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달카날 상륙

 

과달카날 상륙부대를 실은 터너 소장의 제62임무부대는 1942년 8월 7일 새벽 3시경에 사보 섬 서쪽에서 둘로 갈라졌다.

과달카날에 상륙할 Xray 부대는 사보 섬 남쪽을 지나 과달카날 북해안을 따라 동진했고, 툴라기 및 가부투-타남보고에 상륙할 Yoke 부대는 사보 섬의 북쪽을 통과했다.

 

(과달카날, 툴라기 및 가부투 상륙작전상황도)

 

8월7일 새벽 5시 45분부터 과달카날 남서쪽 140km 지점에 있던 제61기동부대의 함재기 85대가 이함하여, 6시 경에 과달카날 상공에 도달했다.

이 함재기들 중 44대는 과달카날 해안을 폭격했고 41대는 툴라기 섬과 가부투 섬의 일본군 수상기 기지를 공격하여 정찰용 비행정과 수상전투기를 합쳐 18대를 모두 수상에서 파괴하고 마침 휘발유를 싣고 툴라기에서  과달카날을 향해 가던 일본군의 돛단배 1척을 격침했다.

 

과달카날 상륙은 완전한 기습이었다.

라바울의 제17군사령부가 툴라기의 일본군으로부터 미군 상륙의 보고를 받은 것은 이미 폭격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오전 6시 12분이었다.

 

오전 6시 13분부터 중순양함 3척(퀸시, 빈센스, 아스토리아)과 구축함 4척(헐, 듀이, 엘렛, 윌슨)으로 이루어진 프레드릭 립콜 대령의 과달카날 포격부대가 퀸시의 일제사격을 신호로 일본군의 포대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되던 룽가 곶의 서쪽 해안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지역에는 해안포가 없었으며 제11설영대가 해안에서, 제13설영대가 내륙 쪽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기습적인 함포사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함포사격과 폭격으로 제11설영대는 약 55%, 제13설영대는 약 35%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1분 후인 6시 14분부터는 대공경순양함 1척(산 후앙)과 구축함 2척(몬센, 뷰캐넌)으로 이루어진 노만 스코트 소장의 툴라기 및 가부투 포격부대가 포격을 개시했다.

 

과달카날에 상륙할 엑스레이 부대 소속의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 15척은 2열을 이루어 12노트의 속력으로 상륙예정해안인 레드비치에서 8,200m 정도 떨어진 집결해역으로 향했다.

수송함들은 오전 6시 47분에 집결해역에 도달했고 6시 50분에 엑스레이 수송함대를 지휘하던 레입스나이더 대령은 상륙주정들을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엑스레이 부대와 요크 부대는 합쳐서 8척의 유레카 보트, 308척의 LCP(L) 과 LCP(R), 116척의 LCV,  그리고 48척의 기계화상륙정(LCM)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레카 보트는 길이 9.5m 로 병력 18명을 태울 수 있고, 램프 겸용의 문이 없다.

 

(유레카 보트)

 

LCP(L)(=Landig Craft, Personnel, Large) 는 유레카 보트의 확대판으로 길이는 11m 이고 병력 30명에서 36명을 태울 수 있다.

 

(LCPL)

 

LCP(R)(=Landing Craft, Personnel, Ramped)는 뱃머리에 램프 겸용의 문을 단 것으로 길이 11m 이며 30명에서 36명의 병력을 수송할 수 있다.

 

 

(LCPR)

 

LCV(Landing Craft, Vehicle)은 길이 11m 로 병력 36명이나 보급품 4.5톤 또는 1톤 트럭이나 105mm 곡사포를 운반할 수 있는 상륙주정으로 트럭이나 곡사포 등을 싣고 내리기 위하여 앞문이 LCP(R) 보다 더 크다.

 

(LCV)

 

기계화상륙정(LCM = Landing Craft, Mechanized) 는 중형전차나 155mm 곡사포급 이상의 대형 야포를 실을 수 있는 상륙정으로 길이가 15m 이며 앞의 상륙정들이 나무로 만들어진데 비하여 완전히 강철로 만들어져 있다.

 

(LCM)

 

미해군 상륙정의 대명사격인 LCVP(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는 LCV 의 후계주정으로 개발되었으나, 나중에 LCP(R) 의 기능을 흡수했다.

LCVP 는 LCV 와 비교하여 수송함 내에서 수납공간을 줄이기 위하여 조종석이 적재 공간 내로 들어갔고 방어력의 강화를 위하여 선체의 측면과 램프에 6.5mm 두께의 강철판을 둘렀다.

LCVP 는 1942년 11월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램프가 없는 유레카 보트와 LCPL은 일찍 도태되었고, LCP(R)과 LCV가 LCVP로 통합되면서 1943년부터 미해군의 소형 상륙주정 세력은 LCVP와 LCM으로 단순화되었다.

 

(LCVP의 사진. 적재공간 후방에 따로 운전석이 있던 LCV 와 달리 운전석이 적재공간 내로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의 저항이 없었으므로 과달카날 상륙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상륙한 것은 제5해병연대였다.

1942년 8월 7일 오전 9시 13분, 예정보다 3분 늦게 최초의 상륙주정이 테나루 강의 동쪽에 연한 1,500m 넓이의 레드비치에 상륙했다.

윌리엄 맥스웰 중령의 제1/5대대가 서쪽에, 프레드릭 비에부시 중령의 제3/5대대가 동쪽에 상륙했다.

 

(엑스레이 수송함대의 집결지에서 바라본 과달카날 섬 상륙장면. 해안에 포격으로 인한 연기가 보인다.)

 

제5연대는 상륙하자마자 해안교두보를 내륙으로 500m 까지 확장했다.

이어서 9시 30분부터는 케이츠 대령의 제1연대가 제2/1대대, 제3/1대대, 제1/1대대의 차례로 상륙했다. 

다음은  포병 차례였다.

가벼운 75mm Pack Howitzer들은 쉽게 상륙했으나 무거운 105mm 곡사포들은 견인할 수 있는 2.5톤 트럭이 모자라서 양륙하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과달카날 전투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LVT(Landing Vehicle, Tracked)들이 105mm 곡사포를 견인해야만 했다.

