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공격에서 참패한 가지오까 함대가 12월 13일에 콰젤린 환초에 입항하자, 즉시 제4함대사령부에서 웨이크 섬 공격계획을 재검토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경순양함 다쓰다와 덴류를 이끌고 작전에 참가했던 제18순양함전대장 구니노리 시게요시 소장은 작전 실패의 원인을 그 중요성에 따라
1)강력한 해안포
2)전투기들의 저항
3)악천후
4)빈약한 일본군 전력
등 4가지로 분석했다.
하루에 1번씩 실시하는 3일 정도의 공습으로는 웨이크 섬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데 역부족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이상, 폭격횟수를 늘리면서 보다 긴 기간동안 지속적인 공습을 가하여 미해병대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본제4함대사령관 이노우에 시게요시 중장은 12월 11일에 공격실패보고를 받자마자 바로 마주로 환초에 있던 제24항공함대의 제3항공공격대에 명령을 내려 보유하고 있는 15대의 4발 대형비행정인 가와니시 H6K 97식대형비행정(Mavis) 을 사용하여 웨이크 섬을 폭격하도록 했으며, 기지도 웨이크 섬에 보다 가까운 웟제 환초로 옮기도록 했다.
(가와니시 97식 대형비행정, Mavis, 길이 : 25.6m, 폭 : 40m, 최고속력 : 331km/hr, 항속거리 : 6,580km, 무장 : 7.7mm 기관총 4정, 20mm 기관포 1문, 800kg 어뢰 2발, 또는 1,000kg 폭탄 2발 )
그리하여 웨이크 섬의 해병대에게는 하루 1번이던 공습횟수가 2번으로 늘었다.
공습의 우선순위는 전투기, 포대들, 기관총좌의 순서로 정하여 가급적 정확한 핀포인트 폭격을 하도록 했으나 대공포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격함대와 상륙부대도 대폭 증강했다.
가지오까 함대는 11일의 공격에서 구축함 하야테와 기사라기가 격침된 이외에도, 경순양함 유바리, 구축함 오이테, 모치즈키, 야요이가 해안포에 맞았고, 경순양함 덴류가 기총소사를 받아서 어뢰에 피해를 입었으며, 중형 수송선 공고 마루의 휘발유 드럼통이 기총소사로 폭발하여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 함정들은 콰젤린 환초에서 집중적인 수리를 받은 후 모두 제2차 공격에 참가할 수 있었다.
격침된 구축함들을 대신하여 자매함인 아사나기와 유나기가 합류했고, 여기에 신형구축함 오보로가 가세했다.
그리고 괌 섬 공략에 참가했던 제6순양함전대(중순양함 아오바,후루다까,가고,기누가사)가 새로이 추가됨으로써 공격함대의 전력은 크게 증가했다.
상륙부대도 증강하기로 하여 괌 섬의 공략을 마치고 사이판 섬에 돌아와 있던 마이즈루 특별해군육전대 550 명이 소해함 쓰가루, 수송선 덴요 마루, 그리고 수상기모함 기요가와에 실려 로이 섬에 상륙했다.
1941년 12월 12일 오전 5시가 약간 지난 시각, 마주로 환초를 출발한 97식대형비행정 2대가 웨이크 섬의 활주로 부근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즉각 비상발진한 Tharin 대위의 와일드캣이 요격하여 1대를 격추했다.
날이 밝자 해병대원들은 다시 피해를 복구하고, 방어태세를 정비했다.
어제 포격전에서 피해를 입은 L 해안포대의 2번포도 급한대로 수리했다.
오전 11시경, 제1항공공격대 소속 26대의 96식육상공격기가 내습했다.
주로 필 섬이 폭격을 받았는데 큰 피해는 없었다.
대공포가 반격을 가해 1대를 격추하고, 4대에 피해를 입혀서, 일본군은 8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오후 4시경, 45kg짜리 폭탄 2발을 매단 채 3,000m 상공에서 전투공중초계 중이던 Kliewer 소위가 웨이크 섬에서 남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해상에서 마침 부상해 있던 일본잠수함을 발견했다.
즉시 해상에 내려간 그는 기총소사를 가하고, 2발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얼마나 수면에 가까운 곳에서 투하했던지 폭탄의 파편에 맞아 와일드캣의 날개와 꼬리에 구멍이 뚫릴 정도였다.
폭탄은 잠수함에 명중하지는 않았으나, 2발 다 잠수함에서 불과 5m 떨어진 해상에서 폭발, 함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여 결국 침몰시켰다.
