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함 파견 결정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은 극동 지역에 전함을 보낼 여력이 없었으나 1940년에 영국본토항공전에서 승리하고 킹조지5세급 전함들이 차례로 취역하면서 여유가 생겼다.

영국함대가 1941년 5월에 비스마르크를 격침하자 영국 해군성(Admiraty)은 극동 지역에 전함을 보내는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1941년 초여름에 작성한 해군성의 계획은 강력한 함정들을 인도양의 트링코말리에 집결시켜 본국함대(Home Fleet)와 지중해 함대(Mediterranean Fleet)에 이어 제3의 함대인 동양함대(Eastern Fleet)를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동양함대는 전함 및 순양전함 7척(넬슨, 로드니, 리나운, 리벤지, 래밀리즈, 레절루션, 로열소버린), 항공모함 1척(허미즈), 순양함 10척, 구축함 24척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새로 만들어질 동양함대는 진주만에 전진 배치된 미태평양함대와 힘을 합쳐 일본의 확장 야욕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었다.

 

동양함대는 서류에서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R급 전함 4척(리벤지, 래밀리즈, 레절루션, 로열소버린)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건조된 것으로 작고 느렸으며 종전 이후 건조한 넬슨과 로드니는 크고 강력했으나 역시 느렸다.

순양전함 리나운은 빨랐으나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건조된 구형함이었으며 순양전함의 특성상 방어력이 약했다.

크고 강력하며 빠른 신형전함 킹조지5세급은 1척도 없어서 전제적으로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 편성이었다.

 

함대 창설 시기도 문제였다.

동양함대에 배정된 전함들 중 많은 수가 오버홀이 필요했으며 신형 레이더도 달아야 했다.

게다가 순양함과 구축함도 당장은 본국함대, 지중해함대 및 선단호송에 필요했으므로 필요한 숫자를 차출할 수 없었다.

동양함대의 창설은 아무리 빨라도 1942년 3월이 되어야 가능했다.

 

사건의 진행은 해군성의 예상보다 빨랐다.

일본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1941년 7월 26일에 석유금수조치를 취하면서 태평양에는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전개되었다.

해군성은 1941년 8월 13일에 긴급 계획안을 만들어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 중이던 처칠 수상에게 보고했다. 

개요는 2달 내로 인도양에 순양전함 1척과 R급 전함 4척을 보내고 전함 넬슨과 로드니는 상황이 허락하는대로 추가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해군성은 극동에 파견할 순양전함을 리나운에서 리펄스로 바꾸었으며 상황이 급박하므로 R급 전함의 개조는 미루었다.

 

해군성은 신형전함인 킹조지5세급을 극동지역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속력이 빠른 독일전함 티르피츠나 샤른호르스트 및 그나이제나우가 대서양에 뛰쳐나와 호송선단을 공격하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해군참모총장(First Sea Lord) 더들리 파운드 원수는 1941년 8월 20일 회의에서 티르피츠에 대항할 수 있도록 미해군이 신형전함 2척 이상을 스캐파플로우에 파견할 경우에 한해서 극동 지역에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파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해군이 2척 밖에 없는 자신들의 신형전함 모두를 티르피츠 잡는데 쓰라면서 스캐파플로우에 파견할 일은 없으니 사실상 극동 지역에 킹조지5세급 전함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처칠 수상은 생각이 달랐다.

뉴펀들랜드에서 돌아온 처칠은 1941년 8월 25일에 파운드 제독에게 각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처칠은 극동에 파견할 함대는 구형함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가 아닌 신예함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여야 한다면서 막 취역한 킹조지5세급 3번함 듀크오브요크, 순양전함 리펄스, 그리고 항공모함 포미더블로 이루어진 함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규모는 작지만 빠르고 강력한 이 함대가 싱가포르-트링코말리-시몬스타운을 잇는 삼각형 내에서 돌아다니면 일본해군의 활동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Winston_Churchill)

 

이후 파운드 제독과 주고받은 전문을 보면 처칠이 두가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처칠은 일본에게는 말레이를 침공할 의사가 없고 단지 태평양과 인도양의 영국 수송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보았으나 일본은 말레이를 침공할 생각이었다.