 

(LVT)

 

해안에서 적의 저항이 전혀 없자 오전 11시에 수송함들이 해안에 접근하여 물자양륙을 위하여 주정들이 왕복하는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문제는 상륙해안의 혼잡상황이었다.

해안에서의 양륙을 위하여 조지 로완 대령이 지휘하는 제1공병대대 500 명이 배정되어 있었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보다못한 해군 수병들이 상륙하여 양륙작업을 거들었으나 여전히 모자랐다.

 

주로 인력으로 양륙작업을 감당하려면 수송선 1척 당 최소한 15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했고 수송함이 15척이니 전투부대에서 1,500 명 이상을 차출하여 양륙작업에 투입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과달카날의 일본군 병력을 최소한 5,000 명 이상으로 예상하고 있던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그렇게 많은 전투병을 양륙작업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정오가 되자 상륙해안은 온통 양륙물자들로 가득 찼고 상륙주정들은 보급품을 내려놓을 공간을 찾지 못하여 몇 시간씩 해안을 헤매고 다녔다. 

게다가 오후들어서 일본군이 수송함대에 2차례 공습을 가해 옴에 따라 양륙작업은 더욱 늦어졌다.

이러한 양륙작업의 지연은 사보 섬 해전의 결과 제62임무부대가 양륙작업을 미처 못 마치고 철수함에 따라 해병제1사단이 과달카날 전투 초기에 보급품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생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미군은 이후로 상륙작전시 불도저, 견인용 트랙터, 기중기, 권양기는 물론 야간작업용 조명장치에다가 현장에서 간단하게 설치할 수 있는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까지 갖춘 공병중대인 전문적인 해안양륙반(Shore Party) 을 대대마다 하나씩 배치하게 된다.(관련 내용은 여기로)

 

(과달카날 해안에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는 해병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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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슈스트링 작전( Operation Shoestring)

 

제1호 임무인 과달카날 상륙작전의 정식명칭은 망루작전(Operation Watchtower)이었다.

그러나 물자와 시간이 촉박한 가운데 급하게 추진되는 과달카날 상륙작전 준비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미군병사들은 망루작전에 슈스트링 작전(Operation Shoestring) 이란 별명을 붙였고 오늘날까지 이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Shoestring 이란 단어는 구두끈이란 의미 외에 매우 부족한 자본, 아주 빠듯한 밑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1호 임무는 태평양해역군총사령관(CINCPOA)인 니미츠 대장의 지휘 하에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COMSOPAC)인 곰리 중장이 지휘했다.

 

(제1호 임무 당시 남태평양해역군 조직도)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는 임무는 제62임무부대(TF62) 가 담당했으며 남태평양해역군의 지상발진항공기들로 구성된 제63임무부대(TF63) 가 작전을 지원했다.

제63임무부대는 1942년 7월 25일 현재 에파테, 뉴칼레도니아, 피지, 통가타부, 사모아 등지에 B-17 폭격기 33대, B-26 쌍발폭격기 22대, 해병대의 와일드캣 전투기 88대, 육군항공대의 P-39 에어라코브라 전투기 38대, 해병대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34대, 카탈리나 비행정 28대, 지상발진 정찰기 25대, 그 외에 허드슨 18대를 비롯하여 뉴질랜드 공군 소속의 항공기 30대를 포함하여 총 298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61,  제62 및 제63임무부대 조직도. 원본은 여기로)

 

터너 소장의 제62임무부대와 노이즈 소장의 항공모함기동부대가 합쳐져서 플레처 중장이 지휘하는 제61임무부대를 형성했으나 실제로 터너 소장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했고 따라서 제61임무부대의 사령관인 플레처 중장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항공모함 기동부대(제61.1임무그룹)는 정규항공모함 3척(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 와스프), 고속전함 1척(노스캐롤라이나), 중순양함 5척(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스,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대공경순양함 1척(애틀랜타), 구축함 16척, 급유함 5척등 총 3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함재기는 와일드캣 전투기 99대,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103대, 아벤저 뇌격기 41대로 총 243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터너 소장이 지휘하는 제62임무부대는 병력수송함(AP) 및 화물수송함(AK) 19척과 고속수송함(APD)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수송함들을 호위하고 상륙시 함포사격을 가하기 위하여 호주군 중순양함 2척(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호주군 경순양함 1척(호바트), 중순양함 4척(시카고, 빈센즈, 아스토리아, 퀸시), 대공경순양함 1척(산후앙), 구축함 15척, 소해정5척 등 총 5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제61임무부대는 항공모함 기동부대와 제62임무부대를 합쳐 총 82척으로 이루어졌다.

 

제62임무부대는 과달카날에 상륙하는 과달카날 그룹(Xray 그룹)과 툴라기 및 가부투-타남보고 섬에 상륙하는 북부그룹(Yoke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과달카날 그룹은 15척의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북부 그룹은 병력수송함 및 화물수송함 4척과 고속수송함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인 제435정찰비행대대가 라바울 부근의 일본군 움직임을 정찰하여 정보를 전달해 주었고 약 20대의 B-17 중폭격기를 운용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던 제19폭격비행전대가 라바울을 폭격하여 과달카날 전투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브리즈번에 기지를 둔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의 잠수함 6척(S-38, S-39, S-41, S-43, S-44, S-46)이 라바울 부근에 전개하여 일본군 함정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이들 중 S-38 호는 8월 8일에 과달카날 역상륙을 위하여 출동했다가 도중에 귀환하던 일본군 수송선 메이요마루를 격침했고 S-44 호는 8월 10일에 사보 섬 해전에서 대승하고 개선하던 일본중순양함 카고를  격침했다. 

태평양함대 소속의 잠수함 그레일링과 드럼은 트럭 환초와 라바울 사이의 해역을 초계하면서 남쪽으로 증강되는 일본군 함정들을 감시했다.

