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해 해전(17)-ABDACOM 해체
17. ABDACOM 해체
바둥해협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미국구축함 스튜어트는 1942년 2월 20일 정오에 수라바야에 입항했고 저녁에는 역시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 경순양함 트롬프가 입항했다. 5인치 포탄 11발을 맞은 트롬프의 피해는 심각하여 자바에서 수리할 수 없었으므로 호주로 가야만 했다. 이로써 ABDAFLOAT는 보이시, 마블헤드에 이어 다시 순양함 1척을 잃었다. 1942년 5월에 수리를 마친 트롬프는 맥아더 휘하에서 일본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네덜란드 경순양함 트롬프.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Tromp_(1937)
스튜어트의 피해는 가벼운 편이었으므로 수라바야의 부유선거 2개 중에서 15,000톤짜리 선거에서 수리하기로 했다. 구축함이 들어서자 부유선거가 20일 오후 4시 5분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10분 만인 오후 4시 15분에 스튜어트는 선거 안에서 쓰러졌다. 사관실에서 함정 수리에 대해 논의하던 빈포드 중령과 장교들은 배가 갑자기 기울어지자 벽으로 넘어졌다가 혼비백산하여 밖으로 뛰쳐나왔으며 침대에서 자고 있던 수병들은 영문도 모르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스튜어트는 왼쪽으로 37도 기울면서 부유선거에 세차게 부딪혔는데 용골을 받쳐야 할 용골반목(keel block)의 설치가 잘못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불명이다. 일부는 적의 지시에 따른 사보타주를 의심했으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용골반목을 설치한 인원들이 구축함을 다루어 본 경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스튜어트가 들어간 부유선거는 민간용이었으며 대체로 상선을 취급했는데 상선의 용골은 구축함보다 평평하다. 물론 미해군은 스튜어트의 용골반목 설치방법을 포함한 상세한 매뉴얼을 전달했다. 아마 매뉴얼이 현장에 도달하지 않았거나 도달했더라도 현장에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잘못을 바로잡아야할 관리감독 체계도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튜어트의 피해는 해전에서 일본군의 포탄에 맞은 것보다 훨씬 심했다. 왼쪽 프로펠러 샤프트가 구부러지면서 기관실에 파고 들었고 쓰러지는 충격으로 보일러가 터졌으며 연료탱크도 벌어져서 중유가 줄줄 샜다.
수리에는 최소한 3주가 걸린다는 진단이 나왔는데 자바에는 부품이 없었다. 승조원들은 물이 새지 않도록 땜질만 해주면 1개의 프로펠러만으로 호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틀 후인 22일 오후 1시 30분에 글래스포드 제독은 스튜어트를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자바를 침공할 병력을 태운 일본선단이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리에 최소한 3주가 걸리는 함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튜어트의 승조원들은 소중한 자산이었으며 이들은 패럿, 필즈베리, 그리고 존D에드워즈로 분산배치되었다. 빈포드 중령은 어뢰가 남아있던 존D에드워즈에 사령기를 옮겨 달았다. 어뢰를 모두 소진하고 포탄도 많이 사용한 패럿과 필즈베리는 일단 칠라찹으로 갔다가 호주로 철수할 예정이었다.
부유선거에 방치된 스튜어트는 2월 24일에 일본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맞아 추가로 피해를 입었으며 수라바야 함락 당일인 3월 2일에 부유선거와 함께 처분되어 가라앉았다. 일본군은 1943년 2월에 스튜어트를 건져서 고친 후에 3인치 주포 2문을 달아 동년 9월 20일에 제102호초계정으로 취역시켰다. 제102호초계정은 주로 남서태평양에서 호위임무에 종사하다가 구레에서 종전을 맞았다. 전후에 제102호초계정은 미해군에 반환되었다가 1946년 5월 24일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서 표적함으로 최후를 맞았다.
