 차갑게 넘실거리는 끝없는 북태평양의 바다 뿐이었다.

 

사실 포격전 당시부터 적의 함대가 레이더 허상일 것이라는 의심이 있었다.

그렇게 치열한 포격을 퍼붓는데도 적의 함대에서는 어떠한 반격도 없었고 무엇보다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와 구축함들의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체가 무엇이든 기펜 함대가 교전한 상대는 일본함대는 아니었다.

당시 일본함대는 키스카 섬에서 80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미해군은 당시 구형전함과 중순양함들이 포착한 함영의 정체를 멀리 떨어진 앰치트카나 다른 섬의 모습이 밀도가 다른 공기의 경계층이나 해면에 반사되어 비친 일종의 신기루 현상이라고 추측했다.

이 정체불명의 함영이 대형함으로서 레이더 안테나의 위치가 높은 구형전함과 중순양함들의 레이더에만 나타나고, 상대적으로 안테나의 위치가 낮은 구축함들의 레이더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킨케이드 제독은 다음날인 27일에 기펜 함대에게 해상급유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기펜함대는 28일 오전 9시부터 키스카 섬에서 남동쪽으로 170km 떨어진 해상에서 급유함 페코스로부터 해상급유를 받았는데 기무라 제독의 구원함대는 미함대가 해상 급유를 받고 봉쇄 위치에 다시 전개하기 이전에 키스카 섬으로 들어가 병사들을 싣고 빠져나갔다.

구축함 에일윈과 모내헌을 대신하여 키스카 섬을 봉쇄하던 구축함 2척 중 기무라 함대의 접근 코스인 키스카 섬 남쪽을 담당하던 구축함 패러것도 그때 마침 연료가 떨어져서 기펜 함대와 함께 해상급유를 받고 있었다.

키스카 섬 북쪽을 담당했던 구축함 헐은 담당 해역을 초계 중이었으나 짙은 안개 속에서 키스카 섬 해안에 바짝 붙어서 항진하던 기무라 함대를 레이더로 포착하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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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키스카 탈출(1) - 일본잠수함들의 수난

 

미군이 애투 섬에 상륙하자 갈팡질팡하던 일본해군은 1943년 5월 19일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 수비대의 철수를 결정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애투 섬 수비대는 일본제5함대의 경순양함들과 구축함들을 이용하여 해상철수를 하기로 하고 키스카 섬은 잠수함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그런데 애투 섬 수비대는 구원함대가 출항하기도 전에 전멸해 버렸으므로 이제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의 관심은 키스카 철수에 집중되었다.   

 

제5함대 휘하의 제1잠수전대에는 총 17척의 잠수함이 있었는데 이들 중 키스카 철수에 동원된 잠수함은 I-2, I-7, I-9, I-21, I-24, I-34, I-36, I-155, I-156, I-157, I-169, I-171, 그리고 I-175 의 13척이었다.

제1잠수전대 사령관 고타 다케로 소장이 지휘한 이 잠수함들은 보급품을 싣고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병력들을 싣고 철수했다.

1943년 5월 26일에 최초로 병력 철수에 성공한 이래 6월 21일에 잠수함에 의한 철수작전을 중단할 때까지 제1잠수전대의 잠수함들은 20회 이상의 철수항해를 시도하여 13번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잠수함들은 키스카 섬에 125톤의 장비 및 탄약과 수백톤의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을 전달하고, 6,000 여명의 수비대 중 약 13%에 해당하는 820 여명을 철수시켰다.

 

키스카 철수를 처음으로 성공시킨 것은 I-7 호였다.

