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기무라대대 전멸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1942년 2월 1일에 아냐산-실라임 지역의 지휘권을 장악한 제57보병연대장 릴리 중령은 1일 하루동안 정찰을 통하여 지형을 익혔다. 그날 저녁 릴리 중령은 다음날 공세에 스카우트 대대 3개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우익인 실리암강 북쪽은 로스 스미스 중령의 제45보병연대제2대대, 중앙인 실리암강과 아냐산강 사이는 제57보병연대제3대대, 그리고 아냐산강 남쪽은 제57보병연대제1대대(퀴나완곶에 파견된 B중대 감편)를 배치했다. 제45보병연대제2대대의 북쪽은 제12보병연대제1대대가 지켰고, 제17추격비행대대는 보급로를 방어했다. 예비대는 경찰대대와 롱고스카와얀곶 전투를 마치고 방금 도착한 제57보병연대제2대대였다.


(아나샨-실라임 지역.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3)


2월 2일 일출과 동시에 공격을 시작하자 우익과 중앙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밤새 기무라대대의 주력이 상륙하여 고바야시중대에 합류했던 것이다. 스카우트 병사들은 무리하지 않고 일찌감치 참호를 팠다. 남쪽인 좌익은 6일까지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지형때문에 진격이 늦어졌다.


3일 전투에는 제192전차대대C중대(퀴나완곶에  파견된 1개 소대 감편) 소속 9대의 경전차가 투입되었다.  아직 보전합동전술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전차는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전차는 정글을 일렬종대로 전진했으며 보병은 약 100m 뒤에서 따라갔다. 일본군은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전차를 손쉽게 공격했다. 선두전차가 공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이고 승무원은 모두 불타 죽었다. 그러자 릴리 중령은 전차 1대당 4명의 보병을 지명하여 바로 뒤를 따르면서 전차를 보호하도록 조치했다. 보병들은 전차가 모르고 지나가도록 개인호에 틀어박힌 일본군을 사살했다.


야포 사용도 어려웠다. 해안을 향하여 완만하게 떨어지는 지형 때문에 포탄을 최전선에 착탄시키기가 어려웠으며 낮은 각도로 날아든 포탄이 나무에 부딪혀 폭발하면서 비산하는 나무파편이 아군에게 피해를 주었다. 서부지구의 화력지원을 맡은 제88야포연대제2대대(PS)는 75mm 야포 4문을 가진 포대 2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75mm 야포 8문은 해발 240m 지점에서 3,700m 떨어진 해발 30m 지점의 일본군을 포격했는데 포탄이 날아가는 탄도 상에는 높이 20m 정도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나무를 피해 적에게 포탄을 날리기는 어려웠다. 대대는 퀴나완곶과 아냐산-실라임 전투에서 5,000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당시 아냐산-실라임 지역에는 155mm 야포 1개 포대도 있었으나 조준기가 없어서 보병지원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관측병이 없어서 보병중대장이 관측병 역할을 겸해야 했다.


기관총 사용은 시계불량과 함께 보급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도보로 보급해야 하는 상황에서 소총수들의 보급을 지탱하기도 버거웠다. 실제로 기관총 요원들은 소총탄을 보급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스카우트 대대는 60mm 및 81mm박격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포탄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불발탄이 너무 많았다. 결국 보병은 거의 소총에만 의지해야 했다.


3일과 4일에 걸쳐 우익과 중앙의 스카우트 대대는 보전합동작전으로 서서히 전진했으나 이후로는 7일까지 교착상태에 빠졌다.


남쪽으로 전진했던 제57보병연대제1대대가 7일에 아냐산곶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만나 전진을 멈추자 경찰대대와 비행대대가 증원되었다. 경찰대대는 북쪽의 제3대대와 연결을 확보했고 비행대대는 남쪽의 퀴나완곶에 있던 스카우트와 연결했다. 이로써 북쪽 실라임만에서 남쪽 퀴나완곶에 이르는 3,700m 길이의 연속된 전선이 완성되었다.


8일이 되자 퀴나완 전투에서 풀려난 37mm 대전차포 1개 소대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아냐산곶의 돌출부에 배치된 37mm 대전차포는 일본군의 보급품 더미를 발견하고 포격을 가하여 불태워 버렸다. 퀴나완 전투에 파견되었던 제57보병연대 B중대도 이날 친정인 제1대대로 돌아왔다.