클렘슨급 구축함 DD-224 스튜어트. https://en.wikipedia.org/wiki/USS_Stewart_(DD-224)#World_War_II
1942년 2월 15일의 싱가포르 함락은 ABDACOM의 해체를 불러왔다. 동남아시아 방어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던 싱가포르를 잃은 영국은 더이상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처칠 수상은 싱가포르 함락 직후 웨이벌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자바의 포기는 고려할 수 없으며 현지의 모든 군대는 마지막까지 싸워야한다고 명령했고 2월 20일에는 연합참모본부가 웨이벌 장군에게 비슷환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하지만 웨이벌 장군은 빈말이라도 증원을 해주겠다는 약속 한마디도 없이 공허하게 최후까지 싸우라고만 명령하는 전문에 담긴 고뇌와 속뜻을 알고 있었다. 다음날인 2월 21일에 연합참모본부에 보낸 답신에서 웨이벌 장군은 ABDA 지역의 방어는 실패했으며 자바의 함락이 멀지 않았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는 ABDACOM을 해체하고 네덜란드군을 포함하여 자바에 있는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자고 제안했다.
웨이벌 장군의 제안은 군사적으로는 타당했으나 네덜란드인의 심정을 무시한 것이었다. 본토가 독일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현지의 네덜란드인들은 동인도제도를 조국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ABDARMY사령관 텔 푸어텐 중장은 동인도제도에서 태어나 모든 경력을 현지의 식민지군에서 쌓았고 ABDAFLOAT사령관 헬프리히 제독 또한 동인도제도 출신이었다. 이건 네덜란드군 전체가 공유하는 정서로 이들은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죽거나 포로수용소에 갈 망정 동인도제도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헬프리히 제독은 자바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웨이벌 장군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순다해협과 발리해협이 열려있는만큼 영국과 미국이 수송 과정에서의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함정, 비행기, 야포, 그리고 병력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자바로 보내준다면 충분히 일본군을 막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웨이벌 장군은 동의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영국과 미국이 헬프리히 제독의 주장을 받아들여도 자바 함락을 저지할만큼 강력한 증원군을 시한 내로 파견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싱가포르를 지키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처절하게 노력했던 것에 비하면 영국과 미국이 자바를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싱가포르로 가는 선단호송을 위하여 함정과 항공기를 차출함으로써 동인도제도를 침공하는 일본선단을 공격할 기회를 포기해야 했던 네덜란드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분노에 찬 네덜란드인들은 자바 방어가 불가능하니 병력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웨이벌 장군의 해임을 요구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웨이벌 장군과 미국을 대표하는 ABDACOM부사령관 브렛 장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총독인 알리디우스 차르다 반 스타켄보르 스타초워와 일련의 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서로의 입장을 조율한 결론이 나왔다. 웨이벌 장군의 사임과 더불어 ABDACOM은 2월 25일에 해체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령부의 구조는 그대로 남았으며 사령관만 네덜란드군으로 교체되었다. 자바에 있던 연합군 병력은 모두 네덜란드군의 지휘 아래 마지막까지 싸우기로 했으나 미국이 제공하기로 한 P-40전투기 59대를 제외한 증원은 없을 것이었다. 웨이벌 장군은 25일 저녁에 LB-30을 타고 실론으로 떠났다.
미국은 비행가능한 상태의 P-40전투기 32대를 수상기모함 랭글리에 실어 조종사와 함께 자바로 파견했으며 포장된 P-40전투기 27대를 조종사 및 50구경 총탄 750,000발과 함께 수송선 시위치에 실어 역시 자바로 보냈다.
글래스포드 제독은 헬프리히 제독에게 미함정들은 마지막까지 네덜란드해군과 행동을 같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하려면 이제 행동해야 할 때였으므로 동시에 철수준비도 시작했다. 부사령관 퍼넬 제독이 잠수함 기지 건설을 위하여 호주의 엑스마우스 만에 파견되었으며 윌크스 대령은 잠수모함을 자바로부터 철수시켰다.
공식적으로 ABDACOM은 해체되었지만 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ABARMY는 이름도 바뀌지 않았으며 사령관 텔 푸어텐 중장은 ABDA지역총사령관이라는 이름으로 웨이벌 장군의 직위를 겸임했다.
