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및 그 이전/필리핀 함락

필리핀 함락(54)-미군사령부 개편

대사(PW) 2018. 5. 30. 08:00

54. 미군사령부 개편


맥아더는 코레히도르를 탈출하기 전에 필리핀 주둔 미군의 지휘체계를 개편했다.

윌리엄 샤프 준장이 지휘하던 비사야-민다나오군은 비사야군과 민다나오군으로 분리하여 민다나오군 사령관으로 샤프 준장을 유임시키고 비사야군 사령관으로 제61사단장(PA) 브래드퍼드 치노웨스 준장을 임명했다. 이로써 샤프 준장은 비사야 방면에는 신경쓸 필요없이 민다나오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을 지휘하는 루손군을 창설하여 제1필리핀군단장이었던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을 사령관으로 삼고 공석이 된 제1필리핀군단장 자리에는 남부루손군을 이끌었던 앨버트 존스 장군을 임명했다.

코레히도르를 포함한 마닐라만의 섬들을 방어하는 조지 무어 소장의 항만방어부대는 존속시켰다. 무어 소장은 코레히도르에 20,000명이 6월 30일까지 먹을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해야 하며 다른 사령관이 요청해도 절대로 내주면 안된다는 엄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필리핀에는 4개의 사령부가 생겼는데 이들은 모두 동격으로 호주의 맥아더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게 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군수참모였던 루이스 비브 대령을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극동미육군사령부 부참모장의 직함을 주어 코레히도르에 상주시키면서 자신의 대리로 삼을 생각이었다.


맥아더는 이러한 내용을 전쟁부에 알리지 않았다. 필리핀의 지휘구조 개편을 온전히 자신의 권한으로 생각한 맥아더는 일단은 눈앞에 닥친 탈출에 집중하고 지휘구조 개편에 대한 내용은 호주에 도착한 후에 전쟁부에 통보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맥아더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3월 12일 저녁에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를 떠나자 지휘구조 개편 사실을 모르는 전쟁부는 필리핀에 남은 선임장교인 웨인라이트 장군을 맥아더의 후임자로 간주했다. 워싱턴에서 코레히도르로 들어오는 모든 전문은 한결같이 웨인라이트를 사령관으로 지칭했으며 그가 맥아더의 지휘권을 온전하게 물려받았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3월 17일자로 준장으로 승진한 극동미육군사령부 부참모장 비브 장군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맥아더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르면 그는 맥아더의 대리로서 전쟁부 또는 맥아더로부터 명령을 받아 웨인라이트를 지휘해야 했다. 그러나 전쟁부는 그를 무시하고 웨인라이트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코레히도르에 들어온 전문을 바탄반도에 있는 웨인라이트에게 그대로 전달해야 할지 맥아더 또는 대리인인 자신의 명의로 전달해야 할지 헷갈렸다. 비브는 호주에 막 도착한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어 전쟁부에 지휘구조 개편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19일이 되자  비브의 시련은 더 커졌다. 이날 마셜 참모총장은 웨인라이트에게 보낸 전문에서 그를 극동미육군사령관(CG USAFFE)으로 부르면서 새로 만들어지는 남서태평양지역군(SWPA)의 담당 영역에 필리핀이 포함되어 있지만 맥아더는 어디까지나 감독을 할 뿐이며 웨인라이트는 전쟁부의 직접 지휘를 받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매일 전쟁부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웨인라이트가 극동미육군사령관이라면 극동미육군 부참모장인 비브 자신이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직속상관이 되는 셈이었다.


20일이 되자 결정적 사태가 벌어졌다. 먼저 오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보내는 전문이 코레히도르로 들어왔다. 대통령은 웨인라이트를 중장으로 승진시켰다면서 그를 필리핀의 모든 미군 및 필리핀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불렀다. 오후가 되자 마셜 참모총장으로부터 웨인라이트를 지칭하는 "극동미육군 사령관" 앞으로 보내는 2통의 전문이 도착했다. 1통은 웨인라이트의 중장 승진을 상원이 승인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전문에서 마셜은 웨인라이트가 필리핀의 미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라고 확인하면서 앞으로 전쟁부에 제출하는 일일보고서를 웨인라이트 자신의 명의로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진 비브는 20일 밤에 바탄의 루손군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웨인라이트가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필리핀 주둔 미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고 말했다. 맥아더의 반응은 기록에 없지만 그가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실제로 코레히도르와 호주 사이에 오간 전문을 보면 비브가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날인 21일 아침에 웨인라이트는 중장 계급장을 달고 코레히도르에 상륙하여 비브가 공손하게 건네는 대통령과 참모총장 명의의 전문을 받았다.