 

(제1호 임무 상륙부대 조직도)

 

위 조직도들은 남태평양해역군의 operation plan 1-42 에 수록된 것들인데, 이 보고서는 최초로 상륙한 미해병대 병력을 18,722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터너 제독의 보고서를 참조한 모리슨 제독의 저작에는 19,105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해병제1사단의 보고서는 19,546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해병대 공간전사는 이 세 가지의 기록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취하지 않고 대략 19,000 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해병 제1사단장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소장은 1942년 6월14일에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에 도착했다.

그가 자신의 임무를 알게 된 것은 6월 26일이었다.

해병제1사단이 8월 1일까지 솔로몬 제도에 상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놀랐다.

그는 해병제1사단이 아직 전투에 투입될만큼 충분히 훈련을 하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1943년 초가 되어야만 실전에 투입될만한 상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뉴질랜드에서 6개월 정도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과달카날에 상륙할 부대는 제1연대와 제5연대였다.

제1사단의 세번째 연대인 제7연대는 1942년 3월 28일부터 사모아를 방어하고 있었으므로 교체할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제7연대 대신 해병제2사단 소속인 제2해병연대가 사단예비대로 작전에 투입되었고 별도로 제1기습대대, 제1낙하산대대, 그리고  제3방어대대가 추가되었다.  

 

1942년 7월 2일, 제5연대를 태운 제1진이 뉴질랜드의 웰링턴 항에 도착하자 부두에서 화물을 내렸다가 다시 싣는 작업이 실시되었다.

병력수송함들과 화물수송함들은 미국을 떠날 때 상업적인 방식에 따라 보급품들을 선적했다.

이 보급품들은 웰링턴 항에서 전투방식으로 다시 선적해야 했다.

 

상업적인 선적방식은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인원과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선적하지만 전투방식은 전혀 다르다.

적이 방어하는 해안에 상륙하는 상황을 상정한 전투방식의 선적에서는 병력과 그들이 최초로 사용할 장비, 차량 및 필수보급품은 반드시 같은 배에 실어야만 한다.

또한 화물선적 순서도 전투의 진행에 따라 필요한 순서대로 가장 긴급한 물품을 가장 윗쪽에 그리고 나중에 필요하게 되는 물품일수록 아랫쪽에 선적하게 된다.

 

웰링턴 항에서의 환적작업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강력한 노조에 소속된 뉴질랜드의 항만노동자들은 게으르고 비효율적이면서 임금은 비쌌기 때문에 각 수송함마다 300 명씩의 해병대원들이 차출되어 8시간마다 3교대로 24시간 내내 화물을 내렸다가 다시 선적하는 고된 작업을 반복했다.

뉴질랜드 특유의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잠시 비를 피하여 보급품을 저장할 창고 용량도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보급품들을 포장했던 골판지들이 흠뻑 젖어서 터져버렸고 보급품들은 안 그래도 혼잡한 부두에 죄다 흩어졌다.

그나마 뉴질랜드 육군이 30대의 유조차와 18대의 대형 트레일러를 급히 지원하고 부두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뉴질랜드 군의 연료저장시설과 탄약고를 제공함에 따라 마지막에 선적할 연료와 소화기용 탄약을 혼잡한 부두에서 일시적으로 치울 수 있었다. 

 

7월 11일에 제1연대를 실은 제2진이 도착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7월 16일이 되자 8월 1일까지 도저히 상륙작전을 실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7월 1일에 샌디에고를 출발한 제2연대는 아직까지 웰링턴에 도착하지도 않고 있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과 곰리 제독의 보고를 받은 킹 제독은 1942년 8월 1일로 예정되었던 상륙작전을 8월 7일로 6일 연기하는데 동의했지만 더 이상의 연기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촉박한 작전일정을 맞추기 위하여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생명을 유지하고 전투를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

 

만 선적하라고 명령했다.

장교들과 병사들의 개인 소지품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탄약은 당초 예정된 20일치의 절반인 10일치로 줄어들었고 식량을 비롯한 다른 보급품들도 원래 예정된 90일치에서 60일치로 줄어들었다. 

사단이 보유한 지프와 1톤 트럭은 거의 다 실었으나 그보다 큰 트럭들의 75% 는 남겨놓고 가야만 했고 155mm 곡사포도 역시 뉴질랜드에 남았다.

 

3주에 걸친 광란적인 환적작업 끝에 1942년 7월 22일에 해병제1사단을 실은 수송선단은 웰링턴 항을 출항했다.

부두는 불어터진 골판지들과 선적하지 못한 보급품이 남겨진 트럭과 섞여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1942년 7월 26일 오후2시 , 진주만을 떠난 플레처 제독의 제61기동부대와 뉴질랜드를 출발한 터너 소장의 제62임무부대는 피지에서 남쪽으로 640km 떨어진 해상에 집결했다.

플레처 제독은 터너 제독과 제62임무부대의 호위함대를 지휘하는 호주해군의 크러칠리 소장, 그리고 반데그리프트 장군을 기함인 새러토가로 불러서 작전희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플레처 제독은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상륙 이후 48시간 이내에 떠날 것이라고 말해서 터너 제독을 놀라게 만들었다.

터너 제독은 보급품의 양륙이 끝날 때까지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머물러 주기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플레처 중장에게 거부당했다.

그러자 그는 누메아에 있던 플레처 제독의 상관인 곰리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항의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프랭크 잭 플레처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61임무부대는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피지 제도의  코로 섬에서 예행연습을 실시했다.

원래는 두번에 걸쳐 실전적인 상륙연습이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코로 섬 부근의 산호초 때문에 실제 상륙이 불가능했다.

실전같은 예행연습이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던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이 예행연습에 금쪽같은 사흘을 투입한 데 비하여 성과는 보잘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어도 수송함에서 상륙주정으로 옮겨타는 연습이나 해안에 대한 함포사격연습이란 면에서는 성과가 있었다.

 

7월 31일 저녁이 되자 제61임무부대는 코로 섬을 떠나 과달카날로 항진했다.

제61임무부대는 혹시 일본군에게 들킬 경우 호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서쪽으로 항진하다가 8월 5일에 뉴헤브리디즈 제도 근해에서 북쪽으로 변침하여 과달카날로 향했다.