그날 저녁에는 처음으로 사망자에 대한 집단 장례식을 치렀다.
해병대용 의무시설에서 남서쪽으로 100m 쯤 떨어진 곳에 공동묘지를 만들었고, 민간인 건설자들 중 전도사를 맡았던 사람이 간단한 기도를 했다.
13일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단 한 대의 일본기도 날아오지 않았다.
해병대원들은 아마도 어제 격침된 일본잠수함이 전파로 항로를 지시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신호가 끊어졌기 때문에 일본기들이 오지 못한다고 추측했다.
웨이크 섬에서는 방어태세를 강화하는데 이 하루의 여유를 최대한 활용했다.
제211해병전투비행대의 무장담당장교 Freuler 대위는 공중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민간인 건설기술자들의 용접용 산소로 조종사용 산소를 보충했다.
산소를 민간용 산소통에서 와일드캣의 조종사용 산소통으로 옮기는 이 작업은 대단히 위험했으나, 덕분에 조종사들은 6,000m 의 고공에서 보다 오래 체공할 수 있게 되어 공중전에서 중요한 잇점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정비병들은 대공청음기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잡음을 걸러내면서 비행기엔진 소리만 또렷하게 잡아내려면 정확한 음향학적 원리에 따라 아주 정밀하게 제작되어야 했는데 웨이크 섬의 시설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만들어 놓고 보니 비행기소리는 커녕 산호초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만 크게 잡혀서 레이더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꾸어 보려던 노력의 산물인 대공청음기 제작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날 오후에 전투공중초계를 마친 프롤러 대위가 착륙하던 도중 많은 사람들과 크레인이 활주로 바로 옆에 몰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을 피해서 급히 왼쪽으로 방향을 틀다가 그만 활주로를 벗어나버린 프롤러 대위는 고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부근의 관목 숲에 불시착했다.
다행히 프롤러 대위는 무사했으나 그의 와일드캣은 비행이 불가능할만큼 망가져 버렸다.
정비병들이 망가진 와일드캣을 끌어다가 이틀 전에 엘로드 대위를 태우고 산호초에 불시착했던 와일드캣 옆에 갖다놓고 일본기의 폭격을 유도하는 미끼 겸 부품 공급처로 사용했다.
이제 웨이크 섬에서 비행가능한 와일드캣은 2대가 남았다.
저녁에는 라디오에서 유명한 지휘자인 Kay Kyser 가 웨이크 섬의 해병대원들에게 헌정한 노래를 연주하고 있는데 해설자가 중간에
“사령부에서 웨이크 섬의 방어군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자, 그들은
‘일본놈들을 더 보내라.(Send us more Japs)’
고 대답했답니다.“
라고 뻔한 거짓말들을 늘어놓았다.
웨이크 섬의 해병대에게 ‘더 많은 일본놈들‘ 은 전혀 필요없었다.
실제로 커닝엄 중령은 다음날 제14해군관구사령부에 보낸 전보에서 레이더, 5인치 및 76.2mm 포탄, 기관총탄에서부터 서치라이트용 전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물품들을 적은 기다란 목록을 제출했다.
일요일인 12월 14일 새벽 4시 37분, 이제는 웟제 환초로 기지를 옮긴 일본제3항공공격대 소속의 97식대형비행정 3대가 활주로 부근에 폭격을 가해왔다.
피해도 거의 없었고, 마침 열심히 위장망을 고치고 있던 대공포대도 반격을 가하지 않았다.
오전 11시, 로이 섬에 기지를 둔 제1항공공격대 소속 30대의 96식육상공격기가 폭격을 가해왔다.
캠프1, 필 섬, 그리고 활주로의 서쪽 끝이 주로 폭격을 당하여 정비병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셀터가 직격당하여 주기중이던 와일드캣이 불타버린 일이었다.
이제 비행가능한 와일드캣은 1대 밖에 남지 않았다.
대공포가 반격을 가하여 2대의 일본기를 격추했다.
일본기가 물러간 뒤 불타버린 와일드캣을 살펴보던 키니 중위는 웨이크 섬에서 가장 상태가 좋았던 그 엔진이 아직도 멀쩡하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Hamilton 중사와 해군항공대에서 지원나온 James F. Hesson 기관준위(Machinist's Mate First Class) 와 함께 15일 새벽까지 일해서 엔진을 분리했다.
15일 아침, 전투공중초계 중이던 푸트넘 소령이 일본잠수함을 발견했다.
