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함락(66)-루손군 항복
66. 루손군 항복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이 항복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비친 것은 4월 7일이었다. 이날 오후에 그는 자신의 참모장 아널드 풍크 장군을 코레히도르에 보내어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루손군이 곧 항복해야할지 모른다고 전했다. 웨인라이트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책상에는 맥아더의 명령문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필리핀미군사령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항복할 권한이 없으며 사령부가 사라질 경우는 오로지 전장에서 적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될 경우뿐이다."
라고 적혀 있었다. 맥아더는 이런 입장을 마셜 참모총장에게도 밝혔는데 마셜은 가혹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명확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웨인라이트는 바탄의 상황을 알면서도 항복을 허락할 수 없었다.
킹 소장은 딜레마에 빠졌다. 7일과 8일의 상황전개에 따라 킹 소장은 명령을 어기고 항복하든지 아니면 수만명의 부하들을 아무 의미없는 개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웨인라이트도 킹의 고민을 이해했으며 그가 항복하기를 원했다. 종전 이후 펴낸 회고록에서 웨인라이트는 당시 항복을 불허했던 이유는 자신에게 항복을 승인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며 킹 소장이 2-3일 내로 항복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실제로 8일 오후에 킹 소장이 전화를 걸어와 바탄에서 코레히도르로 탈출시키기를 원하는 부대가 있냐고 묻자 웨인라이트는 군말없이 제45보병연대(PS)를 지목했다.
8일 오후가 되자 킹 소장은 항복에 대비한 준비를 시작했다. 지휘관들은 차량과 휘발유를 제외한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파괴할 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31보병연대(US)와 제45보병연대(PS)를 비롯한 몇몇 부대는 코레히도르로 탈출할 수 있도록 루손군 사령부의 지휘에서 벗어났다.
8일 저녁에 알랑간선이 무너지자 킹 소장은 세이지 대령의 대공포여단을 캅카벤 북쪽에 전개했으나 추가 병력의 배치는 불가능했다. 이 빈약한 방어선이 뚫리면 일본군이 환자와 패잔병으로 가득한 지역에 바로 뛰어들 것이었다. 12,000명의 환자가 입원하고 있는 야전병원은 벌써 일본군의 경포 사정거리 내에 들어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킹 소장은 8일 밤 11시에 루손군 사령부에서 참모 및 지휘관들과 회의를 열었다. 전술적 상황을 검토한 참석자들은 미-필리핀군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지 일본군이 다음날 오후까지 마리벨스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9일 새벽 0시에 킹 소장은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항복은 명백하게 명령에 반하는 것이었으며 킹 소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참모들에게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미국에 돌아가더라도 군사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웨인라이트가 책임에 엮이지 않도록 항복결정을 알리지 않았다.
일본군을 찾아 항복의사를 전달하고 조건을 교섭하는 어렵고 위험한 일에 총각인 에버렛 윌리엄스 대령과 마셜 허트 소령이 자원했다. 킹 소장은 윌리엄스 대령에게 전투 중지를 원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주었다.
윌리엄스와 허트가 출발준비를 하는 동안 루손군 휘하 부대로 항복사실을 전파해야 했다. 제2군단장 파커 장군은 회의에 참석했으므로 따로 전할 필요가 없었다. 제1군단장 존스 장군에게는 전화로 통보했다. 라마오강에 주둔 중이던 블루멜 장군에게는 파커 장군이 전화로 알려 주었다. 그 이하 제대는 대부분 전령이 달려가 전해야 했다. 미-필리핀군의 말단에까지 항복사실이 알려진 것은 날이 밝은 이후였다.
파괴활동은 항복이 결정되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마리벨스의 해군은 웨인라이트의 명령에 따라 8일 오후 10시 30분부터 폭파작업을 시작했다. 탄약창이 폭발하면서 커다란 불꽃이 밤하늘을 밝혔고 듀이 건선거, 잠수모함 카노푸스, 예인선 나파는 침몰시켰다.