8월 5일부터 이 해역의 날씨가 거칠어져서 미함대는 악천후의 덕을 보았다.

 

일본군도 미군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은 감지하고 있었다.

대본영의 통신감청반은 1942년 7월 3일에 37척 규모의 선단이 미서해안을 떠났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8월 1일에는 미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진주만을 출항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에 따라 중부태평양 지역의 일본군에게는 즉시 경계경보가 내려졌으나 남태평양의 라바울에는 8월 4일이 되어서야 통상적인 정보수준으로 통보했다.

이 정보를 읽어본 일본제25항공전대장 사마다 스미요시 소장은 즉시 툴라기에 주둔 중인 요코야마 항공대에 정찰활동을 강화할 것을 지시했으며 6일에는 재차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내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툴라기의 요코야마 항공대는 정찰활동을 강화했으나 8월 5일부터 날씨가 나빠져서 지장을 겪었다.

특히 상륙 전날인 8월 6일에는 일본군의 제2번 정찰비행정이 미함대 상공까지 도달했으나 스콜이 몰아치는 가운데 구름 밑에 가린 미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운좋게 탐지를 피한 과달카날 침공함대는 1942년 8월 7일 새벽에 과달카날 부근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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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군의 반격계획

 

과달카날 전투를 촉발한 미군의 솔로몬 진공작전 구상은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2년 2월 18일에 미함대총사령관 킹 제독이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에게 보낸 각서에서 최초로 드러난다.

이 각서에서 킹 제독은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에파테 섬에 미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3월 2일에는 에파테 기지를 발판으로 솔로몬 제도로 진출하고 나아가 라바울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킹 제독은 3일 후인 3월 5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이러한 구상을 밝혔다.

 

(미해군총사령관 어네스트 킹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3월 5일 당시 태평양의 정세는 암담했다.

2월 15일에 싱가포르가 함락된 데 이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함락도 시간 문제였으며 필리핀의 미군은 바탄반도에 포위된 채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고 맥아더 장군은 이미 탈출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누구도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어 보였고 워싱턴에서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기하자는 소리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킹 제독은 대통령에게 호주와 뉴질랜드는 미국의 형제국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에 넘겨주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고 대통령도 공감했다. 

킹 제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선 호주와 미국과의 해상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그 과정에서 건설한 미군기지를 발판삼아 솔로몬 제도에 진공한 다음 라바울까지 북상한다는 구상을 밝히고 대통령의 기본적인 동의를 얻어내었다. 

즉 킹 제독은 미군이 향후 1944년 중반까지 남태평양에서 실시할 작전의 청사진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미군의 남태평양 작전은 큰 틀에서 킹 제독의 청사진을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당면 문제는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 사이의  해상수송로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솔로몬 제도 진공 문제는 해상수송로가 안전해진 다음에야 논의할 수 있는 문제였다.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와의 해상수송로. 원본은 여기로)

 

이러한 해상수송로 보호를 위하여 미군은 사모아, 통가타부, 피지, 에파테, 뉴칼레도니아 등에 비행장을 갖춘 기지를 건설하고 방어병력을 배치했다.

특히 뉴칼레도니아와 피지에는 1개 사단이 넘는 병력을 배치하는 등 1942년 4월말까지에는 해상수송로를 보호하기에 충분한 수준의 병력들이 배치되었다.

 

1942년 5월 3일에 일본이 툴라기를 점령하면서 솔로몬 진공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킹은 툴라기가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를 연결하는 해상수송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늦어도 1942년 8월 1일까지는 솔로몬 제도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은 솔로몬 진공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에파테 북쪽의 에스피리투산토에 최대한 빨리 비행장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해군건설대대는 모자라고 공사해야 할 곳은 많았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후방의 보급기지로서 일본군의 라바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뉴칼레도니아의 누메아도 항만시설이 불충분하여 하역작업에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었고 에파테도 3월 25일부터 기지 건설이 시작되어 공사 중인 상태였다.

 

결국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은 5월 28일이 되어서야 기지건설 공사가 진행 중인 에파테에서 해군건설대대원 일부를 빼내어 육군, 해병대 등에서 차출한 수비병력과 함께 에스피리투산토에 상륙시킬 수 있었다.

병력과 장비 및 건설자재를 한꺼번에 수송할 수송선이 모자라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수송선으로는 장비와 건설자재를 수송하고 해군건설대대원 및 육군, 해병대를 합쳐 500 명 쯤 되는 병력들은 어선을 타고 에스피리투산토에 상륙했다.

 

에스피리투산토의 지반은 예상했던 것보다 활주로 건설에 부적당하여 활주로 건설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하여 촌각을 다투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활주로가 완성된 것은 과달카날 상륙작전이 감행된 8월 7일이 되어서였다.

이후 에스피리투산토는 과달카날에서 가장 가까운 전진기지이자 헨더슨 비행장으로 투입되는 연합군 항공기의 중계기지로서 과달카날 전투 기간 내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2년 5월 28일,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일본함대가  중부 태평양에 집결하자 니미츠 제독은 맥아더 장군에게 이틈을 타서 제1해병기습대대를 투입하여 툴라기를 탈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만일 탈취에 성공한다해도 후속하는 일본군의 공격을 막을 전력이 부족하다며 이 작전에 반대했고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도 맥아더 장군의 견해에 동조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6월 4일부터 6일에 걸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이 미해군의 압승으로 끝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맥아더 장군은 6월 8일에 마셜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만약 자신에게 해병대 1개 사단과 수송선단 및 항공모함 2척을 빌려준다면 라바울을 직접 공격하여 탈취하겠다고 제안했다. 

맥아더 장군의 설명은 이러했다.

 

버마 방면의 작전이 종료되어 그쪽 방면에 투입되었던 일본군 사단들이 라바울 방어에 투입되기 전에 라바울을 탈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라바울은 일본육군 1개 사단으로 방어되고 있으므로 호주에 있는  제32 및 제41보병사단과 호주제7사단을 투입하면 충분히 탈취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단들은 상륙작전 훈련을 받지 못했고 수송선도 모자라므로 해군 측에서 해병제1사단을 상륙시켜 해안에 교두보를 만들고 호주에 주둔 중인 3개 사단을 수송할 수 있도록 수송함 12척 및 고속수송함 4척을 제공하여야 한다.