ABDAIR는 자바항공사령부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네덜란드 공군의 루돌프 헨드릭 반 오옌 소장이 사령관을 맡았다. 오옌 장군은 휘하 세력을 동부전대와 서부전대로 나누었다.
헬프리히 제독의 ABDAFLOAT는 해상부대사령부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냥 ABDAFLOAT로 부른다. 영국해군의 팔리서 제독은 계속하여 헬프리히 제독의 참모장을 맡았다. 글래스포드 제독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헬프리히 제독의 지휘 아래에서 자바의 미국함정들을 통솔했다.
1942년 2월 18일 오전 10시에 서부자바공략부대가 베트남의 캄란만을 떠났다. 56척의 수송선에는 제16군사령부, 제2사단, 그리고 보병제230연대가 실려 있었다. 호위를 맡은 제3호위대는 경순양함 나토리와 구축함 10척, 기타 함정 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후 남견함대 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기함인 중순양함 초카이가 합세했다. 21일에는 경순양함 유라, 제11 및 제12구축대, 제1소해대, 수상기모함 가미카와마루와 급유함 쓰루미를 비롯한 함정들이 제3호위대에 가세했으며 구리타 다케오 소장의 제7전대(모가미, 구마노, 미쿠마, 스즈야)와 제19구축대도 24일부터 선단호위를 지원했다. 항공지원은 제1항공부대(수상기모함 가미카와마루 및 산요마루, 제35호초계정, 제91구잠대, 어선 2척)가 담당했으며 27일에는 제4항공전대(경항공모함 류조, 구축함 시키나미)도 가세했다.
다음날인 2월 19일 오전 8시에는 동부자바공략부대가 술루제도의 홀로섬을 출발했다. 41척의 수송선에는 제41사단이 실려 있었다. 호위를 맡은 제1호위대는 니시무라 쇼지 소장의 제4수뢰전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세력은 경순양함 나카, 제2구축대(무라사메, 사미다레, 하루사메, 유다치), 제9구축대(아사구모, 미네구모), 소해정 5척, 구잠정 5척, 기타 함정 3척이었다. 22일에 다카기 다케오 소장의 제5전대(나치, 하구로)와 이카즈치, 아케보노로 이루어진 동방지원대가 호위에 가세했다. 24일에는 다나카 라이조 소장의 제2수뢰전대(진쓰, 제16구축대- 아마츠카제, 유키카제, 도키츠카제, 하츠카제)와 제24구축대(야마카제, 가와카제) 및 제7구축대제1소대(우시오, 사자나미)가 제3함대 사령장관인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으로부터 자바해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항공함대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의 기동부대는 자바 남쪽해상에서 자바로 향하는 증원선단이나 자바를 탈출하는 연합군 함정을 격침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동부대는 나구모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제2항공전대(히류, 소류), 미카와 군이치 중장의 제3전대(공고, 하루나, 히에이, 기리시마), 아베 히로아키 소장의 제8전대(도네, 치쿠마), 그리고 오모리 센타로 소장의 제1수뢰전대(아부쿠마, 제17구축대, 제18구축대제1소대, 제4구축대제2소대, 제27구축대제2소대, 제15구축대제1소대, 아키구모)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맞서 헬프리히 제독이 동원할 수 있는 함대는 훨씬 빈약했다. 콜린스 제독의 영국함대는 탄종 프리옥을 중심으로 주로 선단호송에 종사하고 있었다. 영국함대는 중순양함 엑서터, 경순양함 호바트, 드래건, 다나에, 퍼스, 구축함 일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 테네도스, 스카우트, 그리고 유일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버트센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에버트센은 실전경험이 없었다. 수라바야에는 도먼 제독의 함대가 있었으며 그 세력은 네덜란드 경순양함 드루이터와 자바, 구축함 코테네어, 윗더위드, 방커트 그리고 미국구축함 존D에드워즈였다. 칠라찹에는 미국함대가 있었으며 그 세력은 중순양함 휴스턴, 구축함 알덴, 존D포드, 폴존스, 포프, 휘플, 엣솔이었다.