I-7 호는 애투섬 전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3년 5월 26일 밤에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무기와 탄약 및 식량을 내려놓고 60명을 싣고 빠져나와 바라무시로에 무사히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성공적인 철수가 이루어졌으며 그 와중에 심각한 피해라고는 6월 4일에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던 I-155 호가 다음날 심한 폭풍우 속에서 크게 망가져서 돌아온 것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를 눈치챈 미군이 키스카 섬 주변의 대잠경계를 강화하면서 철수에 동원된 일본잠수함들 사이에서 희생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43년 6월 10일 아침에 월리스 코넬 대위가 지휘하는 구잠정 PC-487 호가 키스카 섬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셰미야 섬 부근 해상에서 소나로 I-24 호를 탐지했다.

이어서 레이더가 700m 거리에서 잠망경을 발견했고, 최종적으로 PC-487 호의 승무원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육안으로 I-24 호의 잠망경을 확인했다.

PC-487 호는 전속력으로 달려들었고, I-24 호가 황급히 잠항하자 5발의 폭뢰를 투하했다.

정확한 폭뢰 투하로 큰 피해를 입은 I-24 호가 부상하자 정장 코넬 대위는 충각공격을 명했다.

 

(PC-487. 배수량 : 280톤, 길이 : 52m, 폭 : 7m, 최고속력 : 20노트, 승무원 : 65명, 무장 : 3인치 양용포 1문, 40mm 대공포 1문, 20mm 기관포 3문, 로켓발사기 2문, 폭뢰투하기 4문, 폭뢰투하레일 2조, 출력 : 2,880 마력)

 

배수량 280톤짜리 구잠정 PC-487 호는 배수량이 2,554톤으로 자신의 9배가 넘는 I-24 호에게 19노트의 속력으로 달려들어 세차게 들이받았다.

고속으로 달려오던 탄력으로 뱃머리가 I-24 호의 갑판 위로 튀어 오르면서 PC-487 호는 I-24 호의 뱃전에 걸터 앉았다.

후진하여 빠져나온 PC-487 호는 I-24 호의 주위를 돌면서 3인치 양용포와 40mm 대공포 및  20mm 기관포로 포탄을 쏟아붓다가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정장 코넬 대위는 잘못하면 자신의 배가 충각공격의 충격 때문에 두동강날 수도 있다고 각오했다고 한다.

두번째 공격에서 PC-487 호의 뱃머리는 다시 I-24 호의 갑판을 튀어올라 이번에는 I-24 호의 함교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그러자 PC-487 호보다 9배 이상 더 큰 일본잠수함이 뒤로 넘어지면서 전복, 침몰했다.

I-24호의 승무원 104명은 전원 사망했다.

PC-487 호는 충각공격의 후유증으로 몇 군데서 물이 새기 시작하여 속력을 늦추고 해상에서 수리를 마친 다음 자랑스럽게 애투 섬으로 개선했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굴뚝에 일본잠수함을 격침했다는 표시를 그리고 있는 PC-487 호의 승무원들)

 

I-24 호가 격침된 지 불과 3일 후인 6월 13일에는 I-9 호가 미국 구축함 프레지어에게 격침되었다.

I-9 호는 6월 2일에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17톤의 탄약과 2톤의 식량을 하역하고 79명을 싣고 6월 8일에 무사히 바라무시로에 도착했다.

6월 10일에 I-9 호는 두번째 철수임무를 위하여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다.

6월 13일 오후 5시 58분에 키스카 동쪽 25km 해상에서 엘리엇 브라운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 구축함 프레지어가 6,300m 거리에서 레이더로 부상한 상태의 I-9 호를 탐지하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프레지어가 접근하는 동안 I-9 호는 잠항했다.

 

서서히 접근하던 프레지어는 소나로 I-9 호를 탐지했고 저녁 8시 9분에 프레지어의 승무원이 불과 90m 거리에서 I-9 호의 잠망경을 발견했다.

프레지어는 일제사격을 퍼부으면서 고속으로 달려들었는데 최초의 일제사격 중 1발이 잠망경에 명중했다.

이어서 프레지어는 황급히 잠항하여 도망치려는 I-9 호의 머리 위에 3번에 걸쳐 폭뢰공격을 퍼부어서 격침했다.

