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게마스 전투
쿠알라룸푸르를 점령한 1942년 1월 11일자 일본제25군 사령부의 정세판단에 따르면 후퇴 중인 영국군은 싱가포르 섬 이북의 마지막 자연방어선인 무아르 강에 의존하여 조호르를 방어하려고 할 것이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개전 이래 30일 이상 계속 전투를 치러온 제5사단은 셈바란 지역에서 잠시 휴식하면서 제21보병연대를 기다리도록 했다. 그동안 근위사단이 말라카를 공격할 것이었다. 이후 휴식을 취하고 제21연대를 받아들인 제5사단은 간선도로를 따라 사가맛과 클루앙 방면으로 공격할 것이었다. 근위사단은 서해안을 따라 무아르 강과 바투파핫 강을 공격하여 제5사단을 방어하는 영국군의 서쪽 측면을 위협할 것이었다. 동해안에서는 2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55연대가 쿠안탄에 주둔 중인 제56연대를 대신하여 남쪽으로 공격하여 엔다우와 메르싱을 점령할 것이었다. 제55연대와 교대한 제56연대는 1월 24일까지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남방군은 제114연대를 중심으로 한 제18사단의 잔여 병력을 엔다우에 상륙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쿠알라룸푸르의 영국군이 예상보다 일찍 철수하고 12일부터 3일간 실시한 공습으로 엔다우 상공에 충분한 제공권을 장악하는데 실패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제18사단의 잔여 병력은 22일까지 싱고라에 상륙하여 육로로 조호르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야마시타 대장은 조호르에서의 항공작전까지 지원하기에는 일본군 보급로가 포화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55연대가 엔다우를 점령하면 항공유와 폭탄을 엔다우에 직접 상륙시켜 달라고 요청하여 남방군 사령부의 승인을 받았다.
1월 14일에 제5사단 주력은 휴식 및 재정비에 들어갔다. 제5사단은 개전 이래 35일 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1월 12일까지 전사 및 실종 349명, 부상 745명, 총 1,094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남쪽으로 철수하는 영국군을 추격하는 임무는 전차제1연대, 보병제42연대제2대대(자전거 탑승), 그리고 약간의 포병과 공병으로 이루어진 무카이데 지대가 맡았다.
(말레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152)
서부부대 사령관 베넷 소장은 바투아남-무아르 선에 걸쳐 방어선을 만들었다. 제27호주여단(던칸 맥스웰 준장)은 바투아남 부근에 주 방어선을 펴고 게마스 서쪽의 간선도로에 제2/30호주대대를 파견하여 전방 방어선을 만들었다. 제9사단의 제8여단(윌리엄 레이 준장)도 바투아남 부근의 간선도로를 지켰다. 제22여단(조지 페인터 준장)은 세가맛-말라카 도로를 따라 방어선을 폈다. 이들 3개 여단은 1개 대전차연대 및 3개 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제45인도보병여단(허버트 던칸 준장)은 1개 야포대의 지원을 받아 무아르 강을 지키면서 일본군의 상륙을 방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베넷 소장은 일본군의 진격을 느리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매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할 장소로 게마스 서쪽의 간선도로를 골랐다. 게마스를 지키던 프레드릭 갈레간 중령의 제2/30호주대대가 더피 대위의 B중대를 게마스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11km 떨어진 작은 강(게멘체 강)으로 파견했다. 제2/12공병중대가 강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동안 B 중대는 다리 동쪽의 정글에 몸을 숨겼다. 적의 선두가 다리를 건너면 다리를 끊어 적을 양분한 후 공격할 생각이었다. 강 건너편의 적은 제30야포대 1개 중대의 25파운드 야포 4문이 타격할 것이었다.
14일 오후 4시에 무카이데 지대의 선발대 약 200명이 자전거를 타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다리를 건넜다. 더피 대위는 당시 일본군이 전쟁에 나선 군인이 아니라 마치 소풍가는 사람들 같았다고 회고했다. 선발대는 매복 중인 B중대를 발견하지 못한 채 눈앞을 지나갔는데 B 중대는 후방에서 처리하도록 그대로 통과시켰다.
약 20분 후에 오토바이 3대가 인솔하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넜다. 일본군의 선두에 선 제2중대가 다리를 건넜을 때 B중대는 다리를 폭파시켰다. 폭음과 함께 다리를 건너던 병사와 자전거가 공중을 날았고 제2중대는 강을 경계로 주력과 분단되었다. 앞서 지나갔던 선발대가 B중대와 제30야포대를 연결되는 전화선을 발견하여 끊어버리는 바람에 강 서쪽의 일본군 주력에 대한 포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강을 건너 약 270m 에 걸친 매복 지대에 들어선 일본제2중대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B중대의 기습공격에 대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B 중대는 수류탄을 던진 다음 브렌 경기관총, 토미건, 그리고 소총을 사용하여 도로 위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 일부가 도로 남쪽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북쪽으로 도망쳤지만 더피 대위는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도로 북쪽에도 기관총을 보유한 2개 분대를 배치해 두었다. 일본제2중대는 전투가 시작된 지 몇 분 내로 전멸했다. 70명이 죽고 5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운좋게 총탄을 피한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시체 사이에 쓰러져 꼼짝않고 죽은 척 했다. B 중대의 피해는 전무했다.