아냐산-실라임 전투가 시작된지 5일이 지나자 식사량을 정량의 절반으로 줄여 1달간 급식한 여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쉽게 지쳤고 전의도 떨어졌다. 매일 공격할 수가 없어서 대대마다 번갈아가며 이틀에 한번씩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맥아더 사령부는 한시적으로 아냐산-실라임 지역에서 전투 중인 부대의 식사량을 정량으로 늘렸다. 이제 병사들은 공격 직전의 일출시, 공격을 마치고 참호를 파기 직전인 일몰시, 그리고 방어준비를 마친 밤, 이렇게 3끼의 식사를 먹을 수 있게 됨으로써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로써 급한 불은 껐으나 아냐산-실라임 전투에 참가했던 지휘관들은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바탄반도를 지켜내지 못하리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2월 9일에 중앙을 담당하던 제57보병연대제3대대가 예비대였던 제2대대로 교체되었다. 원기왕성한 제2대대는 일본군을 밀어붙이면서 착실하게 전진하여 11일 저녁에 아냐산강 하구에서 해안에 도달했다. 이로써 제2대대는 실라임강과 아냐산강 사이에 있던 일본군을 북쪽의 제45보병연대제2대대 정면으로 몰아내었다. 이제 기무라대대의 패배는 피할 길이 없었다.


일본군은 7일부터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날 기무라 소좌는 모리오카 중장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무전을 통하여 전차 및 야포의 지원을 받는 압도적인 수자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으며 자신과 부하들은 모두 최후의 한명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겠노라고 보고했다. (기무라대대의 무전기가 고장나서 발신만 가능했고 수신은 불가능했다.) 보고를 받은 모리오카 중장은 공병제21연대에게 기무라대대를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7일 밤에 장갑정 1척, 특대발 1척, 대발 2척, 소발 5척, 절첩주 21척으로 이루어진 주정군이 올롱가포를 출항했다. 하지만 남하중에 미군에게 들켜서 야포와 기관총, 그리고 P-40 전투기 2대의 공격을 받았다. 주정군은 구원을 포기하고 북상했다. 다음날 저녁에 다시 남하한 주정군은 미군의 방해를 뚫고 접안에 성공했으나 통신이 단절된 상황에서 미-필리핀군과 교전중이던 기무라대대를 철수시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주정군이 환자 34명만 싣고 돌아오는 것으로 구원작전은 끝났다.


구원작전이 실패하자 모리오카 중장은 기무라대대에게 주어진 마리벨스 점령 임무를 철회하면서 자력으로 해상탈출하라고 지시하는 명령문을 대나무통에 넣어 떨어뜨렸다. 명령문에는 물때표, 해류, 일출 및 일몰 시간, 달이 뜨고 지는 시간, 그리고 뗏목을 만드는 법등 해상탈출에 유용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기무라대대에게는 불행하게도 미-필리핀군이 명령문의 사본을 입수했다. 미-필리핀군은 밝은 달빛 아래 해면을 주시하다가 헤엄쳐 탈출하는 일본군을 저격했고 기관총은 뗏목을 공격했다. 결국 해상탈출을 시도한 일본군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익사했다. 11일 저녁까지 남쪽 아냐산곶에서 저항하던 일본군은 전멸했으며 기무라 소좌가 지휘하던 주력의 전멸도 시간문제였다.


해상탈출이 불가능해지자 기무라 소좌는 앉아서 죽느니 저지선을 강행돌파한 후 북상하여 일본군 전선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돌파 시간은 2월 12일 새벽으로 정했다. 11일 저녁에 기무라 소좌는 다음날 새벽을 기하여 미-필리핀군의 저지선을 강행돌파한 후 북상하여 일본군 전선에 도달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자살했다.

당시 기무라대대를 상대하던 제45보병연대제2대대의 E 및 F중대 사이에는 90m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대대장은 간격에 2정의 기관총을 배치했는데 개활지라면 몰라도 사계가 불량한 정글에서는 부족했다.


12일 새벽, 기무라대대의 잔존 병력 약 200명이 갑자기 뛰쳐나왔다. 이들은 하필이면 저지선의 빈틈으로 돌격하여 이들을 가로막은 것은 기관총 2정 밖에 없었다. 기관총 1정의 운용요원은 총알을 다 쏘아버린 다음 기관총을 버리고 탈출했으나 나머지 1정의 운용요원은 탈출에 실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2정의 기관총은 제압당할 때까지 약 30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보고를 받은 릴리 중령은 예비대인 제57보병연대제3대대를 급파했다.