I-9 호의 함장 후지이 대좌를 비롯한 승무원 101명 전원이 사망했다.

 

불과 사흘 사이에 2척의 잠수함을 상실한 잠수전단 사령관 코타 소장은 일단 구출작전을 중단했으나 상부의 압력으로 재개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16일에는 I-157 호가 키스카 섬으로 향하던 도중 앰치트카 섬 부근에서 좌초하여 승무원들이 어뢰, 연료 및 윤활유는 물론 축전지 일부까지 버려서 함체를 가볍게 만든 다음에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I-157 호는 잠항도 못하고 수상항주로 바라무시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6월 22일에는 I-7 호가 최후를 맞았다.

I-7 호는 최초로 키스카 섬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었다.

1943년 5월 26일에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식량과 13mm 및 7.7mm 총탄을 포함한 보급품 6톤을 하역하고, 대부분 환자나 부상자들인 60명의 병력과 전사한 병사의 유골 28점, 그리고 탄피 4톤을 싣고 무사히 바라무시로로 귀한했었다.

6월 8일에는 두번째로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19톤의 탄약과 15톤의 식량을 하역한 후 101명을 싣고 6월 13일에 무사히 바라무시로로 귀환했다.

 

I-7 호는 1943년 6월 15일 오후 4시에 3번째 철수임무를 위하여 바라무시로를 출발했는데 함내에는 키스카에 양륙할 보급품과 함께 해상철수를 위하여 제5함대와 키스카 수비대 사이의 조율을 담당할 제5함대의 도노다 참모가 탑승하고 있었다.

이것이 I-7 호의 마지막 항해가 되었다.

6월 20일 오후 7시에 I-7 은 키스카 섬의 베가 만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해상에 부상했다.

주변은 안개가 자욱했으므로 함장 다마키 대좌는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I-7 호로부터 약 13,000m 떨어진 해상에서는 피터 혼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모내헌이 초계중이었다.

모내헌이 SG 레이더로 I-7 호를 포착하자 함장 혼 소령은 즉시 전속력으로 접근하라고 명령했고 거리가 1,800m 까지 줄어들자 레이더 사격을 명령했다.

 

오후 7시 30분경에 갑자기 주변 해면에 포탄이 낙하하자 I-7 호의 함장 다마키 대좌는 즉시 잠항을 명했다.

그 순간 모내헌의 5인치 포탄 1발이 함교에 명중하면서 함장 다마키 대좌, 부장 나가이 소좌, 항해장 하나부사 대위를 포함한 6명이 사망하고 통신장교가 부상을 입었다.

지휘권을 인수한 어뢰장교 세키구치 로쿠로 대위는 반격을 명령했다.

I-7 은 140mm 갑판포 약 10발과 13mm 기관총 약 250발을 발사하며 반격을 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개방되어 있던 후방 밸러스트 탱크를 잠그는 것을 난리통에 잊어먹은 탓으로 오후 7시 45분에 I-7호가 옆으로 심하게 기울어지면서 해안에 좌초하자 세키구치 대위는 퇴함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도노다 참모도 무사히 퇴함했다.

 

21일 새벽 2시에 세키구치 대위는 키스카 섬 수비대와 접촉하여 도노다 참모를 넘겨주었다.

키스카 섬 수비대가 I-7 호의 보급품을 회수하기 위하여 바지선 2척을 보낼 예정이라는 걸 알게 된 세키구치 대위는 자신들을 바지선에 실어 I-7 호에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I-7 호로 돌아온 승무원들은 21일 하루종일 모내헌의 포탄에 의하여 구멍이 난 함교를 용접으로 떼우는 등 I-7 호의 수리에 매달렸다.

 

그 결과 저녁 6시 45분에 밀물이 들어오자 다시 잠수함을 띄울 수 있었으나 잠항은 불가능했다. 