둘째로 만일  처칠의 생각처럼 일본이 말레이를 침공하는 대신 영국의 해상교통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전함, 순양전함, 항공모함 각 1척으로 구성된 영국의 소규모 함대는 일본의 강력한 전함과 항공모함 세력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처칠이 요구한 함대는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같은 상황에서 유효한 구성으로 처칠은 일본해군이 공고급 전함 1-2척을 사용하여 비스마르크처럼 영국의 해상교통로를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운용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독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전함 및 항공모함 세력을 가진 일본이 독일해군처럼 소극적으로 행동할 이유는 없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6개월간 벌어진 일들을 돌이켜 보면 3척으로 이루어진 영국의 소규모 함대가 인도양에 출현하는 것만으로 일본해군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처칠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소리였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일본을 얕잡아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만큼 처칠만 비난할 일은 아니다.

 

처칠의 각서를 받은 파운드 제독은 3일 후인 8월 28일에 답신을 보냈다.

킹조지5세급 전함을 극동에 파견할 수 없다는 해군성의 입장은 변화가 없었으며 전문의 대부분은 티르피츠에 대비하여 킹조지5세급 전함 3척 모두를 본국 수역에 두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데 할애했다.

처칠은 다음날인 29일에 7개 항으로 이루어진 강경한 어조의 전문을 파운드 제독에게 보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느리고 낡고 현대화 개수를 받지 않은 구형전함 여러 척을 인도양으로 보내는 것은 쓸데없이 비용과 인력만 많이 들 뿐이다. 신형전함 소수를 보내는 것이 일본에게 더 큰 억지력을 발휘한다.

2. 낡은 R급 전함은 8인치 포를 가진 적의 순양함에게는 대응이 가능하나 적이 고속전함 1-2척을 투입할 경우 물에 뜬 관이 될 뿐이다. 호주정부는 다수의 구형전함이 오는 것을 좋아할지 모르나 우리가 할 일은 동맹국의 어리석은 바람에 호응하는 것보다는 소수의 신형전함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3. 독일해군은 티르피츠 1척으로 우리의 킹조지5세급 전함 3척을 본국수역에 묶어두고 있다. 우리가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극동으로 보내면 티르피츠가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 골칫거리을 그대로 일본에게 강요할 수 있다.

4. 티르피츠에 대항하기 위하여 킹조지5세급 전함 3척이 모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해군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고 비스마르크 때처럼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티르피츠의 속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소련해군이 있는 한 티르피츠가 발틱해의 제해권을 위태롭게 내버려두고 대서양에 나오기는 어렵다. 게다가 독일해군은 비스마르크를 잃은 충격 때문에 감히 티르피츠를 대서양에 내보내지 못할 것이다.

5. R급 전함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은 대공방어를 강화한 후에 지중해에 투입하는 것이다.

6. 일본은 적어도 앞으로 3개월 간은 공격하지 않고 미국과 협상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킹조지5세급 전함이 극동에 도착하면 일본에게 결정적인 억지력을 발휘할 것이다. 

7. 이 문제에 관하여 귀관과 논의하고 싶다.

 

처칠이 요구한 파운드 제독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7주간 이 문제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1941년 10월 중순이 되자 누구도 극동 지역의 위기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었고 영국은 도처에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포착했다.

 

일찌기 1941년 6월부터 일본 외무성과 싱가포르, 몸바사 및 베이루트 주재 일본영사관 사이의 암호통신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케냐에서는 일본인 사업가들이 사업을 헐값에 처분하고 서둘러 귀국했다.

8월부터 일본상선의 해외 스케줄은 모두 취소되었으며 해외에 나와있던 일본상선은 서둘러 귀국했다. 

이에 따라 9월에는 인도양 전역에서 일본상선이 사라졌으며 10월이 되자 일본상선이 사기(house flag)와 국적 표시를 제거한 채 일본 내의 몇몇 커다란 항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내의 해군예비역은 소집 통보를 받고 해군기지로 가서 신고했다.

이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941년 10월 16일에 고노에 내각이 붕괴하고 이어서 도조 내각이 출범하자 도쿄주재 각국 대사들은 전쟁이 임박했다고 자국에 경고했다.

다음날인 10월 17일에 영국 전쟁내각은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외상 앤서니 이든은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극동에 파견한다는 처칠의 계획에 찬성했고 노동당 당수 클레먼트 애틀리도 찬성했다.

유력한 각료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처칠은 해군 측에 말했다.

 

"우리에게 미해군의 지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전함 티르피츠는 우리의 신형전함 3척과 맞먹고 있다. 우리가 극동 지역에 신형전함을 1척 보내면 일본해군에게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고 그들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출장간 파운드 제독을 대신하여 회의에 참석한 해상(First Lords of the Admiralty) 앨버트 알렉산더 경은 영국과 일본은 경우가 다르다고 반박했다.