해상으로 내려가자 잠수함은 급히 잠항해버려서 격침하는데는 실패했지만, 그 바람에 잠수함이 담당하던 항로지시가 불가능해서인지 그날은 96식육상공격기의 폭격이 없었다.
정비병들이 지난 8일에 타린 대위의 실수로 망가졌던 와일드캣의 수리를 완료하여, 이제 비행가능한 와일드캣은 2대가 되었다.
오후 6시, 4대의 97식대형비행정이 300m 의 높이로 공격해와서 캠프2 를 겨냥하여 1000kg 짜리 대형폭탄들을 투하했으나 모두 바다쪽으로 빗나갔다.
아마 일본군은 캠프2 지역이 해병대의 숙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들의 기총소사에 맞아서 1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그날 저녁, Bayler 소령은 타린 중위와 함께 제211해병전투비행대의 암호집을 파기했다.
암호집을 절단기로 얇게 썬 다음 종이가닥들을 휘발유가 들어있는 통에 한참 담궈 푹 절인 후 꺼내어 완전히 소각했다.
그리고 그런 암호집이 있었다는 흔적 자체를 신중하게 제거했다.
해군항공대용 암호집과 난수표는 이미 12월 8일에 제14해군관구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커닝엄 중령이 파기했다.
한편, 이날 일본군은 상륙작전의 리허설을 실시했다.
대폭 증강된 공격함대를 가지고도 항공엄호가 없어서 불안감을 느낀 일본제4함대 사령관 이노우에 중장은 연합함대사령관인 야마모또 이소로꾸 대장에게 항공모함의 지원을 요청했다.
개전 이후 일본군의 공격을 받기가 무섭게 줄줄이 점령당했던 중부태평양의 다른 연합군 거점들과는 달리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웨이크 섬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야마모또 대장은 제4함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진주만을 기습하고 돌아오던 나구모 중장에게 타전하여 제1항공함대 소속 6척의 항공모함 중에서 제2항공전대(항공모함 소류,히류)를 웨이크 섬 공략에 파견하도록 명령했다.
제8순양함전대(중순양함 도네,치꾸마)와 제17구축함전대 소속 구축함 다니까제와 우라까제가 호위를 맡았다.
제8순양함전대장 아베 히로아끼 소장이 전체 지휘권을 쥐고, 제2항공전대장 야마구찌 다몬 소장이 항공작전을 주관할 예정이었다.
아베 제독의 함대가 웨이크 섬을 향하여 다가오자 일본군의 통신을 도청하여 해독하던 진주만의 미해군 암호분석가들은 일본제4함대의 작전과 제2항공전대 및 제8순양함전대의 행동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콰젤린 환초의 일본제4함대 사령부에서는 연합함대 사령부에 올렸던 항공모함 지원요청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웨이크 섬 상륙작전계획을 확정지었다.
무시무시한 해안포의 포격을 가급적 피하기 위하여 상륙은 12월 23일 새벽, 날이 아직 어두울 때 감행하기로 했다.
기습을 위하여 함포를 사용한 상륙준비사격은 실시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해면상황에 관계없이 선발대의 상륙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경비함 32호와 33호는 활주로 부근의 남쪽 해안에 그대로 돌입하여 좌초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기존의 특별해군육전대 450명에다가 사이판에서 이동해 온 마이즈루 해군특별육전대에서 50명을 지원받아 총 500 명이 탑승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50명씩 탑승할 수 있는 바지선 6척을 준비하여 2척은 윌크스 섬에, 2척은 활주로 끝과 캠프1 사이에, 2척은 피칵 포인트 바로 서쪽에 상륙시키기로 했으며, 상륙을 마친 바지선은 다시 해상으로 돌아와서 대기 중이던 병력을 재차 상륙시켜 총 1,000 여명의 특별해군육전대 병력으로서 섬을 장악할 예정이었다.
이 병력으로도 부족하면 구축함의 승무원들 중 500 명을 추가로 상륙시키기로 결정하여 각 구축함에서 할당된 숫자의 인원을 선발하여 상륙훈련과 지상전투훈련을 시켰다.
만일 이들까지 실제로 상륙하려면 이들이 탑승한 구축함들도 해안에 돌입하여 좌초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제4함대로서도 이 계획은 상당히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혹시라도 미국함대가 상륙작전을 방해하려고 시도할 경우에 대비하여 제6순양함전대(중순양함 아오바, 후루다까, 가고, 기누가사)가 웨이크 섬의 동쪽 해상으로 나아가서 감시하기로 했다.
만일 실제로 해전이 벌어지면 이들은 소류와 히류에서 날아온 함재기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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