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크로 함락

 

제5사단 보병제42연대장 안도 타다오 대좌의 이름을 딴 안도지대는 태국 남부의 파타니에 상륙했다. 안도지대는 보병제42연대를 기간으로 전차제1연대제1중대, 수색제5연대제2중대, 야포병제5연대제3대대(제9중대 제외), 독립속사포제5중대를 비롯하여 공병, 통신, 위생, 치중병, 가교자재 및 항공부대(지상요원) 등으로 이루어져 7,75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도지대가 받은 명령은 다음과 같다.

우선 파타니에 상륙하여 주변 비행장을 점령한다. 이후 파타니-크로 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태국 최남단의 베통에서 국경을 돌파하여 영령 말레이로 들어가 국경지대의 크로를 점령한다. 이후 남하하여 게릭에서 페락 강에 도달한 후 페락 강의 북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렝공을 거쳐 쿠알라캉사르에서 제5사단 주력과 합류한다. 이후 페락 강을 건너 이포 공격에 참가한다.

 

(크로)

 

안도지대를 실은 수송선 6척은 7일 오전 10시 30분에 G점을 떠났다. 선단은 제5사단 주력을 실은 수송선 10척과 함께 항해하다가 7일 오후 4시에 헤어져 구축함 8척의 호위를 받으며 파타니로 향했다. 수송선들은 8일 오전 2시 30분에 무사히 파타니에 도착하여 주정을 내리고 병력을 옮겨 실었는데 코타바루와 마찬가지로 파도가 높아 고생했다. 안도지대는 오전 4시 30분부터 상륙을 시작했는데 저항은 없었다.

 

안도 대좌는 가장 먼저 상륙한 제42연대 제2대대를 이끌고 파타니 시가지로 돌입하여 전투를 벌였다. 파타니를 지키던 태국군은 태국제42보병대대, 파타니 주 경찰(1개 중대) 그리고 비행장 경비대 약 200명으로 제2대대가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전투는 아침까지 이어졌으며 일시적으로 지대본부가 포위되는 상황까지 겪었다. 그러나 오전 7시부터 제1대대가 전투에 개입하자 태국군은 오전 11시 40분에 항복했다.  태국군 전사자는 42명이었고 민간인 9명이 희생되었다. 일본군 사상자는 45명이었다.

 

제2대대가 태국군을 무장해제하는 동안 제1대대는 8일 오후 3시에 파타니-크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떠났다.

수송선 2척에 탄 제3대대는 파타니 동쪽에 상륙하여 오후 7시에 비행장을 점령했다. 안도지대의 양륙이 완료된 것은 다음날인 9일 저녁이었다.

8일 저녁에 무장해제가 완료되자 안도 대좌는 통신부대와 함께 제1대대를 쫓아 남쪽으로 떠났고 이어서 제2대대가 전차, 장갑차 및 중화기와 함께 뒤를 따랐다. 비행장을 점령했던 제3대대도 비행장부대를 남겨두고 남하했다.

진격은 느렸다. 파타니-크로 도로는 비가 오면 진창이 되어 자동차 운행이 곤란했다.

 

선두로 남하하던 제1대대는 10일 오후에 삼삼오오 후퇴하던 태국병사를 만났다. 병사들은 이틀 전인 8일 오후에 강력한 영국군 부대가 태국수비대를 격파하고 태국 내로 진입하여 북상중이며 지금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서 태국군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1대대가 달려가보니 영국군 1개 중대가 태국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제1대대는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태국군을 공격하던 영국군은 헨리 무어헤드 중령이 이끌던 크로부대의 선두중대였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군 수뇌부는 대처가 느렸다. 코타바루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투우사 작전을 승인하는 영국참모본부의 전문이 8일 오전 8시에 도착했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즉시 태국 내로 진입하자고 주장했으나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날이 밝자마자 싱고라 방면으로 파견한 정찰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일본이 영국군의 태국 진입을 유도하기 위하여 코타바루에만 제한적으로 공격을 가했을 가능성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오전 9시 15분에 만신창이가 된 정찰기가 싱고라와 파타니에 대규모의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코타바루에 착륙했다. 일본군의 전면 침공을 확신한 브룩포팸 대장은 퍼시발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퍼시발 중장이 해협식민지 의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퍼시발 중장은 오전11시에야 브룩포팸 대장으로부터 태국 진입 명령을 받고 말레이 북서쪽 페낭 부근의 부킷메르타잠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당시 말레이 수비대의 장거리 통신은 민간 통신선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할 때 연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전 11시 30분까지 연결이 되지 않자 퍼시발 중장은 전화교환대에 태국 내로 진입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이 명령은 제3군단 내의 혼란 때문에 오후 1시가 되어서야 히스 중장에게 도달했다. 히스 중장은 오후 1시 10분에 다시 퍼시발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태국 진입 명령을 확인했다. 오후 1시 30분에 히스 중장은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단 직속의 크로부대를 편성하여 태국 내로 진입시키라고 명령했다. 크로에 주둔 중이던 제3/16펀잡대대장 무어헤드 중령이 크로부대장을 겸했다.

무어헤드 중령이 머레이-라이언 소장으로부터 국경을 돌파하여 태국내 50km 거리에 있는 레제 지점(Ledge position)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오후 2시 가까이 되어서였으며 제3/16펀잡대대가 실제로 국경을 통과한 것은 오후 3시가 되어서였다. 파타니에 일본군이 상륙한 지 10시간이 지난 후였으며 이 지연 때문에 크로부대는 6시간 차이로 방어에 유리한 레제 지점을 점령하지 못하게 된다.

