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함락(56)-방어선 재편
56. 방어선 재편
일본군이 상륙하자 서부지구 사령관 벤넷 소장은 자정이 막 지난 9일 새벽에 예비대인 폰드 중령의 제2/29호주대대를 제22호주여단에 배속한 후 텡가 비행장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널리 퍼져 주둔하고 있던 제2/29호주대대는 집결에 시간이 걸려 오전 6시 30분에야 텡가 비행장에 도착했다. 제2/29호주대대가 도착하자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텡가 비행장에서 초아추캉에 이르는 방어선을 급조했다. 방어선의 우익은 진드대대, 중앙은 제2/29호주대대, 좌익은 초아추캉에 주둔 중인 제2/19호주대대의 A 중대였다. 특별예비대대는 텡가 비행장에 주둔하면서 예비대 역할을 했다. 이러한 방어선의 후방에서 테일러 준장은 큰 피해를 입고 쫓겨온 3개 일선대대(제2/18, 제2/19 및 제2/20호주대대)의 재편성을 실시했다. 9일 오전 9시 30분에 벤넷 소장이 반격 명령을 내렸다. 오후 1시를 기하여 야포의 화력 지원 아래 제2/29호주대대를 투입하여 아마켕을 탈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아마켕 탈환은 불가능했다.
(1942년 2월 8일 밤 일본군의 상륙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Initial_Japanese_landings)
말레이 사령부의 예비대로서 2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12인도여단(파리스 준장)은 9일 오전 9시 30분에 서부지구에 배속되었다. 오전 10시 45분에 파리스 준장이 벤넷 소장에게 보고하자 벤넷 소장은 전방으로 가서 제22호주여단과 접촉한 다음 일본군이 크란지 강 상류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명령했다. 파리스 준장은 정오에 키트홍에 도착하여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과 회의했다. 회의 결과 오후 1시 30분을 기하여 제12여단은 초아추캉 도로의 이정표 12.5마일 지점, 주롱 방어선의 북쪽 끝을 지키기로 했다. 파리스 준장은 초아추캉 도로 북쪽에 해병 150명을 포함하여 400명으로 이루어진 아길 대대, 도로 남쪽에 다수의 보충병을 받아들인 440명 규모의 제4/19하이드라바드 대대를 배치했다.
한편 테일러 준장은 텡가 비행장에서 초아추캉에 이르는 방어선이 제22호주여단의 전력으로 지키기에는 벅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오전 11시에 텡가 비행장을 포기하고 텡가강 동쪽으로 물러나서 여단사령부가 위치한 불림 주변에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했다.
불림 방어선의 우익인 북쪽은 조호르 의용공병대가 맡았다. 불림과 그 남쪽은 숫자가 약 330명으로 줄어든 제2/18호주대대가 맡았다. 제2/18호주대대의 남쪽은 제2/29대대, 특별예비대대의 1개 중대, 그리고 약 150명으로 줄어든 제2/10공병중대가 맡았다. 방어선의 좌익은 이제 1개 중대 수준으로 줄어든 제2/19 및 제2/20호주대대의 잔여 병력이 맡았다. 초아추캉에 주둔하다가 철수한 제2/19호주대대 A 중대는 제2/20호주대대 병력 약 60명과 함께 제2/20호주대대 A 중대장 메렛 소령의 지휘 아래 제2/18대대 후방에 주둔하면서 예비대 역할을 맡았다.
특별예비대대는 제12여단 남쪽의 117지점에 배치되어 제12여단 방어선의 좌익을 이루었다.
포병도 부킷판장 마을 부근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를 잡았다. 북쪽에는 제2/10야포연대, 중앙에는 제2/15야포연대, 남쪽에는 제5야포연대가 방열했다.
(불림 방어선.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24)
9일 오후에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이 서부지구 사령부를 찾아와 벤넷 소장과 회담했다. 그 결과 제44인도여단은 주롱 도로의 12마일 이정표 지역에 주둔하여 주롱 방어선의 남쪽을 맡기로 했다. 제6여단을 흡수한 제15여단은 제3군단에서 벗어나 서부지구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퍼시발 중장은 제15여단에게 부킷티마 지역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이곳에는 탄약 60,000톤을 비롯하여 대량의 식량, 석유, 그리고 보급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제3군단에게는 해군을 도와 해군기지에 남아있는 보급품과 장비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제44인도여단은 오후 4시 30분에 주롱 방어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단이 해안에 흩어져 있던 병력들을 모아 주롱 방어선에 도착한 것은 9일 오후 10시가 되어서였다.