또한 제5항공대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들이 라바울을 폭격할 수 있으나 항속거리가 짧은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을 수 없으므로 해군 측이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기동부대를 파견하여 함재기로 폭격기를 엄호해야 한다.

그리고 작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작전에 참가하는 모든 부대는 단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라바울 상륙은 늦어도 7월 1일까지는 실시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라바울을 탈취하고 일본군을 트럭 섬으로 쫓아내 버릴 수 있다.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

 

마셜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견해를 지지하여 6월 12일에 킹 제독을 만나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킹 제독은 경악했다.

 

태평양에 3척 밖에 없는 항공모함은 해군 최대의 자산으로 매우 귀중한 것이고 해병제1사단은 현재 가용한 유일한 수륙양용부대였다.

킹 제독의 상식으로는 이런 항공모함들과 해병제1사단을 해도도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고 바다 밑에 산호초가 널려 있으며 사방에 일본군의 항공기지가 깔린 좁은 해역에 밀어넣겠다는 소리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동성을 최대의 장점으로 하는 강력한 공세적 무기인 항공모함을 그 위험한 해역에 밀어넣고는 고작 폭격기 호위를 맡기겠다는 맥아더의 구상은 항공모함이란 물건에 대한 맥아더의 인식이 얼마나 조잡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따라서 킹 제독은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라바울 공격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남태평양에서 미군의 반격은 자신이 주장했던 대로 툴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한 이 작전에 투입되는 함정, 항공기, 그리고 병력들이 대부분 해군 소속이니만큼 작전은 반드시 해군인 니미츠 제독과 곰리 제독이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군의 임무는 항공기를 동원하여 정찰을 해주고 해병대가 점령한 지역을 수비할 병력들을 제공하는데 있다고 못박았다. 

 

킹 제독의 발언을 알게 된 맥아더 장군은 해군이 육군부대를 휘하에 넣고 마음대로 지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고 마셜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3주일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킹 제독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마셜 장군이 6월 29일에 킹 제독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하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7월 2일에 정식으로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이  작성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에 따르면 남태평양에서 미군의 반격은 3단계로 나뉘어져 제1호 임무(Task1), 제2호 임무(Task2), 제3호 임무(Task3)의 3단계로 실시하게 되었다.

 

제1호 임무는 산타크루즈 제도, 툴라기 및 주변 섬들을 탈취하는 것으로 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니미츠 제독)이 지휘하게 되었다.

작전 개시일은 1942년 8월 1일이었다.

제2호 임무는 뉴기니 동부 및 북부 솔로몬 지역을 탈취하는 것으로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맥아더 장군)이 지휘하게 되었다.

제3호 임무는 라바울 및 그 주변 지역을 점령하는 것으로 역시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이 지휘하게 되었다.

제2호 임무 및 제3호 임무의 작전개시일은 제1호 임무의 작전 종료일에 맞추어서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툴라기 섬이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작전구역 내에 들어 있었으므로 남서태평양 해역군의 관할 지역을 기존의 동경 160도선에서 159도선으로 서쪽으로 옮겨서 툴라기 지역을 남태평양 해역군 관할로 편입시켰다.

킹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부하인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을 지원해야 하는 맥아더 장군의 어색함을  덜어주기 위하여 제1호 임무가 시작되는 1942년 8월 1일을 기하여 남태평양 해역군을 합동참모본부에서 직접 명령을 받는 위치로 격상시켰다.

따라서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은 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의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남서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이나 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과 동등하게 합동참모본부의 직접 통제를 받는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서류상 관계야 어찌되었든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은 니미츠 제독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인 곰리 제독의 소극적인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니미츠 제독이 과달카날 전투가 한참 진행중이던 1942년 10월 18일에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을 곰리 제독에서 헐지 제독으로 전격적으로 교체해 버린 사건이다.

물론 이 과정에는 킹 제독의 재가가 필요했지만 곰리 제독의 해임과 후임자인 헐지 제독의 인선은 전적으로 니미츠 제독의 의지였고 킹 제독은 추인했을 뿐이었다.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 실질적으로 니미츠 제독의 지휘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2호 임무가 시작된 이후였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자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사관학교 선배이자 뛰어난 지휘관인 헐지 제독에게 남태평양 해역군의 작전을 전적으로 맡기고 자신은 중부 태평양 공세준비에 전념했다.

이후 1943년 11월부터 타라와 전투를 시작으로 중부 태평양 진격이 본격화되자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 해역군의 작전을 지도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상태로 중부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남태평양 해역군은 1944년 6월 15일에 잠정적으로 관할하고 있던 동경 159도선의 서쪽에 있는 북부 솔로몬 지역이 남서태평양 해역군 관할로 다시 넘어가면서 태평양 해역군 총사령관의 직속 지휘 아래로 돌아오게 된다.

 

니미츠 제독과 킹 제독은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에 따라 제1호 임무의 실행방안을 협의하기 위하여 1942년 7월 3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회담을 열었다.

회담 기간 중인 7월 5일(과달카날 현지시간으로 7월 6일) 남태평양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영국인 해안감시대원인 마틴 클레멘스가 과달카날 북해안에 일본군이 상륙했다고 보고해 온 것이었다.

 

툴라기에서 근무하던 영국 공무원이었던 클레멘스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현지에서 영국 육군 대위로 임관했는데 일본군의 툴라기 침공을 앞두고 코프라 운반선 발루스를 타고 과달카날의 아올라에 상륙하여 해안감시대원이 되었다.

그는 철수하는 호주군에게서 소총 18정과 탄약 2,500 발을 넘겨받아 원주민 60명으로 이루어진 정찰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무전기로 일본군의 움직임을 보고하는 동시에 과달카날의 원주민에게 연합군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일본군에 협조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원주민 정찰대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마틴 클레멘스 대위)

 

클레멘스의 보고를 받은 호주군은 즉시 워싱턴에 알리는 동시에 정찰기를 발진시켰다.

