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및 그 이전/필리핀 함락

필리핀 함락(59)-전투준비(1)

대사(PW) 2018. 6. 1. 16:00

59. 전투준비(1) - 미-필리핀군

1942년 2월 중순부터 시작된 휴지기 동안 바탄반도의 일본군과 미-필리핀군은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일본제14군 사령관 혼마 장군은 3월동안 새로 도착한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동시에 미-필리핀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하여 꼼꼼하게 공격계획을 세웠다.
방어측인 미-필리핀군은 휴지기를 이용하여 필리핀육군을 훈련시키고 방어선을 정비했다.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식량과 의약품이었지만 입수가 불가능했다. 결국 3월 말이 되자 미-필리핀군은 전투준비를 마쳤으나 병사들의 체력 약화 때문에 방어력은 오히려 약해졌다.

킹 소장이 지휘하는 루손군의 병력은 바탄반도의 남단에 몰려 있었다. 520㎢ 가 채 안되는 좁은 지역에 제1 및 제2필리핀군단, 루손군예비대, 지원사령부, 해안대공포연대 2개, 75mm 자주포대대 2개, 임시전차단, 공병 및 통신부대가 몰려 있었다. 너무 많은 병력이 좁은 지역에 몰려 있어 일본기가 실수로 폭탄을 떨어뜨려도 군사적으로 가치있는 표적에 맞을 정도였다.

루손군의 병력은 79,500명으로 3/4이 필리핀육군이었고 필리핀스카우트가 8,000명, 미군이 12,500명이었다. 이외에 6,000명의 현지주민과 20,000명의 피난민이 있었다.

필리핀육군사단은 9개였는데 인가 병력인 7,500명을 채운 것은 제71사단의 전투병력을 흡수한 스티븐스 장군의 제91사단 뿐이었다. 블루멜 장군의 제31사단이 6,400명으로 2번째로 많았으며 나머지 7개사단(제1, 제2, 제11, 제21, 제41, 제51 및 제71사단)은 모두 6,000명 이하였다. 특히 전투부대를 제91사단에 넘겨준 제71사단의 병력은 2,500명에 불과했다.

1942년 3월말 현재 루손군의 배치는 1월 말의 배치와 거의 비슷했다.

(1942년 1월 27일 현재 오리온-바각 방어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1 P.325)

오리온-바각 방어선의 길이는 약 26km 였으며 동쪽 절반은 파커 장군이 지휘하는 제2필리핀군단이, 서쪽 절반은 웨인라이트의 뒤를 이은 존스 장군이 지휘하는 제1필리핀군단이 방어했다. 군단경계선은 북쪽의 판틴간강에서 마리벨스산 동쪽 기슭을 거쳐 남쪽의 파니키안강을 잇는 선이었다.

3월 중순이 되었을 때 동쪽을 지키던 파커 장군의 제2필리핀군단은 약 28,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배치상황은1월말과 비슷하게 동해안에서 판틴간강까지 14,000m 에 이르는 방어선을 동쪽으로부터 A, B, C, D 4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A 구역은 리마이 북쪽 해안으로부터 오리온 남서쪽까지 2,300m 에 걸쳐 있었으며 제31보병연대(PA)가 담당했다. 사령관은 제31보병연대장(PA) 존 어윈 대령이었다.
B구역은 약 1,800m 에 걸쳐 있었는데 육군항공대 요원 1,400명으로 이루어진 임시항공연대가 담당했으며 사령관은 제31보병연대(US)에서 파견된 노련한 보병 지휘관인 어빈 도안 대령이었다.
C 구역은 4,100m 에 걸쳐 있었으며 제32보병연대(PA)와 제51전투단(PA, 제51사단의 잔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제31사단장 클리포드 블루멜 준장이었다.
D구역은 사맛산에서 판틴간강에 이르는 5,500m 구간으로 제21 및 제41사단(PA)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필리핀 사단장인 맥슨 로우 준장이었다.
E 구역은 해안방어를 담당했으며 제2사단(제1및 제2필리핀경찰연대 감편), 전차 1개 중대, 자주포 1개 포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사령관은 프란치스코 장군이었다.
군단예비대는 제33보병연대(제1대대 감편), 그리고 2개의 필리핀육군 전투공병대대였다.

서쪽을 지키던 존스 장군의 제1필리핀군단은 약 32,6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배치상황은1월말과 비슷하게 서해안에서 판틴간강까지 12,000m 에 이르는 방어선을 7번 오솔길을 기준으로 좌측 및 우측 구역으로 나누었다.

우측 구역은 7번 오솔길을 포함한 동쪽 5,000m 를 담당했으며 제11사단(PA)과 제2필리핀경찰연대(1개 대대 감편)이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제11사단장 윌리엄 브라우어 준장이었다. 제2필리핀경찰연대가 가장 오른쪽에 배치되어 제1필리핀군단과의 연결을 담당했다.
좌측 구역은 서해안부터 7번 오솔길까지 7,000m 를 담당했으며 제91사단(PA)과 제1사단(PA)의 잔존병이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제91사단장 루터 스티븐스 준장이었다. 제91사단이 가장 서쪽에 배치되어 비누안간강 이북의 서해안까지 함께 방어했다.
남측 구역은 비누안간강 이남의 해안방어를 담당했다. 배치 병력은 제1경찰연대, 제88야포연대(PS)의 1개 포대 그리고 잡다한 항공부대병력이었다. 사령관은 피어스 장군이었다.
군단예비대는 제45보병연대(PS)와 말을 잃어버린 제26기병연대(PS)였다.