I-7 호는 거트루더 협만으로 들어가 바지선들이 미처 다 옮기지 못한 보급품들과 전사자들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이때 키스카 섬에 주둔 중이던 제51해군통신대의 파견대는 바라무시로와 통신할 수 있도록 I-7 호에 일본해군의 암호인 JN-25b 암호책을 두 권 주었다.

I-7 은 22일 0시에 키스카를 떠났다.

 

22일 오전 0시 35분, 키스카 섬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던 미국 구축함 모내헌은 13,000m 거리에서 레이더로 다시 I-7 호를 발견하고 접근하여 오전 1시 30분부터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해상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으나 모내헌은 레이더 조준으로 정확한 사격을 가하여 I-7 의 함교와 후방 밸러스트 탱크에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때 세키구치 대위가 부상을 입고 기관장 한다 마사오 대위가 사망했으므로 포술장 신도 유시오 중위가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모내헌은 10분 만에 포격을 중단했다.

 

오전 2시 10분에 모내헌은 조명탄을 발사하여 I-7 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다시 포격을 시작했다.

2시 18분에 모내헌의 포탄 1발이 I-7 호의 조타 엔진 중 하나를 파괴하자 I-7 호는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키스카 섬으로 되돌아섰다.

I-7 호는 140mm 갑판포 70발과 기관총탄 2,000 발을 발사하며 저항했으나 모내헌의 함수에 약간의 생채기를 내는데 그쳤다.

 

(I-7 호와의 교전에서 가벼운 상처를 입은 모내헌의 함수)

 

잠시 후 모내헌의 포탄 1발이 I-7 호의 갑판에 쌓아두었던 140mm 포탄에 명중하여 화재를 일으켰고, 다른 1발은 좌현 후방 밸러스트 탱크에 명중하여 I-7 호는 왼쪽으로 30도 정도 기울어졌다.

오전 2시 30분, 신도 중위는 전속력으로 키스카 섬으로 도망치라고 명령했다.

모내헌은 좌초를 염려하여 추적하지 않았다.

 

오전 3시 15분, 침몰 직전의 I-7호는 베가만에 겨우 좌초했는데, 함미 쪽이 순식간에 물에 잠기면서 함수 약 15m 만이 물 밖으로 나왔다.

승무원들 중 약 2/3 가 함수 쪽으로 탈출하는데 실패하여 사망했고 귀중한 암호책이 들어있던 가방도 함미 구역에 남겨졌다.

오전 6시 30분에 일본군 주정이 다가와 생존자 43명을 구조했는데 10명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부상자 중 1명은 끝내 사망했다.

I-7 에서는 통틀어 87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폭약으로 물 밖에 나와 있던 I-7 호의 함수 부분을 폭파시켰다.

 

다음날인 6월 23일에 일본잠수부들이 해중에 잠긴 I-7 호의 함체에 접근하여 귀중한 암호책을 찾으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미군이 키스카 섬을 탈환한 후 1943년 9월 7일에 구조함 플로리칸이 미드웨이로부터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I-7 호를 철저히 조사했다.

미해군 잠수부들은 1달 간의 노력 끝에 I-7 호의 내부로 들어가 귀중한 암호책을 비롯한 기밀 서류들을 입수하는데 성공했다.

 

I-7 호의 상실을 마지막으로 일본해군은 잠수함을 사용한 키스카 철수를 포기했다.

이제 제5함대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과달카날에서처럼 수상함대를 투입한 해상철수에 모든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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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히요 뇌격

 

일본군이 애투 섬 전투를 계기로 미군함대와 결전을 벌이기 위하여 도쿄 만에 일본연합함대의 주력을 모으자 암호해독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아낸 미군 잠수함들이 몰려 들었다.

 

1943년 5월 20일에 유진 샌즈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잠수함 소피쉬가 최초로 연합함대의 주력을 포착했다.

도쿄 남쪽 해상에서 초계중이던 소피시는 11,000m 거리에서 18노트로 항진하는 적 함대의 함영을 레이더로 확인했다.