호주군의 정보가 도착했을 때 진주만의 통신감청반도 일본군의 통신을 해석하여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태평양함대의 정보장교들은 통신감청을 통해 과달카날에 상륙한 일본군의 대다수가 건설 노무자로 추정되는 비무장 병력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일본군의 목적이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의도라고 판단했다.

나중에 미군은 해안감시대원의 안전을 보장하고 일본군 암호를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공식발표에서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정찰기가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는 일본군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둘러 대었다.

 

그런데 일본군의 과달카날 상륙을 알게 된 맥아더 장군과 곰리 제독의 반응은 킹 제독 및 니미츠 제독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킹 제독은 일본군의 진출을 당장 저지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으며 한시바삐 상륙작전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상륙순서를 바꾸어서 가장 먼저 상륙하려던 산타크루즈 제도 상륙을 뒤로 미루고 우선 툴라기 지역에 상륙해야 하며 주요 목표도 툴라기 섬이 아니라 일본군이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는 과달카날 섬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니미츠 제독도 이 견해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과달카날 상륙 직후 호주로 날아가서 맥아더 장군과 회담했던 곰리 제독은 7월 9일에 일본군의 과달카날 상륙으로 제1호 임무의 위험성이 너무 커졌으니 앞으로 충분한 병력이 갖추어질 때까지 제1호 임무를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을 맥아더 장군과 공동으로 발표했다.

 

킹 제독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마셜 장군에게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에 상륙한 이상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과달카날 섬에 상륙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여 동의를 얻었다.

작전 실시에 따르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과달카날 섬을 조기에 점령함으로써 얻게 되는 전략적 잇점을 꿰뚫어 본 이 결정은 킹 제독이 태평양전쟁 기간을 통하여 내린 숱한 결정 중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의 하나였다.

 

다음날인 7월 10일, 맥아더 장군은 8월 1일로 예정된 제1호 임무의 연기는 불가하니 작전을 지원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을 받았다.

같은 날,  곰리 제독도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그가 사용가능한 병력, 함선 및 항공기의 내역과 함께 1942년 8월 1일을 기하여 툴라기, 과달카날, 그리고 산타크루즈 제도에 상륙하라는 정식 명령을 받았다.

작전명은 망루작전(Operation Watchtow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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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군의 진출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하여 영령 말레이와 필리핀,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예정보다 훨씬 빠른 1942년 3월 초까지 석권한 일본군은 차기 전략방향을 두고 일본육군과 해군의 견해가 갈라졌다.

 

진주만 기습의 성공과 뒤이은 잇단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자신감에 넘치던 일본해군은 미함대가 태평양을 건너 쳐들어올 때 점진적으로 세력을 약화시킨 다음 전함을 중심으로 하는 주력함대를 투입하여 단 한번의 결정적인 해전을 통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기존의 점감요격작전을 폐기했다.

대신 그들은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미함대를 포착한 다음 각개격파하고자 하였으며 예정에 없던 호주 침공까지 주장했다. 

 

반면 일본육군은 태평양 지역에서 더 이상 진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버마 방면에 전력을 집중하여 가능하면 인도까지 진출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중국을 완전히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낸 다음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는 지구전을 주장했다.

특히 호주 침공 문제는 가용 사단 수의 부족과 함께 보급문제 때문에 절대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육군도 호주가 태평양 방면에서 연합군 반격의 전초기지가 되리라는 점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주를 고립시켜 무력화시킬 필요성은 인정했다.

따라서 대본영의 육군부와 해군부는 호주와 미국의 연락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뉴기니 남부의 포트모레스비를 점령하는 MO 작전과 솔로몬 제도 및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거쳐 피지와 사모아를 점령하는 FS 작전에 동의했다.

 

그런데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의 생각은 대본영과 달랐다.

태평양에서 일본해군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미국항공모함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는 FS 작전 이전에 미드웨이와 알류샨으로 진출하면서 그 과정에서 요격하러 나오는 미국 항공모함들을 격멸하기 위하여 연합함대 함정 대부분이 참가하는 대규모 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본영에서는 육군부와 해군부가 공히 미드웨이 작전을 반대했으나 진주만 기습의 성공으로 권위가 한껏 높아진 야마모토 제독의 의견을 쉽사리 꺾지 못하여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차기전략방향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1942년 4월 18일, 미국 항공모함 호넷에서 이함한 B-25 쌍발폭격기들이 벌건 대낮에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를 폭격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했다.(관련 내용은 여기로)

둘리틀 폭격이라고 불리는 이 기습적인 도교 공습은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미국 항공모함의 위험성을 크게 부각시키면서 결국 야마모토 제독의 미드웨이 공격작전인 MI 작전이 채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대본영은 1942년 4월 말에 MO 작전(5월 7일), MI 작전(6월 7일), FS 작전(7월 7일)을 1달 간격으로 차례로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MO 작전은 산호해 해전으로 인하여 실패했고 MI 작전은 일본해군이 미드웨이 해전 에서 참패함으로써 전국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 FS 작전은 실시해보지도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포트모레스비 공략작전인 MO 작전의 일환으로 툴라기를 점령했다.

1942년 5월 1일, 뉴조지아 남방해상에 진출한 고토 아리토모 제독이 지휘하는 엄호부대의 경항모 쇼호로부터 출격한 함재기들이 가부투 섬을 공습하여 주기 중이던 호주공군의 카탈리나 비행정 3대를 파괴하고 주변 시설을 폭격했다.

일본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툴라기 지역의 연합군 병력은 소형 코프라 운반선 2척을 타고 툴라기를 탈출했다.

이 2척 중 AIF(Australian Imperial force) 소속의 호주군 22명과 툴라기의 백인들 및 중국인들을 태운 28톤짜리 코프라 운반선 발루스는 간간히 가해지는 일본기들의 공습을 피해가면서 과달카날의 아올라를 거쳐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에파테에 도착했고 최종적으로 호주의 시드니로 철수했다.