 

크로부대는 제3/16펀잡대대, 제5/14펀잡대대의 2개 중대, 그리고 제273대전차포대의 1개 중대(troop)로 이루어졌으나 제5/14펀잡대대는 페낭에 있었고 대전차중대는 지트라에 있어서 당장 출발할 수 있는 것은 제3/16펀잡대대 뿐이었다. 제3/16펀잡대대가 국경선에 도착하자 도로는 봉쇄되어 있었고 태국무장경찰 약 300 명이 숲에 숨어서 사격을 가해왔다. 태국무장경찰의 저항은 예상 외로 강하여 제3/16대대는 9일 오후 3시까지 만 하루동안 전투를 벌여야 했다. 제3/16대대가 태국무장경찰을 쫓아내고 국경에서 불과 5km 떨어진 베통을 점령한 것은 9일 해가 떨어진 후였다.

다음날인 10일 아침에 제3/16펀잡대대는 트럭을 타고 베통을 떠나  북상했다. 선두 중대는 레제 지점에서 10km 떨어진 곳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조심스럽게 북상했다. 아니나다를까 2km도 가기 전에 태국군 방어선에 부딪혔다. 선두 중대는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는데 잠시 후 북쪽으로부터 강력한 일본군이 출현했다.

대대 규모의 일본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제3/16펀잡대대의 선두 중대는 1시간 동안 싸우다가 남쪽으로 도망쳤다. 제3/16펀잡대대의 주력은 북상하다가 선두 중대가 쫓겨 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방어준비를 하여 안도지대 제1대대를 저지했다. 오후가 되자 안도 지대장이 도착하여 공격을 독려했다. 오후 내내 이어진 일본군의 공격으로 제3/16펀잡대대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 방어선을 지켰다. 지친 일본군은 다음날 아침에 공격하기로 했다. 

 

한편 제3/16펀잡대대는 밤이 되자 방어에 불리한 기존 위치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2km 정도 물러나 작은 강을 건너 다시 방어선을 폈다. 이때 다리를 끊어서 적 전차의 돌입을 막았다. 10일 하루 동안 제3/16펀잡대대는 병력의 1/3을 잃었다.

이날 페낭에 주둔하고 있던 제5/14펀잡대대와 지트라에 있던 제273대전차포대의 1개 중대가 크로에 도착했다. 무어헤드 중령은 제5/14펀잡대대와 대전차중대에게 베통 북쪽 15km 지점에 방어선을 펴라고 명령했다.

 

안도지대 제1대대는 10일 밤에 영국군이 물러나자 추격했으나 2km 정도 추격한 후 영국군의 새로운 방어선에서 저지당했다. 일본군은 11일 아침부터 공격했다. 이날 안도지대 제1대대는 영국군 전방 100m 까지 접근하여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으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안도지대의 제2대대와 전차 및 야포들이 도착하자 안도 대좌는 다음날 아침에 총공격을 실시하기로 했다.

 

한편 영국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게다가 무어헤드 중령은 저녁이 되어 일본군에게 전차를 포함한 대규모 증원군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어헤드 중령은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에게 철수허가를 받아 두었다. 

 

일본군이 12일 오전 8시 30분부터 야포와 전차의 지원 아래 공격하자 1시간 만인 오전 9시 30분에 영국군이 철수했다. 이제 350명으로 줄어든 제3/16펀잡대대는 방어선에서 물러나 정오 경에 베통 북쪽 약 15km 지점에 펼쳐진 제5/14펀잡대대의 방어선을 통과했다. 무어헤드 중령은 제5/14펀잡대대에게 일본군의 진격을 견제하면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제3/16펀잡대대는 베통과 크로를 통과하여 저녁에 크로 서쪽 5km 지점의 도로 옆에 미리 파놓은 방어진지에 도착했다. 이날 밤 크로부대는 제11사단의 지휘를 벗어나 제3군단의 직접 지휘 아래 들어갔다. 

안도지대에서는 지쳐버린 제1대대를 대신하여 제2대대가 전면으로 나서 남진했다.

 

13일 오전 10시에 안도지대의 선두에서 남하하던 제2대대가 베통 북쪽 15km 지점에서 제5/14펀잡대대로부터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우세한 일본군은 야포와 전차의 지원 아래 반격했고 저녁이 되자 제5/14펀잡대대는 방어선을 버리고 철수했다. 제5/14펀잡대대는 베통과 크로를 지나 14일 오전에 크로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제3/16펀잡대대에 합류했다.

제5/14펀잡대대의 후퇴로 크로에서 페락 강 북안의 게릭까지 통로가 열렸다. 만일 일본군이 게릭을 거쳐 쿠알라캉사르에 도달하면 제3군단 전체의 보급로가 위험했다.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하여 이포에 주둔하고 있던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2nd Argyll and Sutherland Highlandes)대대에서 1개 중대를 떼내어 장갑차 소대와 함께 게릭으로 파견했다. 

 

안도지대는 14일 아침에 베통 북쪽에 도달했으며 오후 3시에는 국경에서 불과 5km 떨어진 베통 시가지에 들어섰다. 14일 밤을 베통에서 지낸 일본군은 역습에 주의하면서 15일 정오에 국경을 통과하여 크로에 입성했다. 안도지대장이 크로에서 쌍안경으로 서쪽을 바라보니 영국군은 발링으로 통하는 도로를 지킬 뿐 크로를 탈환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따라서 안도지대는 계획대로 남쪽으로 꺾어 게릭으로 향했다. 파타니를 떠난 이후 크로를 점령하기까지 안도지대는 약 12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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