미국구축함 존D포드와 포프는 크리스마스섬 부근에서 구축모함 블랙호크를 만나 블랙호크가 보유한 마지막 어뢰 17발을 받았다. 이후 블랙호크는 어뢰를 소진하고 방카 폭격에서 피해를 입어 속력이 떨어진 미국구축함 바커와 벌머의 호위를 받으면서 호주로 향했다.
전투가능한 연합군 함정들은 대부분 크고작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순양함 엑서터는 오버홀이 시급했으며 수상정찰기를 잃었고 1번 포탑의 양탄장치에 문제가 있었다. 휴스턴은 3번 포탑을 잃었다. 경순양함 퍼스는 방금 도착하여 현지 사정에 어두웠다. 구축함 엣솔은 얕은 바다에 떨어뜨린 폭뢰에 피해를 입어 속력이 떨어졌다. 휘플은 드루이터와 충돌하면서 함수에 피해를 입었는데 완벽하게 수리할 수가 없어서 역시 속력이 떨어졌다. 다른 미국구축함들도 대부분 축전지가 새고 기계류는 낡았으며 배바닥에는 따개비가 잔뜩 붙어 있었다. 코테네어는 좌초할 때 손상을 입은 보일러가 완전히 수리되지 않아서 조금씩 샜다. 오버홀을 방금 마친 윗더위드는 좌초되어 버려진 반겐트의 승조원이 운용했는데 비록 두척의 배가 자매함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승조원들이 배에 대해서 잘 몰랐다. 드래건, 다나에, 스카우트, 테네도스는 미국구축함만큼이나 낡았으며 타넷, 주피터, 인카운터는 기관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연합군 함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연료부족이었다. 동인도제도는 손꼽히는 산유국이었으나 이제 일본군이 대부분의 유전을 차지했다. 자바에도 유전이 있었으나 직원들이 도망쳐 버렸다. 수라바야와 탄종프리옥에 연료가 있었으나 어느 쪽도 전체 함대에 공급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함대는 분산해야 했다.
1942년 2월 21일에 헬프리히 제독은 함대를 재편했다. 탄종프리옥에 있는 함정들은 서부타격부대가 되었으며 영국해군의 존 콜린스 준장이 사령관을 맡았다.수라바야와 칠라찹에 있던 함정들은 동부타격부대가 되었으며 도먼 제독이 지휘했다. 이어서 기뢰부설함이 순다해협과 수라바야로 들어오는 입구인 마두라섬 근해에 기뢰를 깔았다. 이때 헬프리히 제독은 일본선단의 접근 예상 경로에 기뢰를 집중적으로 부설하지 않고 마두라섬 근해 전체에 걸쳐 기뢰를 넓게 흩뿌림으로써 효과를 반감시켰다.
일본선단이 다가오자 헬프리히 제독은 잠수함 부대에 압박을 가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휘하의 잠수함부대를 무자비하게 몰아붙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일본순양함을 만나고도 공격하지 못한 네덜란드 잠수함장은 귀환하자마자 해임당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네덜란드 잠수함 O-19, K-Ⅷ, K-Ⅹ, 영국잠수함 트루언트, 그리고 미국잠수함 S-37과 S-38에게 상륙예상지점인 마두라 근해로 달려오라고 명령했다. 상륙해안에서 적을 공격하는 방식은 항해 중인 적의 선단을 주로 노리는 미국잠수함의 운용방식과는 달랐으므로 미국잠수함부대사령관 윌크스 대령은 헬프리히 제독에게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윌크스 대령이 미국잠수함들은 멀리 나가있어 시간 내로 마두라 근해에 도착할 수 없다고 말하자 헬프리히 제독은 수상항주하면 된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윌크스 대령이 적이 제공권을 장악한 해역에서 수상항주는 자살행위라고 항의하자 헬프리히 제독은 그렇게 몸을 사리니까 미국잠수함들의 전과가 형편없는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윌크스 대령은 잠수함장들에게 헬프리히 제독의 명령을 전달하면서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수상항주를 할 것인지 함의 안전을 위하여 수중항해를 할 것인지의 선택은 함장에게 맡겼다.