적 함대의 구성을 정규항모 1척, 전함 3척, 구축함 2척 및 기타 함정 2척으로 판단한 샌즈 소령은 공격 위치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해상이 거칠어서 기동이 힘들었다.

그동안 일본함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틀 후인 5월 22일 아침에 로이 벤슨 소령의 트리거가 도쿄 만에서 레이더로 접근 중이던 일본함대를 접촉했다.

레이더에 나타난 적의 세력을 정규항모 1척, 전함 3척, 다수의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판단한 벤슨 소령은 즉시 잠항하고 잠망경을 올렸다.

잠시 후 잠망경에 일본 순양함이 나타났고 벤슨 소령은 전함이나 정규 항모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일본함대가 지그재그항해를 하면서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버렸다.

아쉽기 그지 없는 일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SS-237 트리거. 수상 배수량 : 1,549톤, 수중 배수량 : 2,463톤, 길이 : 95m, 폭 : 8.3m 속력 : 수상 21노트, 수중 9노트, 항속거리 : 수상항해시 10노트로 20,000km, 수중항해시 2노트로 180km, 초계 기간 : 75일, 잠항심도 : 90m, 승무원 : 60명, 무장 : 21인치 어뢰발사관 함수 6문, 함미 4문, 어뢰 24발, 76mm 갑판포 1문, 40mm 보포스 대공포 1문, 20mm 오리콘 대공기관포 1문)

 

5월 말에 애투 섬이 함락되고 1주일이 지나자 일본 항공모함들이 도쿄 만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에서 이 사실을 알아내고 통보했는데 당시 일본항모들의 침로 전방에는 트리거, 새먼, 그리고 스컬핀, 이 3척의 잠수함이 있었다.

 

1943년 6월 8일 밤에 트리거가 19,000m 거리에서 레이더로 일본항모들을 포착했다.

트리거는 부상하여 전속력으로 추격했으나 도중에 엔진 하나가 말썽을 일으켜서 최고 속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때 트리거는 일본항모들의 10,000m 후방까지 따라잡은 상태였으며 함장 벤슨 소령은 함교에서 어두운 수평선을 배경으로 일본 항모의 실루엣을 뚜렷이 볼 수 있었으나 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트리거는 2번째의 기회를 놓쳤다.

 

트리거의 남쪽에 있던 새먼은 일본항모의 침로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 바로 부근에 구축함 1척이 호위하는 수송선 3척이 지나가자 함장 존 니콜라스 소령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가서 공격했다.

새먼은 수송함 2척에 어뢰를 1발씩 명중시켰으나 2척 다 살아 돌아갔다.

이 때문에 막상 일본항공모함들이 나타났을 때 새먼은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벗어나 있었다.

태평양함대의 잠수함 사령관 찰스 록우드 제독은 새먼의 전투보고서에 배서하면서 니콜라스 함장이 절호의 매복 지점에서 일본항모들을 기다리지 않고 수송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매복위치를 벗어난 것을 두고

 

"불행한"

("unfortunate")

 

판단이었다고 적었다.

 

가장 남쪽에는 루시우스 채플 소령의 스컬핀이 매복하고 있었다.

스컬핀은 6월 9일 자정 무렵에 레이더로 10,000m 거리에서 접근 중이던 함영을 발견했다.

레이더에 나타난 함영을 정규항모 2척과 호위함정들로 판단한 채플 소령은 잠항하여 기다렸다.

그러나 접근하던 일본함대는 갑자기 지그재그로 방향을 바꾸면서 멀어져 갔다.

채플 소령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6,400m 거리에서 어뢰 4발을 발사했으나 1발은 조기 폭발해 버렸고, 나머지 3발은 빗나갔다.

 

태평양 함대의 암호해독반은 아직도 도쿄만에 1척 또는 그 이상의 일본항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미 2번의 기회를 놓친 트리거의 함장 벤슨 소령은 심기 일전하여 도쿄만으로 돌아갔다.

