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19)-개전결의
19. 개전 결의
미국이 정상회담을 위한 4가지 기본원칙을 전달한지 3일 후인 1941년 9월 6일에 일본은 히로히토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대본영-정부 연락회의를 열어 미국에 대한 전쟁을 결의했다.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회의 전날인 9월 5일에 천황을 만나 다음날 어전회의에서 다룰 의제인 '제국국책수행요령' 에 대해 설명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국의 자존자위를 위하여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한 전쟁을 불사한다는 결의 하에 대강 10월 하순까지 전쟁 준비를 마친다.
2. 제국은 이와 동시에 제국의 요구사항을 미국과 영국이 받아들이도록 모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한다.
3. 외교교섭에 의하여 10월 상순까지 이쪽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즉시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한 전쟁을 결의한다.
제2항과 관련하여 일본이 말하는 소위 최소 요구사항 및 승락할 수 있는 한계는 다음과 같았다.
1. 미국과 영국은 일본이 '지나사변' 을 해결할 수 있도록 버마로드를 폐쇄하고 장개석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어야 한다.
2. 미국과 영국은 비록 자국 영토라고 해도 극동에 더 이상 병력을 증강시키지 말아야 한다.
3.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과 프랑스의 관계에 대하여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4. 미국은 일본이 원료를 획득할 수 있도록 자유무역을 재개하고 일본이 타이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긴밀한 경제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런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진다면
5.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중국 이외의 국가를 공격하는 기지로 쓰지 않으며 극동에서의 평화가 확립되는 즉시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한다.
6. 일본은 필리핀의 중립을 보장한다.
는 내용이었다.
고노에 수상의 설명을 들은 히로히토 천황은 제국국책수행요령이 외교보다는 전쟁에 중점을 두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상은 제1항과 제2항의 순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외교적 노력을 다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전쟁을 불사한다는 의미라고 대답했다.
천황이 다음날의 연석회의에서 참모총장과 군령부총장에게도 그런 뜻이 맞는지 물어보겠다고 하자 고노에 수상은 지금 불러서 물어보라고 조언했다.
그리하여 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 장군과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제독이 불려와 천황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고 수상과 같은 취지로 대답했다.
천황은 이때 양 총장에게 남방작전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었는데 상륙작전시 일기가 불순할 때의 대비라든가 얼마 전의 규슈기동훈련에서 비행기의 공습으로 함정 몇 척이 좌초되었던 일을 지적하면서 대응책을 묻는 등 상당히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천황은 스기야마 참모총장에게 대미 전쟁을 얼마 만에 끝낼 수 있냐고 물었다.
스기야마 총장이 3개월이면 끝낼 수 있다고 대답하자 천황은 언성을 높였다.
천황은 중일전쟁을 결의할 당시 육상이었던 스기야마가 1개월 내로 끝내겠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면서 중일전쟁은 4년이나 지속되고 있다고 질책했다.
스기야마 총장이 쩔쩔매면서 중국이 워낙 넓어서 기동이나 보급이 예정대로 되지 않았다고 변명하자 천황은 중국이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은데 무슨 근거로 3개월로 예상하느냐며 몰아붙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는 스기야마 참모총장을 대신하여 나가노 군령부총장이 천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그냥 두면 반드시 죽을 병에 걸린 환자와 같습니다. 수술은 위험하지만 성공하면 환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수술의 단안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다음날 열린 대본영-정부 연락회의는 히로히토 천황, 고노에 수상, 도조 육상, 오이카와 해상, 스기야마 참모총장, 나가노 군령부 총장, 하라 요시미치 추밀원 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에 긴장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고노에 수상의 모두 발언에 이어 나가노 군령부총장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전쟁 준비를 위하여 개전 결의를 빨리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어서 스기야마 참모총장이 일어나서 나가노 군령부총장의 발언을 지지했다.
이때 히로히토 천황이 외교와 전쟁의 우선순위 문제를 다시 꺼냈다.
어전회의에서 천황을 대변하는 하라 추밀원 의장이 전날 천황이 한 것과 같은 질문을 정부와 대본영에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부를 대표하여 오이카와 해상이 외교에 주력하고 외교가 실패하면 개전한다는 뜻이라고 답변했으며 고노에 수상도 같은 취지로 발언했으나 대본영을 대표하는 참모총장과 군령부총장은 발언하지 않았다.
그러자 천황이 관례를 깨고 개입하여 대본영도 답변하라면서 언성을 높였고 이어서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할아버지인 메이지 천황이 지은 시 한 수를 읽었다.
"사해에 흩어져 있는 우리 모두는 형제인데
바람과 물결은 왜 이리도 거센가!"
히로히토 천황은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이 시를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동은 숙연해졌으며 도조 육상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잠시 후 양 총장이 일어나 대본영 또한 해상의 발언에 동의한다고 말했으나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회의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제국국책수행요령' 을 채택한 후 끝났다.