루손군의 예비대는 감편된 필리핀 사단으로 제31보병연대(US), 제57보병연대(PS) 그리고 임시전차단으로 이루어져 5,000명이 약간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야포는 약 150문으로 제1군단에 약 50문, 제2군단에 약 100문이 배치되었다. 제1군단의 야포는 2문의 155mm 곡사포와 14문의 155mm 평사포를 제외하면 모두 75mm 야포였다. 제2군단은 75mm 곡사포 72문, 2.95인치 산포 12문을 보유했고 나머지는 모두 구형 155mm 평사포였다.
이외에 75mm 자주포 27문이 있었으며 대공포연대 2개가 비행장과 후방 시설을 공습으로부터 지켰는데 이중 3인치 대공포 1개 포대와 37mm 대공포 2개 포대는 전방에 배치되었다.
해군은 37mm 에서 76.2mm 에 이르는 야포 31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해안방어에 투입되었다. 바탄반도의 해안포는 1문이었다.
루손군의 포병세력은 서류상으로는 강했으나 실제로는 지형, 공중정찰의 부재, 사격통제장비 및 통신장비의 부족, 수송기관의 부족 등으로 전력 발휘에 지장을 받았다. 바탄반도에서 효과적이었을 105mm 야포가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

고립지대 전투가 끝나고 소강상태가 찾아온 1942년 2월 중순부터 극동미육군사령부는 필리핀육군에 대한 훈련을 실시했다. 전쟁 전의 훈련과정에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법 이외에는 기초적인 전투기술도 배우지 못한 병사들이 많아서 처음부터 훈련해야 했으나 그만큼 효과도 좋았다. 적의 포격이 시작되면 공포에 질려 나무 밑에 모이는 대신 그 자리에  꼼짝말고 엎드려 있도록 훈련시킨 것만으로도 많은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훈련 과정에는 실전에서 배운 전훈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일본군이 귀중품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곤 했으므로 정글에서 귀중한 물건을 발견했을 때는 각별히 조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일본군이 방어선의 빈틈을 찾아 침투하는데 능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병사들에게 방어선을 점령하면 인접부대와 확실하게 연결하고 열심히 주변을 정찰하라고 명령했다. 만일 적이 후방에 침투했을 경우에는 전선의 병력은 방어선을 그대로 지키면서 지원사격만 하고 후방에 침투한 일본군은 예비대가 처리하는 것으로 원칙을 정했다.

정글 속에서 적의 개인호나 기관총좌를 만나면 소수의 병력이 신중하게 접근하여 처리하되 이 공격조는 분대나 소대로부터 지속적인 화력 지원을 받았다. 근본적으로 정글 전투에서는 전진 속도에 연연하지 말라는 원칙이 세워졌다. 정글에서 행군할 때에는 최소한 일몰 1시간 전에 진군을 멈추고 야영준비를 함으로써 일본군의 야습에 대비했다. 하루에 1번먹는 식사는 가급적 일몰 전에 먹는 것으로 정했다.

전투에서는 야포지원을 기대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야포는 사전에 정해진 계획에 따라 보병의 공격 이전에 실시하는 공격준비사격에 주력했다. 보병의  요청에 따라 지원사격을 하기에는 통신장비가 모자랐다. 대신 박격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부실한 야포 지원의 빈자리를 메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경전차의 운용방식도 확립했다. 초기에 전차는 보병에 앞서 진격해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보병지휘관들은 전차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한 반면 전차들은 시야가 나쁜 정글에서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쉽게 파괴되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보병이 전차 바로 뒤에 붙어서 같이 다니라고 명령했다. 보병의 직접 지원을 받은 전차는 일본군의 기관총좌를 파괴하는데 최고의 효율을 보여주었다.

상륙에 대한 방어책도 마련했다. 최고의 무기는 기관총이었으며 상륙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중요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병사들에게 해안에 배치된 기관총이 상륙 직전이거나 상륙 도중인 적에게 10분간 가하는 사격은 상륙한 적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3일에 맞먹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지시켰다.

훈련과 더불어 방어선의 강화도 이루어졌다. 병사들은 소화기의 사정거리까지 사계청소를 실시하고 개인호에 위장을 실시하고 철조망을 설치했다. 코레히도르에서는 지속적으로 장교를 파견하여 방어선의 상태를 점검한 후 지휘관에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제14공병대대(PS)의 전문가들이 제1군단 전방에서 3군데의 지뢰밭을 선정하고 1,400개의 급조 지뢰와 폭뢰를 개조한 대형지뢰 35개를 묻었다. 지뢰밭의 전방에는 돌격하는 일본군이 지뢰밭으로 뛰어들도록 철조망을 설치했다. 제11사단(PA)은 3월 말까지 대나무를 잘라 사단의 담당구역 전체에 3.6m 높이로 벽을 쌓았다. 이 벽은 방탄 기능이 없었으나 적어도 적이 사단의 방어선을 관측하지 못하게 만들고 병사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어 사기를 높였다.

신속한 전개를 위한 준비도 갖추었다. 킹 소장은 휘하 지휘관에게 야간에도 부하들이 관할 지역 어디라도 헤메지 않고 바로 찾아갈 수 있도록 정글 속의 소로까지 철저히 파악한 다음 부하에게 주지시키라고 명령했다.

루손군의 예비대도 전개 준비를 갖추었다. 바탄반도의 버스와 트럭은 대부분 예비대 주둔구역에 주차해 있다가 여차하면 제31보병연대(US)와 제57보병연대(PS)를 싣고 전선으로 달려갈 것이었다. 빈약한 해안방어선을 보강하기 위하여 75mm자주포 1개 포대와 전차 1개 중대로 이루어진 기동예비대가 대기중이었다. 기동예비대의 병사들은 한밤중에 어느 해안으로든 바로 달려갈 수 있도록 모든 길을 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3월 말이 되자 미-필리핀군은 굶주리고 장비부족에 허덕이면서도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고 일본군의 공격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