바탄의 보급소장들은 8일 오후에 이미 장비와 보급품에 대한 폭파준비를 마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폭파명령은 9일 0시에 내려왔으나 실제로는 8일 저녁 9시부터 폭파가 시작되었고 자정이 넘어가자 본격적으로 탄약과 폭약에 대한 폭파가 시작되었다. 탄약창 부근에는 야전병원이 있었으며 이외에도 철수해 온 인원이 많아 위험했으나 탄약을 옮기거나 인원을 소개할 시간이 없었다. 병사들은 탄약고의 문을 열고 소총 사격을 가하거나 화약가루로 도화선을 만든 다음 불을 붙였다. 자정부터 시작된 폭발은 새벽 2시에 TNT 창고를 폭파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많은 병사들은 근처에서 탄약고가 폭발하자 기겁하여 그 자리에 엎드렸다. 루손군 사령부도 피해를 입었다. 60m x 6m 크기의 허술한 건물이었던 사령부는 폭발에 휩쓸려 가구가 날아다녔으며 지붕이 사라졌다. 사상자가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코레히도르로 탈출할 인원들은 서둘러 바지선이 기다리는 마리벨스로 집결했다. 웨인라이트가 요구했던 제45보병연대(PS)는 철수명령을 받았을 때 판틴간강에 있었는데 마리벨스까지 남하하는데 시간이 걸려 결국 바탄을 벗어나지 못했다. 야전병원의 간호사들도 탈출대상이었는데 제2야전병원의 간호사들은 아슬아슬하게 탈출했다. 간호사들은 간단한 소지품만 챙긴 채 트럭에 올라탔다. 트럭은 패잔병으로 가득한 동부도로를 달팽이 걸음으로 남하했는데 연속적인 탄약고의 폭발 때문에 남하가 더 늦어졌다. 동틀녘에 마리벨스에 도착했을 때는 바지선이 떠난 다음이었다. 보고를 받은 루손군 참모장 풍크 장군이 전화를 걸어 간호사들을 탈출시켜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자 코레히도르에서 모터보트 1척을 보내왔다. 간호사들을 태운 보트가 마리벨스 부두를 떠나자마자 일본기 1대가 나타나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간호사들은 무사히 코레히도르에 도착했다. 78,000명에 달하는 루손군의 병력 중 간호사 104명, 제31보병연대(US)의 생존자 300명, 제26기병연대의 생존자 일부, 해군, 그리고 필리핀육군 등 약 2,000명이 보트와 바지선을 타고 코레히도르로 탈출했다.
윌리엄스와 허트는 9일 새벽 3시에 루손군 사령부를 떠났다. 두 사람을 태운 지프는 동부도로에 나섰으나 길을 메우면서 남하하는 패잔병 때문에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지프에서 내려 걸어서 북상했다. 일선에서 3k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하자 패잔병의 행렬이 사라졌다. 이때 윌리엄스와 허트는 남하하던 지프를 세우고 올라탔다. 두 사람은 지프를 타고 북상하다가 약간의 전차, 2문의 75mm 자주포, 그리고 소수의 병력을 지휘하던 조셉 가날 중령의 부대를 만났다. 보병을 엄호하며 후퇴하던 가날부대가 최전선 부대였다.
새벽 5시 30분이 되자 가날부대도 남쪽으로 떠나버렸다. 지프에 탄 3명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다가 오전 6시 30분에 해가 뜨자 침대보를 막대기에 매단 백기를 들고 천천히 북쪽으로 전진했다. 30분쯤 북상하자 길옆에서 누군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3명 모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직감적으로 멈추라는 뜻임을 알아차린 운전병은 지프를 세웠다. 이어서 윌리엄스와 허트는 백기를 틀고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러자 길 양옆으로부터 착검한 30여명의 일본군이 뛰쳐 나와 둘러쌌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병사가 없었다. 잠시 후 일본군 장교가 도착했는데 그도 영어를 몰랐다. 윌리엄스 대령이 손짓발짓으로 일본군 사령관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자 장교는 지프에 올라타고 길을 안내했다. 이렇게 5km를 북상한 윌리엄스와 허트는 나가노 장군을 만나 킹 소장의 친서를 전했다. 나가노 장군은 전선에 가까운 농업시험장에서 킹 소장을 만나기로 합의하고 제14군 사령부에 보고했다. 이후 윌리엄스 대령은 나가노 장군의 사령부에 남고 허트 소령은 오전 9시에 루손군 사령부로 돌아와 킹 소장에게 보고했다.
이 시점에서 웨인라이트는 킹 소장이 항복 사절을 파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9일 새벽 3시에 그가 킹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킹 소장은 항복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바탄에서 건너온 루손군 작전장교 제시 트레이윅 중령이 오전 6시에 웨인라이트 장군을 만나 킹 소장이 항복사절을 파견했다고 말했다. 웨인라이트는 회고록에서 당시 충격을 받고 트레이윅 중령에게 다시 돌아가 킹 소장을 만류하라고 말한 다음 루손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실제로 킹 소장은 오전 9시가 되어서야 루손군 사령부를 떠났으며 코레히도르와 루손군 사령부 사이의 전화는 9일 오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오전 9시에 킹 소장은 부관인 웨이드 코트란 소령 및 아칠 티스델 소령, 작전참모 제임스 콜리어 대령, 그리고 안내를 맡은 허트 소령과 함께 루손군 사령부를 나섰다. 참모장 풍크 장군은 사령부에 남아 파괴작업을 마무리하고 항복을 준비했다.
킹 소장 일행은 2대의 지프에 분승하여 동부도로로 나섰다. 그 순간 일본기가 나타나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으나 일행은 일본기가 사라질 때까지 길옆에 숨어 기다려야 했다. 이후로도 일행은 몇 번이나 공습을 받았고 따라서 농업시험장까지 5km를 가는데 2시간이나 걸려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잠시 후 제14군의 제1과고급참모 나카야마 모토오 대좌가 번쩍거리는 캐딜락을 타고 도착했다. 킹 소장은 야외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카야마와 마주 앉았다.