미국과의 전쟁을 결의한 역사적인 9월 6일의 어전회의에서 히로히토 천황이 보인 행동은 전쟁에 반대하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자 마이클 몽고메리는 히로히토 천황이 언급한 평화는 서구의 개념과 달리 일본 지배 하의 평화, 즉 팔굉일우를 말하며 히로히토 천황이 할아버지인 메이지 천황의 시를 인용한 것은 아시아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에 순응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개탄과 좌절감의 발로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Hirohito Behind the Myth) 의 저자인 에드워드 베르는 히로히토 천황이 패전에 대비하여 전쟁에 반대했다는 증거를 남겨 여차하면 책임을 떠넘기려는 포석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히로히토 천황은 9월 6일의 어전 회의 이후 개전시까지 전쟁을 막으려는 노력을 보여 주지 않았다.
12월 8일을 개전일로 정한 11월 5일의 어전회의나 외교 교섭을 실패로 규정하고 대미 개전을 확정한 12월 1일의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아무런 이의 제기도 없이 회의 결과를 받아들였다.
(히로히토 천황.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제 고노에 수상에게는 전쟁을 막기 위하여 10월 상순까지 약 6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연석회의가 10월 상순까지 6주라는 기한을 설정한 이유는 물론 석유 때문이었다.
일본의 원유 비축량은 1941년 4월 1일 현재 2,000 만 배럴이 넘었지만 9월30일에는 약 1,500 만 배럴로 떨어졌다.
각종 정제유의 재고는 비축 중이던 원유를 정제한 물량 덕분에 소폭 증가했지만 원유가 떨어지면 정제유도 곧 바닥날 것이었다.
외교관들이 미국을 설득하여 석유 수입이 재개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으나 그렇지 못하면 일본은 석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
다급해진 고노에 수상은 어전회의 당일인 9월 6일 저녁에 그루 대사를 초청해 3시간 동안 저녁 식사를 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간곡히 요청했다.
고노에 수상은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시한 4개 전제조건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후 고노에 수상은 9월 내내 정상회담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9월 28일, 노무라 대사는 국무성에 정상회담을 촉구하는 고노에 수상의 친서를 전달했다.
고노에 수상은 친서에서 정상회담에 육군 대장과 해군 대장도 동행할 것이므로 합의 사항을 군부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과 대표단은 예복까지 포함하여 준비를 마쳤고 타고갈 배도 대기하고 있으니 미국 측에서 시간과 장소만 지정하면 어디든 당장 달려가겠다고 적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은 고노에 수상에게 주어진 마감 시한에 대해 몰랐으나 그가 서두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불행하게도 국무성은 고노에 수상을 믿지 못했다.
고노에 수상은 1937년에 제1차 고노에 내각을 이끌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당시 고노에 내각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했다.
또한 고노에는 일본의 야당들을 말살하여 대정익찬회로 통합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국무성은 일본이 정상회담의 합의 사항을 멋대로 해석하여 침략을 정당화하는데 써먹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걸 막고자 루스벨트 대통령이 회담 석상에서 표현 하나하나를 따지면서 깐깐하게 굴면 회담은 결렬될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미국이 평화를 논의하는 회담 테이블을 먼저 걷어찼다고 선전할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경우였다.
오늘날에는 고노에 수상이 진심이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으며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면 교역 재개를 조건으로 중국에서의 철군에 동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에서의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고노에 수상이 중국에서 일본군을 실제로 철병시킬 수 있었으리라고 보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만일 철군을 시도했다면 십중팔구 군부에 의하여 내각이 붕괴되었을 것이며 수상 자신은 암살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고노에 수상을 불신하던 헐 국무장관은 9월 28일의 친서에 대하여 10월 2일 노무라 대사에게 강경하게 대답했다.
그는 노무라 대사에게 정상회담에 앞서 일본이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공격적인 정책을 폐기하고 평화 정책을 채택할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clear-cut evidence)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 10월 상순이 지나갔다.
1941년 10월 12일에 고노에 수상은 도조 육상, 오이카와 해상, 도요다 외상 등과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도요다 외상은 도조 육상에게 중국에서의 철병 없이는 외교적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도조 육상은 철병 요구를 거부했으며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기한 내에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니 전쟁을 결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노에 수상은 전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자신은 전쟁을 결의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도조 육상은 어찌 천황 앞에서 확정한 어전회의의 결론을 뒤집는 불충한 말을 하느냐면서 자신이 없으면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소리를 꽥 지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이틀 후 고노에 수상은 마지막 시도로 도조 육상과 단둘이 만나 담판을 벌였다.
수상은 미국과의 전쟁이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한 후 외교적 해결을 위하여 중국에서의 철병을 요청했다.
도조 육상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또다른 요구를 들이밀 것이라며 중국에서 철병하면 육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체면이 깎인다는 점을 들어 거부했다.
도조 육상은 덧붙여서 자신은 일본이 미국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제 고노에 수상에게는 사임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고노에 내각은 1941년 10월 16일에 붕괴했고 이틀후인 18일에 도조 내각이 출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