저지선을 뚫은 일본군은 북상하다가 오전 10시에 실라임강 하구에 있던 제17추격비행대대본부와 제45보병연대 F중대본부를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제17추격비행대대장 레이먼드 슬론 대위가 전사했다. 


오전 10시경 일본군이 제17추격비행대대본부를 공격할 때 토벌대인 제57보병연대제3대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제3대대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정오 경에 따라잡은 다음 해안으로 몰아붙였다. 물샐틈없이 포위한 상태로 밤을 지낸 제3대대는 13일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오후 3시에 해안에 도달했다. 포위망 내의 일본군은 전멸했다. 포로는 없었다.


포로는 정보를 얻고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하여 중요하다.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포로를 얻기 위하여 스피커를 단 심리전 트럭과 니세이 장교 2명을 제57보병연대로 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선 일본군은 여간해선 항복하지 않았다. 롱고스카와얀곶과 퀴나완곶에서 일본군은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사살당할 때까지 싸우거나 아니면 자살했다. 게다가 미-필리핀군 장병 또한 일본군을 포로로 잡으려 하지 않았다. 미-필리핀군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손을 뒤로 묶인 채 총검에 찔리거나 심하게 훼손된 전우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치를 떨었다. 일본군을 포로로 잡는 것은 위험하기도 했다. 실제로 포로가 되어 대대본부로 끌려온 일본병사가 숨겨둔 수류탄을 터뜨려 함께 자폭하려다 사살당한 적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지휘관 릴리 중령이 일본군의 투항을 권유하는 작업에 열의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릴리 중령이 병력부족을 이유로 심리전 트럭과 니세이 장교에 대한 호위를 거부하자 이들은 전선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제57보병대대제3대대는 탈출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고 믿었으나 아니었다. 제45연대제2대대의 저지선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 일본군 중 약 80명은 추격을 피하여 정글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16일 아침에 실라임곶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1km,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선에서 남쪽으로 불과 1.6km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될 때까지 4일 동안 미-필리핀군의 눈을 피하여 이동했다. 80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미-필리핀군이 득실거리는 제1군단 후방에서 4일 동안이나 들키지 않고 이동했다는 것은 일본군의 뛰어난 정글전투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군이 발견되자 제26기병연대에서 1개 대대가 급파되었다. 이들은 제72 및 제92보병연대에서 파견된 병력의 도움을 받아 이틀만에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로써 3주에 걸친 아냐산-실라임 지역 전투가 끝났다. 미-필리핀군은 약 70명의 전사자와 약 10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1월 29일부터 전투에 계속 참가했던 제45보병연대제2대대가 26명의 전사자와 42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여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제57보병연대제2대대가 그 다음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다른 부대의 희생은 비교적 가벼웠다.


롱고스카와얀곶과 퀴나완곶에 상륙했던 츠네이로대대 900명은 전멸했다. 퀴나완곶의 츠네이로대대를 증원하려던 기무라대대는 아냐산-길라임 지역에 상륙하여 전멸했다. 기무라대대원 중 약 280명은 12일의 강행돌파 이전에 해안에서 죽었으며 약 30명은 강행돌파 과정에서 죽었고 약 90명은 제57보병연대제3대대의 추격을 받아 해안에서 죽었다. 약 80명은 추격을 피하여 정글에 숨어 4일간 북상한 끝에 제1필리핀군단 방어선에서 남쪽으로 불과 1.6km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되어 전멸했다. 기무라대대의 나머지 병력은 대부분 2월 1일 밤에 퀴나완곶에 상륙하려다 죽었으며 일부는 포위된 상황에서 해상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었다. 철수에 성공한 것은 환자 34명 뿐이었다.


1월 23일에 기무라 소장이 츠네이로대대를 상륙시킨 이래 2월 중순까지 일본보병제20연대는 2개 대대를 상륙작전에 투입하여 모두 잃었다. 일본군의 상륙에 맞선 미-필리핀군의 초기 대응은 서툴렀다. 그러나 해결사로 투입된 필리핀 스카우트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결국 그들의 활약으로 초기의 실수를 만회하고 상륙한 일본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2월 중순이 되자 바탄반도 서해안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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