웨인라이트는 극동미육군사령부를 필리핀미군사령부(U.S. Forces in the Philippines = USFIP)로 개편하고 비브 준장을 참모장으로 삼았다. 해군사령관으로는 케네스 호펠 대령을 임명했다. 원래 미육군과 해군은 같은 지역에서 작전하더라도 별도의 사령부를 유지했으며 합동작전은 사령부 간의 협조를 통하여 실시했다. 그건 필리핀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맥아더가 1942년 1월 말에 전투지역이 좁고 육군과 해군 사이에 긴밀한 연락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해병대를 포함한 해군을 자신의 지휘 아래 넣어달라고 마셜 참모총장에게 요청했다. 워싱턴의 육군 및 해군 수뇌부가 협의를 거쳐 맥아더의 요청을 승인함으로써 1월 30일부터 필리핀의 해군은 맥아더의 지휘를 받게 되었는데 웨인라이트는 이 권한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육군과 해군이 지휘권을 단일화한 최초의 사례로써 이후 맥아더의 남서태평양지역군과 니미츠의 태평양해역군은 이 선례를 따라 통합사령부 방식을 취하게 된다.


웨인라이트가 자신의 사령부를 꾸리자 맥아더가 전문을 보내어 무슨 근거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물었다. 웨인라이트는 대통령과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맥아더는 마셜 참모총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자신은 필리핀에 동격인 4개의 사령부를 두고 코레히도르에 파견한 부참모장을 통하여 통제할 생각이라면서 이는 필리핀의 특성상 꼭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다음날인 22일에 마셜 장군은 대통령에게 맥아더의 계획에 대해 보고하면서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맥아더의 계획에 따르면 마닐라만에 2개의 사령부가 있게 되는데 사령관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6,400km 떨어진 멜버른에 앉아있는 맥아더가 중재해야 했다. 마셜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사태는 이미 일어났었다. 3월 15일에 바탄반도에 식량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러 코레히도르에 왔던 웨인라이트는 다른 사령관이 요청하더라도 절대로 식량을 내주면 안 된다는 맥아더의 엄명을 받은 무어 소장에게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때 웨인라이트는 무어 소장으로부터 20,000명이 6월 30일까지 먹을 식량을 코레히도르에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분노에 휩싸였다. 웨인라이트가 맥아더의 탈출 이후 자신을 맥아더와 동격의 사령관으로 대하던 전쟁부에 제동을 걸고 맥아더의 계획을 알리는 대신 전쟁부의 생각대로 필리핀 전체의 지휘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다. 


마셜에 따르면 맥아더의 계획은 1927년에 미육군과 해군이 합의한 연합사령부 구성원칙에도 어긋났다. 맥아더가 호주의 연합군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 된 이상 그가 필리핀의 미군을 직접 지휘하는 것은 부적합했다. 맥아더는 단일사령부를 통하여 필리핀의 미군을 지휘해야만 했다.


대통령은  마셜의 생각에 동의하고 당일인 3월 22일 오후에 멜버른으로 전문을 보냈다. 여기서 대통령은 맥아더의 계획에 대한 비판은 자제했지만 웨인라이트가 필리핀 전체의 지휘권을 갖는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확실하게 전달했다.


정중하고 예의바른 표현 속에 담긴 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알아차린 맥아더는 물러섰다. 그는 답신에서 참모총장의 의도를 십분 이해하며 자신도 중장으로 승진한 웨인라이트가 필리핀 전체의 사령관이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이로써 지휘권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혼란은 사라졌다. 웨인라이트는 이제 필리핀 전체의 사령관으로서 맥아더가 가졌던 커다란 권한과 무거운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조너선 웨인라이트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onathan_M._Wainwright_(general)


1942년 4월 18일에 남서태평양지역사령부가 정식으로 인가되었을 때 필리핀 제도는 호주, 뉴기니, 솔로몬 제도,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함께 맥아더의 책임 지역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사령관과는 달리 웨인라이트는 맥아더를 거치지 않고 전쟁부와 직접 통신을 주고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웨인라이트가 필리핀 전체의 사령관이 되면서 며칠 전에 만들어진 루손군사령관이 공석이 되었다. 웨인라이트는 루손군사령부를 폐지하는 대신 맥아더의 포병장교였던 에드워드 킹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여기에 대해 맥아더의 참모장 서덜랜드 장군은 훗날 루손군 사령부는 코레히도르의 사령부가 없어지는 대신 만들었던 것이라면서 코레히도르에 필리핀미군사령부를 만든 시점에서 루손군사령부는 없애고 웨인라이트 장군이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을 직접 지휘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서덜랜드의 비판과는 별도로 웨인라이트에게는 루손군사령부가 필요했다. 일본군이 조만간 다시 공격해 올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으며 그때는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이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항복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을 모두 지휘하는 단일 사령관이 없다면 항복절차가 지연되면서 의미없는 희생이 늘어날 것이었다. 그렇다고 웨인라이트 본인이 바탄반도로 건너가 항복한다면 일본군은 코레히도르를 비롯한 필리핀 전체의 항복을 요구하면서 바탄반도만의 항복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 루손군사령관이 필요했다. 루손군사령관은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 전체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으니 항복절차가 쓸데없이 지연되어 의미없는 희생이 발생할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도 코레히도르나 비사야, 민다나오에 대한 지휘권은 없으니 일본군이 그에게 필리핀 전체의 항복을 강요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조지아 법대 출신의 유능한 포병장교인 킹 소장은 미군사령부에 의한 항복으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복을 실행해야 할 비운의 사령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