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ABDA 사령부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진 지 5일 후에 처칠 수상과 참모총장들은 미국과의 회담을 위하여 전함 듀크오브요크를 타고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이후 워싱턴에서 열린 아카디아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몇가지 합의에 도달했다. 중요한 것으로는 독일우선원칙, 중국을 지원하여 전쟁에 머물러 있도록 할 것, 그리고 극동 지역에서는 나중에 반격으로 나갈 때까지 일본의 진격을 멈출 수 있는 수준의 전력만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미본토가 일본군에게 침공당할 가능성은 없었다. 일본의 목표는 말레이, 필리핀을 거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장악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간다면 호주를 침공하거나 버마를 거쳐 인도에 침공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공격으로 북으로는 대만에서 남으로는 호주, 서로는 벵골만에서 동으로는 뉴기니에 이르는 지역이 전란에 휩싸였다. 이 지역에는 4개 국가의 5개 총사령부가 있었다. 필리핀에는 미군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있었고 호주에는 호주군인 토머스 블레이미 장군이 있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는 네덜란드군인 차르다 켄 스타켄보로 스타초워 총독이 있었다. 말레이의 헨리 파우널 장군과 인도의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영국군이었다. 이들은 모두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자바, 그리고 뉴기니까지 늘어선 섬들로 이루어진 말레이 방어선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면 각국의 이해 관계는 차이가 있었다.

영국의 목표는 싱가포르를 지키고 인도양의 동쪽 출구를 열린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필리핀 상실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반격의 발판으로 사용할 호주와 미본토 사이의 보급로를 확보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호주는 당연히 본국의 안전이 우선이었으며 네덜란드 또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안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본토를 독일에게 점령당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 이외에도 감정적인 가치가 매우 컸다.  반면 일본군에게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었으며 균질한 단일 군대와 내선의 잇점을 누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이 지역의 연합군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이해관계의 조정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각국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최고사령부를 만드는 것이 방법 중 하나였다.


최고사령부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1941년 크리스마스에 미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은 영국참모본부와의 회의에서 일본과 교전 중인 극동 지역에 최고사령관을 임명하자고 주장했다. 최고사령관은 각국 정부의 이해를 초월하여 일본에 맞서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국적에 상관없이 담당 지역 내의 모든 군대를 지휘할 권한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처칠 수상은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극동 지역에 군대와 보급품을 보내는 일은 각국 정부의 소관인데 최고사령관 입장에서 자신이 지휘할 군대를 파견하고 먹여살릴 각국 정부의 의사를 무시한 채 독자적으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보았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마셜 장군의 아이디어에 찬성하자 처칠 수상도 태도를 바꾸어 최고사령부 설립을 지지했다. 최고사령부의 관할 지역은 ABDA 지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ABDA 는 미국(American), 영국(British), 네덜란드(Dutch), 그리고 호주(Australian)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ABDA 지역의 최고사령관으로 영국군인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을 추천했다. 영국참모본부는 영국군 최고사령관 아래에서 싸운 결과가 파국으로 끝났을 때 - 실제로 그럴 확률이 높았다 - 미국 여론에 끼칠 악영향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처칠 수상은 영국군에게 최고사령관을 양보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호의로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12월 29일에 웨이벌 장군은 자신이 최고사령관에 임명될 것이라는 처칠 수상의 전문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듯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라 십중팔구 패배의 멍에를 짊어져야 할 자리였으나 웨이벌 장군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웨이벌 장군은 단지 새로 맡은 임무를 파악할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발표를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chibald_Wavell,_1st_Earl_Wavell)


아카디아 회담에서는 또한 미군과 영국군의 작전을 지도할 최고기구로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를 설립했다. 워싱턴에서 상설기구로 운용될 연합참모본부는 미국합동참모본부와 영국참모본부의 대리인인 고위 장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리인을 통하여 런던의 참모본부는 전략 수립의 모든 단계에 직접 관여할 수 있었으며 국방상의 자격으로 참모본부를 손수 통제하던 처칠 수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합참모본부를 통하여 미국과 영국은 사상 유례없이 밀접한 연합작전을 실시할 수 있었다.


ABDA 지역을 확정하는 데에는 논란이 따랐다.