전투가 끝나자 B 중대는 강 건너편에 대한 포격이 실시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강 건너편에서 일본군이 증강되는 것을 본 B 중대는 공격을 시작한 지 20분 만에 후퇴했다. 앞서 통과했던 일본군 선발대가 전투의 소음을 듣고 되돌아왔으나 B 중대는 충돌을 피해 소대별로 흩어져 도로 남쪽의 정글을 통하여 대대로 복귀했다. 이로써 대규모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교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복귀 도중 벌어진 몇 번의 작은 교전에서 B 중대는 7명의 전사 및 실종자와 3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한편 무카이데 지대 주력은 끊어진 다리 주변에서 제재소를 발견하고 그곳에 있던 미리 잘라둔 목재를 가지고 다리를 6시간 만에 복구했다. 따라서 15일 아침까지는 전차를 포함한 병력 전체가 게멘체 강을 건넜다.
(11월 14일 현재 제2/30호주대대의 배치상황.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P.212 )
15일 아침부터 무카이데 지대가 게마스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제2/30호주대대의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전 9시에 전차 2대가 라마크래프트 대위의 C 중대가 지키던 바리케이드에 접근하다가 호주군의 대전차포 사격을 받고 도망쳤다.
잠시 후 전차 2대와 경전차 1대가 접근했다. 2문 밖에 안 되는 대전차포를 지원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A 중대 앞에 방열 중이던 호주군의 25파운더 야포 4문이 사격을 가했다. 야포가 철갑탄을 발사하여 경전차를 맞추자 그대로 뚫고 지나가 버렸다. 고폭탄으로 바꾸어 사격을 가하자 경전차가 불길에 휩싸였고 2번째 전차도 명중탄을 맞고 멈추었다. 3번째 전차가 2번째 전차를 견인하여 도망쳤다.
그러자 일본군은 보병과 함께 전차 4대를 보냈다. 일본군 보병과 전차들은 불타는 경전차를 방패삼아 사방으로 기관총을 난사하여 호주군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제2/30대대는 당황하지 않고 대전차포, 야포, 박격포, 그리고 기관총의 화력으로 맞섰다. 대전차포가 전차 3대를 파괴하고 25파운더 야포가 마지막 전차를 파괴했다. 전차를 해치운 야포가 서쪽 도로를 포격하여 일본군의 증원을 막는 사이 박격포와 기관총이 일본군 보병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결국 1시간에 걸친 무카이데 지대의 공격은 실패했다.
(25파운더 야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Ordnance_QF_25-pounder)
일본군의 공격이 멈추자 제2/30호주대대장 갈레간 중령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멜빌 대위가 지휘하는 D 중대에게 서쪽으로 900m 정도 진격하여 도로 남쪽의 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D 중대가 퇴로를 차단하면 정면에서 반격을 가하여 무카이데 지대를 포위섬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지에 접근한 D 중대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일본군이 전차와 함께 꾸역꾸역 몰려드는 것을 발견했다. 보병제9여단이 전차와 함께 무카이데 지대를 구하러 달려온 것이었다. D 중대는 불과 270m 거리까지 다가온 일본군과 격렬한 총격전을 치르면서 후퇴했으며 와중에 멜빌 대위가 부상을 입었다. 이로써 제2/30호주대대는 감당할 수 없는 전력을 가진 일본군이 몰려오고 있으며 적의 전차 때문에 자칫하면 퇴로마저 끊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5일 저녁에 제2/30호주대대는 게마스를 떠나 바투아남에 있던 제27호주여단에 합류하러 철수했다. 일본군이 오후 10시에 게마스를 점령하고 계속 추격했지만 제30야포대가 도로에 포격을 가하여 일본전차의 추격을 방해했다. 또한 호주군은 후퇴하면서 소규모지만 날카로운 반격을 반복하여 일본군을 놀라게 만들면서 추격 속도를 떨어뜨렸다.
무카이데 지대가 제2/30호주대대를 공격한 15일에 일본의 경폭격기 9대와 전투기 12대가 5번에 걸쳐 게마스 시가지와 호주군 방어선을 공습했다. 오전에 일본군의 경폭격기 1대가 대대본부를 폭격했다. 본부 밖에 세워져 있던 무선통신트럭이 파괴되었으나 다행히 통신병은 멀쩡했다. 당시 통신병이 발신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전파를 포착하여 대대본부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라는 의심이 생겼다. 이러한 의심 때문에 연합군은 그나마 부족한 무전기를 사용하는데 주저하게 되었다. 오후 1시에는 또다른 일본기가 대전차포와 25파운더 야포를 노리고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빗나갔다.
빈약하나마 영국기도 반격하여 버팔로의 호위를 받는 폭격기 몇 대가 탐핀-게마스 도로에서 일본군의 수송차량 대열을 공습하여 트럭 몇 대를 불태웠다.
제2/30호주대대는 중과부적으로 게마스를 넘겨주기는 했지만 이틀간 무카이데 지대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잘 싸웠다. 무카이데 지대는 전차 6대를 잃고 보병중대장 3명이 전사하는 등 큰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사상자가 1,000명을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호주군의 인명피해는 전사 및 실종 26명, 부상 55명이었다. 게마스 전투는 말레이 전역에서 드물게 연합군이 선전한 전투였다. 다만 아쉬운 점은 호주대대가 보유했던 대전차포 2문과 야포 4문을 브렌건캐리어로 끌면서 후퇴하다가 진창에 빠지는 바람에 25파운더 야포 1문을 제외하고 모두 포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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