일본기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하여 헬프리히 제독은 경순양함 자바를 사용하여 야간에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을 포격할 계획을 세웠다. 구축함 방커트가 비행장 상공에 조명탄을 쏘아주고 폭격기 1대가 탄착관측을 맡을 것이었다. 이러한 포격은 일본군의 덴파사르 비행장 사용을 당분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2월 24일에 일본기가 수라바야를 공습하여 방커트에게 지근탄 1발을 가했으며 함미에 구멍이 뚫린 방커트는 부유선거에 들어가 수리해야만 했다. 이로써 포격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또 1척의 구축함을 잃었는데 특히 방커트는 승조원의 숙련도가 뛰어나고 실전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큰 손실이었다.
이제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요격할 방법은 수상함대를 사용하는 길 뿐이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항공기는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과 수마트라의 팔렘방 비행장을 공격하는데 투입되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제10초계비행단에서 살아남은 3대의 카탈리나가 일본선단의 접근 상황을 감시하고 보고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휘하 함정들을 모아 더 가까이 접근한 동부자바공략부대를 먼저 공격한 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서부자바공략부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성공할 확률이 높지는 않았으나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서부타격부대의 주력인 영국중순양함 엑서터, 경순양함 호바트, 호주경순양함 퍼스, 구축함 엘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는 수라바야로 와서 동부타격부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칠라찹에 있던 미국함정들도 수라바야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의 합류와 더불어 동부타격부대는 연합타격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엑서터의 함장 올리버 고든 대령은 구할 수 있는 것은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수라바야로 떠나기에 앞서 탄종프리옥에서 항해가 가능한 모든 상선을 모아 호송선단을 편성한 후 서쪽으로 80km 까지 호위했다. 엑서터가 돌아간 후 상선들은 호위없이 항해하여 실론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사지에서 벗어났다.
칠라찹에 있던 휴스턴은 구축함 알덴, 폴존스, 존D포드, 포프와 함께 2월 24일에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휴스턴이 입항하자마자 일본군이 수라바야에 공습을 가했다. 일본기는 방커트와 부유선거에 누워있던 스튜어트에 피해를 입히고 고무를 가득 실은 상선 코타라자에 폭탄을 명중시켜 맹렬한 화재를 일으켰다. 이제 수라바야는 일본기의 등쌀에 함정 수리는 커녕 낮에는 함정에 급유도 하기 힘들었다.
일본기가 공습을 가하는 도중에도 헬프리히 제독은 참모장인 영국의 팔리서 제독과 미해군을 대표하는 글래스포드 제독과 함께 연합타격부대의 지휘관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동부타격부대사령관인 도먼 제독이 연합타격부대의 사령관을 맡는 것이 무난했으나 문제는 바둥해협 해전의 패배 이후 동맹국 정부와 해군이 도먼 제독의 능력을 의심하며 싫어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바둥해협 해전에 같이 참가했던 미해군의 거부감이 심하여 글래스포드 제독은 도먼 제독 대신 서부타격부대사령관인 영국해군의 존 콜린스 준장이 연합타격부대사령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바에서 발을 빼고 싶어하는 영국의 장성이 네덜란드 장성을 제치고 연합타격부대의 사령관을 맡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적을 눈앞에 두고 사령관을 교체하는 것은 위험했다. 결국 연합타격부대의 지휘권은 도먼 제독이 쥐게 되었다.
한편 핵심 함정들이 수라바야로 불려가면서 서부타격부대는 영국경순양함 호바트, 드래건, 다나에, 구축함 스카우트, 테네도스, 그리고 네덜란드 구축함 에버트센으로 쪼그라들었다. 드래건, 다나에, 스카우트, 테네도스는 미국구축함 못지 않은 구식함이었고 에버트센은 승조원의 경험이 일천했다. 이 함정들은 쓸모가 없어서 수라바야로 부르지 않은 것이었다. 유일하게 쓸만한 호바트는 원래 부름을 받았으나 급유를 받던 도중 유조선이 일본기가 떨어뜨린 폭탄을 맞는 바람에 급유가 늦어져 서부타격부대에 잔류하게 되었다. 서부타격부대사령관 존 콜린스 준장은 자신의 함대에 대하여 "타격을 가할 능력이 없으니 (타격부대는) 잘못된 이름" 이라고 자조했다.