한편 포트모레스비를 떠나 툴라기로 파견되어 가던 호주공군의 카탈리나 비행정 1척이 비행 도중에 시마 기요히데 소장이 이끄는 툴라기 침공부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툴라기 침공부대는 수송선 아즈마산마루, 구잠정을 개조한 수송선 도시마루 3호 및 다마마루 8호, 역시 소해정을 개조한 수송선인 하고로모마루 및 다마마루로 이루어져 구축함 2척(기쿠즈키, 유즈키)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기뢰부설함 오키노시마, 고에이마루, 그리고 소해정 제1호와 제2호도 동행하고 있었다.

아즈마산마루를 비롯한 수송선에는 구레제3해군육전대의 1개 중대와 설영대, 요코야마 항공대 소속 항공요원들과 수상기 기지 건설을 위한 자재 등이 실려 있었다.

일본군은 1942년 5월 3일 오전 8시에 툴라기에 도착하여 무혈상륙했고 그날 저녁에는  라바울을 출발한 97식비행정 3대가 가부투 섬에 도착했다.

 

(가와니시 H6K 97식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군의 툴라기 상륙 당시 툴라기 남방 800km 지점에 있던 플레처 제독 휘하의 제17기동부대는 툴라기 공습을 위하여 즉시 북상했다.

5월 4일 오전 8시 30분부터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떠난 미군 함재기들이 3차례에 걸쳐 툴라기에 정박 중이던 일본함정들을 공격했다.

공습 결과 구축함 기쿠즈키, 기뢰부설함 오키노시마, 소해정을 개조한 수송선인 다마마루, 그리고 소해정 2척이 격침되었다.   

5월 8일에는 8대의 B-17 플라잉포트레스가 툴라기를 폭격했으나 치명타를 입히지는 못했다.

 

이후 일본군은 툴라기 기지를 수상기 기지로서 착실히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초가 되자 툴라기에는 97식 비행정 9대와 제로기를 수상기로 개조한 2식 수상전투기 9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방어병력의 주력은 제84경비대 300 명이었으며 이외에도 요코야마 항공대 소속 342명과 설영대원 144명 등 총 786명이었다.

 

(나카지마 A6M2N 2식 수상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한편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해군 제25항공전대장 야마다 사다요시 소장은 남부 솔로몬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남부 솔로몬 지역에 건설된 비행장은 포트모레스비 공격시 측면 엄호를 제공할수 있을 뿐 아니라 향후 뉴헤브리디스 제도와 뉴칼레도니아 공격시 강력한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도에서 1942년 5월 25일에 제25항공전대와 제8근거지대의 기술자들이 남부 솔로몬 지역에 대한 항공정찰을 실시하여 과달카날 섬 북해안의 룽가 강 동쪽 평원을 비행장 건설의 적지로 선택했다.

1942년 7월 6일 오후 2시 10분, 제11설영대와 제13설영대를 실은 아즈마산마루, 히로도쿠마루,호쿠리쿠마루, 아즈마마루가 과달카날 북해안에 도착하여 11일까지 인원과 물자를 양륙했다.

 

몬젠 가나에 해군대좌가 지휘하는 제11설영대는 보병 230명과 건설노무자 1,3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오카무라 노리나가 소좌의 제13설영대는 보병 50명과 건설노무자 1,300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설영대는 8월 15일로 예정된 건설기한을 맞추기 위하여 매일 오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작업을 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7일에 미해병대가 상륙했을 때 일본군 비행장에는 병사용 막사, 무전시설, 전투기용 방호벽 등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길이 800m의 활주로는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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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투(Guadalcanal Campaign)는 1942년 8월 7일에 미해병제1사단이 과달카날 섬과 그 대안의 툴라기 섬 및 가부투-타남보고 섬에 상륙한 이래 1943년 2월 9일에 살아남은 일본군 패잔병 1만여명이 해상철수할 때까지 6개월간 과달카날 섬과 인근 해역 및 상공에서 벌어진 미일 양국 간의 무력충돌을 말한다.

이 기간 동안 미해병대 및 육군의 4개 사단이 투입되어 헨더슨 비행장을 둘러싸고 일본육군과 처절한 지상전을 벌였다.

또한 과달카날 주변 해역과 상공에서는 약 50회에 걸쳐 미일간의 함정 사이에 또는 함정과 항공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으며 그 중 1942년 8월 9일의 사보 섬 해전, 8월 23일에서 25일에 걸친 동부 솔로몬 해전,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치러진 에스퍼란스 해전, 10월 26일의 산타크루즈 해전,11월 13일에서 15일 사이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 11월 30일의 타사파롱가 해전, 그리고 1943년 1월 29일에서 30일에 걸친 렌넬 섬 해전 등 7번의 주요 교전이 해전의 이름을 얻어 전사에 기록되었다.

이들 중 동부 솔로몬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은 함재기를 사용한 항공모함끼리의 대결인 함대항공전이었으며 마지막의 렌넬 섬 해전은 일본의 지상발진 항공기와 미국의 수상함대와의 대결이었다.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이 실시한 최초의 주요 반격이었다.

이전까지 연합군의 공격은 주로 잠수함을 이용한 소모작전이거나 항공모함을 이용한 히트앤드런 방식의 일시적 공격이었는데 반하여 과달카날 전투는 처음으로 일본군이 방어하고 있는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전투였다. 

또한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육군이 최초로 대규모 패배를 당한 전투였다.

일본해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해군에게 참패한 데 이어 일본육군마저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지상군에게 대패하면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을 상실하였으며 이후 수세에 몰려 수비에만 급급하다가 패전을 맞이하게 된다.

 

1. 과달카날 섬

 

(솔로몬 제도. 남동쪽의 화살표 지역이 과달카날 섬이며, 북서쪽의 화살표 머리 지역이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라바울이다. 원본은 여기로)

 

솔로몬 제도는 대략 남위 5도에서 12도, 동경 155도에서 170도 사이에 분포하며, 북서쪽 끝의 부겐빌 섬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2열로 늘어선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열에는 초이셀 섬, 산타이사벨 섬, 말라이타 섬이 있고, 남쪽열에는 뉴조지아 섬, 러셀제도, 과달카날 섬, 산크리스토발 섬이 있으며, 그 외에도 수백개의 작은 섬들이 산재해있다.