9일 오후 10시에 주롱 방어선이 완성되면서 서부지구사령부는 일단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2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12여단이 주롱방어선의 우익에 배치되었고 특별예비대대가 중앙, 그리고 제44인도여단이 좌익에 배치되었으며 제15여단이 예비대로 부킷티마에 주둔했다. 제22호주여단은 전방의 불림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편 9일 저녁에 텡가 비행장을 점령하면서 1단계 목표를 완수한 일본군은 이제 싱가포르 섬의 북서부에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제5 및 제18사단은 9일 밤에서 10일 새벽에 걸쳐 북쪽 둑길 지구에 근위사단이 상륙하는 동안 불림 방어선 정면에서 가벼운 정찰 활동 이외에는 공격을 중단하고 재편성과 후속부대의 수송에 전념했다. 주정들이 부지런히 해협을 오가면서 예비대, 차량, 전차, 그리고 보급품을 실어날랐다.
일본군은 제22호주여단의 3개 대대가 지키는 지역에 무려 13개 대대를 투입하여 국지적 우세를 확보함으로써 상륙에 성공했다. 퍼시발 중장이 일본군의 상륙 장소를 잘못 판단하는 바람에 제22호주여단의 3개 대대는 4배가 넘는 적과 교전함으로써 승리의 희망은 처음부터 희박했다. 일본군이 동원한 야포는 160문이었는데 비하여 영국군은 266문의 야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역시 퍼시발 중장의 판단 착오 떄문에 접전 지역에서 교전에 참가한 포병부대는 사실상 제2/15야포연대 뿐이었다. 제2/15야포연대는 일본군의 상륙부터 9일 밤이 될 때까지 4,800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며 제2/10야포연대의 일부 포대가 400발을 발사했다. 퍼시발 중장은 9일 밤이 되어서야 포탄 절약을 위하여 야포에 걸어 두었던 사격 제한을 철폐했다.
(1942년 2월 10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2)
일본군이 상륙에 성공함으로써 최종 방어선을 설정할 필요가 생겼다. 퍼시발 중장은 자정이 막 지난 2월 10일 새벽에 싱가포르 시가지를 중심으로 최종 방어선을 설정하고 제3인도군단, 남부지구사령부 및 서부지구사령부의 담당 지역을 표시한 명령서를 기초하여 히스 중장, 시몬스 소장 및 벤넷 소장에게 전달했다. 명령서를 기초할 당시 퍼시발 중장의 의도는 서부지구사령부가 주롱방어선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는 동안 제3인도군단과 남부지구사령부가 새로운 방어선의 담당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킨다는 것이었으며 서부지구사령부의 주롱방어선 철수는 빨라도 며칠 후에나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주롱 방어선은 비록 방어시설은 건설되어 있지 않았지만 지형상 방어에 유리하여 서부지구사령부의 전력만으로도 며칠 간은 충분히 일본군의 전진을 막을 수 있었다. 서부지구사령관 벤넷 소장도 이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나 휘하 여단에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생기면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2월 9일 밤에 싱가포르 항으로부터 3척의 초계정이 출격하여 서쪽으로부터 조호르 해협에 침입했다. 초계정은 일본군이 미처 대응하기 전에 주정 몇 척을 격침하면서 둑길 근처까지 도달했다. 이때부터 초계정은 해협 양쪽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았으나 무사히 도망쳐서 싱가포르 항으로 돌아왔다.
9일 날이 밝자 허리케인 4대가 유일하게 사용가능한 칼랑 비행장에서 날아올라 영국군을 괴롭히던 일본 폭격기들을 몰아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살아남은 허리케인은 수마트라로 완전히 철수했다. 이제 칼랑 비행장은 전방 임시비행장으로만 사용할 것이었다.