(나카야마 대좌와 항복조건을 교섭하는 킹 소장. 미군장교는 좌로부터 에버렛 윌리엄스 대령, 에드워드 킹 소장, 웨이드 코트란 소령, 아칠 티스델 소령. 등을 보이고 앉은 사람이 나카야마 모토오 대좌. 오른쪽은 통역.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6.html P.465)
나카야마 대좌에게는 킹 소장과 항복조건을 교섭할 권한이 없었다. 혼마 중장은 웨인라이트 장군이 아니면 만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카야마를 보낸 것 뿐이었다. 따라서 교섭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나카야마는 킹 소장을 보자마자 당신이 웨인라이트 장군이냐고 물었고 킹 소장이 아니라고 하자 그럼 돌아가서 웨인라이트 장군을 데려오라고 말했다. 킹 소장은 바탄반도에 있는 미-필리핀군의 항복 조건을 교섭하려고 이곳에 왔으며 자신이 웨인라이트 장군을 이곳에 오게 만들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을 불러낼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나카야마 대좌는 회담을 중단하고 혼마 장군에게 보고했다.
혼마 장군은 원래 미-필리핀군이 조각조각 나뉘어 항복하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웨인라이트 장군의 항복만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으나 나카야마 대좌의 보고를 받고 마음을 바꾸었다. 당시 제14군사령부는 바탄의 미-필리핀군이 마리벨스산 부근의 진지에 틀어박혀 코레히도르와 연계하여 최후의 저항을 벌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럴 경우 코레히도르의 중포로부터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진지에 의지하여 싸우는 미-필리핀군을 제압하는데 막대한 희생이 따를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일단 캅카벤에서 마리벨스로 이어지는 동부도로가 코레히도르에서 쏘아대는 중포 사격에 노출되면 마리벨스산 진지를 공격하는 일본군에 대한 보급부터 지장을 받게 될 것이었다. 일본군으로서는 킹 소장의 항복으로 마리벨스산 진지를 공격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커다란 골칫거리를 공짜로 해결하는 셈이었다. 따라서 혼마 장군은 나카야마 대좌에게 킹 소장의 항복을 받아들이되 항복조건의 교섭은 불가하며 무조건 항복만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조건을 말해보라는 허락을 받은 킹 소장은 3가지 사안을 요청했다.
1. 병사들이 바탄반도를 떠날 때 미-필리핀군 장교의 인솔을 받을 수 있게 해줄 것
2. 환자, 부상자, 그리고 완전히 지친 병사들을 미-필리핀군의 자동차로 운반하는 것을 허용해 줄 것
3. 미-필리핀군을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전쟁포로로서 정당하게 대우해 줄 것
킹 소장의 말이 끝나자 나카야마 대좌는 담담한 목소리로 총사령관인 웨인라이트 장군만이 항복조건을 교섭할 권한이 있고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은 웨인라이트 휘하의 일개 부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 항복만이 허용된다고 말했다. 킹 소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항복 조건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다가 일본군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많은 부하들이 의미없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킹 소장이
"부하들을 잘 대우해 주겠지요?"
라고 묻자 나카야마는
"우리는 야만인이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오후 12시 30분에 킹 소장은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일본군은 항복문서를 만들지 않았고 킹 소장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카야마는 항복의 표시로 군도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킹 소장의 군도는 마닐라에 있었으므로 대신 권총을 내놓은 다음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루손군 사령부의 항복은 단일사령부에 의한 항복으로는 미군 역사상 최대 규모다.
콜리어 대령과 허트 소령은 일본군 장교와 함께 루손군 사령부로 돌아가서 풍크 장군에게 항복사실을 알렸다. 바탄반도의 모든 미-필리핀군은 동부도로에 와서 무기를 한데 모아놓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혼마 장군은 우발적인 충돌을 막기 위하여 나가노 장군에게 캅카벤 비행장까지만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바탄의 전투가 끝났다.
일본군은 포로를 잘 대우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항복 직후 굶주리고 지친 포로들은 바탄반도에서 샌페르난도까지 약 100km 에 달하는 거리를 물과 음식을 공급받지 못한 채 뙤약볕 아래를 걸어가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사망했다.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이라고 불리는 이 참사의 가장 큰 이유는 일본군이 예상되는 포로의 숫자를 너무 적게 잡은 것이었다. 일본군은 25,000명 정도로 추정했는데 실제로는 70,000명이 넘었으며 건강상태도 생각보다 훨씬 나빴다.
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일본군이 포로를 학대하고 학살을 일삼은 것도 사실이었다. 일본군은 판틴간강변에서 필리핀군의 장교와 부사관 400명을 참수했다. 걷다가 낙오된 포로들은 가차없이 살해당했으며 물을 달라고 애원하다가 살해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심심풀이로 포로를 참수하기도 했다.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사망한 포로의 숫자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미군은 500명 - 650명, 필리핀군은 5,000명 - 18,000명이다. 연합군은 전후 전범재판에서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혼마 장군을 사형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