중국을 중시하던 미국은 외부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보급로인 버마로드가 지나가는 버마를 ABDA 지역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영국은 버마는 행정적으로나 병력 파견 및 보급 면에서 인도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ABDA 지역에서 제외하여 인도 총사령부 관할로 두는 것이 옳다고 맞섰다. 결국 양측 입장을 조율하여 버마로드가 통과하는 지역은 ABDA 지역에 포함하고 버마의 나머지 지역은 인도 총사령부가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태국을 ABDA 지역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는데 미국은 이미 장개석 총통에게 이 두 지역을 중국 전역(china Theatre)에 포함시키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문제는 ABDA 지역의 획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중국군을 영국인 또는 미국인 사령관의 지휘 아래 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미국은 중국이 전쟁을 계속하도록 고무하는 일을 중시했고 이를 위하여 버마로드의 방어에 집착했다. 중국 또한 영국보다는 미국을 신뢰했다. 따라서 미국은 영국군을 포함하여 버마로드의 방어에 관련된 모든 부대를 미군 장성이 지휘하기를 원했다. 영국군은 ABDA 지역 내에서 미군 장성이 영국군을 지휘하는 상황을 거부했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다. 미육군 장성이 중국정부에 파견되어 중국 내의 모든 미군과 그에게 주어진 중국군을 지휘기로 했으나 그가 버마로드를 지키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버마로 진입하면 최고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1942년 1월 23일에 미육군은 중국에 파견할 장성으로 조셉 스틸웰 소장을 임명했다.


미국과 영국은 ABDA 지역의 동쪽 경계를 호주의 서해안 및 북해안으로 규정하여 호주와 뉴질랜드를 ABDA 지역에서 제외했다. 그러자 미국의 관심이 ABDA 지역에 집중됨으로써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까봐 겁에 질린 호주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호주의 불안감은 미해군참모총장 어네스트 킹 대장이 호주 동해안과 뉴질랜드를 포함하는 안잭 지역을 설정하면서 사라졌다. 안잭 지역 내의 미해군은 미해군참모총장의 전략적 지도에 따라 운용되며 미해군 제독이 사령관을 맡고 호주 또는 뉴질랜드 제독이 부사령관을 맡게 되어 있었다. 안잭 지역의 목표는 미본토에서 출발하여 뉴질랜드 및 호주 동해안에 이르는 해상보급로를 보호하고 해당 지역 내에서 호주 및 뉴질랜드의 항공기와 미군 항공기의 작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협의가 끝난 후 1942년 1월 3일에 웨이벌 대장은 ABDA 지역의 경계와 임무가 명시된 전문을 받았다. ABDA 지역은 버마, 안다만 및 니코바르 제도, 말레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필리핀, 크리스마스 및 코코스 제도를 포함했다. 호주, 중국, 인도차이나 및 태국은 제외했다.

웨이벌 대장은 ABDA 지역을 좀 더 명확하게 정의했다. 서쪽경계는 동경 92도, 동쪽 경계는 동경 143도였으며 남서쪽 경계는 호주의 북서쪽 해안선이었다. 나중에 다윈을 포함한 호주의 북서쪽 해안지역이 ABDA 지역에 포함되도록 웨이벌 대장과 호주 정부가 협의하여 연합참모본부의 동의를 얻었다. 웨이벌 장군은 또한 미국이 바랐던대로 버마 전체를 ABDA 지역에 포함시켰다.


(ABDA 지역.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British-Dutch-Australian_Command)


ABDA 최고사령관의 권한은 1942년 1월 4일에 발효되었다. 같은 날 최고사령관 임명이 공표되었고 처칠 수상과 루스벨트 대통령이 담화를 통하여 최고사령관의 임무와 권한을 확인했다. ABDA 사령부의 설립과 동시에 헨리 파우널 중장을 총사령관으로 한 극동총사령부는 해체되었다. 웨이벌 대장의 취임식은 1월 15일에 있었으며 같은날 장개석 총통은 중국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ABDA 사령부는 긴박한 상황에서 급조한 것이었다. 참모 숫자가 모자랐으며 주어진 병력은 일본을 막는다는 임무를 완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6주라는 짧은 존속 기간 동안 ABDA 사령부는 제대로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휘하 병력은 사령부가 책임진 방대한 지역을 지키기 위하여 정비되기 전에 일본의 파상 공격 앞에 무너졌다. ABDA 사령부의 의의는 최초의 다국적 연합사령부로서 나중에 북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그리고 유럽에서 출현하게 되는 다국적 연합사령부의 모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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