2월 26일에 영국항공기가 남하 중인 서부자바공략부대를 발견하자 헬프리히 제독은 서부타격부대에게 북상하여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오자와 제독이 지휘하는 서부자바공략부대의 호위세력은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대 4개, 수상기모함 2척에 달했으니 경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으로 이루어진 서부타격부대는 이빨자국도 내지 못하고 몰살당할 수준의 전력차였다.
호바트의 함장 해리 하우든 대령이 이끄는 서부타격부대는 탄종프리옥을 떠나 북상하여 밤새 수색했으나 일본선단을 만나지 못하고 27일 오후 2시 20분에 탄종프리옥으로 돌아와 급유를 받았다. 서부타격부대가 살아남은 이유는 일본군의 착각 덕분이었다.
2월 27일 오전 9시 35분에 구마노의 정찰기가 수색 중인 서부타격부대를 발견했는데 호바트를 알래스카급같은 대형순양함으로 착각하여 "대형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으로 보고했다. 당시 구마노가 소속된 제7전대는 서부타격부대로부터 북동쪽으로 16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제7전대사령관 구리타 다케오 소장은 중순양함 킬러인 대형순양함이 포함된 적함대를 대낮에 중순양함 4척으로 이루어진 제7전대만으로 맞서기에는 다소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65km 떨어져 있던 하라 겐자부로 소장의 제5수뢰전대를 불렀다. 하라 소장은 서부 자바 상륙을 하루 연기하고 제5구축대의 호위 아래 수송선단을 북쪽으로 대피시킨 다음 경순양함 나토리, 제11 및 제12구축대를 이끌고 제7전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달려갔다. 그동안 일본항공기 8대가 서부타격부대를 공격했으나 호바트가 가벼운 피해를 입는 선에서 그쳤다.
광대한 해상에서 사전 계획없이 고속으로 기동하는 두 함대가 만나는데는 뜻밖에 시간이 많이 걸려 제7전대와 제5수뢰전대가 만난 것은 27일 오후 3시가 되어서였다. 구리타 소장은 제5수뢰전대가 합류하자 전속력으로 남하를 시작했으나 그때는 이미 서부타격부대가 탄종프리옥으로 철수한 다음이었다. 게다가 급하게 달려온 제5수뢰전대 소속 구축함들의 연료가 부족해지자 구리타 소장은 전투를 단념하고 다시 북상했다. 이로써 서부타격부대는 살아남았다.
서부타격부대사령관 콜린스 준장은 부하들이 전멸을 면한 것은 순전히 행운 덕분이며 두번 다시 그런 행운을 바라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헬프리히 제독의 참모장인 팔리서 중장을 졸라서 주저하는 헬프리히 제독으로부터 만일 서부타격부대가 또다시 일본군과 접촉하는데 실패하면 자바를 떠나도 좋다는 양보를 얻어내었다. 일단 헬프리히 제독이 물러서자 콜린스 준장은 하우든 대령에게 다시 해상에 나가 수색하되 28일 오전 4시 30분까지 적과 접촉하지 못하면 순다 해협을 거쳐 실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콜린스 준장의 명령은 가장 최근에 들어온 일본선단의 위치를 감안하여 서부타격부대가 일본군을 만날 수 없게끔 신중하게 계산한 것이었다. 그의 계산대로 서부타격부대는 일본군을 만나지 못하고 순다해협을 통하여 실론으로 철수함으로써 사지에서 벗어났다. 다만 네덜란드구축함 에버트센은 폭풍우 속에서 본대와 헤어져 탄종프리옥으로 돌아옴으로써 탈출할 기회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