북쪽 열과 남쪽 열 사이의 수로를 슬롯이라 부르며,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 특히 일본함정들이 주로 이 슬롯을 이용하여 라바울과 과달카날 사이를 왕복했다.

 

과달카날 섬은 남부 솔로몬 제도에 속하며 동서로 약 145km, 남북으로 40km 쯤 되는 짚신벌레 모양이다.

 

(짚신벌레)

 

(과달카날 섬. 화살표 지역이 헨더슨 비행장이 있는 룽가 평원이고. 북쪽의 화살표 머리는 툴라기 섬이다. 원본은 여기로)

 

과달카날 섬의 북쪽은 평탄한 지형으로 상륙할만한 해안도 많고, 비행장을 만들만한 평지도 많으나 남쪽 해안은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접안이 거의 불가능하다.

섬의 중앙은 최고높이가 약 2,400m 에 달하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서 북해안으로 여러 개의 강이 흘러들어간다.

 

이러한 강은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물이 항상 흐르는 일반적인 형태의 강으로 테나루 강, 룽가 강, 발레수나 강 등이 속한다.

또 한 가지는 수량이 많으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만 수량이 적으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호수처럼 고여 있는 강으로서 일루 강, 마타니코 강 등이 여기에 속한다.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우림기후로 연간 강우량이 4,200mm 에 달하고(우리나라의 연간 강우량은 약 1,200 -1,400mm) 평균 기온은 28도 정도이며 습기가 높아서 무더운 날씨이다.

계절은 11월부터 3월까지의 건기와 나머지 기간인 우기로 나뉘는데 건기란 것도 상대적 개념으로 건기에도 상당량의 비가 내린다.

따라서 쿠나이라고 부르는 키가 큰 풀이 자라는 평원을 가진 북해안 일부를 제외한 섬의 대부분은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과달카날 섬은 1568년에 스페인의 탐험가 멘다나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과달카날이라는 이름도 멘다나가 지은 것이다.

이후 과달카날은 200 년 가까이 잊혀졌다가 1767년에 프랑스 탐험가 부갱빌에 의하여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19세기 말에 독일이 동북부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 및 부갠빌 섬을 차지하자 영국도 동남부 뉴기니와 부갠빌 섬 이남의 솔로몬 제도를 차지했다.

영국은 1893년 10월 6일에 솔로몬 제도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했고, 1897년에는 솔로몬 제도 제일의 양항을 가진 과달카날 섬 대안의 툴라기에 행정청을 설치했다. 

한편 제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이 차지했던 뉴기니 동북부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 그리고 부갠빌 섬은 호주가 신탁통치했다.

 

1939년에 솔로몬 제도의 중심지인 툴라기에는 작은 호텔 하나, 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 몇개, 그리고, 영국인 공무원들을 위한 방갈로 몇채 등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과달카날 섬에는 북해안을 따라 몇군데 야자농원이 있었고 야자나무로 만든 3개의 작은 교회가 있었다.

 

농장주들은 주로 호주인들로서 원주민들을 인부로 고용하여 농장을 경영했다.

야자농원의 주요 산물은 야자를 말려서 수송 및 저장에 편리하게 만든 코프라로서 이 코프라를 찌거나 압착하여 야자유를 추출한다.

야자농원에서 산출된 코프라는 주로 영국계 회사인 레버브라더스 사 또는 시드니에 본사를 둔 번스필릅 사가 매입했다.

과달카날 섬 북해안의 아올라 지역에는 번스필릅 사의 출장소가 있었으며 레버브라더스 사의 출장소는 툴라기 섬 인근의 가부투 섬에 있었다.

호주인 농장주들과 원주민 인부들과의 사이는 원만한 편은 아니어서 원주민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감독관을 살해하고 농장에 불을 지른 다음 정글 속으로 도망가 버리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1942년 5월에 툴라기를 점령했을 때 원주민 관리에 신경을 썼더라면 원주민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백인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자유와 풍요를 가져다 주겠다는 선전과는 달리 백인들보다 심하게 원주민을 차별했다.

그들은 원주민을 데려다가 하루 종일 중노동을 시키고는 임금으로 쓸모없는 군표를 지급했다.

그리하여 8,000 - 10,000명으로 추정되는 과달카날 섬의 원주민들은 일본군에게 등을 돌리고 연합군에게 협조했다.

 

호주 정부는 1919년부터 자국의 해안을 감시하기 위한 해안감시원을 운용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유럽의 정세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호주 정부는 이 해안감시원 제도를 솔로몬 제도까지 확장했고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주 해군이 이 해안감시원 제도를 관장하게 되었다.

주로 농장주이거나 현지 공무원이었던 해안감시원들은 호주해군의 계급을 부여받고 자신들이 생활하던 익숙한 지형에서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일본군 항공기, 선박, 그리고 지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무전기로 보고했다.

호주군이 툴라기에서 철수할 당시인 1942년 5월에는 솔로몬 제도 전체의 해안감시원 수가 10명 미만이었으나 이후 호주군 및 미군의 관심과 후원에 힘입어 차츰 늘어났다. 

나중에 투입된 해안감시원들은 기존의 농장주나 현지 공무원에 더하여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호주군이나 미군 병사들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해안감시원들은 연합군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미군은 해안감시원들의 보고 덕분으로 일본기들이 도달하기 약 50분 전에 경보를 받을 수 있었고 전투기들이 미리 발진하여 유리한 고도를 차지하고 있다가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또한 해안감시원들은 과달카날 상륙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격추된 연합군 조종사 및 항공승무원 120 명을 구조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호주공군은 가부투 섬에 카탈리나 비행정 3대를 배치하고 보병 22명을 파견했다.

툴라기에는 장교 3명, 하사관  2명, 그리고 112명의 원주민 경찰로 이루어진 솔로몬 방위대가 있었다.

일본군이 침공해 왔을 때 툴라기와 과달카날 지역의 연합군 병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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