 

전투초계의 마지막 날인 1943년 6월 10일 오후에 트리거는 세번째이자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트리거는 잠망경으로 고가 미네이치 일본연합함대 사령관의 기함인 개장항공모함 히요를 발견했는데 히요는 2척의 구축함을 앞세우고 21노트의 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트리거는 잠항 상태로 일본구축함에게 들키지 않고 히요에게서 1,100m 거리까지 접근한 다음 함수에서 6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일본의 개장항공모함 히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발사된 6발의 어뢰 중 2발은 함수 쪽으로 빗나갔다.

3번째 어뢰는 히요에서 300m  떨어진 곳에서 조기 폭발해버렸다.

4번째 어뢰는 함수의 닻줄 보관고에 명중하여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5번째 어뢰는 함수와 함교 사이에 명중했으나 불발탄이었다.

 

유일하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힌 것은 마지막 6번째 어뢰로서 함교 바로 아래의 1번 보일러실에 명중했다.

탄두가 폭발하면서 1번 보일러실이 분쇄되었고 격벽이 무너지면서 2번 보일러실도 순식간에 물에 잠겼으며 3번 보일러실도 침수가 시작되었다.

히요는 동력을 잃고 해상에 멈추었으나 침몰은 면했고 경순양함 이스즈에게 이끌려 요코스카항으로 향했다.

 

트리거의 함장 로이 벤슨 소령은 6월 22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일본항공모함에 어뢰 4발을 명중시켜 격침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의 잠수함 사령관 록우드 제독은 암호해독반의 보고를 통하여 히요가 격침되지 않았으며 실제로 피해를 준 어뢰는 단 1발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벤슨 소령의 보고를 듣고 트리거의 전투일지를 주의깊게 검토한 록우드 제독은 히요가 살아남은 원인이 신뢰성이 떨어지는 Mk6 자기감응신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Mk6 자기감응신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던 록우드 소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틀 후인 6월 24일에 니미츠 제독을 찾아갔다.

 

록우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에게 만일 그 빌어먹을 Mk6 자기감응신관만 아니었다면 히요는 지금쯤 요코스카의 건선거가 아니라 도쿄만 바닥에 있을 것이라면서 지금 당장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록우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에게 벤슨 함장이 명중시켰다고 주장한 4발의 어뢰 중 3발이 제 역할을 못한 이유가 모두 Mk6 자기감응신관 때문이라는 확증을 제시하지는 못헸지만 록우드 제독의 능력과 통찰력을 신뢰하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날 오후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명의로 태평양함대의 모든 잠수함에서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해군 병기국과 맥아더 장군 휘하의 제7함대 잠수함 사령관 랄프 크리스티 소장은 발끈했다.

Mk6 자기감응신관의 개발 책임자였던 크리스티 소장은 즉시 미해군 병기국과 함께 니미츠 제독에게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한 이유를 따져 묻는 편지를 발송했다.

니미츠 제독은 답장에서 Mk6 자기감응신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어쩌면 적의 대응책 때문이거나 어떤 조건 하에서 신관이 효과적이지 못하고 요구되는 적절한 발사 조건이라는 것이 비현실적이기 때문"

("because of probable enemy counter-measures, because of the ineffectiveness of exploder under certain conditions, and because of the impracticability of selecting the proper conditions under which to fire.")

 

일 것이라고 밝혔다.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하고 있지만 Mk6 자기감응신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과 불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Mk6 자기감응신관 사용금지 명령을 철회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답장이었다.

 

크리스티 소장은 포기하지 않고 미해군 병기국과 함께 호주의 프레멘틀에서 Mk6 자기감응신관에 대한 토론회를 연 다음 록우드 제독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결과를 알렸다.