독일은 영국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했지만 영국은 일본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할 생각이 없었으며 일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어서 해군참모차장(Vice-Chief of the Naval Staff) 톰 필립스 중장이 구형전함을 파견한다는 해군성의 계획을 되풀이했다.

육군참모총장 존 딜 대장과 공군참모총장 찰스 포털 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칠은 해군참모총장이 없는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면서 전쟁내각이 찬성하는 안에 해군이 끝까지 반대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은근한 경고와 함께 회의를 마쳤다.

 

1941년 10월 20일 월요일 오후 12시 30분에 다우닝가 10번지 수상 관저에서 열린 전쟁내각 방위위원회 회의에서 운명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에는 해군참모총장 더들리 파운드 제독이 참석했고, 지난 회의에 참석했던 필립스 차장도 참석했다.

처칠은 처음부터 거칠게 나왔다.

그는 티르피츠가 대서양으로 뛰쳐나올 경우에 대비하여 킹조지5세급 전함 3척 모두를 본국 수역에 배치해야 한다는 해군성의 논리는 지겹도록 들었으며 전쟁내각은 티르피츠가 대서양에 튀어나옴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선박의 손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파운드 제독은 구형전함을 파견하려는 해군성의 계획을 되풀이했으나 장황하기만 할 뿐 힘이 없었다.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극동에 파견한 사이 티르피츠가 대서양에 뛰쳐나옴으로서 생길 수 있는 손실을 영국의 최고통치기구인 전쟁내각이 감당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해군성이 반대할 명분이 약했다.

이든 외상은 신형전함 1척을 극동으로 보냄으로써 얻는 정치적 이익이 상당하다면서 처칠을 지지했다.

이든 또한 처칠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개전과 동시에 말레이를 침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진 파운드 제독은 마침내 항복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파운드 제독은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케이프타운으로 파견하되 최종 목적지는 그곳에 도착한 후 상황을 종합하여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처칠은 그 대답에 만족했고 이제 주제는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 오킨렉 장군이 준비하고 있던 십자군 작전으로 옮겨갔다.

이번에도 전함 파견 문제에 대해서는 처칠과 이든, 파운드 제독만이 발언했고 육군과 공군은 침묵했다.

 

이 회의에서 극동에 파견할 킹조지5세급 전함은 2번함 프린스오브웨일스로, 항공모함은 인도미터블로 정해졌다.

킹조지5세급의 3번함 듀크오브요크는 취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준비가 부족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 리펄스, 인도미터블 그리고 호위 함정들로 구성되어 싱가포르로 향할 함대의 이름은 G 부대로 정해졌으며 향후 G 부대를 중심으로 동양함대를 창설할 것이었다.

회의에서는 G 부대와 동양함대의 사령관으로 해군참모차장인 톰 필립스 중장을 임명했다.

 

다음날인 1941년 10월 21일에 해군성은 프린스오브웨일스를 파견하기 위한 예비 명령을 내렸다.

특이한 점은 전날 파운드 제독이 말했던 바와는 달리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다음 최종 목적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항공모함 인도미터블과 함께 트링코말리에 가서 이미 인도양으로 향하고 있던 순양전함 리펄스와 합류한 다음 싱가포르로 가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파운드 제독이 회의에서 했던 말과 실제 명령이 다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아마 처칠 수상의 의지가 굳다는 걸 깨달은 해군성이 케이프타운에서 반전을 노리는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하고 명령에 순순히 따르기로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파견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처칠 수상과 이든 외상은 일본이 말레이를 침공하지 않고 영국의 해상교통로 차단에 집중하리라고 예상한 반면 해군성은 말레이 침공 가능성을 높게 보고 침공 저지에 적합한 전력을 파견하려고 했다. 

사실 말레이를 침공하려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구형전함을 여럿 파견한다는 해군성의 계획이 훨씬 위협적이었다.

비록 구형이라고는 하나 무려 7척의 전함이 한꺼번에 또는 1-2척씩 흩어져 병력과 장비를 실은 일본군 선단을 찾아 타이 만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상황은 함께 행동하는 신형전함 1척과 순양전함 1척을 상대했던 실제 역사보다 훨씬 까다롭고 위험한 상황이다.

구형전함이 느리다고는 하지만 일본군 선단을 찾아 공격하는 데에는 충분한 속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낡았다고는 하나 명색이 전함이라 일본이 수송선단을 보호하려면 전함 세력의 대부분과 수척의 항공모함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일본군의 의도에 관해서는 해군성이 처칠 수상이나 외무성보다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군성은 논의 과정에서 말레이 침공 가능성을 강하게 언급하지 않았는데 근거가 될만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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