이 편지에서 크리스티 소장은

 

1. Mk6 자기감응신관이 최소한 가끔씩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2. 자기감응신관은 흘수가 얕은 대잠함정에 대한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이며

3. 만일 이대로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중지해 버리면 앞으로 자기감응신관의 문제를 확인하고 해결할 기회를 영원히 없애버리게 된다

 

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만일 Mk6 자기감응신관에 실제로 문제가 있다면 태평양함대와 제7함대, 그리고 해군 병기국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사실을 밝히자면서 그렇게하여 결론이 날 때까지만이라도 자기감응신관 사용금지 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편지의 내용은 불과 1년 전에 록우드 제독이 제7함대 잠수함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어뢰 문제를 제기했을 때 병기국이 보였던 고압적이고 무성의한 태도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Mk6 자기감응신관이 최대 수요처인 태평양함대에서 전면적으로 거부당한데 대한 크리스티 소장과 병기국의 당혹감과 절박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미 1년 이상 어뢰 문제로 크리스티 소장 및 병기국과 충돌하면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던 록우드 제독은 1년 전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조차 없이 너그럽고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는 이러한 제안에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록우드 제독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크리스티 제독은 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일기장에 록우드 제독을 가리켜 Mk6 자기감응신관을 반대하는 자로서 곧 어뢰에 반대하는 자인데 그래놓고는 격침 톤수는 열심히 자랑하고 다니는 걸 보면 그 격침 톤수를 바로 어뢰가 만들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얼간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Mk6 자기감응신관의 문제는 미해군 병기국과 크리스티 소장을 제외한 미해군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오히려 크리스티 소장이 병기국과 작당하여 감히 니미츠 제독에게 그런 건방진 편지를 보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크리스티 소장의 직속상관인 제7함대 사령관 카펜더 중장이 남서태평양지역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 컸다.

맥아더 장군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실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던 남서태평양지역군에서 총사령관의 신임을 얻지 못한 카펜더 제독은 비록 직속 부하라고는 하나 병기국이라는 해군본부의 막강한 부서와 한몸이나 다름없는 크리스티 소장의 전횡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해군의 방침에 따라 태평양함대와 제7함대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순환배치되고 있던 잠수함의 함장들은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새우 꼴이 되지 않기 위하여 눈치껏 처신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잠수함장들은 모두 태평양함대 잠수함 사령관  록우드 제독의 방침에 찬성이었으므로 제7함대로 배치되는 잠수함들은 진주만을 떠나 호주 프레멘틀 앞바다에 이르기까지는 어뢰의 Mk6 자기감응신관을 모두 죽여놓고 있다가 입항 직전에 마지못해 활성화시켰다.

반면 제7함대에서 태평양함대로 배속되는 잠수함들은 프레멘틀의 부두를 떠나자마자 즉시 어뢰의 Mk6 자기감응신관을 죽여 버렸다.

 

물론 미국 어뢰의 문제점이 단지 Mk6 자기감응신관만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한 이후에도 어뢰의 신뢰성이 극적으로 높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기국과 크리스티 소장의 결사적인 반대를 물리치고 가장 큰 문제인 Mk6 자기감응신관 문제를 일단 해결하자 문제 해결에 가속도가 붙었다.

결국 록우드 제독은 1발에 10,000 달러나 하는 어뢰 3발을 실험용으로 소모한 끝에 불발탄 문제까지 해결함으로써 1943년 9월부터 태평양함대의 잠수함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전투초계를 실시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 소장이 지휘하던 제7함대 잠수함 부대의 잠수함장들은 여전히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강요당했으나 이들의 고생도 11월에 끝났다.

북태평양군 사령관이었던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이 1943년 11월에 카펜더 중장의 후임으로 제7함대 사령관으로 옮겨 오면서 크리스티 소장의 전횡에 종지부를 찍고 제7함대 사령관 명의로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개전한지 실로 2년 만에 미국의 잠수함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전투초계에 나설 수 있었다.

(미해군 어뢰 문제 해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여기로)

 

크리스티 소장은 1년 후인 1944년 11월에 잠수함대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12월 30일에 파이프 소장이 제7함대 잠수함 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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